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과 나눔
◑지난 주일 설교 복습
▲예수 믿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가 가치관의 혁명을 일으키는 회개를 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 가치관대로 사는 것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다.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크리스천이 가는 길은, 아무도 예외 없이 십자가의 길이며,
크리스천의 삶은, 아무도 예외 없이 순교자적인 삶이다.
예수님도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니라
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는가!
▲우리나라에서 십자가 지는 삶
사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문자적 의미로 ‘순교’는 없다.
이슬람에서 기독교인이 당하는 죽음, 사업 방해 같은 순교적 고난은 한국에 없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인은 공개처형이 되고 강제수용소에 갇힌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크리스천은 핍박을 받고 십자가를 진다는 성경은 잘못되었는가?
물론 아니다.
그럼 대한민국 크리스천에게는 어떤 핍박과 십자가가 있는가?
세상은 떡을 구한다. 맹렬하게 구한다.
오늘도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기 아파트 한 채 마련해서
전세로 떠도는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적으로 살고 싶어 한다.
‘내 나이 50이 되기 전에,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하고 싶다’는 분위기가
사회에 팽배해 있다.
그런데 (성경대로) 사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며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야말로 십자가의 길, 순교적 삶을 각오해야 가능하다.
우리 다시 한 번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이 삶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결단해야 하겠다.
집 사는 것이 죄라기보다, 그것이 우상이 되어
먼저 그 아파트(↔나라)를 구하는 것이 문제다.
하루 종일 생각이 온통 투자, 집값, 담보대출 이런 것에 집중하는 것이 문제다.
물론 모든 것을 버리면, 그 골치 아픈 문제에서 훨훨 자유로워서 제일 좋다.
내가 이 세속적인 가치를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붙들고
이것을 위해서 정말 온전히 매진하겠다는 결심하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도록 기도드리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자기’라는 멍에를 메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목사인 저 자신도, 이 세상 영광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말씀의 가르침 그대로 살겠다고 결심했지만,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제ego가 제 자신의 노예가 되어서
주님의 나라보다 ‘나 자신’의 소원을 추구하며 엎치락뒤치락 할 때가 많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와주셔서
‘자기’라는 에고이즘,
즉 내 떡과 내 명예와 내 권세의 멍에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주님이 이 땅에 세우시고자 하는 그 나라를 위해서
정말 제가 온전히 헌신하고 봉사하게 하소서!...
◑부흥과 나눔
▲부흥의 필연적 결과 - 나눔
오늘은 <부흥과 나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회개는 부흥의 시작이요, 중심이라 한다면,
나눔은 부흥의 결과요, 열매이다.
부흥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나눔이다.
부흥의 원형인 초대교회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2:44~45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행4:32~35
이것이 당연한 결과인 것은, 부흥이 일어난 것은 → 회개가 일어난 것이고,
→ 회개는 자기를 깨뜨림이며 → 그 결과 나눔이 일어난다.
▲타락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중심’이다.
만사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자기’라는 성(城)이 매우 견고하게 서 있다.
회개는 바로 그 성을 깨뜨리는 것이다.
내ego가 죽고, 내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부흥이 일어나면,
자기의 이기심에서 벗어난다. ‘자기중심주의’에서부터 벗어난다.
저 깊은 우물 속에 앉아있던 자기 자신에게서부터 이제 벗어나서
넓은 온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형편을 바라보게 된다.
과거에는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주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이 어떻게 보이겠는가?
주님의 관점으로 이 자연 세계를 볼 때, 과거와 다르게 보인다.
과거에는 토지를 내가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사야겠다는 눈으로 보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관점으로 보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 자연세계(토지)를 지으셨는데,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누리면 되는 것이지,
악착같이 자기소유로 등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관점으로, 즉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자연을 보게 된다.
자연을 창조하신 분이, 뭣하러 꼭 '자기 소유'로 만들려고 발버둥 치시겠는가!
이웃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쟁대상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형제자매로 본다.
그러므로 나눔과 베풂은 자연적으로 일어난다.
그래서 내 주변 세상이 천국이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가!
◑차별과 평등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다른 점
혹자는 공산주의 사상이 사도행전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과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공산주의는 인간 능력의 차등을 무시하고, 제도로써 강제로 평등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는 회개, 부흥을 통해 사랑이 넘쳐나, 자발적으로 평등을 추구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각 사람의 개성과 능력 차이를 존중하면서
사랑의 정신으로 평등사회를 추구하니까, 성장과 평등(분배)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각 사람의 개성과 능력 차이를 무시하고
제도적으로 평등하게 만드려고 하니, 성장과 평등(분배)이 둘 다 가로막힌다.
성장이 안 되니까, 분배할 것도 없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모두 같이 굶주리는 평등'에 이르게 된다.
▲차별 과 평등
저는 경제학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경제학에서 차별과 평등은 서로 치열하게 대립되는 두 개념이다.
여기서 차별이란 더 능력 있고 부지런하며 더 큰 성과를 내는 사람과 그 반대,
즉, 능력차이를 뜻한다. 이것을 정책적으로 따르는 사회를 시장경제 라고 한다.
평등이란 경제주체(기업, 개인)의 노력과 성과에 관계없이
그 대가를 모두에게 동일하게 베푸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정치 사회적으로 이념화되고 정책화되었을 때,
경제평등주의, 혹은 사회주의 라고 한다.
▲차별 과 평등, 이 둘은 어느 하나도 적대시 할 수 없다.
열심히 일하고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을 우대해 주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라도 우리는 버릴 수 없다.
반대로 열심히 일하고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이든, 적당히 일하는 사람이든
모두 똑같은 대우를 해 준다면, 그런 사회는 결코 발전하지 않는다.
공산주의가 다 망한 결과를 우리는 똑똑히 관찰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차별화의 이념이 사회를 주도하고
평등주의 이념이 비판적 소금역할을 할 때,
그 사회는 건전하게,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 그렇게 말하고 있다.
①성경은 일단 차별화를 근본적으로 가르친다.
기독교 문화인 서양속담에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경은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열심, 부지런함, 성실함을 강조한다.
청교도들은 근실한 자는 왕 앞에 서고 천한 자 앞에 서지 않느니라 잠22:29
라는 말씀을 표어처럼 즐겨 사용했다.
이렇게 성경은 한편으로 차별을 지지한다.
②동시에 성경은 평등도 아주 중요하게 강조한다.
성경은 인격적, 사회적 평등은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평등을 위한 말씀도 많다.
희년제도만 봐도 그렇다. 50년째가 되면, 종들도 돌려보내고, 땅도 되돌려주었다.
예수님은 항상 가난한 자, 병든 자 등 사회적 소외 계층에 더 관심가지셨다.
사도 바울도 우리가 연보를 하는 것은 평균케 하기 위함이다 라고 했다. 고후8:13
그러나 성경이 사회과학과 다른 점은, 또한 더 진보된 점은
이 평등을 이루는 방법론, 근간을... 변화된 인간의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된 세계관과 가치관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평등을 이루어간다.
▲참여정부의 공과
물론 현세에서는 회개한 사람이라도 완전하지는 못하고
또한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도 완전히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not yet
그러므로 이 불평등이라는 악을 억제하기 위해 국가정책, 사회제도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지만
이것이 투쟁적이 아니라 온정적으로 시행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차별화의 과정에서 조정되어지는 불법을 단속하고,
경제활동의 기회균등을 지향하고,
정직하고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 것은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발전과 성장을 이끌고 있는 경제주체들을 폄하하고 적대시함으로써
오히려 경제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지 않았는가, 우려한다.
능력 있는 경제 주체들을 인정해주고, 저들의 마음을 얻어야
생산과 나눔이 동시에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축복은 사명(책임)이다
▲축복에는 사명(책임)이 따른다.
하나님은 차별을 인정하고, 찾고 구하는 자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신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고
축복을 사명으로,
부흥을 나눔으로 이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며, 성실히 일하는 자에게 더 많은 것(축복)을 주신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축복은 사명(책임)이다.
받은 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의를 이루는데 애쓰며
가난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손을 내밀라는 사명이 담겨있다.
여러분의 기업을 하나님이 부흥시켜주셨는가?
여러분의 교회가 부흥되어졌는가?
그것은 바로 나눔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성경은 폭력적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불의한 세상을 뒤집어엎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의 심령을 변화시키시고, 사랑으로 행하도록 설득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가르치시고, 설득하시고, 기다리신다.
부흥을 경험하고 은혜 받은 자들이, 자발적 나눔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도록 이끌고 계신다.
▲부자들을 설득하시는 하나님(↔강압)
부자들에게 주신 대표적 권면의 말씀을 들어보자.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6:17~19
위 본문을 볼 때, 성경은 부자들을 비난하지 않고, 강압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고 있다. (특히< >부분)
우리도 ‘선한 일에 부유한 자가 진짜 부자’임을 설득해야 한다.
▲우리를 설득하시는 하나님
우리 자신들이 물질 외에도 뭔가 상대적으로 남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각자 한 번 생각해 보자. 은혜, 은사 등등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자, 동시에 사명(책임)이다.
그러므로 나누어야 한다.
우리의 인격이 변화되었으면 반드시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
그렇게 하도록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설득하시며 우리를 이끌고 계신다.
가치관이 바뀌지 않은 회개가 참된 회개일 수 없듯이,
삶에 나눔이 없는 회개도 참된 회개인지 믿기 어렵다.
예수는 오래 믿고, 잘 믿는다고 까지 말하는데
그 분의 삶에 진정 나눔이 없다면, 그를 정말 믿음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나눔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닌 것이다.
▲만약 크리스천들이 나눔에 실패하면, 세상은 혁명으로 응답한다.
이것은 과거 역사 속에 반복되어진 교훈이다.
크리스천들이 말씀에 순종해서, 가정을 잘 지키고 성실히 일하고 살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사회에서 반드시 우위를 점령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그 축복에 머물러 있는 다면, 자발적 나눔이 없으면,
사회는 폭력과 혁명으로 치닫는다.
기독교가 7세기에 부와 세속 권세를 모두 차지하면서 나눔이 없었을 때,
농민혁명이 일어났고, 그것이 바로 이슬람을 만들어내었다.(환영했다)
후에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의 공산화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에 좌경 세력이 성장한 원인
7~80년대 한국의 기독교는 외형적으로 놀랍게 성장했다.
그러나 나눔에 실패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에 좌파가 성행하고 득세하게 되었다고 본다. (분배에 불만 급증)
그 원인이 기독교의 ‘자발적 분배 실패 책임’에도 다소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 사회가 상당히 좌경화되었다고 한탄만 하지 말고
교회와 자신이 과거에 정말 나눔을 잘 실천했는지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자기 몸, 자기 교회 우상화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오늘 대부분 사람들이 모두 바쁜데
결국은 ‘자기 하나’ 붙들고 몸부림치는 것이다.
거기에 부모, 형제, 친구마저도 안중에 없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은 곧 내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자(사회에서 소외된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은...안한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놀라면서' 읽어야 한다.
우리교회는 지역이 개발되어 옛 교회 부지를 비싼 값에 팔아서
새 교회 부지를 구입하고, 그 돈 남겨서 새 교회 건물지어서는 안 되겠다.
새 교회는 우리 힘으로 지어야 하겠다. 건축의 남은 빚도 우리 힘으로 차차 갚자.
그리고 옛 교회 부지 땅 값이 올라서 새 교회 부지를 사고도 남은 차액은
지역사회에 되돌려주려고 한다.
특히 우리교회는 특수 호스피스 사역(에이즈)에 사명을 갖고 있으므로
거기를 통해서 환원하려고 한다.
▲한국 교회의 반성과 미래
그동안 우리는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하면서
은혜 받는 일에, 축복받는 일에만 골몰해 왔다.
이제는 우리가 좀 더 나누고 베푸는 일에 열심을 내자.
그동안 우리는 은혜 받고, 축복을 사모하는 일에는
세계가 따라올 수 없을 만큼 열심이었다.
이렇게 새벽기도, 철야기도 열심히 하는 교회가 세계에 별로 없다.
그동안 우리가 이렇게 받는 일에만 열심 내었다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우리가 받은 은혜와 축복을 나누는데 열심내기 바란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살아나게 될 것이다.
나누지 않고서는, 한국교회의 장래는 없다고 본다.
물론 그동안 교회는 열심히 나누어 왔다. 그 일에 타종교보다 몇 배 더 열심이었다.
그렇지만 사실 전체 교세에 비해 부족했다.
그 결과 지금 현실은, 교회의 ‘전도’까지 세상 사람들은 색안경 끼고 보고 있다.
‘한 사람 더 붙잡아서, 헌금 좀 더 많이 받아내려 하나보다!’ 한다.
이런 일을 바로 잡으려면, 이제 '나눔의 부흥'이 일어나야 한다.
'나눔의 회개'가 일어나야 한다.
앞으로 이런 나눔에 우리교회가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케 되기를 원한다.
진정한 회개와 부흥운동은
나눔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로 받아들이자!
<인터넷 설교 07.02.11. 발췌, 정리 *원제목 : 부흥과 나눔 (행2:42~47)
[주제별 분류] 사회적 책임 http://blog.daum.net/bible3/10790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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