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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진다 1736

LNCK 2009. 2. 9. 11:06
 

◈“하나님 앞에서” 담대해진다        행4:5~22            인터넷설교 스크랩



▲복음 전파에는 반드시 핍박이 따릅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에게 큰 핍박이 시작되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는 체포당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면서 걷지 못하던 자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의 복음이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왜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것입니까?


복음의 특성 때문입니다. 복음은 그저 좋은 말씀 정도가 아닙니다.

착하게 살라, 죄짓지 말라 정도의 말씀이라면 핍박이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복음이란 죄와 저주에서 구원받는 놀라운 소식입니다.

죄와 마귀의 종노릇하던 사람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악한 영과의 무서운 영적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질 때 마다 사실상 우리를 지배하고 있던

악한 영과 전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하였는데도 아무런 일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복음전파에는 핍박이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복음전도자가 되려면..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준비해야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 내가 복음전파자가 되려면

두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믿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두려움에 흔들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결코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드러내고 살 수 없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핍박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그들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당시 유대 나라의 종교와 정치를 통합한 최고 권력 기구입니다.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까지 결정해 버립니다.


예수님도 여기서 사형선고를 받았고, 빌라도를 통해서 사형 집행을 당한 것뿐입니다.

예수님이 이 자리에서 재판 받으실 때,

베드로는 벌벌 떨다가 예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그 자리입니다.

그 현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다시 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두려운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예수를 전할 수 있었을까요?

행4:19절을 주목해 보십시오. 더 이상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서

베드로가 무엇이라 담대하게 외쳤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보다 더 큰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자기 눈앞에는 지금 공회원들 71명이 무서운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사람들이었고

지금 예수의 제자들도 죽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서 베드로가 본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고,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에게, 어느 순간에나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하는

분명한 믿음을 우리에게 줍니다.


▲마르틴 루터의 담대함의 비결 - “하나님 앞에서”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보름스 의회 앞에서 종교재판을 받았습니다.

당시 종교재판은 무시무시했습니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마틴루터는 담대하게 종교개혁을 하는 자기의 입장을 밝히고

마지막에 하늘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Oh. God, Here I stand." (하나님이여 제가 여기 서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종교개혁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루터는 지금 수많은 청중들 가운데 보름스 의회 앞에 서 있지만,

자기는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지 생각하라’

즉, 자기가 지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그 마음으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도, 사람들이 이를 갈며 돌을 던질 때,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서서 내려다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 상황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 적 용


여러분, 하나님 앞에 서 보셨습니까?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가시떨기 나무 앞에 있을 때,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 앞에 섰을 때,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눈이 열려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에서 말씀에 의지해서 많은 고기를 잡았을 때,

-제자들이 변화산에서 완전히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서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전에는 그저 하나님이 계시겠거니.. 막연히 믿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눈이 뜨였을 때 그들은 경외함에 사로잡혔습니다.

동시에 그토록 커 보이고 두렵게 보이던 세상과,

그동안 심각하게 고민하던 자기 문제는 콩알처럼 작게 느껴졌습니다.


야곱이 들판에서 돌베개 베고 자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벧엘 들판에서 그가 잠들 때까지만 해도

그는 너무너무 두려웠고 외로웠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돌베게를 베고 들판에서 잠을 자야 되는 신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눈이 열려서 하나님 보좌를 보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잠이 깼습니다. 환경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곳에 제단을 쌓고 고백했습니다.

창28:16,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지만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았을 때는.. 두려움 속에 사로 잡혀 있었고,

영적인 눈이 뜨이니까.. 모든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움이 없었던 엘리사

아람 군대가 도단 성에 있는 엘리사를 죽이려고 군대를 보내 포위하였을 때,

새벽에 엘리사의 사환이 이것을 보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두려워하는데,

엘리사는 태연했습니다. 상황은 같은데, 두 사람의 믿음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께 종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선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하6:16-17

그 순간 그 사환의 마음에도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보게 되면 더 이상 세상에 나를 두렵게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두렵게 할 것이 없습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참된 복음전파자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파하게 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한 에스더

에스더에게 동족 유대인이 다 죽을 위기에서,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왕에게 나아가 동족을 살려달라고 간청해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에스더가 동족 유대인들이 멸족하게 되는 심각한 위기에 부딪혔을 때

삼촌 모르드개가 ‘네가 왕비가 된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니냐?’ 하는 말을 하므로

아하수에로 왕 앞에 담대히 나갈 사명을 받았습니다.


왕 앞에 나가서 ‘내가 사실은 유대인이고 내 동족이 내일이면 다 죽게 생겼으니,

우리 동족을 살려주십시오.’ 그 부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왕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왕비라도 왕 앞에 나가면 죽임을 당하는 당시 풍습에,

이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그녀는 “죽으면 죽으리라”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담대해 집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한번이라도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심정으로

살아본 적이 있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자신 없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면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할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고백을 주저할 분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 그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죽음도 문제가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엄청나고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물론 내 공로로, 내가 천성적으로 담대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 시각에, 하나님이 그런 담대한 마음을, 은사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시간과 장소에 내가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데 도망가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자기 눈앞에 캄캄해지는 고난의 순간이 오더라도

가야할 길이 오히려 더 훤히 보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사는지

어떤 길이 복된 길인지 너무나도 선명해 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베드로가 자기들 앞에서 복음을 담대히 전하는 것을 듣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행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그들이 오히려 기가 질렸습니다.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재판 받으러 서있는 사람 중에

말 한마디 제대로 변변하게 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지식이 많은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한과 베드로는 제대로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닌 평범한 사람인데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게 말하는가? 그들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것 같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진 자 앞에서 스스로 위축된 것입니다.


▲판단 앞에서 담대해 지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십시오.

여러분,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산헤드린 공의회를 향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어떻게 할 것인지, 두려운 마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가룟유다는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었고, 3년을 예수님과 함께 살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었는데, 언제 무너졌습니까?

십자가 고난 앞에서 무너졌습니다.

십자가 고난이 두려워서 결국 예수를 판 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의 시험 앞에서 두려워할 때 예수님을 부인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십자가 고난 앞에서 그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여러분도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결코 괴로운 환경 때문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 앞이 캄캄할 뿐인 것입니다.


▲두려움은 환경 때문이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그 겁쟁이들이 달라졌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받는 그 순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성령이 임하신 다음,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고난 앞에서 무너지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난도 있으리라!’

그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에게 핍박이 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입니다. 여러분, 준비 되셨습니까?

어떤 고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예수님만 따라갈 준비가 분명히 되셨습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신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더 이상 고난은 고난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두려움으로 묶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두려운 순간은 언제인가?

내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입니다. 환경과 여건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받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계속해서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순간이.. 가장 두려운 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위험한 자리, 편안한 자리가 달라 보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면 세상 어디도 두려운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다.' 그것을 계속 확인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이것이 분명하다면 모든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져도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겪든지 여러분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려운 시험'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두려운 시험 뒤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보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내가 겪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어떤 계획이 있음이 믿어집니다.

 

이 믿음이 분명하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십자가를 붙잡은 우리가 서 있는 곳은 바로 “하나님 앞”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이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보여주어야 할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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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문 행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두려움이 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그들 관원과 공회원들에게 '증거' 곧 전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실제로 나중에 제사장의 큰 무리도 이 도에 복종했습니다. 행6:7

 

다음으로, 제자들이 담대해지는 연단이 된 것입니다.

이제 땅 끝까지 나아가기 위해서, 먼저 담대해지는 훈련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그들은, 유사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 이전(복음서 시절)처럼 떨지 않고,

계속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09.01.18. 인터넷설교 스크랩                                [주제별 분류] 고난의 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