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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6

290 주의 손

LNCK 2006. 8. 4. 17:32
 

◈주의 손   행11:21

 

<토마스 선교사 순교한 자리에 평양 과기대 준공 중>


▲4차원적 신앙

이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 수준이 아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 동의하고, 내가 예수의 제자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는 것(3차원)을 넘어서는

일종의 ‘초자연적인 현상’(4차원)이다.

기독교 신앙에는 이런 4차원적인 요소가 반드시 있다.


그것의 한 표현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이다.  행 11:21

내가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어떤 강권적인 주의 손 이 우리 곁에 역사하실 때가 있다.

 

성령충만을 받고 역동적인 크리스천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사실 3차원을 뛰어넘는, 이런 4차원적인 '이끌림, 강권적 역사'가 필요하다.

그것은 대체로 하나님의 은혜로 위에서 주어진다.

 

▲성경에 나타난 주의 손

①인도, 보호, 도우시는 손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 139:10, 119:173 등


신적divine 역사가 나타나는 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행 11:21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눅 1:66


③징계하는 손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시 32:4, 39:10, 행 13:11, 출 9:3 등,


  Robert J. Thomas (1840-1866)


주의 손 이 함께 한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며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고 있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순교한 영국 선교사가 있다.

한국 개신교사에서 ‘첫 순교’의 영광을 차지한 토마스 선교사다.


▲처음에는 중국선교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

그의 아내 케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데다가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와 불화가 겹치게 되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산동성으로 옮겨와

세관에 직장(통역사)을 가지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다.


그는 너무 실의에 빠져서 ‘선교든 뭐든 나는 다 관두겠다!’고 포기하고

중국 땅에서 취직을 하며 방황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 웨일즈까지 돌아가는 것도

배를 타고 몇 달을 가야하니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의 마음은 실의에 빠졌으나 고향으로 쉽게 돌아가지도 못하고

선교 사역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그를 하나님은 조선 땅으로 부르셨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산동성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에서 천주교 박해를 피해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였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선교여행을 계획하였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하였다.

2개월 반 동안 황해도 연안의 창린도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다.


그 후 또 다시 중국에서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이번에는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있었다.


그러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 땅에 도착하였다.


1866년 9월,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허락 속에 되어진 일이었다.


누가 스스로 맨 정신으로 순교를 원하겠는가?

그러나 주의 손이 강하게 그를 이끌어

조선 선교를 위해 순교의 길로 그를 인도하셨다.


▲그의 생명이 헛되게 끝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내가 서양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손을 마주잡고 무삼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 을 가지고 우스면서 나에게 밧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엿스나 이책을 밧 지 않을 수가 없어셔 밧아왔노라"

(오문환 '도마스 목사전') 토머스의 목을 친 병사 박춘권 의 말이다.

 

①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나중에 그는 결국 토마스 목사가 준 그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후에는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성경을 뜯어 벽지로 썼던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후에 장대현 교회당)이 되었다.


②그의 순교에, 원래 요녕성에서 활동하던 존 로스, 매켄타이어 선교사 등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에 큰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중, 4복음서 성경을 각각

당시 한국인이 통용하던 문자(한자어와 이두)로 번역했다.

그리고 그 성경을 조선 땅에 보급했다.

이것은 미국 선교사들이 오기 전에, 그들의 길을 예비한 선교 사역이었다.


③토마스 선교사가 승선했다가 순교한 제너럴셔먼호가 사건을 계기로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다.


그의 순교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인터넷 자료 편집  http://www.ezer.or.kr/yanghwajin/yanghwajin02.htm

 

 

 

토마스 선교사 기념교회 터에 [평양과기대] 건축 중 

 

한국교회는 토머스의 순교를 기려 1926년 순교 60년 기념회를 조직,

1927년 5월8일 그의 순교지에서 1천여 명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으며

1928년에는 오문환 목사의 집필로 전기가 나왔고

1933년 9월14일에는 대동강변에 토마스 기념예배당이 세워졌다.


이 예배당은 북한의 다른 많은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평양시 락랑구역 승리동에서, 평양과기대를 대동강 변에 건축하는 중에,

부지 흙더미에서 교회 종탑의 잔해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교회 종탑의 고증을 확인한 결과,

이 분야의 전문가인 손영섭 목사, 이덕주 교수 등은

이 잔해가 토마스 기념교회당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의 열정」 정진호 저. pp.21-27.  


토마스 선교사의 뿌린 피는 아직 살아서 역사하는 것인가...?

그의 기념 교회 터 위에 다시 평양 과기대가 건설되는 것은 우연인가?

하나님의 섭리인가?


*관련글 : [영광의 문] http://blog.daum.net/rfcdrfcd/8088611

 

[주제별 분류] 순 교 http://blog.daum.net/bible3/9318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