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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유산을 자녀에게 2178

LNCK 2009. 11. 11. 21:50

◈신앙의 유산을 자녀에게 상속해 줍시다.     고전7:14      설교 편집



내가 오늘 내 세대에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외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 부모의 신앙은, 자식의 신앙으로 대물림 됩니다.

부모의 신앙적 장/단점을.. 자식이 고스란히 유전처럼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주님을 바로 섬겨야 하는 이유 중 중요한 한 가지는

온전한 믿음생활을, 자녀/손자에게, 상속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신앙 성장의 4단계


믿음은 한 번 쥐고 나면 영원히 그대로 있는 물질이 아니라,

조건과 환경에 따라 자라가는 생물(유기체)과 같습니다.

믿음이라는 생물이 자라는 단계는 대략 다음과 같이 4단계로 볼 수 있습니다.


▲1. 첫째는 ‘영접의 단계’ 입니다.            stage of acceptance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으로 개인적으로 영접하면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고,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우리의 영혼은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죄가 모두 용서 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으며, 내가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을 얻은 것처럼 기쁘고 감사합니다.


▲2. ‘내적 싸움의 단계’입니다.              stage of inner struggle

주님을 영접하고 나면, 내면에서 싸움이 시작됩니다.

성령 안에서 지어진 속사람이 옛사람과 싸움을 시작합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끌고, 옛사람은 욕심과 죄로 이끕니다.

믿음이 자라지 못한 상태에서는 속사람이 번번이 옛사람에게 집니다.

하지만 믿음이 자라면서 속사람이 이기는 확률이 커집니다.


성도가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 내적 싸움의 단계에서 늘 머무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 단계를 어느 정도 빨리 뛰어넘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내적 싸움은, 죽을 때까지 있습니다.

그러나 대강 큰 것은, 어느 정도 해결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외적 성화의 단계’입니다.               stage of outer sanctification

속사람의 다스림이 강해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죄의 습관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납니다.

언어생활에, 사람 대하는 태도에, 돈 씀씀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런 외적 성화는.. 바리새적인 외식을 뜻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2단계 내적 싸움/내적 변화의 자연적인 결과로서 나타나는 외적인 성화입니다.


직장 생활을 하는 태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믿음의 변화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합니다.


많은 이들의 믿음의 성장이 안타깝게도 여기서 끝나버립니다.

하지만 한 단계가 더 있습니다.


▲4. ‘헌신의 단계’가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stage of dedication

나에게 주어진 축복을 ‘영혼을 구하고 키우는 일’을 위해 사용하는 단계입니다.


믿음이 네 번째 단계에까지 자라면, 우리는 영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우리의 소유라고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것임을 인정하고,

나의 시간도, 물질도, 경험도, 지식도, 심지어 생명까지도 하나님께 내어 드려,

영혼을 구하고 키우는 일을 위해 기쁘게 사용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전에 맛보지 못했던

신비한 기쁨과 행복을 비로소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내가 4번째 단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자녀에게 이 수준을 상속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쉽게 이 단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신비와 성령충만의 기쁨을 날마다 체험할 것입니다.

오늘날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대개의 경우, 훌륭한 믿음의 부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신앙이 1~2단계에 그치면,

자녀 세대에서 4단계에 도달하기는 해도, 매우 어렵고 험난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단계에 이르면, 그 다음 단계는 무엇입니까?

그 다음에는, 네 단계 모두에서 더 깊어지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계속 깊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판단하기에 믿음의 4단계 중, 어디에 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단계에 와 있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이만하면 됐다!”하고 자만하고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2가지 영적 전립선


어느 의사분의 말씀을 들으니, 인간의 장기 가운데

약효가 가장 잘 미치지 않는 곳이 남성의 전립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에 염증이 생기면, 항생제 투약 기간을 2배로 늘려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 중에도, 믿음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이 두 영역에서 변화가 나타나면, 진실로 영성이 깊어졌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전립선은.. 물질에 대한 태도입니다.

물질이야말로 우리의 ‘영성의 전립선’과 같습니다.

물질에 대한 우리의 욕심은 참으로 뿌리 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성숙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점점 더 밝히 본다는 뜻이며,

삶의 본질이,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관계에 있음을

점점 더 굳게 믿습니다.


어떤 아이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엄마가 5백 원짜리 동전을 두 개 쥐어 줍니다.

“하나는 헌금 하고, 하나는 과자 사 먹어라.”


아이는 동전 두 개를 손에 꼭 쥐고 노래하며 예배당으로 뛰어갑니다.

그러다가 그만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집니다.

순간, 손에 쥐었던 5백원 동전 하나가 떼구르 굴러 하수구에 빠져 버립니다.

그 동전을 바라보면서 엎어진 아이가 소리칩니다.

“아이쿠, 내 헌금할 돈이 하수구에 빠졌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이게 비단 어린아이의 얘기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하면서도, 물질에 대한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재점검 받아야 합니다.


영적/신앙적 성장의 결과는

마땅히 물질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그 변화가 너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서두에서 ‘전립선’ (약효가 몸속에서 맨 마지막에 미치는 곳)이란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에 있어서 전혀 변화가 없다면,

내 믿음이 진실한지 어떤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내 영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4년 전에 참석했던 Spiritual Formation Forum에서

World Vision의 첫 번째 여성 의장이었던 Roberta Hestenes 박사가 한 말이

아직도 제 귀에 메아리칩니다.

“가난의 문제에 대한 태도에 변화를 만들어 내지 않는 영성 운동은..

그 어떤 형태의 것이든 속은 것이거나 속이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개인적으로도 진실이요, 교회적으로도 진실입니다.

영적 성장에 대해 간절하다면,

물질 문제에 있어서 태도를 달리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수입이 증가하고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집도 커지고 자동차도 고급스러워지고 휴가는 점점 더 사치스러워지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뚜렷한 변화가 없다면,

믿음의 맥을 한 번 짚어볼 일입니다. 죽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적으로도, 사회의 가난의 문제에 대해 뭔가 구체적인 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속고 있는 것이거나,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전립선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한 관심입니다.

믿음이 깊어지고 성숙해지면

당연히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자라나야 합니다.


믿음이 깊어진다는 말은, 예수 안에서 사귐이 깊어진다는 뜻입니다.

사귐이 깊어지면.. 그분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분의 아픔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즉, 한 사람이라도 더 ‘영혼에 이르는 열매’가 되도록 돕는 일에

평소에 관심을 가지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원리가 작동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기심으로 물들어 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라면서 사람을 냉정하게 대하도록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선천적 이기심과 후천적 무관심을 고치는 일은

마치 말기 암세포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믿음으로는 그 약효가 미치기 어렵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이 두 가지의 ‘영적 전립선’을 검토하면서

우리의 영성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가늠해 보십시다...



◑‘가정사는 곧 세계사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무엘상에 나타난 ‘엘리의 집’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난 게 있었습니다.

펄 벅 여사가 쓴 소설「대지」의 끝 장면입니다.


▲왕룽은 거칠고 험한 세파를 다 이겨낸 끝에 땅을 얻습니다.

이제는 남부럽지 않을 만큼 큰 땅의 소유자가 됩니다.

그가 이렇게 땅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에겐 땅에 대한 확실한 생각이 있어서였습니다.


인간의 모든 길吉과 흉凶은 땅을 사고파는 데서 생겨나는 것

이란 것을 그는 간파한 것입니다.       ※이 말이 이 글의 주제가 아닙니다. 그냥 소설 내용

그래서 ‘땅을 모으되 절대로 팔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일평생 지켜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그런, 땅에 대한 사랑을

아들들에게도 누누이 밝히고, 평소에도 땅을 되파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흉년이 들자.. 왕룽은 자기의 원칙을 깰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가족이 먹고 살 만큼만 조금 땅을 팝니다.


그리곤 경작에 더 정성을 쏟습니다.

그의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땅은 정직하기 때문에.. 자기가 기울이는 정성대로 소산을 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땅에서 거두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 소신만큼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들들이 장성하고 왕룽 자신도 기력이 점점 쇠해집니다.


시대가 바뀌기 시작해서, 그 땅에도 산업화의 물결이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왕룽은 지금의 치매 비슷한 병을 앓게 됩니다.

자기가 누군지, 누구의 아버지인지, 누구의 남편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의 이런 말년을 보면서 두 아들들은 새로운 계획을 짭니다.

시대에 맞춰.. 더 이상 농사는 짓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죽으면.. 땅을 팔기로 결정합니다.


아버지는 아직 살아 있지만, 이미 제 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일을 시행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 세월을 보내다.. 결국 왕룽은 죽습니다. 

그런데 죽기 며칠 전 왕룽은 잠깐 제 정신으로 돌아옵니다.


오랜 만에 자기 땅을 돌아보려고.. 두 아들과 함께 나갑니다.

그때 아버지는 다시 한 번 아들들에게 다짐을 받아둡니다.

‘내가 죽더라고 절대로 땅을 파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물론 아들들은 그러마고 아버지께 약속합니다.

그런 약속을 한 두 아들들은

아버지 등 뒤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피식 웃습니다.


그리고 소설은 끝이 납니다. 


▲왕룽이 자기 땅을 지키고 싶었으면, 아들들에게도 ‘땅’을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땅이 자기의 분신처럼 되도록, 땅 사랑하는 법을 알려줬어야 합니다.


자식들로 그 땅에서 직접 땀을 흘려보고, 농사를 짓도록 해봐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아버지는 땅을, 남에게 소작만 줄줄 알았지

자기 아들들에겐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어느 순간 아들들은.. 땅이 아버지의 유산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땅을 절대 팔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은

아들들에겐 비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았던 겁니다.     


▲한 가정에서 하나님의 원칙이 세워져 나가려면,

먼저 부모가 그것을 소중히 여겨 지키고,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왕룽의 가정에서나, 엘리의 가문에서나.. 우리가 받는 메시지는 같습니다. 

부모들이 먼저 신앙적인 원칙을 세우고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강하게 반복해서 교육시켜야 합니다.


자기가 아는 원칙을, 자기만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자녀가 그것을 ‘자기 삶의 철학’으로 삼을 수 있도록

부모가 먼저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디 오늘의 이 말씀을 경고나 위협으로 듣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소망으로, 기쁨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한 가정사는 곧 세계사”라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아들이 링컨이고, 딸이 마더 테레사인 것처럼 그렇게 대하시기 바랍니다.              ▣ 행복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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