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04~2005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대로 지내라 2846

LNCK 2011. 1. 25. 23:25

 ◈부르심을 받은 대로 그대로 지내라           고전7:17~24            스크랩출처, 편집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고전7:17



◑하나님의 부르심, 그 주권을 인정해 드려야 한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대단히 귀한 말씀이다.

이것은 흔히 우리가 인종 차별문제, 혹은 빈부의 문제,

지식의 문제, 소유의 문제, 신분의 문제, 지능의 문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 있다.


‘왜 내가 흑인으로 태어났나?’

‘왜 내가 머리가 안 좋게 태어났나?’

‘왜 나는 부잣집 부모를 못 만났나?’


이런 모든 복잡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위 고전7:17절은 가장 밝고 명쾌한 대답을 주는 말씀이다.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때때로 이것(하나님의 부르심 그대로 살기)을 바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적어도 깊은 신앙 가운데서,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줄 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든지 어떤 신분에,

흑인이든 백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혹은 가난하든 부하든


이 모든 일..

내가 당하고 있는 형편, 내게 주어진 모든 형편을

여기에 "주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께서 내게 나누어주신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게 주신 분깃이요 분복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았다고 하는 입장에서 이런 절대성이 있다.

그 절대성, 그 주권을 침범, 거부, 훼손하면 안 된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다양하게 부르시지만, 근본적으로 공평하다.


남자와 여자라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남자로 부름 받는 것이 우월한가, 여자로 부름 받는 것이 우월한가?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입장에서는 똑같다.

남자도 사람이요, 여자도 사람이다. 

그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다.


또한 부자와 가난하다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지능도 다르고, 지식도 다르고, 형편도 다르고 그렇지 않은가?

그렇게 차이를 구분하자면 끝도 없다.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사람, 뻣뻣한 사람 차이도 있다. 이런 구분은 끝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입장에서는 똑같다.


그래서 신앙이 깊은 사람은, 이같이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본다.

같은 것, 분명 같은 것이다. 같은 것만 많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평안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그게 99.9% 너무나 크니까,

이 세상에서 잠깐 사는 동안의 차이.. 그건 0.1%밖에 안 되니까..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영생의 관점, 천국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은,

이 같은 관점은 없고 다른 것만 있다고 생각해요.

다른 것을 너무 극대화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남자와 여자, 뭐, 그거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알고 보면 뭐, 같이 빨갛게 태어나고, 나중엔 같이 죽는다.

그래서 뭐 80세가 지나면, 남녀 성별의 차이도 없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빈 몸으로 왔다가 빈 몸으로 간다. 그러니 뭐, 다를 바가 없다.


다 같은 것이다. 뭐, 직장으로 말하면 한 사람은 사장실에 앉았고

한 사람은 수위실에 앉았지요. 그것이 다르지

한 회사 직원이라는 데는 같은 것이다.


인생이라는 문제, 그리스도인이라는 문제,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문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문제,

여기에 다를 바가 무엇 있는가? 시작도 끝도 같아요. 궁극적으로 같고요.

영생과 천국을 진실로 소유한 사람은.. 그 ‘세상 신분의 차이’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한 마디로 말하면, 정리해서 말하면 이렇다.

예수를 믿고 은혜 받은 사람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유 한다.

그는 자유인이다. 왜요? 그리스도의 사람이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았으니까. 자유인이다. 어디서나 자유인이다.


가난해도 자유인, 노예로 살아도 자유인, 부해도 자유인,

어디서나 자유인이고, 어느 곳에나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일에서 감사하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사명감이 충만하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그 부르신 처지가 여기에 있고,

내가 할 일이 있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한다.

나누어주신 것이 내 잔에 넘칩니다... 라고 고백한다.


내게 주신 분량이 넘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요.

이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디서나 불평이 없어요.

감사, 자유, 모든 일에서.


▲사장이나 직원이나 .. 스트레스 받는 것은 똑같다.

고용인은.. 사장이 부럽고, 편하게 보인다.

고용인의 눈에 사장은. 자기 외출하고 싶을 때 마음대로 외출하고.. 자기 쉬고 싶을 때 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어쩌면 사장이 더 어렵다. 이건 사장 해 본 사람만 아는 고충이다.


미국에서 보니깐 어떤 젊은 집사님 한 분이 

자기 슈퍼마켓을 하고 있었는데, 대단히 컸다.

큰 슈퍼마켓에 좌우지간 직원이 한 50명이나 되는 큰 슈퍼마켓이었다.


그래서 내가 ‘집사님, 아주 출세했구만’ 그랬다.

 

그랬더니 ‘아이고, 말도 마세요. 제가 큰 실수를 했습니다.’

자기가 이민 와서 처음부터 이런 슈퍼마켓만 돌아다니면서

처음에는 일꾼으로 일하다가

그 다음에는 조금 진급해서 매니저도 하고, 이렇게 경험 쌓으면서 일을 했대요.

 

그러다가 경험도 있겠다.. 아예 이걸 사서 하면,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어서, 큰 슈퍼마켓을 인수했는데..

막상 맡아서 보니까.. 지금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장 집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여기 직원들 가운데

과거에 이 슈퍼마켓 사장을 하던 사람이 일곱 사람이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큰 이익도 없는 사업체에, 사장으로 골머리 앓으면서 일하는 것보다,

직원으로 월급 받으면서 다니는 것이.. 훨씬 더 낫고 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사장 그만 두고, 직원으로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사장으로 이 회사를 경영하는데

저 직원들은 아침에 제 시간에 땡! 하면 나와서 일하다가

땡! 하면 퇴근하면 된다. 주말엔 놀러 가고...


그런데 사장인 자기는 보니까,

두 내외가 새벽에 나와 가지고 일하고, 밤에도 걱정이 되어서 돌아가고,

각종 세금에다.. 죽을 고생을 한다는 것이다.


‘이 사업이 될까 안 될까, 적자가 났나, 모자라나?’ 이거 아주 죽을 지경인데,

가만히 보니까

직원으로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편하고 부러운지...

그래서 이걸 누구한테 넘겨주려 하는데, 누가 인수받을 사람이 없어서 고민이란다.


보세요. 사장만 좋은 줄 알지만, 사실은 이름만 사장이지 죽을 지경이거든요.

이걸 우리가 생각해야지요.


그러니, 사장만 부러워할 게 아니라,

지금 자기가 직원으로 있으면.. 그 삶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나는 사장으로 하나님이 세워주시지 않았나?’ .. 하고 탄식할 일만은 아닌 겁니다.


▲가난한 사람도.. 불평하면.. 노예로 살게 된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가난하게 부르신 사람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 몸이 건강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다.

그래서 재래시장에서, 건설현장에서, 여러 힘든 일들을 거뜬히 해 내는 것을 본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가난하게 하신 것은

부자로 살면.. 도무지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럴 수도 있다.) 


그리고 가난한 형제나 식구들은.. 보통 화목하다.

항상 집안에 웃음이 피어나고, 가족끼리, 형제간에 서로를 아끼고 위해준다.

서로가 불쌍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부자로 사는 게.. 멀리서보면 다 좋게 보이지만..

부자이면서 몸이 아픈 사람이 있다.

부자이면서 가족 간에, 형제간에 원수인 사람이 있다.

부자라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도 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상대적으로 가난한 것이 낫다는 것이다.


꼭 부자가 좋고, 빈자가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인생에 여러 가지 고려할 요소들, 변수들이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가난한 집 자녀로 태어났더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다’고 여기라는 것이다. 롬11:29


어떤 미국인은 정말 가난하게 태어나서, 남의 집 차고를 빌려 살았다.

그런데 그 자녀가 나중에 커서, 남미 선교사가 되었다.

그 선교사는 ‘자기가 어릴 적에 가난하게 자란 것이, 가난을 경험해 본 것이,

선교지에서 자기가 가난하게 살며, 가난한 현지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 말했다.

가난에도 섭리적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가난한 사람은 불평의 노예가 되기 쉽다.

불평불만으로 자기의 가난한 책임을 남에게로만 돌리고

‘이놈 때문이고, 저놈 때문이고..’ 하루 종일 욕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 역시 노예다. 이건 원망과 불평의 노예가 되어 있다. (성도는 자유인으로 살아야 한다.)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불평이고,

그렇게 해서, 자기에게 이득 될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큰 손해뿐이다.


▲병든 사람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자, 어떤 사람은 건강이 좋은 줄 알지만.. 건강해서 또 역시 잘못된다.

건강이 하나님이 주신 줄 모르고 방탕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또 방탕함의 노예가 된다. 이렇게 정욕의 노예가 되어서

이것도 비참한 사람이 되요. 또 병든 사람은 병든 대로 또 노예가 되는 수가 있다.


그러므로 병든 사람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섭리와 부르심을..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

사실 육신이 병들어서, 영혼이 건강한 사람은 셀 수 없이 많다.

대표적으로 패니 크로스비 여사이다.              패니 크로스비의 불행과 행복 이야기

 

그런데 만약 크로스비 여사가, 자기 삶을 한탄만 하고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극단적인 예지만, 실화라고 들었다.

미국 교포 크리스천 가정에, 한 장애아가 태어났다.

그 부모 부부는, 너무 불쌍하고 가여워서, 결사적으로 매달려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가 점점 크면서, 기적적으로 그 장애가 치료되었다.

정상적인 아이가 되었다. 부모는 정말 기뻐서 감격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틴에이저 때,

친구 불량배들이 저지른 범죄 사건에 가담자로 연루되어

법원에서 수 십 년 형을 언도받았다고 한다. 일평생을 거기서 살아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때 부모들은 회개하며 기도했다고 한다.

‘차라리 하나님이 주신 장애를 그대로 받아들였더라면..

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인데..’



◑정리하면, 성도는 관점이 달라야 한다.


▲1. 하나님의 부르심,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우리는 회사에서 생활한다 하더라도

윗사람이 있고, 아랫사람이 있을 것이다.

윗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이 직장을 내게 주셨고

저분을 위해서 순종할 때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주를 섬기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 사람을 섬기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게 절대로 아니다.

내 마음은 어디까지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 회사 직원으로서 일한단 말이다.

그런고로 불평이 없다. 어떤 처지에서도 원망이 없다.


또 백인이 되어 가지고, 황인종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다 쓸데없는 짓이다.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그대로 수용해야 된다.

다른 사람도 내가 수용해야 되지만 내가 나 자신을 수용해야 된다.


그래서 여기서 일단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다.

또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환경도 내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야 한다. 그걸 잊지 말아야 된다.

그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구원의 관점, 영생의 관점을 가지고(다 똑같다)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이 구원받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는

오래 살고 짧게 살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부하고 가난하고 어떤 처지에 있고 저런 처지에 있고, 다 사치한 소리다.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모든 불평은 다 사치한 것이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고로 나누어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것이다.

그런고로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부르신 그대로 만족하는 것이다.

부르신 그 자리를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귀한 선교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어떤 가정에 있든지 불평하지 말라. 세상에 제일 불행한 사람,

그리고 가장 멍청한 사람이 누구냐?

여자가 되어서 남자 못된 것 불평하는 사람,

이 사람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내게 주어진 처지 그대로 지내라.


▲3.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마음은 자유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편에서도 자유인이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심령은 어떤 형편에서도 노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마라. 사람의 종이 되지 마라.  7:23


그래서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되지 마라. 무할례자냐?

이방 사람이냐? 유대 사람 부러워하지 마라.

이방 사람은 이방 사람대로, 유대 사람은 유대 사람대로,

흑인은 흑인대로, 흑인 되어 가지고 백인 못된 것 불평하는 사람 많다.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1


이 말씀의 뜻은 자유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거든,

주인이 자유를 주거든 ‘노예로 있겠다’고 버티지 말고, 자유해라는 것이다.

또는 자기가 돈을 모아서, 자기 신분을 바꿀 수 있으면, 바꾸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 것은, 어느 때든지 어떤 형편에 있든지

구원을 받은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의 노예다.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종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만을 섬길 뿐이다.


그리고는 정신적으로 어느 누구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

노예든지, 주인이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느 처지에 있든지 자유인,

어느 처지에 있든지 감사하는 사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그런데 그 처지를 원망하고, 그것 때문에 불평하고..

가진 것이 적으니 뭐, 아는 것이 적으니, 나는 왜 이러니, 팔자가 왜 이 모양이냐?

팔자 신세타령 하는 사람, 이거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느 처지에서나 자유 한다. 주님의 말씀은 그렇다.


그 있는 처지 그대로 지내라. 무슨 말씀인가? 그 처지에서 감사하라.

그 처지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라. 그 처지에서 주를 섬기라.

이 얼마나 깨끗한가? 귀한 말씀이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모든 것을 감사하며,

내게 주신 분복으로 받는 그 자세에 자유인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 더 읽으실 분 ...............................


▲오늘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세브란스 병원에 원목으로 오래 있던 제 친구가 있다.

언제 한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연세대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아주 데모를 많이 할 때

그 데모하는데 아주 선두에 서는 학생이 있었다.

아주 똑똑하고 불평 불만이 많다. 뭐, 항상 불만 원망 투성이다.


그런데 이 가난한 청년이 고학을 하다가 위장병이 걸려서 병원에 들어왔는데

보니까 위암이다. 이 젊은 사람이 위암으로 죽는다는데 너무 안 돼서

수술비는 없지만 의사들이 돈을 모아서 이 사람을 한번 살려 보자고 수술을 했단다.



하고 보니까 아주 꽉 찼다.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서 그냥 도로 꿰매고 말았다.

그 다음에 퇴원할 때 그 학생에게 얘기를 해 주었다.

자네는 수술을 받았지만 위암을 제거하는 수술은 하지 못했다고,

자네는 이제 잘하면 한 6개월 살 수 있을 걸세.

그러니까 그 동안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하면서 퇴원을 시켰다.



자기 친구 두 사람에게 부축을 받으며 병원 문을 나오는데

병원 문에 나와서 택시를 타기 전에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그 앞에 무릎을 딱 꿇더란다.


그리고 그가 하늘을 향해서 손을 모아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 나 좀 1년만 살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 동안에 잘못한 것 고쳐먹고

정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을 살겠습니다. 1년만 살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고 그 다음에 일어서서 친구들과 같이 부축을 받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아름다운 줄은 몰랐다' 그러더란다.


늘 보던 하늘이다. 그러나 오늘 새로운 마음으로 보니까

이 하늘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산다는 게 이렇게 소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그 청년의 입장에서 가난하다고 불평하겠는가? 지위가 낮다고 불평하겠는가? ▣ 행복한 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