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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1

인생의 굴곡 의식, 성도에겐 없어야

LNCK 2011. 9. 23. 10:48

◈인생의 굴곡 의식, 성도에겐 없어야          미1:2~3        11.08.12. 설교스크랩


 

▲성도에겐 굴곡의식이 없어야 한다.

인생의 굴곡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또 불가항력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인생의 침체기절정기

그 굴곡의 반복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성도에겐

그런 굴곡 의식(개념)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에게 ‘영적인 신앙심의 굴곡’은 있습니다.

신앙심이 침체될 때가 있고, 절정으로 치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삶에는 굴곡에 대한 개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삶의 굴곡’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내게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굴곡>은,

        개인적인 감정의 기복, 느낌과 기분의 상하 굴곡

        또는 사람의 직업적 출세와 실패의 상하 굴곡을 모두 포함하는 뜻임.   

 

▲공수부대 예화를 들어봅니다.

공수부대 요원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예를 들어 아마존 밀림 위로 가서, 거기 상공에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높은 곳에 떨어지는 자도 있고, 낮은 곳에 떨어지는 자도 있고,

강물에 떨어지는 사람, 습지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가지가지예요.


공수부대 요원은,

내가 좋은 자리 떨어졌다, 나쁜 자리 떨어졌다.. 불평할 수 없는 겁니다.

그냥 그 주어진 대로, 떨어진 자리에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거예요.


우리 삶이 그렇다는 겁니다.

오늘 하루는 좋은 겁니까, 나쁜 겁니까?

그런 게 없어요.


내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정말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하루 하루, 직장생활 가정생활을

낙하산 타고 떨어진 대로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겁니다.

자기가 떨어진 자리에서 불평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가정이면 가정,

직장이면 직장,

내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냥 그 하루를 살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날 하루 사는 동안에 전체 내 가정의 역사,

내 인생의 역사, 나라의 역사, 이 지구의 역사는.. 누가 책임질 겁니까?


하나님이 끌고 가십니다.

(걱정도 팔자예요. 내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책임 지십니다.

 

그냥 나는, 내가 낙하산 타고 떨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면 됩니다.

 

자기가 처한 자리가 높든지, 낮든지..

그런 굴곡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아예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예언


본문에서 미가는 이야기합니다.

 

미가서 서두에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죄악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전에

웅장한 서문으로서 산과 골짜기의 이야기를 하면서

인생에 있어서 선민들이 굴곡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죄악의 열매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굴곡이 없을 수 없는 게 인생 아닙니까?


굴곡의식이 뭡니까?

절정에 도달하게 되면 절정에 오래 머물기를 원하고,

골짜기에 빠지고 나락에 떨어지게 되면, 산꼭대기를 향해 올라가고 싶어 합니다.


이 의식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선민을 멸망시키고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죄악의 열매들의 뿌리가 된다는 겁니다.


이런 굴곡의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성도의 정체성을 상실하는, 죄악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얘깁니다.


비유적으로 심장박동 그래프가 있습니다.

병원 입원실에 가 보면,

심장박동 그래프가 ‘산봉우리와 골짜기’ ∿∿∿ 모양을 반복하면서 지나갑니다.


그런데 심장박동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수평면으로 쭉 그려진다, 이게 죽은 겁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심장박동 그래프처럼,

어쩔 수 없이 봉우리와 골짜기, 절정과 나락을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런데 미가는, ‘그게 아니다!’는 거예요.

그렇게 오르내림의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 한, 신앙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미가서1:3~4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의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그 아래에서 산들이 녹고 골짜기들이 갈라지기를 불 앞의 밀초 같고

비탈로 쏟아지는 물 같을 것이니..’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심판하실 때,

이 땅에서 높은 곳을 발로 밟을 때,

그때 산골짜기가 양초가 녹아내리듯 녹아내리고 골짜기가 무너질 것인데

마치 홍수 때 골짜기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그렇게 무너져 내릴 것이다’ 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심판 때에 산과 골짜기가 없어질 것이라는 거예요.


▲‘높은 곳’이란?

이건 비유적으로 하신 말씀에요.

‘높은 곳’은 상징적인 의미가 복합적으로 들어있습니다.


1)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 할 것 없이,

높은 곳 좋은 자리마다 산당을 지어놓고 우상숭배를 해서, 높은 곳이라는 뜻도 있고,


2) 또한 그 우상숭배의 궁극적인 심리적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로 산봉우리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나락으로 떨어진 모든 사람은 본능적으로

골짜기위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곳으로 올라가려 합니다.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자리로 올라가려 합니다.


그래서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싫어하고

떨어진 자들은 부지런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이런 ‘높은 곳-골짜기 의식’에서부터 우상숭배가 나오고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죄악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맺혀나간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높은 곳’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내려오셔서

이 땅에서 높은 곳을 발로 밟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시고 강림하사 땅의 높은 곳을 밟으실 것이라. 믹1:3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정상이요 절정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우리가 골짜기라고 여겼던 그것들조차도

골짜기가 아닌 것이 판명이 될 거라는 것이에요.


이사야서에도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적용  


그러면 신앙인은 어떻게 산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사람이 굴곡의식 없이 어떻게 살라는 것이에요?

‘내가 지금 잘못 되고 있고 나락에 떨어져 있다’

이런 의식이 없이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믹1:3에 ‘하늘의 거처에서 하나님께서 나오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은 나락(골짜기)에서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위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발을 떼서

그 하나님의 거처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겁니다.


이 땅위에서 높은 산봉우리로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아예 하늘 위로 올라가버리는 겁니다.


하늘 위로 올라갈 때, 어떤 시조가 생각납니까?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절대로 하늘 아래에 있습니다.

모든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원하고 있는 인생의 절정이라는 것이

다 하늘 아래 있는 것이에요.


그 하늘 위에 올라가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 하는 욕심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 즉 천국 생활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세상을 탈 속세 한다는 뜻은 아니고, 초월(넘어서)해서 사는 것입니다.


나락을 벗어나 높은 곳으로 가려 할 때, 신앙인은 반드시 타락하게 됩니다.

연속극에 보면,

종종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대비되어 나오면서,

가난한 사람이 부자되기를 꿈꾸는 (부잣집 아들과 결혼을 통해서라든지)

그런 플롯plot이 늘 등장합니다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삶을 그래프로 그린다고 한다면

심장 박동기의 수평선    으로 표시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죽은’ 것입니다.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그래프 ∿∿∿가 아닙니다.

     심장박동기의 수평선(직선)으로 표현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가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귀한 자리에도 처할 줄 알고 비천한 자리에도 처할 줄 안다’ 빌4:12


이게 무슨 얘깁니까?

신앙인에게는 나락의 자리나 절정의 자리가 있을 수가 없고, 구분이 없다는 얘깁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린 특수부대 얘기를 다시 드립니다.

특수부대 요원들이 비행기를 타고 작전에 투입될 때

산봉우리에 떨어졌다고 절정의식을 갖는 게 아니고, 골짜기에 떨어졌다고 나락의식을 갖는 게 아니에요.

꼭대기, 꼴짜기.. 어디에 떨어지든지, 그 자리에서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사업을 잘해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게 신앙인이 아닙니다.

자식을 기르는 사람들은, 자식을 일류대학 보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게

신앙인의 삶이 아니라는 겁니다.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지금 내가 가난합니다. 사업이 잘 안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이 땅에서 떠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마음이 가는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아버지와 만나서 평강을 누리고 행복과 기쁨을 누린 상태에서

내 마음의 평강을 유지하면서 이 땅으로 보내져서 사업이 실패한 현장으로 왔을 때,

그 사업이 실패한 현장은 나락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사명지이지, 나락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업체 회장 자리로 보냈다 합시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실 낮은 골짜기보다, 높은 봉우리가 더 위험한 자리입니다.

빈곤에 처할 때보다, 풍부에 처할 때.. 더욱 정신 차릴 때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교만해서 꽈당 넘어집니다.

주님이 그 ‘봉우리’를 짓밟으실 것입니다. 믹1:3  

 

▲등고자비 登高自卑 라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기를 원하면 낮은 데서부터 시작하라.’ 는 뜻입니다.

낮은 데로부터 시작해서 올라가라! - 듣기에는 너무 멋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니에요.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는, 기독교 신앙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낮은 곳에서 이 땅위에 있는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게 해주는 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대해 죽는 것이, 구약의 안식일이고 제사고,

신약의 십자가입니다.

내 육신이 죽어서, 하늘 위로 올라가는 겁니다.

그 높은 하늘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세상을 초월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이 땅의 삶이 어렵습니까?

반대로, 이 땅의 삶의 형편이 번영했습니까?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입니다.

신앙인은 산봉우리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위로 올라갑니다,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러니까 지금의 여러분의 상태는 나락이 아니에요.

지금의 여러분의 상태는 절정도 아니에요.


여러분의 절정은 이 땅위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떠난 하늘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절정은 그 땅에서 사명을 가지고 보냄 받은 자로서

한 시간을 살고, 하루를 사는 데서 연장되어져 갑니다.


▲정리하면 

굴곡 의식(높낮이 의식) - 이것이 신앙인의 삶을 망치고, 선민 됨을 훼파합니다.


‘오늘도 정상의 산봉우리를 향하여 높은 곳을 향하여 한 걸음 더 나가자, 하나님 나 도와주세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고,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에요.

인생의 굴곡 의식, 선민에게는 없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점점 꼭대기 정상으로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깊어질수록, 세상 욕심에 대해 점점 더 자유하며 사는 것입니다.     *관련글  믿으면 자유인이 된다

 


................ 관련글 .................



▶C. 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기가 좀 더 선하다, 좀 더 낫다, 좀 더 남보다 거룩하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고, 악마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라.”


▶천국에서 누가 더 큰 상을 받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수 애양원교회를 섬기시다 천국가신 양재평 장로님 계십니다.

이 장로님은 15세에 한센병(나병)에 결렸습니다. 

그 후 한센병에 걸린 부인과 결혼해서 이제 살게 되었는데 26세에 실명까지 합니다.

부모님은 6.25전쟁 때 공산군에게 학살당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장로님은 사랑에 원자탄으로 불리었던 손양원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여수 애양원교회(지금은 성산교회) 장로님으로 섬기시다가

2007년 84세를 일기로 소천하십니다.


그런데 한센병으로 정상인과 같이 생활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많은 한센병 환자들을 기쁨과 사랑으로 섬겼어요.

늘 주의 말씀을 묵상해서 신약을 거의 다 외울 정도로 말씀을 묵상하였고,

그다음 돌아가실 때 까지 1천명이 넘는 이 한센병 환자를 돌보시다가,

모든 사람이 그 은혜 감사하고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장로님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한센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이 나를 구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은혜였습니다.

이런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쉽게 하나님께로 돌아서지 않았을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한센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혹시 누구를 벌주고 재판하는 일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센병에 걸리는 바람에 남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 수 있으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렇게 보잘것없는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제가 이 병에 걸린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으니

병든 우리까지도 귀하게 보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소망으로 행복합니다."


여러분 한센병으로 온몸이 문드러지고 남이 볼 때 참 비참한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 심령천국이 이루어져 있어서 감사하는 거예요.

감사하고 또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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