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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3 하나님 나라의 이면 역사를 볼 줄 알아야

LNCK 2007. 9. 21. 09:42
 

◈하나님 나라의 이면 역사를 볼 줄 알아야            왕상11:35~36

 


◑장남보다 차남을 선택하시는 이유


명절이 가까워오면 TV 토크쇼에서 재담꾼들이 출연해서,

과거에 살기가 힘들었던 학창 시절에 

형은 맞이라서 힘들고 어려웠고,

막내는 막내라서 서글펐고,

중간은 중간에 끼여서 기를 펴지 못했다고들 제마다 애교 섞인 하소연들인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유독 차남이나 막내를 편애하시는지

장남 입장에서 보면 실족할만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에서와 야곱 중에서 동생인 야곱을 택하시고, 

야곱의 12아들 중에 거의 막내에 속하는 11번째 아들 요셉을 택하시고,

다윗도 8형제 중에 막내다.


다윗왕도 형들 다 제쳐놓고 막내 축에 속하는 솔로몬을 택했고,

모세도 아론과 미리암의 동생이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성경은, 실제로 장자권을 엄격히 인정한다)


요지는, 하나님은 동생이나 막내를 선호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약한 자를 택하신다!>이다.

 

하나님이 여러 민족들 중에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도,

그들이 주변 국가들 중에서 가장 작고 미약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나신 것도, 그 고을이 가장 작고 초라했기 때문이다. 마2:6


▲두 지파만 주신 이유

열왕기상에 보면, 솔로몬의 우상숭배로 하나님은 노하셔서

다윗 왕국을 둘로 나누셨는데... 인간적 시각으로 볼 때, 너무 불공평하다.


다윗의 자손도 아니요, 메시야의 계보도 아닌 '서자' 북 이스라엘(여로보암)에게

10지파나 떼 주신다.


그리고 다윗 왕국과 메시아 계보를 이어가야할 언약의 후손

'적자' 남유다 왕국에는 달랑 2지파만 주신다.

그래서 ‘세속 역사가’들은 남왕국을 북왕국의 속국 정도로 해석한다.

국력의 차이가 그만큼 달랐다는 것이다.

 

6:6으로 공평하게 나눠주시든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 일을 할 남왕국에 10지파를 주셔야... 인간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런데 미운 자식 떡 한 덩이 더 주시는 것이 아니라,

북왕국에 떡을 무려 5배나 더 주셨다.


이것은, 막내를 택하시는 이유와 같다고 본다.

‘너는 사명자이니까, 다른 것 의지하지 말고, 오직 철저히 나만 의지해라!’

그래서 하나님은 고의로 낮추시고, 그렇게 낮아진 나라를 쓰신다는 것이다.

 

실제로 미약하고 힘이 없었던 남유다는 강력했던 북이스라엘보다

더 오래 왕국을 유지했으며, 포로귀환 이후에도 나라가 계속 존속했다.

 

(물론 솔로몬의 우상숭배와 범죄의 결과로 그런 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10지파 북이스라엘은 나중에 우상숭배 안 했는가? 극심하게 했다.)


그러므로 형은 형이라서, 동생은 동생이라서 자기가 차별받았다고

하소연 할 필요 없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부족함과 낮아짐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이요, 은총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볼 줄 아는 신앙적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이 글의 전체 주제이다.

 

그러므로 부모의 유산 분배에 있어서 신자가 불이익을 당해도, 달랑 2지파 몫만 받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고, 도리어 더 깊이 깨달으시라! 

 


▲영화, 반지의 제왕의 교훈  

처음에 영화 ‘반지의 제왕’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대형 스펙터클(큰 볼거리)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과거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큰 전쟁’을 거기서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은 컴퓨터 그래픽의 발달로 많이 일반화 되었지만...)


그런데 실상 ‘반지의 제왕’의 주제는... ‘큰 전쟁’이 아니다.

세상 역사는 영웅호걸들의 큰 전쟁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프로도 같은 호빗(난장이, 낮은 계급)이

반지를 ‘불의 산’ 용암 속에 잘 던지느냐, 못 던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 반지는 12번째 '절대 반지'로서, 이미 11개의 반지를 모은 악의 세력이

마지막 12번째 반지만 손에 넣으면... 세상을 악의 제국으로 통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프로도가 그것을 막은 것이다. 결국 성공적으로 용암 속에 던져 없앴다.


저자 톨킨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진행방식'을 꿰뚫어 본 것이다.

세상 역사는 장군, 영웅, 전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마치 호빗 같은 낮고 작은 크리스천 개개인이

자기 사명을 얼마나 잘 감당하느냐, 못 감당하느냐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 나라 역사의 주인공은... 바로 당신과 나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다.

오늘 나의 작은 선행이, 이 세상 전체가 사탄의 제국화 되는 것을 막고 있다.
마귀의 교묘한 역사를 저지하고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낮고 겸손한 방식으로 찾아오신다.

그것을 발견할 수 있어야... 


어느 이교도가 랍비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왜 떨기나무 속에서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시라면 적어도 영산(靈山)의 정상에서 천둥소리로 말씀하셔야 한다는 것이

그 이교도의 생각이었다.


랍비는 이렇게 답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

보잘것없는 가시덤불조차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방식에서 그분의 겸손이 보이지 않는가?

마구간의 낮아진 그곳에서

갓난아기 울음소리로 통해 말씀하시는,

우리는 주님의 겸손의 극치를 보지 않는가?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부족해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주님의 제자가 되는 좋은 자격임에 틀림없다.


낮고 겸손하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특유의 방법을 깨닫지 못하는 한.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이 가득한 순간들,

하나님이 인간의 태를 빌려 태어나는 베들레헴의 그 순간들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 것이다.


말구유 건초더미 위에서 성스러운 것을 볼 때까지

우리는 우리 마음의 눈을 끊임없이 고쳐나가야 한다.  (이 단란, #877에서 발췌)




◑눈에 보이는 바람, 눈에 안 보이는 해류


세찬 바람이 바다와 빙하를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눈에 안 보이는 물밑의 해류가 그것들을 움직인다.


▲기독교 근본주의 : 사람의 방식

지금 우리는 금권 정치, 제국주의, 그리고 근본주의가

동시에 권력으로 부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신자유주의 경제 질서입니다.


그것은 부자는 더욱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은 체제입니다. 그런 경제 질서는 막강한 군사력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강대국의 의도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세상 도처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배후에는 에너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있음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 약탈적인 질서를 부추기는 것은 놀랍게도

기독교 근본주의의 망령입니다. (cf. 회교 근본주의)

‘근본주의’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판단 위에 놓여 있습니다.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그렇지 못한 이들에 대해 공격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의 정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이면의 질서에 눈을 뜬 사람 : 예수님 방식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예수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예수 정신의 핵심은 권위주의와 지배심에 대한 거절입니다.

교회가 권력으로 변할 때 예수의 자리는 사라지고 맙니다.


저는 가슴에서 돋아나는 절망을 희망의 칼로 베어내면서

예수 정신의 씨를 뿌리는 이들을 보고 있습니다.

가슴 시린 사람의 옷이 되어주려고 애쓰는 이들,

배고픈 사람을 어떻게든 먹이려고 애쓰는 이들,

고독한 이들의 벗이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


교권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그런 이들을 귀히 보십니다.

얼음을 깨뜨리는 것은 망치가 아니라 바늘입니다. (옛날에 얼음 깨본 사람은 압니다.)

금권 정치와 제국주의 그리고 근본주의의 얼음을 깨는 것은,

오직 예수만을 바라보며 세상에 틈을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연약해 보이는 나무뿌리가 바위를 깨뜨립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비전과 용기입니다.

희망은 연약해 보입니다. 하지만 희망처럼 강한 것이 없습니다.

역사는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이미 시작하신 일에 동참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친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으로 변할 것입니다.


거대한 빙하가 바람의 방향을 거슬러 흐르는 것은 저 밑바닥의 해류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하나님의 생명은 자라고 있습니다.

추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면의 질서에 눈을 뜬 사람,

그리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해류는 저절로 흐릅니다.

‘저절로’ 자라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역사와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넘겨드리고,

그의 이끄심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오.

그 바탕 위에서 하나님 나라의 좋은 일꾼이 되십시오. <이 단락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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