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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예언할 수 있다 1713

LNCK 2009. 1. 26. 23:04

◈나도 예언할 수 있다                 벧후1:19                설교 녹취

 

 

참된 성경적 예언이란,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말씀으로, 현재 잘못된 것을 교정하는 것인데,

거기엔 필수적으로 자기 교정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벧후1:19

 

 

▲나는 예언해 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참 성도가 아닌 것인가?

성경 요엘서와 사도행전에,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행2:17

어린아이는 예언을 한다고 했다.

이렇게 말세에 모든 사람이 예언을 한다고 했는데, 그럼 나는 참 성도가 아닌가?

 

성경에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예언’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가? 예언의 성경적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적 예언은, 미래 예측이 아니다.

‘예언’하면.. 일차적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언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니까,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대부분은, 미래를 한 번도 내다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 설교 제목이 ‘나도 예언할 수 있다’인데,

어떤 교회에 가면 방언도 훈련하고, 치유 은사도 연습한다던데,

우리 교회도 이제 그런 식으로 빠지는 것인가?

이제 목사님이 우리에게 ‘예언하는 법을 훈련시켜 주려는 것인가?’ 하며

오해할 것이다. 물론 아니다.

 

저는 여러분께 <성경적으로 예언이 무엇인지> 오늘 여러분께 말씀하려고 한다.

성경적으로 예언은, 미래를 내다보는 점치는 일이 아니다.

 

(구약성경에 선지자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간혹 있었지만,

거기에 주안점이 있지 않았다.

선지자先知者 하니까, 한자어 뜻풀이로 ‘앞서 아는 자’가 되어서

아마 그런 오해를 쉽게 하게 된다.

선지자의 예언의 주안점은, 어디까지나 말씀으로 현실 개혁에 있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점도 있었지만, 점쟁이가 그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성경은 미래에 대해 점쟁이처럼 예측하지 않는다. 주로 그렇다.

어쨌거나 교회나 성경은 ‘미래를 점치듯이 내다보는 일’을 그리 권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무척 알고 싶어 한다.

적극적인 성도들은, 목사님께 괜한 기대를 가지기도 한다. ‘좀 알려 주세요!’

 

우리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 알 수만 있다면

당장 주식투자부터 해서 쉽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고,

내 고난이 끝나는 시점이 언제쯤인지 알게 되면.. 살기가 한층 쉬울 것 같은데,

그래서 우리가 자꾸 미래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 강조하지 않을까?

왜 선지자들이 많은 부분 ‘미래를 예측하는 점쟁이’로 활동하지 않았을까?

(일부 미래를 예측한 경우도 있음) 그 대답은 아래와 같다.

 

▲성경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한다.

가장 중요한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성경에 너무나 명백하게 예언되어 있다.

수차례에 걸쳐서 반복해서 예언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예언하실 필요가 없다.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는 너무나 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측 중 한 가지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이며,

<누구나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한 예언이라는 것이다.

다른 예언, 일례로 사업이 잘 되고/안 되고, 건강이 좋고/나쁘고는

살다보면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으로서, 그리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가까운 미래에 대한 초조감과 기대감.. ‘이 일이 될까/안 될까?’

이런 것은 그냥 그대로 갖고 사시라. 인생의 진짜 중요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확실하고도 중대한 예언은

<미래에 누구나 죽으며, 그 때 심판의 기준은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이다.

성경의 이 예언만큼은 우리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떤 목사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다른 목적이 아니라, 그의 마음 상태, 본심을 잘 알면,

그의 영혼을 인도하는데, 어쩌면 잘 상담/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기도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니가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알면, 조금 지나서, 너는 돌아버릴 것이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알면, 돌아버릴 것이다.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낫다.

 

미래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시시콜콜 다 알게 된다면

제정신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미래에 일어날 세부적인 일들을 우리가 사사건건 다 알 필요는 없지만,

그 모든 내 미래의 일들이 다 누적되어, 가장 최후에 일어날 그 일(죽음, 심판)

무엇인지.. 성경은 명백하게 예언하고 있다.

 

 

◑예언은.. 현재를 교정하는 일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예언은.. 현재를 교정하는 일이다.

현재(↔미래)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이.. 예언의 주된 목적이다.

 

이것은 韓목사가 우기는 것이 아니라, 구약학자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나도 예언할 수 있다’이다.

여러분, 예언 하셔야만 한다.

 

현재의 잘못을 바로 잡는 일에 쓰임 받은 사람이.. 구약의 선지자들이었고,

신약의 성도들이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할 줄 믿는다.

 

현재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며 쓰임 받는 사람이

구약에는 선지자였고, 지금 시대에는 저와 여러분 같은 성도이다.

물론 이 일은, 자기 개혁, 자기 교정에서부터 출발한다.

 

▲특별한 ‘예언의 은사’는 없더라도, 누구나 일반적으로 예언할 수 있다.

어떤 분을 보면, 얼마나 주님을 정성스럽게 믿고 섬기시는지,

‘저 분은 반드시 복 받을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사람은.. 거의 대부분 다 복을 받는 것을 본다.

 

반대로 또 어떤 분을 보면, 얼마나 엉망인지

‘저 분은 저렇게 살면 큰 일 나는데..’ 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사람은.. 여지없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본다. 물론 후에 돌아오지만..

 

물론 이 때, 그에게 정직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당신은 그렇게 하다가 큰 일 납니다.’ 라며 <현재의 그를 교정>해 준다.

결단과 결과는 그에게 달려 있지만, 어쨌든 나는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이가 둘인데, 사단과 성령님이다.

성령님도, 사단도.. 둘 다 똑같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정죄) 하지만

시작은 같다고 해도,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사단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할 때는, 그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파괴적 정죄다. 자기 능멸이다.

그러나 성령님이 우리 죄를 깨닫게 하실 때는, 내가 죄인이지만,

오히려 성령 안에서 더 세워진다. 통회하지만 그 결과는 기쁨이요, 세워짐이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예언자/선지자적 음성을 잘 분별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선지자적 음성’을 쉽게 ‘사단의 음성’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두 개가 비슷(지적, 비판)하지만, 결과가 판이하게 다른데,

그것을 분변하지 못하고, 자기 입장에 편한대로 해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를 교정한다면서 선지자적 음성으로 시작했다가

계속 비판하고 싸우다가 사단의 음성으로 변질되는 수도 왕왕 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은 이유

사람이 부당한 일을 할 때, 자기도 부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 안다.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는 의식이 가물가물하게라도 있다.

 

그런데 그 일이 한창 진행될 때, 누가 그것을 하지 말라고 제지하면.. 당장 반발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상황이 종료될 즈음.. 비로소 깨닫는다.

‘아, 그게 잘못된 일이었지!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일이 다 끝나면.. 잘못된 일은 사람이 후회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데 구약의 선지자들이 어떤 때 예언의 타이밍을 맞추느냐 하면,

‘한참 그가 무르익어서 그 일을 열심히 진행하고 있을 때,’

그 일을 하지 말라고 제지하니.. 누가 그 말을 곧이 듣겠는가? 미운살만 박히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서, 다 망해서 초라하게 되었을 때,

그 때는 이야기하면 그가 수긍한다. ‘그래, 잘못된 일이었어!’

 

그런데 사건이 다 망쳐지고 나서 말하는 것은.. 참 예언이 아니다.

개선의 가능성이 있고, 돌이킬 기회가 있을 때 말하는 것이.. 참 예언인 것이다.

그 타이밍 때문에.. 선지자는 항상 핍박 받고 무시 당했다.

 

▲예언자의 능력이 공동체를 살린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이송되어 갈 때, 유라굴로 태풍이 불었다.

당시에 그 배에는 선장도 있었고, 백부장도 있었고, 사람들도 많이 타고 있었다.

평상시에는 항해에 관해서는 선장의 말을 듣게 되어 있다.

바울은, 선장과 비교하면 참 시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풍이 몰아치는 유사시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바울이 리더가 된다.

사람들은 바울이 시키는 대로, 밥을 먹고, 배를 버리고 상륙하고,

일절 그의 지시에 따랐다. 무엇이 상황을 그렇게 바꾸었나?

 

바울 한 사람이 참된 예언자의 능력을 발휘할 때, 모두가 살았던 것이다.

모두가 구원(문제 해결)을 얻었던 것이다.

이런 크리스천이 되시길 바란다.

예언자(=선지자)는 유사시에 더욱 능력을 발휘하고, 그 역할이 돋보이는 사람이다.

 

......................................... 더 읽으실 분 .............................................

 

▲설교자 한목사님의 탄생 비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데는, 비화랄까, 에피소드가 있다.

제 어머니는 당시에 서울의 괜찮은 어느 집안에 시집을 가셨는데,

첫째와 둘째를 연속으로 딸을 낳고 보니, 셋째인 저를 가지고서도 마음이 불안했다.

당시만 해도, 며느리가 아들을 못 낳는 것은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부모님들의 기대감과 실망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짓눌린 제 어머니, 당시 새댁은

시집가기 전에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었는데, 불신가정에 시집간 이후부터는

교회 다니기가 쉽지 않아서.. 좀 쉬고 있던 터였다.

 

‘또 셋째마저 딸이 나오면 어떻게 하나?’

급기야 어머니는 당시 서울 시내에서 가장 용하다는 10명의 점쟁이를 수소문해서

리스트를 작성해서 한 명씩 모두 찾아갔다.

그런데 10명이 모두 다 ‘임신한 아이는 딸입니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임신한 애(나)를 지워버릴 생각을 하셨다.

 

그런데 옆집에, 교회를 잘 다니던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가 새댁에게 ‘그거 안 된다’고 설득하셨다.

그러면서 ‘요즘 교회 안 나가서 그러니까, 다시 교회 나가자’고 전도도 하셨다.

그런 일을 계기로, 옆집 아주머니를 따라서 교회도 나가게 되었고,

애도 지우지 않고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바로 저(설교자)다!

 

점쟁이가 미래를 내다보는 일을 다 믿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오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다.

 

▲미국의 한 2세대 목회자(영어가 모국어인 아이들 담당 목회자)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 한인교회의 1세대 성도들은, 설교를 귀담아 듣는 것 같고,

2세대 아이들은, 다리도 꼬고 앉아 있고, 눈도 안 맞추고,

설교를 도통 듣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1세대는 열심히 목사님을 쳐다봤지만.. 들은 게 별로 없고

2세대는 도무지 안 듣는 것 같은데, 알고 보면 설교를 다 듣더라... 고 말했다.

 

설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누군가 제게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성도들의 반응이 중요하지만, 때로는 성도들의 반응에 관심 가지지 마세요."

때로는 반응을 많이 한 것 같은 설교가.. 실제로 영양가가 없었고,

반응을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은 설교인데.. 몇몇 성도들이 인생이 변하는

영양가가 있은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계12장에 보면, 사단과 교회의 영적 전쟁이 나오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사단이 하나님 보좌 앞에서 성도들을 참소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는, 사단의 참소권이 법적으로 없어진 것을 말하고 있다.

참소하던 자 마귀가 쫓겨났다는 것이다. already not yet

 

그런데 오늘날 우리 현실에 보면, 사단이 여전히 참소권을 가진 것처럼

우리 성도들을 참소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가 속으면 안 된다.

사단이 혹시 우리를 참소하더라도, 그것은 법적으로 ‘머리가 잘린’ 능력이다.

‘힘이 없다’는 것이다. 사단은 이미 패배했다는 것이다.

 

<08.12.15. 인터넷설교 녹취                              [주제별 분류] 선지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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