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에 이르는 열매 요4:34~36 09.08.30설교스크랩, 축약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4:36
◑일work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방해 받는 것이, 우리의 일
영성신학자 헨리 나우웬 신부가 노틀담 대학교에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그는 예고도 없이 불쑥 연구실로 찾아와서,
자기 스케줄을 흩트려 놓는 방문자들로 인해 자주 짜증이 났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 날도 어김없이, 예고에도 없는 방문객들로 인해
하루 일정이 완전히 망가져.. 매우 불편한 심기로 교정을 걷고 있었습니다.
인상을 구기고 걷는데, 친구 교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묻습니다. “아니, 무슨 일이 있나? 자네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군.”
헨리 나우웬이 대답합니다.
“아침나절에 예고도 없이 몇 사람이 찾아와 하루 일정이 완전히 망가졌다네.”
그러자 그 친구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방해받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우웬은 순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계획과 일정에 따라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때 이후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는
자신의 일정을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일이 아니라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방해 받는 것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예고도 없이 찾아올 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나에게 보내주신 사람이라 믿고, 기쁘게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람들을 맞다 보니,
그것이 바로 전도요, 목회임을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일을 너무 중요시하는 것은 불신앙이 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읽은 나우웬의 이 일화는 저에게 크게 공감이 되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는 제 스스로 세운 일정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오랜 습관이다 보니, 그렇게 사는 것이 제게는 편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일정에 방해를 받으면 심기가 불편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함부로 남의 영역에 침입하여 일정을 흩트려 놓는 사람에 대해 화가 난다면,
그는 틀림없이 ‘사람’보다 ‘일’을 우선하는 습성이 있고
지금도 그 습성은 완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 태도가 얼마나 불신앙적인지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주님으로 모셔 들였다면,
나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저의 세계 안에서 주인이 되도록 해야 옳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 불쑥 찾아오면,
주께서 나에게 보낸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사람에 대해 화를 낸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셈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불신앙인 셈이지요.
하나님은 때때로 낯선 사람들을 통하여 제가 짠 일정에 개입하기도 하시며
그 일정을 흩트려 놓기도 하십니다.
제가 짠 일정보다 더 기가 막히는 계획이 그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방해받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받아들이면
제가 기대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신비한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을 위한 일입니까? 나를 위한 일입니까?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때로, 우리는 방향도, 목적도 잊어버린 채
오직 일work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몰두하고 질주하곤 합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가족도 희생시키고, 친구와 이웃도 희생시킵니다.
그리고 결국은 자기 자신까지도 희생물로 만듭니다.
목적 없는 일, 방향 없는 일에 몰두한 결과는 늘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보다 사람을 앞세우도록 힘써야 하며,
일을 하면서 ‘이것이 사람을 위한 일이냐?’를 질문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삶의 초점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 거두기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 요4:34
사람을 살게 하는 양식은 밥과 빵과 고기만이 아닙니다.
끼니마다 산해진미로 배를 채우고도 허기를 느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이것 때문에 산다!’는 뿌듯한 보람이야말로.. 나를 살게 하는 양식입니다.
보람 있는 일을 할 때는.. 음식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보람이 없어서 생긴 허기를.. 우리는 음식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어디, 산해진미로 그 허기가 채워지던가요?
저도 여러 번 경험해 본 일이지만,
삶의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얻은 포만감은
오히려 삶을 더 권태롭게 만들지 않던가요?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보람을 안겨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은 무엇을 통해 삶의 보람을 찾으십니까?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된다고 하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서 밭을 보아라. 이미 곡식이 익어서, 거둘 때가 되었다.
추수하는 사람은 품삯을 받으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인다... 요4:35~36
예수님의 삶에 보람을 안겨 주었던 일은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일이었습니다.
즉, 전심으로, 진심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고, 마음 다해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함께 웃고 울어주며, 당신에게 있는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삶의 보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맡긴 일의 초점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분은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자신의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세계 안으로 침범하여 들어오는 사람 한 명, 한 명을 전심을 다해 만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친구 교수의 말대로, ‘방해받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본질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매일 매일 씨름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을 전심으로 만나기 위해 ‘방해받는 것’을 환영할 뿐 아니라,
사람을 찾아 만나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일정을 스스로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만나고 제대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이며 보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세운 성 안에 갇혀서 고립되어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홀로 자신의 일정과 계획과 기호대로 사는 삶이.. 참으로 안전하고 편안해 보이지만,
실은 우리 자신을 독방에 감금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진실하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맺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고갈되지 않는 보람이 우리 삶에 들어찹니다.
▲늘 기회를 엿보십시오.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며 살고 싶다면, 그런 보람을 양식으로 먹고 살고 싶다면,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뜻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신 것이다’라는
전제로 살아가야 합니다.
나와 함께 50년을 살고 있는 배우자도.. 뜻이 있어서 나에게 붙여주신 사람이듯이,
공항 대기실에서 잠시 옆 자리에 앉았던 사람도..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보내 주신 사람이고,
직장에서 자주 만나는 고객도 실은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보내 주신 사람입니다.
내가 적극적으로 찾아가 만난 사람이든, 우연히 마주친 사람이든,
예고도 없이 나를 찾은 사람이든,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께서 뜻이 있어서 나에게 붙여준 사람입니다.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신 예수님
이 점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십니다.
그분이 사람들을 만나신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그분이 이 같은 삶의 진실에 충실한 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사람조차도 소홀히 하지 않고 전심을 다해 만나주셨던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만들기 위해
그 사람을 붙여 주셨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계속 이어지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요4:1~30, 4:39~42
▲지난 주간, 한국을 방문하고 온 어느 교우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허락을 받고 여러분과 나눕니다.
집사님은 한국 방문 중에 어느 신앙 집회에 참여하여
그동안 사모하던 성령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성령의 강한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늦은 밤, 집회가 끝나고 바깥에 나오니 비가 오고 있었고,
집사님은 급히 택시를 잡아탔습니다.
택시 안에서 자리를 잡고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자
30대 초반의 젊은 택시 기사가 집사님에게 말을 던집니다.
“껌이 향기가 좋은데, 혹시 하나 주실 수 있습니까?”
그 때 그분은 딸기 향이 나는 껌을 씹고 있었습니다.
집사님은 “어머, 어쩌죠? 남은 게 없는데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기사가 응답합니다.
“됐습니다. 저는 재수 없는 놈이거든요. 오늘 하루 종일 재수가 없었는데,
껌 하나 얻어먹을 재수도 없군요. 이렇게 재수 없는 놈 보셨어요?”
집사님은 기사의 반응에 당황했습니다.
“아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혹시 있을지 모르니.”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뒤져 보았더니,
마침 껌 하나가 물건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껌을 건네며, 집사님은 “자, 이거 보세요. 기사님은 재수가 없는 분이 아니세요”
라고 위로했습니다.
껌을 받아 입에 넣으면서 그 기사는 계속하여 신세 한탄을 합니다.
자신은 그동안 내내 재수가 없었다고...
할아버지도 농약을 먹고 자살했고, 아버지도 농약 먹고 자살했으며,
형마저도 몇 년 전에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젊었을 때 당한 사고 때문에 자신은 택시 기사 밖에는 할 일이 없다고...
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큰 병에 걸려 고생했었고,
지금은 아내가 정신병으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시키지도 않은 말을 술술 풀어내면서 집사님에게 묻더랍니다.
“아주머니, 이렇게 재수 없는 놈 보셨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집사님의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그 기사를 자신에게 붙여 주셨다는 믿음이 들었습니다.
삶을 비관하며 청년기를 살아왔고
스스로를 ‘재수 더럽게 없는 놈’으로 규정하고 암흑 같은 인생을 살던 그 사람에게
성령께서 그 밤에 자신을 보내셨다고 믿어졌습니다.
집사님은, 스스로를 저주하며 살고 있는 그 젊은이에 대한 긍휼한 마음에 사로잡혀
대화를 나누었고, 목적지에 당도했을 때 그 기사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그 청년은
‘재수 없는 놈’이 아니라 ‘재수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
교회에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노라고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집사님은 헤어지면서 그 기사의 이름과 주소를 적어 가지고 내렸고
지금까지 매일 그분의 이름을 불러가며 중보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믿음의 뿌리를 내리고 온전하게 자라가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던지는 진실한 관심과 애정은
때로 이 같은 놀라운 이적을 만들어 냅니다.
이 같은 일은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 같은 보통 사람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자꾸 ‘큰 일, 위대한 일’에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보내지는 ‘작은 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간과하기 쉽습니다.
몇 년 전에 헨리 나우엔의 글(서두에 소개)을 읽고 대오각성 한 다음부터,
저는 일보다는 사람을 우선하며,
누구든지 내게 오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사람으로 알고
전심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대하여 ‘영생에 이르는 열매’가 되도록 하기 위해
그 동안 나름대로 힘써 왔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말하자면, 저는 요즈음도 매일 이 문제와 씨름합니다.
사람보다 일을 더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내 앞가림을 하기에만 몰두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만날 때, 내면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요즈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기회들을, 얼마나 많이 흘려보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무릎 꿇습니다. 그래서 매일 회개합니다. 그래서 매일 은총을 구합니다.
.....................관련 글, 지난 번 발행분 속에서 발췌......................
◑하나님의 무력한 손 .... 헨리 나우웬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손은
역사의 운행을 주관하는 능력 많은 손이 아니라,
연약한 인간들이 돌봄을 갈구하는 무력한 손이다.
나는 그들의 도움을 갈구하는 손에서, 하나님의 무력한 손길을 느낀다.
나는 세상 모든 것에서.. 나를 향해 뻗은 하나님의 무력한 손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보면 볼수록.. 좀더 분명하게 그 손들은 더 가까워 보였다.
음식을 구하는 가난한 이들의 손,
그냥 같이 있어 주기를 요구하는 외로운 사람들의 손,
안아 주기를 원하는 아이들의 손,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는 병자들의 손,
이 모든 손은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기다리며
(골고다 길에서처럼) 쓰러져 계신 예수님의 손이다.
그런데 나는 항상 캘커타, 카이로, 혹은 다른 머나먼 곳에서
이렇게 구걸하며 내미는 손들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바로 내가 사는 공간 안으로 뻗은 손들을 보지 않으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내 양손을 바라보며 묻는다.
‘너희들은(자기의 두 손) 오늘, 주변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평화, 소망, 용기, 확신을 조금이라도 가져다주었니?’ <헨리 나우웬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헨리 나우웬
‘해야 할 일을 하는 것’과 (소명)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을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욕망)
우리의 수많은 욕망들은 우리 눈을 가려져,
참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참된 행동이란 소명을 완수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일할 때나 여행할 때,
책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혹은 가난한 사람을 돌볼 때,
아니면 지도자로서 리더십을 발휘하거나,
돋보이지 않는 평범한 일을 수행할 때나, 그 외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할 때
언제든지 우리는 “나는 무엇을 가장 하고 싶어 하는가?”가 아니라 (욕망)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소명)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소명에 순종하여..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명을 거부하여..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다.
마찬가지로 보잘 것 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소명에 따라..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소명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뜻(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면 (소명)
우리가 하는 일중에 상당 부분은,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소명적 일이 아니라 욕망적 일이라는 뜻)
우리가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일은 (소명)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주는 일이다...
과로하고 지치고 탈진해 가며 하는 행동들은 (비소명, 또는 욕망)
하나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신다. (소명)
침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는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소명)
기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윗 글 출처:「나우웬과 함께하는 아침」IVP에서 글번호 1, 2번
이 책은 번역이 잘 된 것 같습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쉽군요...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나는 수 십 년 동안 평생 예수 믿으면서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아래 말씀을
헨리 나우웬은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하는데...)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나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마20:22
예수님이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그분은 나의 사제직과, 인간으로서 내 삶의 핵심을 건드리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수년 전 내가 손에 아름다운 성찬의 잔을 들었을 때 (성직자의 영광을 누릴 때)
그 질문에 내가 대답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 때 온갖 생각과 이상으로 가득 찬 새로 서품된 신부이었고,
삶은 온갖 약속으로 풍요롭게 보였다.
나(헨리 나우웬)는 그 잔을 너무나 마시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몇 해가 지나서 오늘, 장애를 지닌 이들과,
그들의 도우미들이 둘러앉은 (초라하고 불쌍하게 보이는) 식탁에 앉아서
그들에게 포도주가 담긴 유리잔을 돌리면서
똑같은 그 질문은 나에게 영적인 도전으로 다가온다.
‘나는, 예수가 마셨던 잔을 마실 수 있는가?’
나는 수년 전 어느 날, 예수의 이 질문을 성찬식 때 읽었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 아침 8시 30분경, 갑자기 “너는 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라는 말씀이
사냥꾼의 날카로운 창처럼 내 마음을 꿰뚫었다.
나는 그 순간 -영감의 섬광으로-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 굳어진 마음을 부수고 깨뜨리며,
삶의 연약한 부분을 드러내는 힘을 갖고 있는 질문이다.
“나는 이 잔을 다 마실 수 있는가?
그 잔을 남김없이 마시고 비울 수 있는가?
나는 인간이 겪는 모든 슬픔과, 기쁨을 다 맛볼 수 있겠는가?
삶이 무엇을 가져오든지 간에, 다 받아들이며 살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것이, 내가 직면해야 할 실존적인 질문들임을 깨닫는다.
▶그날 아침 성찬식 때, 그 말씀 마20:22절을 읽은 후,
나는 내 앞의 식탁 위에 놓여 있는 큰 유리잔 하나를 무의식적으로 움켜쥐고서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설교했다.
“우리는 우리 손에, 내 삶의 잔을 들어 올릴 수 있을까요?
그 잔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있도록 높이 들어올리고,
마지막 남은 것까지 다 마실 수 있을까요?
잔을 마신다는 것은, 먼저 잔을 잡고 들어올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잡고 들어올리며(십자가 함의)
그 잔을 다 마실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처럼, 높이 들어올려진다는 것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알려진다,
또는 모두에게 조롱받는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다.
오늘날 개인적 프라이버시를 끔찍하게 존중하는 사회흐름과는 정반대이다.)
그 아침의 간결하고도 단순한 성찬식 이후 오랫동안
나는 그 예수님의 질문을 계속 듣고 있다.
“내가 마시려고 하는 잔을 너도 마실 수 있느냐?”
그 질문이 나를 편안치 않게 만든다.
지금 나는 그 질문과 함께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헨리 나우웬「이 잔을 들겠느냐」의 일부를 발췌, 펀 글, 편집 ▣ 꿈, 비전, 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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