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려면 마9:35~10:1
어떤 의미에서 모든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야 하는데..,
◑1. 상처 입은 이웃들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마9:36
그들은 병든 자, 약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유리하고 방황하고 기진맥진해 있었다. 마9:36
현실은, 오늘날 많은 현대 크리스천들이 이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왜 그럴까?
자기 상처 속에만 빠져 살기 때문이다.
▲이웃을 못 보고 쫓겨서 살아가는 현대인
고든 맥도날드의「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 보면
현대인을 두 부류로 나누고 있다.
*driven life 쫓겨 다니는 인생
오늘도 이 일, 저 일에 쫓겨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일에 쫓기며 사는 인생은 좋지 않다.
*called life 소명적 인생
분명한 자기 인생의 소명과 목적을 깨닫고, 일관성을 갖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인생.
그런데 불행하게도, 후자인 ‘소명적 인생’을 사는 사람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쫓겨 다니는 인생, 충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바쁘게 쫓겨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이웃들이 보이지 않는다. 자기만 보인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이웃들마저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자기 눈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데, 무슨 사역을 하겠는가!
▲퀴블러 로스 여사의 자기 반성
유명한 퀴블러 로스 여사의 마지막 유작은「인생수업」Life Lessons 이다.
이 책에 매우 흥미 있는 이야기가 나온다...
저자 로스 여사는 뉴욕의 큰 강연회에 초대되어 강의를 가졌다.
그리고 강의 직후에 그 장소에서 ‘북 싸인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의 책에 싸인을 받았다.
그런데 비행기 출발 시간이 임박하자, 하는 수 없이 ‘북 싸인회’를 중단하고,
로스 여사는 비행장으로 와서 모든 수속을 끝낸 후에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에 화장실 문 아래로, 자기 책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박사님, 싸인 좀!”
얼마나 황당하고, 또한 무례한지...!
여사는 급히 볼 일을 보고 나와 보니, 바깥에 수녀가 한 분 서 있었다.
사연은 이랬다.
“박사님, 이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로스 박사 : 웬 은혜?)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제게 한 친구가 있는데, 저처럼 수녀입니다.
굉장히 박사님을 존경하고 있고, 박사님의 책을 즐겨 읽는 사람입니다.
사실은 그 친구도 이번 뉴욕의 강연회에도 꼭 오기 원했는데,
그가 암에 걸렸는데, 최근에 증세가 너무 심해져서 도저히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는 제게 부탁했는데,
하나는, 박사님의 강의를 잘 듣고 메모해서 오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박사님의 저서에 꼭 싸인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북 싸인회’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박사님 비행기 스케줄 때문에 싸인회가 중단되지 않았습니까!
‘이제 나는 어떻게 친구 얼굴을 보나!’ 하며 실망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렇게 허탈한 마음으로 비행장에 왔는데,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중에 화장실을 쓰고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박사님이 들어오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란 말입니까!”
바로 이 대목에서 로스 박사는,「인생수업」에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평생 <상처 입은 사람들, 죽어가는 이웃들을>
섬기고 돕기 위해서 내 평생을 걸고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바로 그 순간만큼은, 내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나는 내 곁에 있는 상처 입은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있었다.
나는 오늘 또다시 결단한다.
‘내 이웃 그 누구라도, 내 처지와 환경과 상관없이,
내 곁에 있는 상처 입은 이웃들을,
하나님의 긍휼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내게 주소서!’
▲사역의 시작은... 눈이 열리는 데 있다.
우리가 만약 이런 눈으로 우리 이웃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가 섬길 수 있는, 사역할 수 있는 대상은.. 지천에 늘려있지 않은가!
먼저 우리 눈이 열려야 한다.
금년에는, 주님이 새롭게 우리 눈을 열어주시기를 바란다.
만약 한국교회 성도들의 눈이 열려
우리 주변에 우리가 붙들어 주고, 세워줘야 할 영혼들에 대한.. 눈이 열린다면,
한국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맞이할 것을, 저는 믿는다.
◑2. 상처 입은 이웃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있어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compassion 여기시니... 마9:36
‘불쌍히 compassion’은, ‘함께com 고통passion을 느낀다’는 뜻이다.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그들의 외로움을 자신의 외로움처럼 느끼는 가슴을, 주님은 갖고 계셨다.
▲예수님의 기도
제 아내가 기도할 때 가만히 보면, 기도 속에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는 말을 제일 자주 반복한다.
이것은 절대 비굴한 기도가 아니다.
가만히 보면 불쌍하지 않은 인생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주기도문 Lord's prayer’ 말고도 교회사에 내려오는 유명한 기도문이 또 있는데,
‘예수님의 기도 Jesus' prayer’이다.
이것은 사실은 예수님의 기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예수님께 드린 기도이다.
맹인 바디메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 다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렇게 기도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함께 기도할 때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늘을 감히 올려다보지 못하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런데 그 세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2세기 경부터 ‘저를 불쌍히 여겨 주서서!’는 기도문으로 낭송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죄인 된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답답하고 기도가 잘 안 나올 때,
때로는 무슨 기도를 드려야 몰라서 당황할 때,
이 ‘예수님의 기도’를 계속 반복했다고 한다.
‘주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이 기도가 왜 놀라운 능력을 가져올까?
주님은 2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 ‘긍휼compassion’은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엡2:4
우리도 모두 이 기도를 배워야 하겠다.
우리가 이웃을 불쌍히 여길 때, 비로소 사역이 시작된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다음 단계는...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시도라도 해 보자!
우리가 상대방의 자리(입장)에 서는 것은 사실 매우 힘들다.
그러나 시도, 노력이라도 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아내의 입장에 서서, 아내를 이해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 있다면...
아내가 남편의 입장에 서서, 남편이 겪는 직장의 치열한 싸움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면... 우리의 부부관계는 얼마나 달라질까!
부모들이, 자녀들이 겪는 갈등과 고통을 이해하려고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 있다면..
자녀들이, 부모들 입장에 서서, 부모들이 겪는 자식들 키우는 고통과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더라면.., 그 관계가 얼마나 달라질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는 행동으로 자연히 연결된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
미국에서, 한 목사님이 아침 식사를 하러 어느 식당에 들어갔다.
그런데 볼썽사납게, 거기 웨이트리스가 음식을 가져와 거의 팽개치듯 내놓았다.
그리곤 테이블로 다시는 오지 않았다.
(보통 미국 식당은, 웨이트리스 아가씨가 식사 중에 몇 번이나 테이블로 와서
뭐 필요 한 것이 없느냐고 친절하게 묻는다.)
이런 불친절한 대접을 받고서, 그 목사님은 화가 나면서 열이 뻗쳤다.
매니저를 불러서 항의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이었다.
‘혹시, 저럴만한 딱한 사정이 저 자매에게 있는지도 몰라!’
그러자 갑자기 그 자매가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 도리어 기도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 저 자매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러자 뻗쳤던 열이 사라지면서, 식사를 잘 마칠 수 있었다.
목사님은 나가는 길에, 보통 아침 식사 팁은 3~4불이면 족한데,
그 날은 성령님의 감동으로 10불을 놓게 되었다. 선뜻 내키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자 그 웨이트리스 자매가 10불을 들고 뒤쫓아왔다.
“이것, 팁이 아니죠?”
“팁 맞는데요?”
“아니 어째서 이렇게 많이?” (제가 불친절했는데도...)
“제가 가만히 자매님을 보니까,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조금 팁을 더 놓아서, 자매님께 혹시 위로와 격려가 될 수 있을까 해서...”
그 순간 자매는 갑자기 얼어붙은 것처럼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그리고 눈물이 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무례하게 섬겼지요?
사실은 어제 밤에, 제 남편이 저를 버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이혼을 당했습니다!”
목사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의자에 앉아서, 그 자매를 위해 기도해 드렸다.
자매는 기도 중에도 계속 어깨를 들먹이면서 울음을 멈추지 못했다.
“자매님, 성경에 내가 과연 너를 버리지 않겠고, 과연 너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 있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날 아침, 그 자매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고 헌신했다고 한다.
여러분,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기만 하면,
사역의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다.
◑3. 상처 입은 이웃을 제자 삼으라
▲제자란 - 다른 사람을 제자 삼는 사람
예수께서는 모든 병자, 약한 자들을 보셨다.
그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마9:38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 연결된다.
마10:1, 예수께서 그 12제자를 부르사...
왜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부르셨는가? 9장 끝과 10장 앞을 연결해서 보면
그들 유리하는 양떼 같은 불쌍한 사람들의 작은 목자가 되어주라고!
그래서 진정한 ‘제자’는 - 상처 입은 사람들을 제자 삼는 사람이다.
‘제자 훈련 코스를 마친 사람’이 아니다.
▲어떻게 실제로 제자를 삼을 것인가?
제자 훈련의 근본을 보여주는 구절은 바로 이것이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시고
막3:14
제자훈련의 본질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에 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다.
함께 있다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
함께 있다 보면, 저절로 배우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다른 제자가 생기기를 원하시는가?
간단하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가급적 많이 가지시라.
그러면 그들이, 내 수준만큼의 사람이 된다.
삶으로 함께 할 때, 그 삶을 저절로 배우기 때문이다.
▲함께 있는 교제의 본질은 - 삶을 나눔
사도행전이 가르치는 ‘코이노니아’(교제)의 본질도,
그저 함께 지내면서 친하게 놀며 지내는 ‘교제’가 아니다.
그것은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내 고통, 아픔, 눈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교제의 본질이다.
삶을 나누는 것이, 제자 삼는 사역의 가장 큰 본질이다.
자기 삶을 나눌 수 없다면... 제자 삼을 수도 없다.
서로의 삶을 오픈해서, 서로 붙들어주고, 세워주고, 함께 기도할 때
거기서 제자가 탄생하는 것이다.
▲나의 도전
저는 지난 5년간, 우리 교인들에게 계속 도전하는 것이 있다.
“여러분 평생에, 다른 것 하지 마시고, 열두 사람에게만 영향을 끼치시고
세상을 떠나시라!”
12명 이상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겠다는 것은... 만용이 될 수도 있다.
예수님도 12제자를 삼지 않으셨는가!
내 평생을 통해서 12명만 제대로 섬긴다면... 나중에 주님께 칭찬들을 것이다.
그러자 어떤 교인이 이렇게 하소연했다.
“목사님, 12명이라뇨? 이 험난하고 지치는 세상,
내 한 명 제대로 살기도 힘든데, 어떻게 12명씩이나 섬기겠습니까?”
“그렇다면 3명만 영향을 끼쳐 보십시오!
상처 입고 고독한 영혼 세 사람만 돌봐 보십시오.”
그 세 사람을 지극히 사랑해주고, 기도해주고, 챙겨주고 하다가
때가 되면 그 세 사람이 성장해서, 각자 다른 세 사람씩을 제자 삼는다면,
모두 12명이 된다.
◑모든 것은 단 한 명에서 출발한다!
이 모든 것은, 한 명에서 출발한다.
금년에는 <단 한 사람이라도 제자로 삼겠다!>는 기도와 결심을 하시기 바란다.
그와 같이 만나서 밥 먹고, 위로해 주고, 기도해 주고,
문자 메시지 보내고, 격려하고, 같이 말씀도 나누고..,
▲한 영혼의 가치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늘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 쉰들러 리스트!
독일사람 쉰들러가 유태인들을 구출하는 내용이다.
마지막에 전쟁이 끝난 후에, 그가 좀 더 많은 유태인을 구출하지 못해서 한탄하는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내가 이 시계를 풀 수 있었더라면...”
“내가 이 뱃지를 팔 수 있었더라면...”
“내가 저 자가용을 팔았더라면, 몇 사람이라도 더 구출했을 터인데...”
그 때 유대인 랍비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이런 유명한 말을 한다.
“쉰들러 씨,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을 구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한 영혼의 가치는, 온 세상의 가치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8:36
(이 말씀은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오직 한 영혼을 위해서 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 결코 낭비가 아니다.
또한 거기서부터 온 세상을 구하는 일이 시작 된다.
한 사람을 변화시켜 제자 삼을 줄 아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여러 사람도 제자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집중했던 마더 테레사
마더 테레사에게 어떤 기자가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그 연약한 몸으로,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이런 위대한 일들을 이루셨습니까?”
이 때 마더 테레사는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라고요?
저는 단 한 번도, 수많은 사람을 섬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늘 지금 내 곁에 있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했을 따름입니다.”
▲한 사람을 섬긴 톰슨 선생님
아래는 한 감동적인 주일학교 교사의 스토리다.
톰슨 선생님은 중학교 교사이면서, 교회 주일학교 교사였다.
그는 알라바마 주의 산속 시골학교로 전근 가게 되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 저는 시골학교로 전근 가는 것을 불평하지 않겠습니다.
거기서 제가 섬길 한 사람만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제 삶을 거기서 헌신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 가보니, 한 학생이 장기결석을 하고 있었다.
바비 잔슨이란 학생은 너무 오래 결석해서, 이제 막 제적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크리스천인 톰슨 선생님은, 자꾸 기도시간에 마음에 부담이 되면서
그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전화도 안 되고,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을 내서, 그 집 주소를 들고 직접 찾아갔다.
예상한 대로, 엄마는 집을 나갔고, 아빠는 알콜 중독에다 마약 중독자였다.
바비는 아버지의 악영향을 받아, 중학생이면서 벌써 술을 마시면서,
그렇게 십대 때부터 자기 인생을 포기하며 살고 있었다.
그 때부터 톰슨 선생님의 일과는 달라졌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 바비 잔슨의 집으로 → 자기 집으로!
그리고 매일 바비를 설득했다.
“바비야, 학교 나와서 공부해야 돼! 진도 못 따라간 것은 선생님이 도와줄께!”
“바비야, 내 소원은 단 한 가지야.
내가 출석부를 때, 단 한 번이라도 Sir, I'm here 라고 네가 대답 하는 거야!”
설득한지 한 달 만에 바비가 드디어 학교에 나왔다.
출석을 부르는 시간에 바비가 대답했다. “Sir, I am here!”
탐슨 선생님은 그를 잘 격려해 주었다.
바비는 약 두 달 정도 학교에 열심히 다녔다.
그 동안 선생님은 계속 바비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그런데 두 달 후에, 바비는 또 다시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톰슨 선생님은 다시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바비의 아버지가 말했다.
“선생님, 바비에게 아마 큰 병이 걸린 것 같아요.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에 갔어요!”
바비의 병명은 간암이었다.
그리고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 날부터 톰슨 선생님의 일과는 다시 이렇게 바뀌었다.
학교 → 병원 → 자기 집
이렇게 한 동안 계속되었다.
어느 날 침대에 누운 바비가 선생님께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중병에 걸린 것을 알아요. 오래 못 산다는 사실도 알아요.
이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셔도 Sir, I am here!라고 대답하지 못할 거예요!”
“그래 바비야, 네가 앞으로 학교에 다시 안 와도 된단다.
그런데 선생님은, 네가 꼭 갔으면 하는 곳이 있거든, 천국이란다!
사람은 길게 살든, 짧게 살든 다 죽으면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거기서도 출석을 부르거든...
예수님이 거기서 네 이름을 부르실 때, 바비야, 네가 이렇게 대답하길 바란다!
Dear Jesus, I'm here! 예수님, 저 여기 왔어요!”
“선생님, 저는 예수님 모르잖아요!”
“알고 싶니?”
“예, 알고 싶어요!”
그래서 톰슨 선생님은 바비 학생에게 그 자리에서 복음을 나누기 시작했다.
바비는 선생님의 인도에 따라, 그날 예수를 자기 구주로 영접했다.
“성경에,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어!
너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
그러면 이제 자녀니까 당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가게 되는 거야, 거기는 천국이지!”
그리고 톰슨 선생님은 그날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날 사랑하심!”
이란 찬송을 바비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 때로부터 두 주간 후에, 톰슨 선생님이 수업 중인데, 학교로 급한 전화가 왔다.
바비의 아버지가 전화로 말했다.
“선생님, 바비가 이제 세상을 떠나려나 봐요, 의식이 없어졌어요!”
톰슨 선생님은 수업을 중단하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집 나갔던 어머니도 와 있었고, 못 보던 바비의 동생도 거기에 와 있었다.
코마(무의식)상태에 들어간 바비 앞에서, 톰슨 선생님은 조용히 기도드렸다.
식구들도 안타까운 눈으로 모두 바비를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가 지나갔을까? 갑자기 바비의 입술이 파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비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 숨을 거두었다.
“Dear Jesus, I'm here! 예수님, 저 여기 왔어요!”
톰슨 선생님은, 마침내 ‘온 천하보다 소중한 한 영혼’을 구한 것이다.
그날 밤, 그는 이런 일기를 썼다.
바비는 갔지만, 나는 오늘, 온 세상을 얻었다!
오늘 우리도 톰슨 선생님처럼 될 수 있다! <08.01.25.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주제별 분류] 제자 양육 http://blog.daum.net/bible3/13925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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