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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참된 화해를 위하여

LNCK 2009. 2. 7. 23:41
 

◈민족의 참된 화해를 위하여         창45:1-8            설교 스크랩



 

▲한국 민족성의 이중성

여러분, 우리 한국 민족이 민족성에 있어서 평화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호전적인 경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양론이 있다고 합니다.


흰옷을 사랑하는 백의민족의 어떤 전통, 또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았을지언정

우리가 별로 이웃 나라들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어떤 그런 전통을 들면서

한국인의 ‘평화적인 민족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조시대의 무서운 사색당파 싸움들, 그 피 묻은 보복의 역사,

아직도 지구상에서 최후의 분단국가로 남아서 남북 사이에 대결을 지속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우리 민족성이 의외로 상당히 호전적이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그렇지 힘만 있었더라면 열방을 향한 침략도

얼마든지 가능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이 두 가지 이중성이 함께 우리 민족성 안에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민족성 형성은 지정학적 영향 때문

한국학을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은 이런 이중성이, 우리의 국가가 위치하고 있는

특별한 그 공간성과 지리적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①우리가 열강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어서 계속적인 고통의 역사를 해왔다는 것

②또 하나는 공간이 너무나 좁은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산맥을 빼고 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좁은 지역에 한데 몰려서 삽니다.


여러분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오래 살다 보면

서로 굉장히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또한 이렇게 서로 피부를 맞대고 살다 보면

의외로 서로 상처를 주고, 원수관계가 되기 쉽습니다.


이런 민족성은, 넓은 대륙에서 살아가는 민족들의 민족성과 비교하면

극명하게 그 차이가 나타납니다.

좀 더 넓은 공간에서 사는 대륙성을 가진 민족들을 보면

좀 다투고 싸운 일이 있어도,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고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헤어질 때는, 서로 축복할 수 있는 여유로움이 그들에게 있음에 반해서

우리는 그런 여유를 갖지 못한 민족인 것을 솔직히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신데렐라와 콩쥐팥쥐

이런 보다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산 사람들과, 좁은 공간에서 산 사람들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보여주는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신데렐라’와 ‘콩쥐 팥쥐’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내용은 아주 비슷하지요.

계모와 그 딸에게, 배 다른 딸이 구박을 받고 살아간다는 내용은,

외국에서 만들어진 신데렐라의 이야기나, 국내의 콩쥐 팥쥐 이야기나 비슷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이 상당히 다릅니다.


신데렐라는 주인공이 왕자의 아내가 되는 일종의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콩쥐 팥쥐는 그렇지 못합니다.

(콩쥐팥쥐의 마지막 결론은, 한 개가 아니고 몇 개의 다른 스토리가 있지만)

한 스토리에 보면, 마지막에 팥쥐를 향한 콩쥐의 처절한 피 묻은 복수극,

심지어는 양쪽 마차에 양손을 잡아서 찢어서 죽이는 것으로 끝나는

피 묻은 처절한 보복의 엔딩을 보게 됩니다.


▲남북 분단을 가져온 것은 민족성 때문이라면, 의식의 전환이 필요

이런 우리 민족의 독특한 심리적 특성이

바로 지나간 50년 동안에 남북 대결에 어떤 긴장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한 일이 있습니다.


지나간 6.15선언을 통해서 남북한에는 새로운 화해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처럼 이것이 단순한 선언적 의미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의 진정한 민족의 화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들의 의식의 전환이라고 저는 생각이 됩니다.


우리 남북한이 새로운 화해의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분열, 파당, 싸움, 보복에서) 새로운 의식으로 전환이 필요한데,

그 의식은 어떤 의식이어야 할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오늘 성경 본문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1. 형제의식


잘 아시는 대로 요셉이라는 사람이 자기 형님들에게 구박을 받고 핍박을 받고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고 심지어는 음해와 죽음의 위기까지 넘겨야 했었던 요셉이

그 어느 날 형제들과 화해하고 있는 이 장면 속에서

남북한 민족의 진정한 화해를 위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의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상처가 있어도 형제는 형제

저는 첫째로 그 의식을 형제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형제의식.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처지였습니다.

그들의 음모로 생명의 위기를 겪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넘겨졌고, 노예로 외국에 인신매매까지 당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자기를 그렇게 핍박하고 증오했고, 자기 인생을 무참하게 짓밟았던 그 형님들을

요셉은 여전히 변함없이 형제로 의식하고 있었다 라는 사실입니다.


창45:4,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앞서 44장에서, 유다가 대표로 나와서,

자기 동생 베냐민을 가나안에 꼭 데려가야 하는 이유를 간곡하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베냐민 대신에, 노예를 삼으라고 부탁합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창44:33


과거에 자기 동생(요셉)을 팔았던 냉혹한 형들이,

이제는 자기 동생(베냐민)을 적극 구하겠다는 ‘변화된 모습’을 보고 감동 받았던가요?

45:1절에, 요셉은, 통곡을 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비로소 자기를 공개합니다.

“가까이 오세요. 잘 보십시오. 제가 당신들의 아우가 아닙니까?”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45:4 


저 같으면 도저히 이렇게 못 할 것 같아요.

요셉은 여전히 이렇게 자기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그들을

여전히 ‘형님’이라고 부르며 ‘내가 당신들의 아우가 아닙니까?’ 라고

접근하고 있는... 이 요셉의 형제의식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바로 이런 형제의식이야말로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더불어 화해가 가능할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호칭, 명칭부터 ‘형제 의식’이 없었음

그러나 지난 50년 동안 남북한 사이에는 이런 삶을 우리는 살아오지 못했습니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높은 불신의 벽, 이 벽을 쌓아놓고

남북한이 주고받았던 회색의 언어들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십시오.

우리는 어떻게 불러왔습니까?


형제들이어야 할 그들을 향해서 불러야 할 명칭 하나,

이 언어의 명칭만 생각해보아도

우리는 남북한의 긴장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북한에 사용한 명칭은.. 괴뢰, 빨갱이, 원수,

우리가 이런 단어들을 거침없이 사용해 오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것은 입장을 바꾸어서 북측에서도 남측을 향해서도

동일한, 아니 그 보다 더 심한 언어들을 그들도 사용해 왔습니다.


▲현실

저는 두 차례 걸쳐서 북한 땅을 방문해 본 일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에 북한의 평양 고려호텔에서 북녘 땅에서 첫날 밤을 지낼 때

호텔 방을 들어가자마자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텔레비전을 틀었습니다.

‘도대체 여기 테레비에서는 뭐가 나오나?’


드라마가 나오더라구요. 연속극이었습니다.

‘아, 여기도 드라마도 있구나.’

어떤 드라마인가 호기심을 가지고 좀 지켜봤어요.


뜻밖에도 그 내용은, 북한의 외교관 한 명이 유럽에 외교관으로 나갔다가

남한의 안기부 요원에게 납치되는 그런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남북 분단의 비극의 현실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데올로기로만 보지 마시고,

이데올로기의 극복이란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또 그리스도인의 전망, 성서적 입장에서 볼 때

저도 도무지 공산주의 라는 이데올로기를 수용하지 못 할 것입니다.

아니 수용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분리시켜서

동시에 우리는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공산주의 라는 이론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여전히 우리의 사랑이요 여전히 우리의 복음 선포의 대상이라는

새로운 안목이 우리에게 요청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남북한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우리에게 전환된 이런 의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원수가 아니라, 이제는 그들을 형제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안목,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것처럼

동일하게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동일한 인간이란 사실을 가지고

접근할 수 있는 안목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더군다나 그들이 대부분이 지금은 예수를 모르고, 복음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만약 이 복음을 받아들이면 그들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그렇다면 나와 동일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는

형제들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능성의 형제의식

선교학에서는 이런 것을 표현하는 독특한 그런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이것을 ‘가능성의 형제의식 potential brotherhood’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 모르니까 아직 ‘형제’라고 할 수가 없죠.

‘그래도 그들을 ’형제‘라는 안목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라는 얘기입니다.

나와 종교가 다르다고 ‘원수’라는 안목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서 저들도 믿게 되면, 장차 주 안에서 서로 ‘형제’가 되개 때문에

아직은 진짜 서로 형제간이 아니지만, ‘가능성/미래적 형제의식’을 갖자는 것입니다.


▲남편을 ‘마귀’로 부르면 안 됩니다.

남편이 교회도 안 나오시고 믿지 않는 남편과 더불어 사시는 아내들이 속상하죠.

신앙을 공유하지 못하니까 얼마나 속상해요.

어떤 때는 또 아내의 신앙을 고의적으로 방해하는 남편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아내들이 쓰는 말 가운데는 자기 남편을 지칭하면서

“우리 바깥양반은 마귀예요. 마귀!” 이런 표현을 심히 잘 쓰잖아요.


저는 이런 호칭이 남편 전도에 전혀 도움이 될 수가 없다고 생각을 해요.

지금은 내 남편이 하나님 모르지만, 복음을 듣기만 하고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남편도 입술이 열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날이 올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가능성의 형제의식’을 가지고 내 남편을 대한다면

복음 전도의 시기는 훨씬 더 앞당겨질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남북한의 50년 분단을 극복하고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형제의식이라고 생각을 해요.

주께서 우리 남북한, 이땅에 살고 있는 모든 동포들에게

다시 한 번 진정한 이 형제의식의 회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2. 섭리의식

 

두 번째로 저는 남북한이 민족의 새로운 화해를 위해서 필요한 의식이 있다면

그것을 섭리의식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과 화해가 가능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그가 겪어왔던 상황, 그가 당했던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였습니다.

 

요셉은 분명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해프닝,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믿은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신앙,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이 신앙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여러분! 이것은 국가적으로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괴로운 일을 당할 때 아픈 일을 당할 때

누가 나를 아프게 만들었는가?

우리가 그 초점을 상대방에게 계속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은 상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지나간 해에 저도 개인적으로 좀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알고 있는 분이 계시지만.

그러나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 저를 지배하고 있었던

그리고 이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이 이 사건을 내게 허용하셨다면 나는 여기서 렛슨을 받겠다.

하나님 어떤 의미에서 이 일을 허용하셨습니까?

이랬을 때 그 고통을 가한 사람들을 저는 용납할 수가 있었습니다.

용서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손을 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이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롬8:28)

이 모든 고통스러운 것, 우리가 상처를 받고 있는 것,

이 아프고 괴로운 상황, 이 모든 것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섭리 신앙 혹은 섭리 의식, 하나님의 섭리를 의식하는 믿음입니다.


민족의 드라마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끝에 가서 봐야 돼요.

끝이 아름다우면 모든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쩌면 50년의 분단의 비극이 우리 민족사에 더 유익한 플러스로 작용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달리 고난의 삶을 살아왔던 이 민족,

그리고 미움을 마침내 극복하고 화해의 새 시대를 창출할 수가 있다면

여기 민족사에서 경험하는 놀라운 에너지는

저는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민족의 새로운 시너지로

이 파워가 엄청난 내일을 향한 새로운 가능성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

그 넓은 포용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3. 섬김의식


민족의 진정한 화해, 갈라진 남과 북의 화해를 위해서

우리가 가져야할 또 하나의 의식이 있다면

세 번째로 저는 그것을 섬김의 의식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지금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만은 한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스포츠 이벤트가 벌어질 때 우리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제일 흥분하는 것이 한일전 말고도,

북한과 붙으면.. 

즉, 남북한의 게임에서도 우리가 유달리 민감했고

이것만은 꼭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들을 가족으로 생각했더라면, 형제로 생각했더라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의 둘째 아들이 만16살이 되었을 때 집에서 생일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자기 친구들을 초청했어요.

그래서 집 안에 가득히 둘째 아들 친구들이 저희 집에 모였습니다.

생일 파티가 한참 무르익어가고 있었습니다.

 

얘기도 하고 피자도 먹고 케익도 먹다가, 갑자기 우리 둘째 아들이 벌떡 일어나더니

저한테 '아빠, 나하고 팔씨름하자'며 저한테 도전을 했어요.

그래서 자기 친구들 관중 앞에서 우리는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려놓고 팔씨름을 했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기분 나빴을까요, 기분 좋았을까요? 기분 좋았습니다.

 

저는 게임에 지고도 너무 너무 행복했어요. 왜 그랬을까요?

'아, 이제 내 아들이 이제는 컸구나. 그래서 팔씨름을 나한테 이길 만큼 이렇게 성숙했구나.'

내 아들의 성숙을 확인하고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팔씨름을 할 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제가 패배하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제 속에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한 패배였습니다. 그것이 가족이에요. 그것이 형제입니다.


▲강한 자가 돕습니다

이 도움은 어디서부터 먼저 시작이 될까요? 저는 강한 자가 먼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다 강한 자가 먼저 도와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여성들을 아주 존경합니다. 마누라를 필두로 해서.

왜 그런 줄 아세요?

성경에 보시면 창세기에 그 아내를 표현할 때

하나님이 아담을 위해서 아내인 하와를 '돕는 배필'로 지었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어떤 여성분들은 스스로 싫어하더라구요. 왜 우리만 돕는 자냐?

그러나 아셔야 할 것은 <강한 자가 도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돕는 자, Helper, 이 단어를 연구해 보면 흥미롭습니다.

이 '돕는 자'란 단어가 제일 많이 적용된 분이 하나님이에요.

시편에 보시면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요... 이런 구절이 무수히 나옵니다.

 

하나님이 약자예요? 하나님이 강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성을 강하게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이 남성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돕습니까? 밥 해주고, 빨래 해주고, 아기 낳아주고, 도와 주고...

강한 자가 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울 수가 있어야 새로운 역사가 창출될 수가 있습니다.

 

▲요셉은 강하니까, 형제들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요셉은 기쁘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곳간을 열어 자기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마침내 자기 형제들로 하여금 이집트에 데려와 같이 살도록 배려하지 않습니까?

70명이 처음에 내려와요.

그러나 나중에 애굽 땅을 다시 떠날 때는, 200만 이상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그 당시 이집트는 세계의 강자이었는데

이집트 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했던 델타의 삼각주 근처에 있는 고센 땅,

거기에 이스라엘 민족들이 거했는데,

거기서 이집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들은 국력을 키웠습니다.

그래서 '고센 땅은 이스라엘 민족사에 인큐베이터였다' 라고 성경학자들은 말합니다.

 

요셉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들은 다시 국력을 키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갑니다.

섭리를 받아들였고, 그리고 섭리의 자리에서 요셉은 할 수 있는대로 형제들을 도왔습니다.

그리고 민족은 새로워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독일의 통일에서 배울 수 있는 렛슨이 바로 그게 아닙니까?

서독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먼저 도왔어요? 강한 자가 도왔습니다.

얼어 붙었던 동독이 차츰 차츰 그들의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일의 통일사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 이 서독의 교회가, 동독을 도우는 일에 앞장설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두 번째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는 한 북녘 땅의 당원과의 대화를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람들 여러 사람 있으면 정치적인 이야기말고는 별로 솔직히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일대일로 거리에 남겨지게 되면 상당히 자기 진심을 마음을 열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런데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우리도 알아요. 기독교인들이 참 좋은 분들이란 것을 우리도 알아요.

우리는 기독교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바꾸고 있습니다.

조국(북한)이 어려울 때 누구보다도 달려와서 사심없이 도우려고 하는 분들은

다 기독교인들이거든요."

 

실제로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지금처럼 이 교류가 활성화되기 그 이전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도 혹은 흩어진 우리 한민족 가운데

북녘 땅의 문을 노크하고

상당히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저는 한국 교회의 시각에서 우리가 먼저 앞장서서 북녘 땅을 돕는 일에

좀 더 적극적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후략)

 

<인터넷 설교 스크랩, 연도 정확히 알 수 없음.                  [주제별 분류] 시사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