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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이 오면 벌벌 떠는 이유 2155

LNCK 2009. 10. 29. 13:09

◈풍랑이 오면 벌벌 떠는 이유              눅8:22~25               09.10.04.설교녹취



떠는 이유1.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기 때문


눅8:22, 하루는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저희에게 이르시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매 이에 떠나


예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곤하셨는지, 배에서 곧장 주무셨다.


배가 호수 한 가운데 왔을 때 즈음에, 풍랑이 내리쳤다.

그러자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그리고 급히 예수님을 깨웠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대  :24


예수님은 풍랑을 꾸짖어 잠잠케 하신 후에, 제자들은 나무라셨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25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삶이 몹시 불안하다.

우리 삶/가정/사역에 풍랑이 생길 때,

우리가 불안해서 떠는 이유는

그 삶/가정/사역을 시작할 때, 또는 살아가는 중에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다. 본문의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와 같은


그런데 풍랑이 휘몰아치면, 그래서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이 연약한 신자들은

‘약속의 말씀’을 붙잡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을 것만 겁을 내서 패닉에 빠진다.


그러므로 지금 내 삶에 불안감이 있으면,

내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내 믿음을 굳세게 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묵상 생활이 헤이해지면.. 반드시 믿음이 흔들리게 되고

그것은 삶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여러분, 지금 ‘환경’ 때문이 아니라, 실상은 내 ‘믿음’의 문제이다. 그래서 불안하다.

제자들이 ‘말씀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 있었다면, 풍랑을 보고 떨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예수님이 정하신 목적지인 호수 건너편에 도달할 것을 믿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이 이루신다.

그 계획에 동반자로 초청된 내가

일평생 벌벌 떨며.. 그 계획을 이루어 갈 수도 있고

주님을 믿으므로 일평생 담대하게.. 그 계획을 이루어 갈 수도 있다.

결국은 내 ‘믿음’의 문제이다. 


▲여러분, 지금 예수님이 내게 지시하신 목적지(호수 건너편)가 어디인가?

우리 각자가 일생에 받은 개인적 사명,

우리 공동체가 받은 공동체적 사명,

혹은 ‘금년’에 내가 받은 ‘레마의 말씀’ 등

우리 각자에게도 어떤 ‘호수 건너편’의 목적지가 있다.


그런데 풍랑이란 것은.. 항상 치게 되어 있다.

갈릴리 호수에 별안간 풍랑이 일어나듯이

우리 삶에도 별안간 광풍이 밀어닥치게 되어 있다. 그게 삶이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말씀하셔 놓고, 안 이루어진 일이 있는가?

주님이 약속해 놓고 잊어버리셔서, 그냥 공空약에 그친 일이 있는가?

당연히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으로.. 제자들은 믿어야 했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지시하신 목적지’(호수 건너편)를 다시 살피게 되시기 바란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반드시 그대로 된다.

풍랑이 쳐도, 물에 빠져서 죽지 않는다. ‘호수 건너편에 가도록’ 되어 있으니까!

내가 예수님께 받은 말씀은 반드시 현실이 된다.


▲주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법

우리 각자가, 기도하는 중에, 성경을 읽는 중에,

또는 설교를 듣거나, 다른 사람의 대화를 듣는 중에 

어떤 ‘주께 받은 말씀’, 소위 ‘레마의 말씀’을 받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주의 음성인지/아닌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경험에서 오는 답은 이렇다.


주께 받은 말씀이면.. 계속 기도가 나온다.

그 말씀을 가지고 몇 달은 기본이고, 몇 년 동안, 혹은 일평생 기도하게 된다.

까먹으려고 해도, 안 까먹어 진다.


그런데 ‘주께 받은 말씀’이 아니고, 내가 ‘자체 생산한 말씀’이면

그 말씀을 가지고 기도해도.. 오래 못 간다. 며칠 하다가 중단하고 잊어버린다.


그래서 ‘주께 받은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동안

풍랑이 찾아오는데, 그 때 믿음으로 이기고, 불안에 떨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호수 저편으로 계속 배를 저어가야 한다.


▲그런데 초신자는

‘나는 아예 예수님께 받은 말씀이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교회를 10년 다녀도, 건성으로 다닌 사람도, 똑같이 고백한다.


그래서 우리가 큐티를 매일 해야 하고,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개인적인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그래야 그 받은 말씀을 목표로 삼아서, 내 인생항로를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바울이 로마로 항해하는 중에, 유라굴로 광풍이 대작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자기가 로마에 갈 줄을 분명히 알았다.

주님이 ‘밤에 바울 곁에 서서’ 그 사실을 재차 확인해 주셨다. 행27:23

그러니까 풍랑이 일어나도, 그 폭풍이 바울 일행을 죽이려고 달려들어도

바울은 안심하는 것이다.

진짜 어떤 사람의 표현대로 ‘오히려 롤러코스트 타듯이 풍랑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음성’을 못 듣는 사람, 못 믿은 사람은 이렇게 나온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행27:11


물론 상식적 차원에서는, 전문가인 선장과 선주의 말을 우리가 들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은, 종종 상식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지만 그것을) 초월한다.


여러분,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 머물면서, 언제나 전문가의 의견만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대로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상황에 관계된, 모든 말씀을 하시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러나 꼭 필요한 상황에, 꼭 필요한 말씀은 해 주신다. 인도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 해 주시는 말씀은 들을 필요가 없고,


우리는, 주님께서 해 주시는 말씀만 잘 들으면 된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듣는 마음/묻는 자세>이다. 그것마저도 없으면 안 된다.


▲하나님이 출애굽을 명하셨으면.. 반드시 그대로 된다. 모세는 그것을 믿었다. 아니, 믿음이 생긴다.

아무리 바로가 백성을 풀어주지 않아도,

아무리 홍해가 가로막고 있어도,

아무리 광야 길 행진이 뙤약볕에 고되어도

아무리 광야에 물이 없어도..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명하신 일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저절로 생긴다.

 


◑이유2.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기 때문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가 믿음이 없다’고 꾸짖으셨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허둥대고 난리법석을 떨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허둥대고 난리법석을 떨고 있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들이 믿음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롬10:17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신 것은

롬10:17절에 의하면,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아서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호수 건너편으로 가자)을 듣기는 들었는데,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말씀을 듣기는 들었지만..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안 생겼고,

믿음이 안 생기니까.. 불안해서 벌벌 떤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은.. 아예 안 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눅8장에서.. 예수님은 계속적으로 <말씀을 귀담아 들을 것>을 반복해서 강조하신다.


8:8,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의 말씀을 다 들어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실제로 듣게 된다는 것이다.


8:9절부터, 예수께서 길가/돌짝밭/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를 말씀하셨는데,

그들도 모두 ‘말씀을 들은 자들’이었다. 안 들은 게 아니고, 말씀을 들었다.

: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생의 염려와 재리에 기운이 막혀


이 3가지 밭은.. 말씀을 들었지만.. 결국은 안 들은 것과 똑같았다.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래서 말씀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21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이렇게 눅8장에서, 예수님은 ‘말씀 들음’에 대해 계속적으로 강조하신다...


▲이어지는 눅8장의 오늘 본문에도, 제자들이 풍랑 만나 야단법석을 떤 것은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말씀을 듣는 문제였다.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는 말씀을 귀담아 들었다면

그래서 ‘호수 건너편으로 우리는 갈 것이다’는 믿음이 생겼더라면 롬10;17

제자들은.. (약간 겁이 났어도) 예수님처럼 곧 평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믿음이 없으니까.. 벌벌 떨었고.. 예수님은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던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많은 말씀을 들어도.. 본문의 제자들처럼 귀담아 듣지 않으면

믿음은 안 생기고.., 풍랑이 닥치면 벌벌 떨게 된다.


오늘도 우리가 많은 말씀을 듣지만,

오직 귀담아 듣는 말씀만 .. 내게 믿음이 생기게 하고

그래서 내게 믿음이 생길 때에만 .. 풍랑이 와도 불안해서 떨지 않는다.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부부싸움 중에 깨달은 명언

제가 12년차 결혼생활을 했을 때,            (지금은 23년차)

(부부싸움을 하면 안 되지만)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는데,

나도 모르게 했던 ‘위대한 말’이 있었다.

지금도 제가 잊을 수 없는 명언이다.

그 때 우리 집 근처의 카페에 가서, 제가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지난 12년 동안 함께 고생하며 했던.. 그 수고와 땀과 노력들..

그리고 그렇게 사랑했던 그 많은 시간들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지금 그렇게 행동하지 마!” (청중들 웃음)

명언 아닌가요? (재차 웃음)


제 부부싸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섬길 때, 많은 경우, 우리가 이렇게 행동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동안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던 모든 것들이

마치 무의미했다는 듯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주님께서 그동안, 10~20~30년 동안 내게 보여주셨던 모든 은혜와 사랑들이..

마치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우리가 그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제만 생기면 패닉에 빠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책망하신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오늘 우리가 이런 책망을 듣는 것은, 말씀의 홍수 시대에,

많은 말씀들을 듣지만, 마치 제자들처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 때문이다.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그런데 예수님 지금 주무시는 겁니까?’

만약에 오늘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가 평소에 말씀을 흘려버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마치 과거에 예수님이 말씀했던 그 무수한 말씀들, 보여주셨던 은혜와 사랑,

그것들이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는 지금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히 몰랐던 제자들.. 그래서 벌벌 떨었다.


눅8:25, (예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니) 저희가 두려워하고 기이히 여겨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고 하더라


‘기이히 여겨’,

‘저가 뉘기에’ ..

이런 말들은, 제자들이 예수님과 늘 함께 지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극명히 드러내 보여준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자세히 모르면.. 풍랑이 치면 두려운 것이다.

예수를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초신자들은.. 이럴 수 있다.

제자들도 아마,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예수가 누구신지 정확히 몰랐을 것이다.

그래서 마구 두려워했을 것이다.                                                                       ▣ 고난의 신학, 영광의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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