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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 어윈 루처

LNCK 2009. 5. 13. 22:44

◈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히11:8~10/롬8:25        영어설교녹취편집

 

Erwin Lutzer

 

 

◑1. 아브라함이 바라본 땅은... 내세적인 땅

 

물론 아브라함이 바라본 땅은, 현세적/내세적 의미를 모두 포함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내세적인 하나님의 나라요,

그것이 이차적으로 현세적인 가나안 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1차적인 개념을 깡그리 무시한 채로

2차적인 '부동산 개념'으로  '아브라함의 축복'을 이해하는 것은.. 큰 오해다.

2차적/현세적 축복으로 해석하려면, 반드시 1차적 해석을 먼저 한 다음에 가능할 것이다.

 

히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은, 무슨 ‘현세적’ 복을 받기 위해 떠난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 포르투갈이 신대륙을 향해 ‘갈 바를 알지 못 하고 나아갔을’ 때는,

상당 부분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누리려는 목적이 강했지만,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것은

무슨 주인 없는 땅에 가서, 깃발 꽂고 자기 땅으로 차지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이라고 할 때, 부동산에 민감한 한국인들에게는

그것이 ‘현세적인 땅’으로 여겨지겠지만,

이어지는 히11:10절에 보면,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고 했다.

여기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는 <영적인 도성>으로 봄이 옳다.

 

왜냐하면 사실 아브라함은, 생전에 어떤 성castle or city도 짓지 않았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현세적 성으로 이해했더라면,

살아생전에 그는 작은 도시 하나라도 지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318명의 가신과 노유 종을 합치면 1천명의 대가족을 거느렸지만

성경은 그가 ‘장막’에 거했다고 했지, ‘도시’에 거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히11:9

 

이는 그가 ‘하나님이 지으실 영적인 도성’을 일평생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히11:10

사실 그는 ‘보이지 않는 도성’을 짓는데 성공했다.

이삭-야곱-12지파로 이어지는 훌륭한 믿음의 가문을 형성하는데 성공했고,

족장시대에 자기 사명을 성실히 감당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무덤 값을 4백 세겔 치렀다. 창23:15

어떤 TV설교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 사방 땅을 주셨으므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복 받아, 동서남북 사방 땅을 차지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의 매장지도 없어서

헷 족속에게 4백 세겔을 주고 샀다고 한다.

동서남북을 차지하기는커녕, 실상은 매장지 하나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 물론 그 땅은 약속대로 4백년 후에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성경이 일차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 나라’이다.

 

하나님이 가나안 동서남북을 아브라함에게 주신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고 하신 것이고

실제로 나중에 그 땅을, 4백년이 지나서, 여호수아 시대부터 주셨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가나안을 ‘눈에 보이지 않는 땅/도성’으로 성경을 풀어나가야 한다.

 

그런 일차적 의미를 깡그리 무시하고

(무슨 토지공사 택지분양처럼) ‘땅을 차지합시다’ 라고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것은

우리의 관점이 얼마나 세속적/현세적/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뒤늦게라도 시각을 교정하고

성경을 제대로 올바르게 배워나가야 하겠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을 ‘행인과 나그네’라고 불렀다.

행인과 나그네는 아시다시피, 부동산 등기부원본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복을 주시옵소서’ 하면서 ‘땅을 많이 차지하자’고 격려하는 것은

(쉽게 되지도 않겠지만) 우리의 성경에 대한 시각을 새롭게 교정해야 한다.

 

     물론 아브라함 언약이 ‘보이는 땅, 현세적인 땅’을 당연히 포함한다.

     그러나 일차적/영적인 의미는 ‘보이지 않는 땅/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표’이다.

     그런 땅을 ‘오늘날의 부동산’처럼 해석하는 것은.. 해석상 오해이다.

 

 

◑2.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는 믿음

 

(모세는)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11:27

 

아브라함이 추구한 것은, 보이지 않는 도성city이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도성이었다. 히11:10                                   whose architect and builder is God 

아브라함도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히11:27)

보이지 않는 도성을, 보이는 도성처럼 건설하고 살았다.

 

‘보이지 않는 도성’은.. 신약적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kingdom of God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나라/도시이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계21:3

 

아브라함은, 보이지 않는 도성을.. 마치 보이는 도성처럼 일평생 짓고 살았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영생의 세계를 보이는 것처럼 믿고/건축하며/살아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큰 도시>를 세우기 좋아한다.

아주 크고 우람한 성/신도시 들이다.

수 백~수 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들은 해외관광을 다니면서

사람들이 세운 ‘눈에 보이는 도시’를 보고 감탄한다.

 

그러나 우리 눈이 바뀌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더 중요한 ‘눈에 안 보이는 도시’가 있다고!

 

아브라함은 이 땅에 ‘만리장성’이나 ‘forbidden city/자금성’같은

‘눈에 보이는 도시’를 건축하려하지 않았다.

 

▲칼빈은 ‘눈에 보이는 도시’를 건축하는데.. 거의 실패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네바에서 어거스틴이 말한 ‘하나님의 도성’을 재현하려고 했는지,

신정정치를 하려고 했는지 (교회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러나 칼빈이 성공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종교개혁 신학을 정리함을 통해서

특히 <기독교강요> 및 여타 저술을 통해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의 건축에 성공했고,

그것은 후대에, ‘눈에 보이는 도시’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런 예는 칼빈 말고도 얼마든지 더 있다.

오늘날에도 ‘눈에 보이는 도시’를 건축하는 사람은, 어쩌면 한 세대로 끝난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시’를 건축하는 사람은, 그 도시가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3.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4:18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5

 

성도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믿으며 일평생 살아간다.

그래서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 일평생...

 

▲모세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훨씬 귀하게 여기는 안목이 있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보이지 않는 것)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보이는 것)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11:26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사모하는 믿음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11;16

 

모세는 본향을 사모하다가/바라보다가 죽었다.

자기가 원하던 것들을, 이 세상에서 다 차지하고, 만져보고

죽은 것이 아니다.

 

모세도 가나안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사모하다가 죽은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의 신앙이 너무 현세적이어서

이 현세에서 다 성취하고/만져보고/가져봐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 현세에서 못 성취하고/못 만져보고/못 가진 것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허무하게 여긴다.

 

아브라함과 신앙의 모든 조상들은.. 사모하다가 죽었다.

하나님이 지으실 도성(11:10)을.. 다 지은 것을 못 보고.. 사모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물론 그 도시는 차츰 지어졌다. 2천년 후에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거의 완성’되었다.

내 생애에 다 지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일생의 기도가... 이렇게 응답될 수 있다.

내 대代에 응답되지 않더라도.. 내 다음 세대에 응답될 수도 있다. 아니 여러 세대 후에도 응답 될 수 있다. 

 

▲신유기도의 응답도 궁극적으로 내세적으로 기대해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몸의 구속’도 포함한다.                     *구속redemption: 전을 치르고 해낸다는 뜻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를 전인적으로 구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의 치료(신유)도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있다. 아무리 불치병이라도!

 

단, 그 신유를 너무 현세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라. 그것은 오해다.

많은 사람들이, 암환자를 위해서 기도했는데, 온 교회 성도가 함께 기도했는데

결국 암환자가 죽자.. 시험에 든다. 혹자는 다시는 기도하지 않겠다고 한다.

괜히 응답되지도 않는 기도로, 하나님을 성가시게 하지 않겠다며.. 크게 실망한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 현세적이라서

신유도 꼭 현세에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믿는다.

예수 믿으면, 영혼은 물론이요, 우리 몸의 구속도 반드시 일어난다.

그러나 그 신유의 기적이 꼭 ‘현세적’에 일어나야 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내세에는 반드시 치료된다.

 

너무 현세에만 치우치는, 우리 신앙적 시각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현세에서 내세까지.. 다 내다보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참음으로 기다리는 신앙>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사는 정체성이 ‘나그네요 행인’일진대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도성을 바라는 자들일진대

성도가 일평생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 참음으로 기다림이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8:25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히11:6

그러므로 내 기도가 당장 응답 안 되어도...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신다)

하나님은 기도하는(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고 했으니

기도가 내 세대에 응답되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내 기도가 영 소용 없는 것은 아니다.

 

응답은 안 되어도, 상은 받기 때문이다.

 

위에서 암환자 예를 들었는데, 기도응답이 안 되었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암환자의 기도는, 영생의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치료/응답될 것이고,

내 눈에 응답이 안 되어도..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기도의 상(하나님을 찾는 데 대한 상)을 반드시 받을 것이다.

(그 상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마 하나님의 임재/동행/위로/기쁨 등이 될 것이다.)

 

<Erwin Lutzer목사님 설교 듣고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