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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마친 후의 허탈감

LNCK 2011. 7. 15. 16:17

세미나 마친 후의 허탈감             펀 글

 

세미나를 마친 직후에는 껍데기만 남은 것처럼 허탈해집니다.

긴 강의로 인해 에너지가 소진된 탓도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세미나가 끝난 후에 참석자들이 평가서를 제출합니다.

이때 대부분이 감사의 표현을 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입니다.

 

“세심한 배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평생 목회사역의 큰 모델을 보고 배웠습니다.”

“어두움과 혼란가운데 빛으로 살아가시는 목자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멈추지 않는 사도행전의 역사를 눈으로 보았습니다.”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가장 귀한 사명을 분명히 하여 목회에 임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의견을 남기는 분들도 있습니다.

“모든 교인이 마치 가정교회를 전파하는 전도사나, 세일즈맨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토요일 목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에 목회자를 설득하려고도 하고,

강의를 잘못들은 것이 아니냐고 비아냥대기도 했습니다.”

 

세미나 직후 이런 부정적인 글을 읽으면, 자신이 폭삭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긍정적인 소감을 말했고, 소수만이 부정적인 소감을 말했는데

제가 왜 이처럼 과민 반응할까요?

 

저는 의아해 하다가, 제스스로 답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신약 교회 같다는 주위 분들의 칭찬을

자신도 모르게 사실로 믿게 되어서,

자그마한 부정적인 평가도 못 참아하는 것 같습니다.

 

또, 최선을 다해서 섬겼다는 자부심 때문에, 감사함이 없는 것 같으면

분개하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부족한 면을 직시하고,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 때문임을 새롭게 깨닫고,

오로지 하나님의 칭찬만을 바라면서 섬기기를 다짐할 때,

허탈감이나 낙심에 빠지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최영기 목사 칼럼 스크랩

 

 

◑여호와 샬롬을 체험하기 전에           삿6:22~24          신앙칼럼 스크랩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삿6:22~24 

 

때때로 우리가 주님의 임재 가까이로 나아가게 되거나,

주님의 강권적인 찾아오심이 임하면,

우리는 기드온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삿6:22,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이사야도 성전에서 비슷한 고백을 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사6:5 

 

또 얍복강에서 야곱을 찾아왔을 때, 야곱은 거의 죽을 뻔 했습니다. 환도뼈 부러지는 것으로 끝났지만요. 

모세가 애굽으로 떠날 때, 하나님은 그를 죽이려고 찾아오셨습니다. 출4:24~25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잘못 만나면.. 까딱하다가 죽습니다. 물론 진짜 죽지는 않습니다.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전에, 너 자신을 스스로 성결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보여주십니다.

그때 사람은 스스로 깨닫습니다. 까딱 잘못하면 내가 까불다가 죽겠구나! 

 

바로 이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여호와 샬롬’을 알려주십니다. 삿6:24

 

요지는, 우리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체험할 때는,

그 전에 먼저 ‘죽는 듯한’ 경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아직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서워서 죽는 경험’이 아직 없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는,

거룩하고/무섭고/죽일 듯이(진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존재 자체가 무서움)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분은, 우리에게 ‘여호와 샬롬’이 되어주십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드온이, 단 3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메뚜기 떼와 같이 수많은 미디안 군대 앞으로 싸우러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샬롬은 무슨 의미입니까?

히브리어 샬롬은 “온전함, 건강,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건강한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주어지는 은총들입니다.

 

이것은 초조하지 않고 내부적, 외부적으로 모두 평화로우며,

영적으로 또한 감정적으로 안식하고 있는 편안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단,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임재 때문에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런 무서운 것, 무서운 분.. 내가 안 받고 말겠다고요?

그걸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결정합니다.

 

주님이 갑자기 질병으로, 사고로, 망함으로.. 또 다른 모습으로, 갑자기 나를 찾아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내가 꼭 죽을 것 같지만, 당황하지 마시고,

결국은 ‘여호와 샬롬’의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중간에 죽는 경험(회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겉은 마치 ‘슈렉’처럼 무서울 수 있지만,

결국은 자기 자녀들에게 그분은, ‘평화, 샬롬’으로 나타내십니다. <편집자 글

 

 

........................ 이하 녹음 안 함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사6:1-13          출처

 

▲서론/ 예언자 이사야가 활동하던 당시 유다에는 웃시아라는 위대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에 유다 왕국은 외세로부터 강성대국을 누렸습니다.

종교적 열정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고

예루살렘 성전은 언제나 순례자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현미경으로 예루살렘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사회 전반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종교지도자들의 권력남용과 종교적 조작행위는 도를 넘어섰습니다.

 

정의로워야할 하나님의 도시에는 불의와 폭력이 난무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는 언약백성다운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날 위대한 왕 웃시야가 서거합니다.

정국은 패닉상태였고 국가의 앞날은 어두웠습니다.

주변 강대국인 앗시리아의 군사적 영향력 아래 편입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이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사야는 하늘의 성전에 계시는 천상의 왕을 보게 됩니다.

하늘 보좌에 좌정하시고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위대한 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들이 서로에게 화답하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노래할 때

이사야는 거룩한 두려움으로 전율하였습니다.

공포에 질린 두려움이 아니라 무한히 거룩하여

누구도 감히 그분 앞에 설수 없는 그런 두려움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거룩성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부적격성과 부정함을 고백하게 됩니다.

 

사실 신앙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경험’이라 함은 단순히 어떤 외형적이고 감각적인 황홀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거룩성 앞에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1. 이제 이사야는 더럽고 추악한 백성들을 위한 사역자로서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가 되기 위해, 그는 먼저 그의 입이 깨끗해야만 했습니다.

입은 말씀 사역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사6:6~7

 

▲2. 그러나 이사야가 받은 사명은 즐거운 복음전도자의 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패역하고 완악한 백성에게, 심판과 형벌의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메시지였습니다.

오히려 설교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마음은 더욱 완고하고 완악해 진다는 것입니다. 사6:9-10

 

그러나 이사야는 백성들의 입맛에 맞는 설교를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수고 허물고 깨뜨리고 뽑는 설교를 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패배와 깨어짐과 내려놓음이 선행될 때

비로소 온전한 회복의 은혜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지나지 않고는 영광스런 왕의 자리로 올라가는 길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 영광의 하나님을 대면하여, 내 입이 깨끗해지고, 반대 속에서 더욱 담대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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