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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감수성이 살아 있습니까?

LNCK 2011. 5. 3. 12:14

www.youtube.com/watch?v=2ggq_twRl-g

◈영적 감(수)성이 살아 있습니까?      욥3:23      11.04.03.설교녹취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세대

 

▲감수성을 잃어버려 무감각해진 사람들

인생에 ‘3가지 무’가 찾아올 때, 조심해야 한다.

 

-무슨 일에든지 의욕이 없게 되는 무기력한 상태

-무슨 일에도 관심이 없는 심드렁한 무관심한 상태

-무슨 일이든지 감동을 받지 않고 무덤덤한.. 무감동의 상태

 

이 ‘3가지 무’가 나타나면 바로 감수성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감수성을 가진 사람은 설렘을 가진다.

설렘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정말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이런 사랑의 감정이 있을 때,

 

감수성이 살아있으면..

모든 것들을 의욕적으로 일하게 되고..

그리고 감동을 받으면서

또한 참으로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일을 하게 된다.

 

▲사랑, 감수성을 잃어버린 사람의 예

오래전에 유행했던 노래로, ‘이 세상의 끝 the end of the world’이란 노래가 있었다.

‘왜 태양은 빛나는지

왜 파도는 밀려오는지

왜 새는 노래하는지

그들은 마치 이 세상이 끝난 것도 모르는 것처럼 노래하고, 밀려오고 있구나.’

 

내게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갔으니

내게는 그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고, 세상의 끝인데,

이 세상은 전과 똑같이 돌아가고 있으니, 정말 이상하구나..

그런 내용의 노래이었다.

 

사실 세상은 전과 같이 돌아간다.

새는 노래하고,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바람은 불고..

다 똑같이 진행되지만,

문제는 사랑을 잃어버린 그 사람의 마음에는 전혀 감동이 없다.

 

왜냐하면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심드렁하고, 무기력하고, 무덤덤하다.

 

▲오늘 저는 우리 모두의 영적인 감수성에 대해 한 번 질문해 보려고 한다.

여러분, 예배드리고 있는 이 시간에, 예배의 감격을 느끼시는가?

감격을 느끼고 계신다면.. 영적인 감수성이 살아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내 영혼 속에 기쁨을 느끼시는가?

그러면 영적 감수성이 살아있는 것이다.

 

봉사의 기쁨이 있으신가? 주님을 따라가는 제자도의 기쁨이 있으신가?

그뿐 아니라,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내 마음속에 있는가?

각자 자신에게 질문해 보시라.

내 생生에 감수성이 있는가, 아니면 다 죽어버려서 무관심, 무덤덤, 무기력하신가?

 

 

욥을 통해 보는 영적 감수성의 위기

 

▲영적 감수성이 예민했으나, 위기를 당하게 된 욥

욥의 경우, 그가 처음에 건강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을 갖고 있을 때,

그는 너무나 영적 감수성이 뛰어났다. 늘 기뻐했고, 늘 감사하는 생활을 했다.

자녀의 생일날만 되어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만큼 영적 감수성이 예민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왔다.

건강이 떠나갔고, 재물이 떠나갔고, 자녀들도 떠나가고 말았다.

그전까지 그렇게 좋아보이던 것이, 하나도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출생을 한탄한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

마치 세상의 끝이 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을 .. 욥이 가지게 되었다.

 

보통 사람은, 여기서 포기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끝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다시 또 일어난다.

 

세상에 모든 것이 사라져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하나만 살아 있으면,

모든 것은 의미가 있고, 다시 시작될 수 있다.

 

▲1. 하나님께 둘러싸인 욥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3:23

 

욥은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런 고백을 한다.

바로 자기는 ‘하나님께 둘러싸인 자’라고 고백한다.

 

물론 이 말은, 부정적인 말이다.

하나님이 겹겹이 자기를 둘러치고 있어서, 자살할 수도 없다는 말이다.

답답하다는 뜻이다.

‘내가 죽고 싶은데도 하나님이 겹겹이 막고 계셔서 죽을 수도 없구나..’

그런 뜻이다.

 

내 인생을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에, 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는 그 시간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번에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제가 십자가를 묵상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귀한 팔을 보면서,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세상과 우리사이에 우리를 가로막고,

죄와 절망과 저주 사이의 모든 비통 속에 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로막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으로 느껴졌다.

 

십자가위에서 주님은, 우리를 막아주시고 감싸주셨다.

죄로 인한 멸망과 슬픔에서 우리를 막아주시고,

절망과 자포자기의 삶에서 우리를 막아주셨다.

마귀의 저주와 횡포에서 우리를 다 막아주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도 막아주고 계신다. 우리를 감싸고 계신다.

그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기뻐하며 승리하며 살 수 있게 된다.

 

내가 하나님께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고 믿는 자는 욥3:23

영적인 감수성이 살아난다.

그래서 막 기쁘고, 감격이 있다.

예배를 드려도 너무너무 감사하고 기쁘게 드릴 수가 있다.

 

▲2.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3:23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알았지만,

환경이 너무 극도로 어려우니까, 그 사실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나는 길이 아득하구나.’ ↑

자기 길이 아득한 자라고.. 그는 고백했다.

 

내 삶을 둘러싸고 사랑으로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부족할 때

길이 아득하다고 말하게 된다. 

 

길이 아득하다는 뜻은.. 갈 길은 멀고, 힘은 없고,

또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욥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 얼마든지 정신을 차린다.

이게 하나님의 사람이다.

 

길이 아득하다고 말하던 욥의 입에 진짜 고백이 나온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23;10

 

여러분, 그렇다. 욥은 분명히 알았다.

‘내가 가는 그 길을 주님이 아시나니..,’

하나님이 자기 길을 아시므로, 이젠 아득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시나니 그가 자기를 연단하고 난 다음에

순금, 정금처럼 나오게 되리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다.

 

여러분, 길이 아득하다는 것도 우리의 느낌에 불과하다.

현실 속에 사는 우리의 생각이 그럴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길이 활짝 열려 있다.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그 길은 잘 진행되고 있다.

 

내게 아득할 뿐이지, 하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다.

나를 둘러싸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이 지금 나를 연단하고 계신다.

연단이 마쳐지면 우리는 정금같이 나오게 될 것이다.

 

▲삶의 의미가 있어야 살 힘을 얻는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1942년에 악명 높은 나치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다.

 

거기서 3년 동안 생활 했는데, 그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모든 것이 없는 상태이지만,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기의 선택의 자유이었다.

 

절망중이라 생각하지 않고 희망이 있다고 선택할 수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의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객관적으로 그 모든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까, 누가 끝까지 살아남는가?

의미를 발견한 사람, 내가 풀려난 다음에 무엇 무엇을 하리라,

분명히 살아갈 이유가 있는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리는 풀려난다’는 유언비어가 떠돌고 있었을 때

사람들은 죽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거짓으로 밝혀진 다음에는,

사람들이 급격하게 죽어나가는 것도 목격했다.

 

(여러분, 예수 믿으면 당신은 성공할거야! .. 똑같은 거짓 희망이다.

이런 거짓 희망을 가지다가는.. 그것이 사라지는 날.. 크게 실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그 자체로.. 지금 이미 행복한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아우슈비츠의 삶을 전부 기록했다.

조그만 종이만 생겨도.. 거기에다 다 기록해서, 그 종이를 모았다.

 

가스실로 가는 사람이, 자기가 가진 빵을 웃으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이걸 먹고 꼭 끝까지 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가는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도 기록했다.

 

기어이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풀려난 다음에 그는, 자기 기록을 바탕으로 책을 썼다.

<죽음의 포로수용소에서>

 

그는 그곳에 있는 동안에, 심리학의 한 부분을 정립했다.

이른 바 ‘로고테라피’ .. 번역하면 ‘의미 요법’이다.

사람은 의미로 산다. 목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예수와 의미요법> 이런 책들을 그가 기록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지금까지도 주고 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도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길이 막혀 있고, 아득하다고 하는 말 대신에,

하나님이 내 길을 인도하신다는 귀한 생각을 선택할 수 있다.

 

내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님의 길은 분명하며 지금도 나는 그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선택하고,

믿음으로 선포해야 한다.

 

 

▲3.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계속되는 고통 속에 있던 욥은, 죽기를 원했다.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죽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 때문이었다.

자기 삶을 다 둘러싸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니, 죽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밤에 잠을 자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 이대로 그냥 영원히 눈을 감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다. 창틈으로 햇살이 비춰든다.

영원히 잠들고 싶었는데, 아침이 되고 눈이 떠졌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바로 이 말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욥3:23

  

그는 답답했을 것이다. 죽을 것만 같은데, 숨이 쉬어지는 것이 너무 신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숨을 쉬고 있다는 자체 하나 만으로도

우리는 놀라운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오늘도 해가 떠올라 빛이 내게 비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숨을 쉬고 있고, 생명의 빛이 내게 비취고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에게 진행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비록 고난의 형태이긴 하지만..

 

내게 생명이 있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숨을 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늘 아침에 빛을 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매일 매일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산다.

절망의 권세를 이기고 산다. 슬픔의 권세를 다 이기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

 

 

욥 같은 시련을 극복하고 영적 감수성을 되찾은 사람들

 

젊은 나이에 일찍 주님의 부름을 받은 고 김창섭 집사님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이 난다.

루게릭 병에 걸려서 점차적으로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마지막에는 눈동자만 남기고 다 마비되었다.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눈동자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컴퓨터인데 아주 신기한 것이,

눈으로 깜박거리는 신호를 컴퓨터가 인식하여, 그것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마치 모스 부호를 치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리며 신호를 보내면,

컴퓨터가 그것을 인식해서.. 문장을 만들고.. 그 문장을 컴퓨터 기계음이 읽어준다.

 

제가 심방을 갔더니, 제게 이렇게 말했다.

‘자제분 결혼식을 축하해요!’

 

제가 그 분의 손을 꽉 잡아 주었다.

‘목사님 오셔서 감사해요!’ (컴퓨터의 기계음이었다.)

 

얼마나 그 마지막 말이 제 가슴을 파고들든지..

 

여러분, 마지막 눈동자 하나만 움직일 수 있어도,

우리는 남을 축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다.

 

만나는 사람을 축복해 줄 수 있고, 기도해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오늘도 다시 눈을 떴나?’ 하는 자리에서

얼른 빠져 나와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시고, 내 생의 의미를 발견하시고,

무감각, 무덤덤, 무기력이 아니라,

감수성이 풍부한..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되시기 바란다.

 

▲삶의 의미를 발견한 여자 중학생

가난한 시골 개척교회 목사님의 딸이 있었다. 중학생이었다.

동생이 둘 있어서, 모두 5식구가 단칸방에서 아주 어렵게 고생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목포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차를 타고 가다가, 그만 교통사고가 났다.

어머니는 즉사했다. 두 동생은 전치 50주, 거의 죽은 목숨이었다.

 

그 절망의 상황에서 이 어린 여중생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있었다.

그는 절망하지 않았다. 자기를 감싸고 있는 하나님을 느꼈다.

그는 마음으로 4가지를 결심하고 하나님께 이렇게 자기 결심을 고백 드렸다.

 

‘-하나님, 엄마대신 제가 아빠를 잘 보살피겠습니다.

-병상에 두 동생을 엄마처럼 제가 보살피겠습니다.

-제가 골프를 하고 있으니, 근력을 키워서, 훌륭한 골프 선수가 되겠습니다.

-제가 최고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서, 지금부터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 2008년 여름에,

세계최고 권위의 브리티시 오픈 골프대회에서 그는 최연소 우승을 거두게 된다.

그가 바로 미소천사 신지애 선수이다.

 

▲사건보다 해석이 더 중요하다.

찰스 스윈돌이 말했다.

인생에서 내게 벌어지는 일이 10%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반응은 90%를 차지한다.

사건보다 해석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게 생긴 일보다,

그 일을 대하는 내 반응이 훨씬 더 큰 역할을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내게 비취는 빛을 보시기 바란다.

 

한 줄기 빛만 있어도, 내가 숨만 쉴 수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를 느끼고, 보호를 느끼고, 섭리를 느끼면서

주님께 감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