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거울, 광야의 이스라엘 고전10:1~12 11.03.22.설교스크랩, 정리
▲여자는 거울을 자주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교회를 ‘여자, 신부’로 비유합니다.
여자는 거울을 남자보다 많이 보는데
마찬가지로 교회는 거울을 자주 보고 아름답게 꾸며야합니다.
신부될 처녀가 거울을 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예수님의 신부인데 거울을 보지 않습니다.
특히 말세에 기록된 우리의 경계와 거울로 기록된 말씀이 있는데, 본문이 그것입니다.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다 거울이지만 본문의 거울은 다 봐야합니다.
우리가 거울을 봐야 교회에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춰볼 것들은?
▲1. 출애굽/홍해를 건넘/반석에서 물 마심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전10:1~5(각자 찾으세요)
출애굽하고/홍해를 건너고/반석에서 신령한 물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했다는 말로 끝납니다.
일부가 아닌 다수가 멸망했습니다.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홍해(세례를 의미)를 건너고 난 후
‘이제 우리는 애굽과 바로로부터 구원 받았으니 안전하다.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마음이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광야의 힘든 여정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도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으니 (오늘날 구원의 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처럼)
이제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본문에서 ‘구원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시작하였을 뿐이다.
계속 절제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에 들어간 사람들이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2.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마십시오.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겼는데, 왜 다수가 멸망 받았을까요?
그 이유는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나 십일조 같은 종교 문제가 아닌, 삶 속에서 악을 행했습니다.
오늘날도 신앙고백하고, 봉사하고, 심지어는 교회의 직분자도 될 수 있지만.. 문제는 삶입니다.
그것 때문에 목사도 장로, 권사, 소수가 아닌 다수의 성도들도 지옥가는 것입니다.
세계적인 예언 사역자들의 신비 체험에 의하면,
전체 인구 중에 아주 적은 %만 천국에 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서도 상당수 %가 지옥에 간다고 경고합니다.
※이렇게 %수치까지 말하는 것은, 성경보다 더 자세하면 위험하지만 (경각심을 갖기 위한 의도로 이해해 주시고)
다만 성경은, 모두가, 대다수가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그루터기, 남은 자, 좁은 문을 가는 자,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노아의 때와 같다 등의 말씀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만 구원 받을 것이라는 것을 일관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6천년 역사를 통 털어서 그 구원 받은 사람의 숫자는
계시록에서 14만4천(많은 사람을 뜻하는 상징적 숫자)
또는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계7:9
▲3. 그래서 성경이 거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스라엘 백성들만 많이 멸망 받은 줄 알지만
교회에서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나고 있음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니고 우리의 거울인 줄 믿습니다.
11절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저희에게 거울이 되고...
꼭 말세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세지말에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롯의 때요, 노아의 때같이 된다고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지말에 더 거울이 되는 것이므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는데
교회 안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교회 안에 다수가 지옥 가는 상태입니다.
마치 사업하는 것처럼 무조건 큰 교회 이루어놓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위기의식을 갖고 회개를 외쳐야합니다.
‘행함 있는 산 믿음’과 ‘버림받을 수 있음’을 외쳐야 하는데
지금 형편은, 다수가 교회 안에서 지금 멸망 받게 생겼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지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옥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나와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다수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언제나 다수가 지옥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보고, 교회사를 통틀어도
다수가 천국 갔던 시기와 부흥이 일어났던 시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다수가 지옥 가는 시대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다수가 지옥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섬긴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겨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까요? 히12:25~29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은혜는 성령이 임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성령의 감화력이고 말씀대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설교자들부터 성도들을 말씀대로 살게 하려는 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닌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은혜 끼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냥 '설교 좋았다. 은혜 받았다' 이런 덕담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소원, 의지가 불끈 넘쳐나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
이것이 설교자의 목표가 되어야하는데, 그냥 가르치는 것이 목표입니다.
잘 가르쳐서 성도들이 잘 이해하고 '설교를 잘한다. 설명을 잘한다'고 하며 감동하면
은혜를 끼친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머무른 설교자가 많습니다.
설교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로 만들기 위한 은혜를 끼치기 위해’,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은혜를 안 받고 어떻게 신앙생활 합니까?
성경공부와 강해설교, 큐티로 어떻게 신앙생활 합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니... '성경지식'이 아니라 '은혜'를 받아야합니다.
영성, 성령운동, 신사도운동도 마찬가지 입니다.
은혜가 아닌 은사, 능력, 체험을 받게 하는 것으로 초점이 잘못 되어 있습니다.
성경공부도 은혜 받게 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영성, 은사운동도 성경에 나왔으니 하더라도
'은혜 받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물론 성경구절 하나 더 배우면, 그것이 기초와 기본을 튼튼히 해 줄 것입니다.
그러나 늘 거기에만 머물면 안 됩니다.
은혜 받는 것은 좋은 느낌이나 감정이 아닙니다.
변화! ... 나를 바꾸고, 나의 삶을 개혁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바꾸고 성숙시키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고 받는 것이, 기독교의 중심이고 신앙생활이나 사역의 중심입니다.
사역의 성공, 은사, 체험, 교회 성장이 중심이 되어버리면 벌써 탈선한 것입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은 마음이 부드럽습니다. 부드러워야 변화됩니다.
그 부드러운 마음(옥토)에 말씀이 뿌려져야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으며 사람이 변화되잖아요.
◑왜 은혜를 받아야 할까요?
▲첫째, 은혜를 받아야 경건한 삶이 가능해집니다.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12:28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딛2:11~13
성령이 역사하지 않아 은혜 받지 못하면
지식적으로 성경공부 해봤자 자랄 수 없습니다.
성경공부한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경건해지고 자랍니다.
예언, 기적체험, 영성운동 한다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성령운동을 통해 은혜를 받아야 자랍니다. 은혜가 영적인 젖이고 양식입니다.
말씀을 통해, 집회를 참석해도, 그 속에 있는 영양(은혜)을 섭취하는 것입니다.
위 말씀에 보면 '근신함'이 시작입니다. 의로움과 경건의 시작이 근신이고,
이 근신함이 사라지면 의로움과 경건도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근신함은 가난한 마음, 애통함, 말씀으로 두려워 떠는 마음입니다.
정통교회라고 해도 가난한 마음이 없는 교회를 조심해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과 애통함, 말씀에 두려워 떨지 않는 기독교, 교회, 신앙생활은
가짜이고 바리새적인 것입니다.
근신하는 마음이 없으면 모든 것을 잃습니다.
마지막 때에 근신해야 한다고 했는데 목회자, 교단, 교회 안에서 근신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함이니...’ 딤후1:7
그래서 마지막 때에 근신해야 합니다.
몇 시간씩 기도하면서 무례하고 방자히 행하면 무엇합니까?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했고, 근신함이 없는 기도는 종교입니다.
근신의 중요성을 교회가 잃어버렸습니다.
▲둘째, 은혜는 두려운 마음이 생기게 합니다.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히12:28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신앙을 기뻐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했는데 분명히 두려워하고 공경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얘기라고요? 신약에도 많이 있습니다. 한 구절을 보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전7:1’
두려워해야.. 죄에서 떠나 거룩해집니다.
사도 바울도 성숙한 사람인데 버림 받을까봐 두려워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복종하여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앞에 떠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지옥이 실제로 있고, 버림 받는 것도 실제로 존재하므로
영적인 절벽 앞에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니.. 두려워하고 조심함이 마땅합니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것은 성경이 권장하고, 바울도 말합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지옥, 버림 받음, 준엄한 성경말씀이 회복되어야합니다.
진리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사람들이 조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 이것은 큰 은혜입니다.
막연한 것이 아닌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다’는 결연한 의지 말입니다. 시57:7
신앙생활 하는데 은혜 받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결심만으로는 잘 안되잖아요. 그러므로 은혜 받고 하나님을 섬기되 기쁘시게 섬기십시오.
▲셋째, (은혜를 받고서) 광야 여정의 시험들을 이겨야 합니다.
출애굽했는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광야에 들어섰습니다.
광야에 들어섰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있던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일단, 천국에 들어가려고 믿는데
예수님을 믿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악이 4가지 있습니다.
①우상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우상숭배였습니다. 가장 큰 우상은 재물입니다.
사도 중의 가룟 유다처럼, 발람 선지자처럼 돈 때문에 넘어집니다.
돈이 가장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보내는데 돈에 넘어간 성도들이 많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임이 실제입니다.
엡5:5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②음란
고전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2만 3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지금은 노아와 롯의 때와 같이 악하고 음란한 시대입니다.
탐심을 겨우 극복한 사람들이 또 음란 때문에 많이 넘어집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할 것은 현대 문화는 음란 문화입니다.
미술도, 음악도 예전에는 사랑이나 매력 정도를 노래했지만
요즘 음악은 사랑이 아닌 ‘성’을 노래합니다.
가수들은 단순히 노래가 아닌 성적 매력을 나타내어 일종의 성을 팝니다.
만화도, 영화도 스토리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면 되는데 점점 노골적입니다.
옷도 과거에는 예쁘라고 입었는데, 요즘은 섹시하려고 입습니다.
외국은 더 심각하고 문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의 문화는 음란 문화라 너무 일상적이 되다보니, 당연시 여기고 용납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 문화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 심판하십니다.
시대 문화 수준이 낮아지고 지저분해져도 문화가 아닌 말씀이 기준이 되어 심판합니다.
마5:27~30,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간음, 외도, 혼인 외의 성관계 등을 다루는 것이 아닌
마음의 청결부터 다루고 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느냐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으면 안 돼!’가 아니라
그 마음을 품으면 너는 지옥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누가 이 말씀을 바꾸겠습니까?
이런 시대에 이 경고가 얼마나 필요합니다.
요즘 여자들의 옷차림, 인터넷, 영화 등을 볼 때
더욱 이 메시지가 필요하므로 선포가 되어야합니다.
음란이 대중화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을 낮추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시대의 흐름이나 도덕적인 척도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척도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두려워 떨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세상 문화에 휩쓸려 동성애까지 정당화한다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못된 성관계를 맺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 되시기 바랍니다.
③하나님을 시험하는 것
고전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의 경우는 우상숭배와 간음은 금방 이해했는데, 주를 시험하는 것이 의아했습니다.
주를 시험하는 것이 무엇인가?
토마스 맨톤이 지은 <시험 당하신 그리스도>에 나오는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험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검사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또,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이 과연 그 말씀처럼 선하신지의 여부를 알아보려고 하거나
경고의 말씀과 약속의 말씀을 의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 셈이다.
대체로 모든 범죄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킨 그들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을 시험한 것으로 지칭된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즉, 과연 하나님이 보응을 그들에게 가하시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발적으로 죄인 줄 알면서도, 어떤 죄악에 빠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시험하는 셈이다.
그것은 감히 하나님과 싸우려는 것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부추기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과연 경고의 말씀대로 엄격하신지를 시험하려는 행동이며
또한 그분의 진노와 공의와 권능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행동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마치 과장인 것처럼,
실제로는 그런 경고가 아닌 것처럼 간주하고 사는 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가
지금 교회안에 만연되어있습니다.
잘못된 교리와 구원 등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말 회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가?
끊어버리지 않은 죄가 한 가지라도 있으면 천국에 못 가나?
정말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나?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나?’ ... 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과장하거나 거짓말하고 있는 것처럼 안 믿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정말 회개하고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바울이 간 그 길과 참된 신자들이 걸어갔던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의심하니 그 말씀대로 살기 위해 진지하게 결단하고 노력하지 않고
‘에이, 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사는데...’ 라고 합니다.
오래된 신자, 교수, 목사들부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천지니
‘설마 그렇게 되겠어? 그 많은 사람이 다 지옥 가겠어?’
그러나 말씀에는 내 말이 마지막 날에 너희를 심판한다고 했습니다.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요12:48
예수님이 성경에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그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기준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어떻게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들의 안위를 생각할 때 엄청나게 위험한 일들이
지금 교단들과 교회들 안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시험하지 마시고 믿으세요.
‘신율법주의’라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이런 주장은 ‘신율법주의’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말씀대로 회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④ 원망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고전10:10
우상숭배, 간음,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도 심각한 죄이지만
원망은 작은 죄 같아도 작지 않습니다.
원망은 근본이 잘못 되었습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원망하는 것은 주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라 ‘양인가, 염소인가’의 문제라
성경도 원망을 덕의 문제로 보지 않고
‘구원이냐, 멸망이냐’의 문제로 다룹니다.
우상숭배와 간음과 주를 시험하는 것과 함께 실족하는 죄로 다룹니다.
교회 안에서 마음대로 원망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원망은 번져나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봤듯이 다른 영혼들까지 실족시킵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원망하다가 멸망했다고 나옵니다.
약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유1:14~16, 아담의 7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넷째. 은혜를 받아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고전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 받고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교회를 출석했습니다.
그 중에 다수가 멸망했습니다.
말세를 만난 우리의 거울입니다.
구원 받는 사람이 적고 구원 받는 자 중에도
넘어짐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도 많습니다.
고전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 말씀을 하고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아 하나님께 버림 받고
광야에 엎드러져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말하며
이 일이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닌 우리의 거울과 경계로 기록되어 있다고 밝히고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했습니다.
버림 받는 것에 대해 믿지 않는 교회가 많은데 반드시 제거되어야 할 미혹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한 버림 받을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갈5장에서 바울이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항상 대적한다고 말했는데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거듭나면 육신의 소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자도 성령의 소욕이 아닌 육신의 소욕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육체의 현저한 일을 행하고
이런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5:19~23절에 나왔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습니다. (22~23절)
가능성을 열어놓고
분명히 거듭나고 구원 받는 사람이지만 타락하고
지옥갈 수 있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는 말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는 말씀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하길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반드시 알아야 할 말씀입니다.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지 않았다면, 지옥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거듭나도 육체가 이 땅에서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정욕이나 소욕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도, 금지된 것을 원하는 욕구가 있어서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고
죄와 싸우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목회 성공이 문제가 아니고, 이런 삶을 끝까지 지켜나가야 합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생명을 잃으면 무엇 합니까?
남에게 복음을 전파한 뒤 나는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한다는
바울의 두려움이.. 우리 모두에게 실제가 되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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