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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 회심론’ 의 에피소드 2284

LNCK 2010. 1. 28. 14:34

◈‘극단적 회심론’ 때문에 빚어진 에피소드         09.02.15.설교녹취



아래는 한 목회자의 체험담(설교)을 녹취해서 올린 것입니다.

이 내용은 <조나단 에드워즈/청교도 신앙의 극단적 회심론> 때문에 생겨난 에피소드입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그냥 소개해 드리는 것이며,

이 내용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각자 성령의 인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20년 만에 그 집사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오래 전에, 제(설교자)가 부교역자로 섬기다가, 교회를 떠나게 된 사연이 있었다.

바로 그 집사님 때문이었다.

(그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최근에, 난데없이 그 집사님이 보낸 이메일을 받고서,

갑자기 옛날 일이 죄다 생각났다.)


제가 부교역자로 지역교회를 섬기면서 ‘제자반’에서 가르쳤는데,

거기에 교회 일에 너무 열심인 그 집사님이 있었다.

교회 일에 얼마나 열심인지, 정말 목회자보다 더 열심인.. 그런 집사님이었다.

 

그 집사님은, 남편만 아직 안 믿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것 같았다.

어디 하나 딱하게 모자란 점이 없었고,

거기에다 사람들 몰고 다니는 리더십까지도 있는 것 같았다.

(교회에 이런 분 몇 명만 있으면, 큰 보탬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제게 성령께서 강한 부담을 주셨다.

‘그 집사는 아직 나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제가 기도 중에 받은 마음의 부담을, 꼭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가 하루는, 그 집사님을 만나, 정직하게 얘기를 해 버렸다.

‘집사님은요, 성경은 많이 아는 것 같은데, 아직 주님을 모르시는 것 같아요!’ 

나는 그 집사님을 진정 사랑하는, 목자의 심정으로 말해 주었다.


▲그 일로 인해, 교회가 크게 술렁거리는 결과가 나타났다.

교회의 중직이었던 그 집사님이, 크게 시험에 든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교회에서 가장 열심히 섬기는 분이었는데,

젊은 부교역자가 ‘당신은 예수님을 아직 모릅니다.’ 라고 했으니...


이 분이, 제 말을, 겸손하게 받아드렸으면 좋았을 것을..

제 말에 큰 상처를 받고는..

그로 인해 여러 가지 후폭풍이 일어났는데,


제일 먼저, 제가 가르치던 ‘제자반’에서, 제가 제외되었다.

그 다음에, 저의 심방이 금지되었다.

그 집사님은 고열에 몸져누웠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중에 결국 그 집사님은, 개척교회로 옮겨가셨다.

물론 저도 결국 그 교회를 사임하게 되었고, 그 후로도 이 일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제가 그 집사님을 찾아가서 위로해 드리고, 사과를 드리려고 해도(제 신념에는 변함없지만)

‘심방 금지령’이 내려져 있어서, 제가 찾아 뵐 수도 없었다.


‘도대체, 제자반에서 뭘 어떻게 가르쳤기에, 건강하던 사람이 몸져눕는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남편이 아직 불신자인데, 전도에 덕이 안 된다’는 소리도 들려왔다.

‘저 전도사(나)는 마귀의 종이라서, 절대 목사 안수를 받게 해서는 안 된다’ 소리도 들려왔다.


교회에서 가장 열심인 집사를, ‘예수님을 아직 모른다’라고 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반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저는 혼자 코너에 몰렸다.

신학적으로도 이상한.. '마귀의 종'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결국 저도 얼마 안 있어, 그 교회를 떠났고, (저는 해외유학을 떠났다.)

그 집사님도 얼마 안 있어, 그 교회를 떠났다.


저는 그 교회를 떠나기 전에, ‘심방 금지령’을 깨고, 그 집사님을 찾아갔다.

정말 몸져누워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집사님은, 정말 예수님을 모르시는 겁니다.

집사님이 제 말을 듣고, 몸져누운 것 자체가, 아직 예수를 모른다는 증거예요.’


(여러분은, 제 순수한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정직하게 말해 드린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본의 아니게, 그 분께 상처를 준 점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한다.)


▲그 집사님은, 근처의 개척교회로 교회를 옮겼다.

그리고 또 그 특유의 열심으로, 그 개척교회를 열심히 섬겼다고 한다.

얼마나 열심히 그 교회를 섬겼는지,

그 지역 기독교(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해서, 사연을 간증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개척교회가 성장하면서, 후에 깨어지고 나눠지게 되었는데,

거기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그 열심이던 집사님’이 또 감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정은, 그 개척교회 목사님을 기도원에서 우연히 만나서, 그 분께 전해 들었다.)


▲놀라운 것은, 20년이 지났는데, 제가 지금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데,

그 집사님의 이메일을 받았다.


그 내용은 한 마디로 이랬다.

‘(20년 전) 그 때는, 자기가 그게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몰랐는데,  ('집사님은 아직 예수님을 몰라요'라는 말)

이제야 그 말의 뜻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라는 고백이었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지금 한국에서 제 설교를 계속 듣고 있다고 했다.


저는 솔직히, 아직까지 좀 억울한 심정이 남아 있었다.

20년 전 그 사건을 통해, 저도 굉장히 큰 우환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감사한 것은

제가 ‘집사님은 아직 예수님을 몰라요’라고 한 말이,

사실인 것을,

그 때로부터 20년이나 지나서, 자기가 지금에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이 내용이 잘 이해 안 되시는 분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극단적) 회심론’에 대해 각자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집사님과 비슷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교회생활에 열심이지만, 주의해서 자기 영혼을 살펴야 한다.

당시 그 집사님은, 교회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있었다.

교역자보다도 더 열심히, 발 벗고 교회를 섬겼기 때문이었다.


여러분, 제가 지금, 20년 전 과거의 그 집사님 얘기를 드리는 이유는

오늘 우리 중에도 이럴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생활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지만,

아직 주님이 누구신지, 제대로 모를 수 있다는 것이다.


사영리 수준으로만 하나님을 알고 믿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진정한 회개/ 통회’가 결정적으로 빠져 있기 때문이다.

아직 ‘자기 자아가 전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회를 열심히 섬기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기 영적인 성장도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그동안 ‘고속성장시대’를 달려오면서,

교회에서 열심히 섬기는 분들은 매우 많아졌는데,

그 중에 영적으로 성숙한 분들, 진정 예수님을 알고 믿는 분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관점으로 볼 때) ...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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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서                          /이 단락 편집자 글


▲그런데 이게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으로 설득되지 않는다>는데 .. 어떤 ‘벽’이 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깨닫고 이해되는 진리이기 때문에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내가 요3:16절로 신앙고백하고 예수 믿고, 교회 생활에 열심인데, 뭐가 잘못인가?’

라고 반문한다.


성경을 펴고, 2시간을 일대일로 길게 설명해도, 아마 절대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역사’로만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신비한 기적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진정 회개할 죄인임을, 하나님의 진노의 손 아래 놓여 있는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한다. 

 

그런데 그런 성령의 깨달음의 역사가 없이

그냥 말로만 계속 설명하면,

도리어 ‘그런 네가 잘못이지!’

‘네 신학이 이상해! 혹시 구원파 아니냐?’ 라는 반격을 당한다...


그러나 ‘신앙에 이런 차원이 있다’는 것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위의 내용을 ‘조나단 에드워즈 식 (극단적) 회심론’이라고 일단 이름을 붙이기로 하고,

그러나 이것도 ‘신앙의 전부는 아니다.’ 여전히 어떤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①극단적으로 회심한 사람도, 극단적으로 회심한 후에도

결국에는 ‘죄를 짓는다.’


물론 극단적 회심 전의 과거와는.. 많이 달라지고, 성화되었겠지만,

극단적 회심을 경험한 사람도.. 그것이 하루 아침에 자기를 성자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체험도 마찬가지다. 그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인이다.

하루 아침에 성자가 되는 것은 미신myth이지, 현실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극단적 회심을 한 사람도, 안 한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극단적 회심을 경험하고도.. 늘 깨어있지 않으면.. 사람은 얼마든지 타락하기 때문이다.

성령충만도 마찬가지다. 늘 깨어있지 않으면.. 행2장의 체험이 없는 사람과 똑 같다.


②극단적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영적인 교만’에 빠지기 쉽다.

‘극단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누구의 말을 들어보면, 누구의 설교를 들어보면,

‘극단적 회심’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 눈에 훤히 드러나 보이면서

그들을 무시하게 되고, 반대로 자기는 우월감/교만에 빠지기 매우 쉽다. 자연히 그렇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이 ‘함정’이라는 것이다.


성령충만도 비슷하게 함정이 있다.

‘성령충만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자기 눈앞에 훤히 보이면서

그들을 자꾸 가르치려 들고, 판단하게 되고, 우습게 여길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에는, 성령충만 하지 못한 사람보다.. 상태가 더 안 좋을 수 있다. 교만 때문에.


▲그래서 어거스틴/ 성 프랜시스/ 토마스 아 켐피스 같은 분들은

기독교 신앙에서 <겸손>의 덕목을 최고로 강조한 것이, 아마 이런 이유에서 라고 본다.


-조나단 에드워즈처럼 ‘극단적 회심’을 체험했든지

-사도행전 2장의 성령충만을 극적으로 체험했든지

-남들이 흉내도 낼 수 없는 신비한 은사/능력/예언이 있든지

-‘복음을 깨달았든지’ (한 때 이런 표현을 쓰던 분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거기에 겸손이 보태져야

자신이 넘어지지 않는다.

아니면, 교만 때문에 넘어져서, 심한 경우에,

그런 신비한 경험이 없는 보통 신자보다 더 못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이끌어 가신다. 강제로 겸손하게 만드시는 경우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12: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회심론'은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영혼의 구원은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기준을 좀 높게 잡아야.. 그래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 믿음론 (순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