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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붙드는 종, 나의 택한 사람

LNCK 2011. 3. 8. 18:24

 

◈내가 붙드는 종, 나의 택한 사람       사42:1~2     04.03.14.스크랩, 정리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1),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2),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3)..’ 사42:1~2

 

*같은 본문의 신약병행구절 설교문 : 예수님의 길에는 발걸음 소리가 없습니다.

 

살다보면, 모든 사람들은 때로는 참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고함을 치고 욕을 하고 멱살을 잡고,

그것도 되지 않으면 법정에 고소를 해서 법으로 해결하면 되지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때로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교회 안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모함을 당할 때가 있는데

이때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교회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편을 갈라서 싸우고, 욕을 하고, 또는 은밀하게 다른 사람을 매장시키고...

 

그런데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행동일까요?

그리고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말씀을 같이 나누어 봤으면 합니다.

 

 

◑1. 외치지 아니하며..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몇 가지 표현하고 있는데,

가장 첫 표현이 ‘외치지 아니하며’입니다.

 

▲1. ‘차아크’의 의미

 

오늘 2절 첫 부분을 보니까, 메시야의 특징은 ‘외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글번역상 이 부분은 오해가 있기 쉽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외쳐야 하는 존재이고

예수님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라고 외치신 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외치지 않는다'니요?

 

여기서 ‘외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차아크라는 동사로서

일반적인 외침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차아크란 말은 구약에 53번이 쓰였는데, 쓰인 용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출5:15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가서 바로에게 호소하여 가로되

왕은 어찌하여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벽돌을 만들던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바로가 짚을 주지 아니하고도

예전에 만들던 벽돌의 수만큼 만들라고 명령하자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바로에게 호소할 때,

차아크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②출17:4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을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라는 구절에서

‘부르짖다’는 단어에 차아크를 쓰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영도해 출애굽을 시키고 홍해 바다를 건너오게 했지만

그들은 노중에서 물이 없다고 오히려 모세를 원망하게 됩니다.

모세는 이 억울함을 하나님께 부르짖고(차아크) 있습니다.

 

③삿4:3, “야빈 왕은 철병거 9백승이 있어서 2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더라

 

이스라엘이 야빈왕의 학대에 견디다 못해 자신들을 상황을

하나님께 부르짖고(차아크)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차아크’란 단어는,

자신의 급박한 상황이나 억울함을 하나님이나 타인에게 부르짖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함이나 급박한 상황에서

‘차아크’하며 자신의 억울함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는

나의 기뻐하는 나의 택한 종은 차아크 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사42:2

 

2. 외치지 않으신 예수님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기사를 읽으면서 참으로 억울함과 분노를 느낍니다.

그런데 당시에 예수님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하나님의 본체로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낮고 낮은 마굿간에 친히 인간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죽임과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헤롯왕은 자신의 왕권이 위협 받을 것 같아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2세 이하의 어린이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자라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자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몰아 세웠습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잘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3)’

 

이 정도의 대우도 보통사람은 참기 힘든 것인데

그 후에 우리는 그 분께 가장 끔찍한 대우를 했습니다.

그 분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당시 십자가는 모든 형벌 중에서 최악의 형벌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람은 온갖 수모를 당하고 발가벗겨 십자가에 달려서

모든 사람의 조롱거리가 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형벌을 몸소 당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정죄하는 많은 증거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2.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인 예

 

‘창4: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이렇게 가인이 하나님께 소리치며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창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하갈이 소리내어 울 때, 그는 자기 목소리를 높혔습니다.

 

‘창27:38, 에서가 자기 장자의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기고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목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의 구절만 뽑았습니다만,

긍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예’도 있습니다.  사52:8등

 

▲주님이 택한 종의 분별법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사42:1~2

 

당신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종이십니까/아닙니까?

그 기준이 본문에 나옵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물론 성령에 감동해서, 자기 목소리를 높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원리는.. 하나님 택하신 종은..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3.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며..

 

※사실 성경에는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등의 3가지 표현이 나오지만, 다 비슷한 말입니다. 

 

▲목소리를 높인 예

창4:23, 라멕이 자기 아내들 아다와 씰라에게 ‘내 목소리를 들어라’고 소리쳤습니다.

 

※물론 ‘들어라’(듣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말입니다. 영어로 hear/heard이죠.

그런데 부정적인 예를 뽑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어 자체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고요.

 

▲오늘날 자기 억울함을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발표, 무슨 회견,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더라도,

교인들은 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들도

무조건 성경을 무시하고, 세상 법정으로 고소/고발하고 있습니다. 고전6:1~8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분노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지고 나옵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자신의 분냄을 참으려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자아는 분노하고 억울해 합니다.

그래서 ‘참으면 병이 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안으로 삭이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분노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 담아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분노를 누구에게 가지고 나갑니까?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분노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분노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억울해서 참을 수 없지만

인간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이기신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이길 수 있습니다.

 

 

    ▲주의 종이 하는 '주의 일'이란?

     당신은 하나님이 붙드시는 종,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십니까?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는 외치지 않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무슨 큰 역사를 이루어 '주의 일을 하는'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이 주의 일을 수행하는 내용은 .. 위에서 말한 3가지 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방식으로 주의 일을 수행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는 방식 말입니다.

 

     물론 대외적으로 널리 활동하는 것도 '주의 일'이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진짜 '주의 일'은 .. 그것은 십자가였습니다.

 

     오늘 당신은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