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가지 시험 눅4:1~11/마4:1~11 10.01.17설교스크랩, 정리
▲예수님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런 시험을 받을 때 놀라지 말고
이 시험을 잘 통과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벧전4:12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히2:18
그래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시험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성령에 이끌림을 받으사 광야로 가십니다. 주1)
◑3가지 시험의 비교표
누가복음4:3~12 |
요한일서2:16 |
창세기3:6/ 선악과 |
돌덩이를 떡이 되게 하라 (육신의 정욕의 시험) 4:3 |
육신의 정욕 |
먹음직 하고 |
천하를 보여주며 내게 절하라 4:5 |
안목의 정욕 |
보암직도 하고 |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자랑, 명예의 시험) 4:9 |
이생의 자랑 |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런 |
※누가복음과 요한일서, 창세기는.. 시험의 순서가 모두 일치함 (위 도표에서 보듯이)
단, 마태복음은 시험의 순서가 약간 다름, 2번째와 3번째가 뒤바뀜.
위 표에 의거해서,
창세기3:6절을 해석할 때는 다른 두 본문을 참고할 수 있으며,
요한일서2:16절을 해석할 때, 다른 두 구절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아래 설교는, 눅4장을 해석하면서, 다른 두 구절(창3장과, 요일2장)을 참조해서 설명합니다.
▲아담의 시험/ 예수님의 시험/ 나의 시험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의 시험은.. 첫 사람 아담이 받은 시험과 똑같은 것입니다.
위의 표를 보십시오.
모든 인류의 대표인 아담은, 애석하게도, 그 시험에 실패했지만,
모든 인류의 대표인 예수님은, 감사하게도, 그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당당히!
또한 요한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똑같은 3가지 시험을 언급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담만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만 시험을 받는 것이 아니요,
우리 각자에게도 똑같은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둘째 아담(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승리를 힘입어,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면 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2:15
▲1. 육신의 정욕.. 시험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면서 느낀 첫째 시험은
<먹음직함>의 시험이었습니다.
본문의 예수님에게는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달러dollar를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투자는 돌로 하고, 거두어 드리기는 달러로 하라’는 것입니다.
40일을 금식하며 주리시던 예수님께, 떡 소식은 얼마나 그럴듯한 복음이었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어떻게 승리하셨나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눅4:4
그분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삶의 준거가 있으셨습니다.
그리고 떡이라는 물질보다도
말씀이라는 영적 자산의 중요성을 더 확고하게 붙들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은 부당한 투기나 투자,
불의한 뇌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마귀에게 자신의 영혼과 양심을 팔고 있는지요?
어떻게 시험 준비를 잘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기록되었으되>라고 말할 수 있도록
기록된 성경의 가치관을 내면화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의 실패는 교회에는 나오지만
우리가 붙들고 있는 가치관은 성경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이라는 사실입니다.
진실로 우리 안에 성경적인 가치관이 내면화되어 있다면
우리는 세상/마귀의 유혹 앞에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아닌
‘주님을 사랑하는 자’임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일2:15
우리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칠 때
요단강에서 예수님을 향해 들려주시던 아버지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너는 과연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2. 안목의 정욕.. 시험
첫 사람 아담에게는 <보암직함>의 시험이었습니다.
눈을 매개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눅4:5절의 말씀을 보십시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러나 이 말씀은 보여 주는데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음 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내게 주리라
결국 보이는 세상의 환상을 미끼로 사단을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의 유혹입니다. 일종의 쾌락의 시험입니다.
우상은 창조주와 피조물을 바꾸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보다도 세상의 쾌락이 더 아름답게만 보일 때,
이웃에 대한 섬김의 삶보다도
이웃을 밟고 지배하는 출세가 더 매혹적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내 존재보다도, 내 소유가 나를 더 위로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안목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천하만국을 보여주며’라고 했지만, 성서지리학적으로 보면,
아마도 당시에 마귀는, 예수님을
당시의 근동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였던 ‘종려나무의 도시- 여리고’가 가장 잘 보이는
여리고 맞은 편 (시험 산정 Mt. Quarantal, 희랍 정교회 수도원이 있음) 산에 세우고 예수님을 미혹했을 것입니다.
‘내게 절만 하면.. 이 여리고 도시의 문화, 이 도시의 쾌락, 이 도시의 영광이 다 네 것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는 ‘천하만국의 모든 영광의 대표/샘플’로 보여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준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경배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나의 위로, 나의 기쁨, 나의 보람, 나의 만족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요일2:15절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의 주일 경배는 이 고백을 확인하고 연단하는 것입니다.
예배할 때마다 “주님, 저의 위로는 주님이십니다. 저의 기쁨도 주님이십니다.
저의 평화도 주님이십니다.” “저는 저의 만족을 세상에서 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갖가지 안목의 정욕의 유혹을 받을 때,
예수님처럼, 위 말씀을 외워보십시오, 그리고 그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그러나 이 말을 세상의 문화를 등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주께서는 어느 정도 당신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을 즐기다가, 이 세상이 마치 나의 궁극적인 삶의 자리인 것처럼
착각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아름다고 좋아도 세상은 결국 지나갈 것입니다.
다시 요일2:15을 상기하십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제가 믿음 생활 초기에 읽은 밥 포스터(Bob Foster)의 글은
저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 분은 본래 성공적인 젊은 사업가이셨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중년기에 갑자기 주변 사람들이 병으로 연속적으로 세상을 떠나자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그 시점에서 <무엇이 영원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 대답을 위해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성경을 공부해 보니까 모든 것이 지나가는데
3가지만 성경에 영원한 것으로 기록된 것을 발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하고
(벧전1:24-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셋째는, 요일2:17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위해,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을 세우는 일을
자신의 남은 생의 소명으로 발견합니다.
▲3.이생의 자랑.. 시험
첫 사람 아담에게 이 시험은 <지혜스럽게 탐스러움>의 시험이었습니다.
누구만큼 지혜로워 질수 있느냐 하면 “하나님만큼”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가 하나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시험이 성전 제일 높은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 보라는
유혹으로 찾아옵니다.
‘그 후에 네 발이 땅에 닿기 전에, 천사가 네 발을 들어 올리면
너는 내일부터 유명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소위 ‘명예/인기/자랑의 시험’ 입니다.
영어로는 ‘pride of life/ 이생의 자랑’입니다.
우리 중에는 실제로, 자기 이름 석 자 내려고
평생 발버둥치는 삶을 사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쁜 일이란 말입니까?
성경에도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택할 것이니라. 잠22:1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재물보다는 확실히 명예가 더 소중한 것입니다.
좋은 명예를 지닌 사람들을 우리는 아직도 존중합니다.
명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 잠22:1은 명예와 은총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진정한 명예는 은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 받을 만한 인생을 살 때
자연스럽게 명예는 주어지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연스러운 삶의 결과를 떠나
무리하게 자기 이름을 무리하게 매사에 드러내고 선전만 할 때
명예는 바람직하지 못한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는 ‘구할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입니다.
잘 살면 명예는 주어지지만 ,억지로 구하면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예의 시험을 받을 때, 세상 자랑을 무리하게 추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주님이 이기신 그 말씀을 선포하며, 이겨나갑시다. '주 너희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주님은 이 시험을 어떻게 승리하셨습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출세와 명예의 대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내가 높아지기 위해 내게 이용되는 대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지성으로 하나님을 높이면
그분이 나를 자연스럽게 높일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내 이름 높이는 게임에 매달리지 말고
날 구원하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인생을 살면 됩니다.
내가 아닌, 세상이 아닌, 주님을 내 인생의 자존심(자랑)으로 삼으십시오.
풀의 마름과 같은 세상을 내가 어찌 자랑하겠습니까!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7
..............................
▲이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사람
「그 청년 바보 의사」책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고려대 의학과 91학번 안수현.
그는 ‘유행성 출혈열’(질병 이름)로 군의관 하다말고
예수님처럼 33세로 떠나간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잊지 못한 주변 사람들이
그를 생각하며 책을 만들고,
그의 인생이 조용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라 저 영원한 나라의 삶을 추구한 때문입니다.
백혈병 걸린 아이와 친해지려고 무단히 노력하고
그 아이 하나를 위해 선물을 사들고 지방으로 내려가는 모습,
간호사가 실수로 깬 의약품을 발품을 팔아 약품을 구하는 모습,
잠이 부족인 인턴 시절에 환자의 고민을 들어주기 위해 밤을 하얗게 새는 그는
정말 바보였습니다.
의사들이 까운을 벗고 모두 파업을 할 때
왕따를 각오하고 환자의 곁을 지키는 그는
세상의 인정보다 자기의 주인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나가는 인생 광야에 주님의 흔적을 남김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이름 앞에 항상 ‘스티그마(흔적)’이란 말을 붙였습니다.
‘스티그마 안수현’ 이렇게 썼던 것입니다.
스티그마는 헬라어로 ‘흔적’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흔적, 예수님의 못 자국, 창 자국, 채찍 자국’을
자기 몸에 지진 사람으로서 항상 살기를 소원한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의 정욕이 한창인 때, 그 욕심을 하나님의 뜻으로 바꾼 바보!
‘그런 바보는 또 없느냐?’고 주님은 오늘도 묻고 계십니다. ▣ 영적전쟁
주1) 유대 광야
광야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곳입니다. 일교차가 매우 심한 곳이죠.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신 ‘유대 광야’는
예루살렘 동편으로 펼쳐져 있는데, 무섭도록 아름답고 외로운 곳입니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편서풍 비구름이
예루살렘이 위치한 해발 600~1,000m의 서부 산악지대를 넘지 못합니다.
그래서 90%의 비를 산악지대 서쪽에 뿌려서, 서쪽은 비교적 비옥하지만
이 비구름의 10%정도만 산악지대를 넘어 동쪽에 소량의 비를 뿌리면서
산악지대의 동쪽/예루살렘 동쪽은 메마른 광야지대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광야는 완전히 모래뿐인 사막과는 좀 다릅니다. 半사막으로 보시면 됩니다.
광야는 비가 오면 그래도 생물들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나무가 없고, 무릎 높이의 볼품없는 식물(관목)만 드문드문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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