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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의 고통과 기쁨

LNCK 2009. 12. 4. 08:47

https://www.youtube.com/watch?v=uwbXUdV2JBc 

 

◈해산의 고통과 기쁨     요16:21~22           인터넷설교 스크랩

 

이 설교문은.. 죽음을 ‘지브롤터 해협’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를 지나면 더 넓은 바다(영생)에 이어진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죽음을 ‘해산의 과정’에 비유하여 본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16:21~22

 

그런데 히브리서 2:15절,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두렵게 하여서

평생에 매여서 종노릇하게 한다는 말씀처럼,

우리는 그 ‘해협’을/그 ‘해산’의 순간을 넘어가기를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죽음 이전의 세계가 좋다고 하면서,

거기에 매여서 평생을 종노릇하다가

주님이 갖고 오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 한 번 제대로 태어나 보지도 못한 채

교회만 다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해산의 고통’ ... 비유로 참 많이 쓰이는 말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아기가 자궁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심리상태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신념’이나 ‘확신’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세상의 바뀜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머물던 사람이..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지

내 심리상태의 변화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심리상태의 변화를 초래하지만... 그것을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뭐냐? <내가 사는 환경과 삶의 세상, 그것을 바꾸는 것>이에요.

 

그래서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이 세상으로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의 가치관과 생활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주제 중에 하나가 ‘죽음’입니다.

지금 우리 현실의 삶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 암흑으로 덮여있는 상태에서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마치 ‘자궁 안에서의 삶’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웁니다. 왜 웁니까?

죽음 이전의 세상에서의 일 때문에 웁니다.

 

여러분이 웃습니다. 왜 웃습니까?

죽음 이전의 세상일 때문에 웃습니다.

 

왜 걱정합니까?

죽음 이전의 세상의 일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절망하는 것도, 자살하는 것도.. 죽음 이전의 세상 일 때문에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살던 우리가,

죽음 이후의 세계로부터 주님께서 문을 열고

저벅저벅 이쪽 우리의 세상으로 걸어 나오신 겁니다. 죽음 이후의 세상으로부터!

 

그러니까 죽음 이전에서 사람들이 추측만하고 있었을 그 세상으로부터

주님께서 문을 열고 이쪽 세상 안으로 나오셨지요.

 

나오셔서 하신 게 뭐냐 하면, ‘죽음 이전의 세계’에다가

‘죽음 이후의 암흑에 덮여 있던 세계’를 열어 주셨어요.

확 열어주시고 ‘죽음 이전의 세계’에 그 이후의 실체를 갖다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이제 이 세상을 살기는 사는 데, 어떤 세상이냐 하면

죽음 이후의 세계의 빛이 비춰오고 있는 동안에 이 세상을 사는,

죽음 이후의 세계와 붙어있는/맞닿아있는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예수님의 모든 천국 비유/ 영생에 대한 설교는.. 두 세상이 아니라, 한 세상입니다.

현 세상과 죽음 이후의 세상.. 두 세상이 맞닿아 있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이 없습니다. 실제로 영혼은 안 죽습니다.

다만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를 ‘죽음’이라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 살아있어도,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이 ‘죽은’사람이 많습니다.

꽃병의 꽃이 잠시 살아 있는 것 같으나, 꺾여진 꽃은 오래 못가서 말라버리듯이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의 사람은.. 지금 살아있는 것 같으나.. 오래 못간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들어야 하는데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연결된 ‘하나’라는 의미)

우리는 이 세상의 관점에서만 듣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역설의 진리’가 이해가 되지 않고,

그 결과, 항상 자기 삶은 ‘상식적 수준’으로 삽니다. 현실에 잘 적응해서 말이죠.

 

다시 말해서, 우리는 죽어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로 지금 (미완성이긴 하나) 영생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고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이긴 하나) 지금 현재 하나님 나라에/그 기쁨과 행복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설교문의 주제는,

우리들이 너무 ‘현실 세계’ 위주로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세계’와 ‘죽음이후세계’를 연결한 관점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래 비유로 설명합니다.

 

▲지브롤터 해협의 비유

지브롤터 해협은, 스페인이 있는 리베리아 반도의 남쪽과

아프리카북부 모로코의 최북단 사이에 폭 14Km의 바다입니다.

그러니까 해협(협소한 바다)이라고 하지요.

 

14세기까지 사람들은, 그 해협을 넘어가면

지구가 평면으로 돼있는데 거기서 떨어진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음과 멸망이 기다린다고 생각해서 ‘이 선을 넘어가지 말라’고 하는 말이

지브롤터 해협의 바위산에 써 있었다고 해요.

 

그래서 지중해를 주변으로 사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지중해가 세계에서 중심인 거예요.

 

그러다가 콜럼버스가 용기를 가지고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간 겁니다.

넘어가면서 ‘어~ 떨어지겠다’ 하면서 가는데.. 자꾸 가도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발견한 땅이 아메리카 대륙이고,

그 후부터 ‘대서양의 시대’가 열린 겁니다.

 

그러면서 지중해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될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아프리카의 수에즈 운하를 통해서 아시아로 향하게 되고

그리고 대서양으로 뛰어나온 사람들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항해해서

케이프타운 희망봉까지 여행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지중해가 조그만 해진 거예요.

지금의 지중해는 어떻게 돼 있습니까? 그냥 느낌이 휴양의 바다입니다.

중심이 태평양과 대서양쪽으로 옮겨져 버리니까.. 조그만 해진 것이지요.

 

얼마나 무서운 겁니까? 그러니까 지중해가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대서양이 발견되고, 더 넓은 태평양이 발견되자..

지중해는 요만한(조그만) 바다가 돼버리고 말았어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전에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몰랐습니다.

아무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가 보지 못했습니다.

 

넘어가면 끝난다. 그래가지고 이 안쪽에서만 기를 쓰고,

지브롤터 해협으로 배를 몰고 갔다가는 어~하고 돌아서곤 했던 거지요.

떨어지면 죽을까봐.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 쉽게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가는 겁니다.

죽음의 마지노선이었던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서.. 대서양 넓은 세계로!

 

▲이제 지중해는 단지 항해술 연습장이 되어버렸습니다. 미사리 조정경기장처럼!

대서양 넘어가려면 지중해에서 연습하는 거예요.

태평양 항해하려면 지중해에서 연습하고 나가는 거예요.

연습장이 돼버렸어요. 미사리 조정경기장처럼.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면 더 넓은 바다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서부터..

 

마찬가지로 죽음 이후를 모를 때는.. 죽음 이전의 이 세계가 다야. 다.

그러니까 웃어도 여기서 웃고, 울어도 여기서 울고,

기뻐도 여기서 기쁘고, 슬퍼도 여기가 끝인 것처럼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이를 악물고 생활하는데...

그게 바다 저편을 못 보니까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궁(현세를 의미)에서 나온 사람입니까?

그래서 오늘 내가, 내세를 보고/경험하고/누리고 살고 있습니까?

 

뉴스를 봤더니 엄마가 아기를 낳았는데, 신생아가 8.5kg입니다.

 

영적으로 봐서 여러분이 지금 이 세상 뱃속에서 몇 kg인지 아세요?

20kg, 30kg 이상이에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 현실 세상 속에서만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보면, ‘죽음을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얼마나 기쁜지 ‘해산의 기쁨’으로 표현합니다. 다 경험해 봐서 그 기쁨을 아시죠?

그런데 우리는 왜 해산을 싫어하는지.. 자궁 속이 계속 좋다는지요..?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요16:21~22

 

▲지금 온 성도가 원하는 게 뭐냐? 죽음 이전의 세계의 꿈을 원합니다.

죽음 이전의 세계의 비전을 원하고 있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세상을 품자!

 

그래서 주님은 ‘섬기는 자가 크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머리된 자가 크다’ (섬기는 자는 좀 모자라고)

 

그래서 주님은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자녀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악착같이 긁어모으는 자가 복이 있다.’

 

그 결과, 크리스천과 교회가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과 다를 게 하나도 없거든요.

 

아니, 악착같이 부자 되겠다는 사람, 출세하겠다는 사람이

교회로 더 잘 모이는 것 같습니다. 설교가 그런 자기 욕구를 채워주니까요.

그래서 회사에서도 보면, 교인들 중에 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건강한 자보다, 병든 자를 돌보시러 오셨습니다.)

 

▲마치는 말

서두에서 믿음은 ‘관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삶의 변화요, 세계의 변화라고 했습니다.

‘현실/지중해’가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살던 사람이

‘영생/태평양’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

이제는 정말 태평양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죠.

 

그러려면 빠져나와야 해요.

그런데 빠져나오는데 ‘해산의 근심과 고통’이 임한다는 거예요. 요16:21~22

 

죽음 이전의 세계에서는 ‘내 가족’이 최고였어요.

근데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붙으면서.. 죽음 이후의 세계가 환하게 비춰지자마자

최고의 가치관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 이전에 최고라고 생각하고, 정이 들었던 것들을, 완전히 다 떼 내지 않으면

죽음 이후의 세계가 붙어버린.. '새 세상에서의 삶'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새 세계의 새 질서에 맞게

내가 좋아하고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재정립되고

사라지고 다시 붙고 하기 전까지는.. 진정한 영생의 삶이 영위될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삶이 늘 수박 겉핥기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실 그렇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해서 다 배설물로 여긴다고!

 

여러분, 그동안 좋아하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있습니까?

 

"음, 그래도 아직은 돈이 좋지요."

“그래도 세상 재미, 자식 재미가 좀 있어야 살지요..”

그러면 영적인 변비에요. 아직도 배설물을 자기 배속에 가득 담고 있는 거예요.

 

제자들(오늘날로 치면 신자들)이 왜 아파했을까요?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스승을 잃었기 때문만 아니라

죽음 이쪽에서의 자기들의 모든 가치관에서 생각했던 가장 좋은 것들을

주님의 힘을 빌어서 얻겠다고 희망을 다 걸고 있었는데..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죽음 이전의 세계에서 이루려고 했던 모든 게 다 깨어져나가는..

아픔이 있었다는 겁니다. 제자들에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아픔을 ‘해산의 수고’에 비유하십니다.

아기가 그러는 거예요. 자궁에서 나오면서 상실감을 느끼는 겁니다.

‘아! 엄마의 자궁이 좋았는데. 양수가 좋았는데...’          *양수: 산모 배속의 물

 

이러면서 굉장히 상실감을 느끼는데.. 그건 상실하는 게 아니지요.

이 넓은 세상으로 나오려면 거기서 빠져 나와야 되는 거지요.

 

처음에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가는 사람들은, 아마 근심하고, 울고, 난리쳤을 것입니다.

아직 대서양을 가 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믿음이 뭔지 이제 짐작이 갑니까?

이 현실의 삶에, 하늘나라가 붙으면서/맞닿으면서

이 세상의 모든 가치관이 다 변해요.

그러면 이 세상을 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당연히 버리게 되는 것이에요.

더 넓고 좋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을 무조건 무시하고, 도피주의자가 되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현실도 영생과 맞닿은, 영생의 일부입니다.

현실에서도 하나님의 뜻/사명을 이루며 소중히 살아야죠.

다만 얽매이기 쉬운 현실의 욕망, 죄성, 세상 짐들을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현실을 빠져나오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치루신 사건이 뭡니까?

십자가 사건이에요.

어떻게 해야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겁니까?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좋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내가 죽은 자임을 고백하고

내 마음이 실제로 죽게 될 날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겁니다.

죽게 될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빠져나오게 되는 것이에요.

 

심형래가 부른 캐롤에 그런 노래가 있잖아요. 썰매를 타고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그런 식으로 몇 년 동안이나 그러고 있는 거예요. 왜? 세상에서 좋은 게 너무 많아서!

 

가족, 자식이 좋고, 돈이 좋고, 사업이 좋고, 좋은 대학이 좋고,

건강이 좋고, 미모가 좋고. 그러지 말아요.

보톡스 맞지 마세요. 그런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요?

 

진짜 하늘의 빛을 받아서 살기 위해서, 그냥 우리가 할 것은 십자가 붙잡아 보세요.

그리고 진짜 하늘의 빛이 쏟아져 내리는 가운데.. 이 세상의 삶을 살아보자는 것이에요...(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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