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예술관 시27:4 Daivd Feddes 목사님 설교 번역
"BEAUTIFUL SAVIOR" (Date 06/16/02) 편집.
지금은 휘발되고 없음. *관련글 더 보기 -클릭-
▶조잡한 전위 예술
어떤 것은 유리컵에 오줌을 받아놓고 거기에 십자가를 빠뜨려놓고서,
예술작품이라 부른다. 어떤 것은 코끼리 똥을 붙이고,
또한 포르노 잡지를 찢어 붙여서 여성의 얼굴을 표현했다.
이런 것은 art(예술)가 아니라 vandalism(예술문화의 고의적 파괴주의)이다.
그럼,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지저분한 것들을 예술작품이라고 만드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밖으로 표현하게 되어있다(눅6:45 참조).
자기 내면 세계가 추잡하고 복잡한 사람은, 추하고 이상한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사람은,
엽기적인 작품을 만든다.
자기 속에서 겪는 모든 실망과 실패와 분노와 한숨이 작품에 고스란히 스며 나온다.
그들은 인생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가치관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
▶진짜 아름다움을 보는 눈
반대로, 자기 내면세계가 아름답고 안정된 사람은,
아름답고 안정된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
인간과 대자연의 선함, 진실함, 친절함, 믿음, 거룩함,
순수한 사랑의 아름다움 등 - 이런 것들은 정말 아름다운 것들이다.
자기 가슴 벅차게 느끼는 이런 아름다운 것들을 문자, 선율, 붓끝으로 표현하면
- 예술이 된다.
예술이란, 자기가 본 아름다운 것에 대한 감동받음의 ‘외적 표현’인데,
우리는 세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되어
예술작품으로 표현해야 한다.
성경은, 특히 시편이, 이런 아름다움을 구구절절 잘 표현했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발하셨도다”(시 50:2)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너의 눈은 그 영광(아름다움) 중의 왕을 보며 광활한 땅을 목도하겠고 (사 33:17)
이와 같이 진실한 아름다움(↔감각적인 것)에 감동된 사람들은
붓을 들거나 노래하게 된다.
그런데, 불신자들도 이런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받아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일반은총’ 영역을,
신자나 불신자들이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듯,
인간성과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똑같이 주시고,
특히 예술작품을 만드는 창조적 재능creativity을
신자나 불신자에게 똑같이 부어주신다.
▶1. 건축/미술 분야
건축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마음이 감동되어 아름다운 교회(성당)를 많이 건축했다.
이들이 자기 이름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깊은 신앙심의 발로였을까?
그들이 교회지붕을 하늘을 찌르듯 높이 세운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했던 열망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아 모세와 다윗상을 조각했다.
장엄한 ‘시스티안 교회벽화’를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재능만 가지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 역시 감동의 산물이다.
라파엘로과 렘브란트, 역시 감동적인 성화도 많이 그렸고,
또한 일반 작품도 많이 남겼다.
만약 그리스도가 없었더라면, 이들의 작품성은 탁월하게 계발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창조적 예술성에 불을 지르고 감동을 더해 준 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기독교 신앙이었다.
성경에서 볼 때, 모세가 광야에서 회막을 지을 때
장인들을 불러서 매우 아름답게 지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건축 재능을 받은 장인으로서,
성막을 거룩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수embroider와 문향으로 매우 아름답게 장식했다.
후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더욱 눈부시고 찬란한 것이었다.
솔로몬이 성전 봉헌식을 통해 고백한 것은,
하나님이 너무 영광스럽고 찬란하신데,
그것을 인간이 만든 성전으로써는, 아무리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해도,
도저히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성전을 아름답게 지은 것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마음이 크게 감동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하나님을 우상(형상)으로 만들면 안 된고,
하나님을, 인간이 만든 성전 안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은 너무 크셔서..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다 모실 수 없다(왕상 8:27).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건축물을 보고 감동받지만
기독교를 믿는 것은 거부한다.
거저 예술적 아름다움을 위해 예술작품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 우상숭배다.
예술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예술 자체가 영광이요, 아름다움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예술은
- ‘예술’이란 우상이다.
또한 예술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요, 예술을 위해 사람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교회 건축을 위해 많은 사람을 혹사시킨다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비싼 예술품을 구입하는데 큰돈을 쓰고, 사람을 살리는데 인색한 것도 마찬가지다.
성전 건축 - 성령의 감동에 의해 아름답게 짓는 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자랑하고 보여주기 위해
필요이상 큰돈을 들이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2. 문학
영국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지만,
영어라는 언어를 다듬고 영문학을 발전시킨 것은 성경이었다.
독일어 성경도 마찬가지였다.
문학 작품으로서 성경은, 사람들의 언어와 사상을 발전시켰다.
물론 성경은, 문학 작품 이상인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문학 작품으로서도 위대한 것이다.
괴테는, 성경의 ‘룻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단편 문학이라고 높였고,
찰스 디킨슨은, ‘탕자의 비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토리로 칭송했다.
그 외에도 에스더, 야곱, 요셉의 이야기 등은 정말 문학적 가치에 있어서도 걸작들이다.
고대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베오울프는 기독교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켄터베리 이야기’의 작가 초서,
문학의 거장 윌리엄 세익스피어... 모두 기독교 신앙의 감동 때문이었다.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이 기독교적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모든 작품의 배후에 흐르는 사상의 근간은 분명히 기독교적이다.
역사적으로 서구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인
존 번연의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존 밀턴의 ‘실낙원 Paradise Lost'
단테의 ’신곡 The Divine Comedy'
- 모두 기독교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들이다.
또한 도스또예프스키와 톨스토이
- 이들은 비록 크리스천의 모범을 때로는 보여주진 못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작품은 항상 기독교 신앙적 주제들을 담고 있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C. S. 루이스는 말할 것도 없고,
헤밍웨이 - 그는 비록 기독교인으로 자처하진 않았지만,
그의 작품의 주제는 항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기독교가 없었더라면
이런 문학작품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을 쓰도록 만드는 영감을 공급받지 못했을 터이니까.
▶3. 음악
음악이야말로, 어떤 예술 분야보다도 기독교의 영향을 밀접하게 받은 분야이다.
‘서구음악역사’는 바꾸어 말해서 ‘기독교음악역사’였다.
근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는
주님께 영광돌리는 목적으로 작곡했다.
너무나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한 헨델
- 두말할 필요없이 메시야 예수님을 높이 찬양했다.
헨델이 그런 대곡을 작곡했던 것은, 그의 고백에 의하면,
“나는 작곡하는 중에,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높으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는 체험을 했다”고 했다.
멘델스존, 모차르트 - 이런 음악가들 역시 예수님이 없었다면
음악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는 말
①예술에 대한 극단적 태도를 주의하라
한쪽 극단은, 문화 자체를 높이거나 문화 예술을 즐기는 것 자체를
높이 권장하는 것이다.
다른 쪽 극단은, 문화 예술 자체를 모두 세속적으로 보고, 모두 버리는 것이다.
역사 속의 모든 아름다운 예술 작품은, 바로 예수와 기독교의 영향에서 나왔다.
그 예술 작품이 직,간접적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주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상하고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예술 자체를 즐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더라도,
인간에게 기쁨, 소망, 교훈, 행복을 주는 등 일반은총적 영역을 만족시키는 것이라면,
죄짓는 것이 아니라면, 너무 터부시할 필요 없다.
②현대의 타락한 문화를 경계함
오늘날 현대의 타락한 문화(전위예술, 저질영화)를 숭배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인간의 더러운 죄성을 밖으로 표출했다.
그것은 진실한 아름다움의 표현이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이 선하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진정한 예술은 ‘자기 표현’self-expression이 아니다.
가급적 자기를 표현하려 하지 말라! 주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동받은 (자기 내면의) 표현이다.
expression of the beauty of the Lord.
설교도 마찬가지다. 설교자를 드러내기보다는 주님을 더욱 드러내시라!
less of ourselves, more of Christ!
③성경을 읽거나 기도하는 중에 마음이 크게 감동되면,
또는 대자연을 바라보면서, 또는 삶 속에서 느끼는 인간애에 감동되면서..
- 거기서 아름다운 예술이 나온다.
주옥같은 시와 문학이, 영혼을 울리는 장엄한 음악이,
사람을 잡아매는 미술작품이....
그러므로 ‘영감’inspiration을 받아야 한다.
영감을 받으면 훌륭한 예술가가 된다.
꼭 ‘하나님’이란 주제와 말이 안 들어가도 괜찮다.
광활한 대자연, 사람의 일상적인 순수함을 표현하는 작품 역시
-창조자께 영광이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진정한 예술가는 -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다.
과거 2천년 역사가 그랬다.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신에 감동되는 일이 중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예술 분야에 있어서도,
하늘의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예술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고귀한 사람이 될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가처럼, 시대를 거치면서 수 억 명의 영혼들에게
감동을 주는 걸작 중의 걸작을 남길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왠만한 설교보다 더 나을지도 모른다.<김지윤 편역
'분류 없음 > 2002~2003' 카테고리의 다른 글
731 가난한 예수, 부요한 나 (0) | 2007.06.09 |
---|---|
509 선지자가 필요한 세상 (0) | 2007.02.01 |
기독교와 물질적 번영 (0) | 2007.01.24 |
488 사회를 위한 교회 (0) | 2007.01.24 |
487 '조용히' 변화시키는 누룩 (0) | 2007.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