◈성령의 유연성 (정통-극단-이단)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9
성령이 역사하는 사람은, 판단에 있어서 경직되지 않고
유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을 가급적 좋게 본다...
▲1. 바울은 언제부터 사울 → 바울로 이름이 바뀌었나?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은 “사울아!” 라고 부르셨다.
바나바의 초빙을 받아 안디옥에서도 그는 일년간 가르치며 큰 무리가
더했는데 여전히, 그의 이름은 “사울”이었고 행 11:26, 13:1
바나바와 함께 예루살렘에 부조를 전달하고 올 때까지도 “사울”이었고, 12:25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파송을 받을 때도 “사울”이었다. 13:2
('사울'은 원래 히브리식 이름인데, 그것을 헬라식으로 바꾸어 '바울'로 표기했다는 의견도 있음.)
제1차 전도여행 때부터 사울은 → 바울로 호칭이 변경된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행 13:9
사울은 - 교회를 잔해하고 핍박하던 수치스런 이름이었다.
바울은 - 2천년 교회사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의 이름이다.
그 위대한 변경이 사도행전 13장, 제1차전도여행 바보(지명)부터 나타난다.
그 이후 역사서인 사도행전은, 계속 사울이 아닌, 바울로 기록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사실fact이고, 거기에 대한 해석은 각자 다르겠지만...)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바울의 전도여행 중 열정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저가 전도여행 중 행하는 모든 일과 사역(ministry)을 지켜 볼 때,
그는 이전의 사울이 아니라, 새 사람 바울이라는 것이다.
▲2. 바울은 언제부터 사도 로 공인되었나?
바울이 사도로 공인된 것은, 어떤 신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아래 ‘교제의 악수’가 바울에게 ‘사도권’을 공인한 자리였다고 한다.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갈 2:9
(만약 이 사건이, 사도행전 13장의 1차전도여행 직전에 일어난
것이라면, 그 신학자의 말이 맞을 가능성 크다)
그래서인지 성경에, 바울에게 처음으로 “사도”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도
제1차전도여행 중이었다.
(이고니온에서)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행 14:4
그 이후부터 바울은 계속 “사도”라는 명예스러운 호칭을 부여받는다.
그러니까 자기가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바울의 하는 일을 보고서, “사도”라고 불러주었다고 본다.
사도행전을 바울의 주변 사람인 누가가 쓰지 않았는가.
▲눈여겨 볼 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바나바에게도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12사도들은, 사도권을 자기들에게만 한정된 종신직으로 여기지
않았다. 누구든지 복음을 전하는 자이면 → 사도로 인정해 준 셈이 된다.
물론 바울의 사도권은 시비가 되기도 했었다. 고전 9:2 등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고후 12:12 (갈 1:1 참조)
물론 사도권을 12사도들로부터 공인 받았다고 추측은 하지만,
바울이 스스로 주장하는 사도됨이란, 외형보다 내면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3. 성령의 유연성
성령이 역사하는 사람은, 판단에 있어서 경직되지 않고
유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가급적 좋게 본다.
사실 법적으로 보면, 바울은 사도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그의 열정적 사역을 보고,
그를 “사도”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를 기꺼이 “바울”로 불러주었다. (사울로 부르면서 갈구지 않았다.)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따지던
나다나엘에게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직설적으로 말하는 구나!)라고
가급적 좋게 봐 주시지 않으셨는가! 요 1:47
비판적인 나다나엘을, 경직되어 혼내지 않으시고,
유연하게 잘 봐 주셨다는 뜻이다.
한국처럼, 유교적 영향을 받은 문화권에서는
호칭이 대단히 중요하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 권사 등의 호칭이 통용되고
그들을 ‘형제’, ‘자매’, ‘성도’라고 불렀다가는 혼쭐 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는, 유교문화를 극복하고 뛰어넘어서
호칭 때문에 상호간 시험 드는 일은 없을 것이며
가급적 서로를 좋게, 인정해 주는 식으로 불러줄 것이다.(바울로!, 사도로!)
높여주고,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다.
▲정통 - 극단 - 이단
말이 나온 김에, 외국에서는 정통 - 극단 - 이단 등 3구분이 있는데
우리나라는 정통 - 이단 등 2구분으로 분류하고 있다.
사실 이단(heresy)은 무서운 말로서, 가급적 상대방에게 쓰지 않는 것이
예의고 기본이다. 이단은 반드시 지옥에 갈 사람들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믿는 신앙과 좀 다른 행태를 보이면, 이단 대신,
극단(extreme) 이라 부른다. 이들은 비록 나와는 좀 다른 기독교
신앙 행태를 가졌지만, 천국에 갈 사람들이다.
과거에 한국 성도들은, 자기와 조금만 틀리거나 다르면 <이단>이라고
낙인찍었는데, 사실 그것은 성령을 훼방할 위험도 있다.
자기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정 구분이 필요하면 <극단>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유연하지 않을까?
간간히 벌어지는 이단 시비가, 성령의 역사로 유연하게 결론나기를 바란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에게 그랬던 것처럼!
사실 개신교protestant의 모든 교단들은, 장로교, 침례교, 감리교, 오순절 등,
바울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자유스럽게’, ‘유연하게’, ‘자생적으로’ 발생하고, 자라왔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되겠다. (물론 위험하게 잘못 빠진 부류도 있었지만) <김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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