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에 알만 빠지면.. 욘4:1~11 11.08.11. 인터넷설교스크랩
◑복어 이야기
▲기가 막힌 복어 맛
신학교 시절에 어느 교수님께서 점심식사를 한번 사주신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이 저를 데리고 가신 집이 바로 복어매운탕 집이었습니다.
그때 말로만 들었던 복어매운탕을 난생처음 먹어본 거예요.
보글보글 끓고 있는 그 매운탕 안에서
콩나물하고 미나리 복어 살을 꺼내서
와사비 간장에다가 찍어 먹는데.. 아! 그거 맛이 있어요.
교수님도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그 얼굴에 땀을 닦아 가시면서
그렇게 맛있게 드실 수가 없어요.
그 뒤로 저도 복어매운탕에 마니아가 됐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이게 굉장한 요리더군요.
철갑상어의 알(캐비어) 요리,
떡갈나무 숲속 땅 속에서 사는 버섯(트러플) 요리와
유럽에서 유명한 거위 간 요리인 푸아그라와 함께
세계 4대 진미 중에 복어가 들어가더라고요.
▲그런데 ‘복어 한 마리에 물 서 말’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이 생긴 이유는 독 때문에 그래요, 독.
복어가 그렇게 맛이 있는 고기인데 알이 있잖아요,
알은 테트로도톡신 이라는 독이 들어있는데
치사율이 80%에 달하고, 청산가리에 10배의 독성을 담고 있습니다.
알 뿐만 아니에요, 복어의 종류에 따라서
간에나, 내장에나, 껍질에도 독이 있기 때문에.. 그걸 씻어내야 됩니다.
그래서 ‘복어 한 마리에 물 서 말’ 이라는 속담이 생긴 겁니다.
많은 물로 씻어 내지 아니하면.. 잘못하면 큰일 나지요.
▲여러분, 알을 뺀 복어는 온 세상에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 알(독)에서 부화된 복어고기는 그렇게 맛있는데
그 알은 먹었다가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30분 뒤부터 독성이 발동되기 시작해서
한 시간 반 ~ 8시간까지 지나면 다 죽습니다,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해독제도 없다고 합니다.
씻어내는 수밖에 없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은 복어 마니아이십니다.’ 라고 비유적으로 말해 봅니다.
(비유적인 설명이니까, 표현이 과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인간은 복어와 같은 존재입니다.
복어마니아가 복어를 좋아하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인간을 좋아하신다는 뜻입니다.
단 반드시 복어 알을 빼 내야 해요.
복어 알을 갖고 있으면, 복어를 좋아하실 수 없습니다.
알의 독성 때문에.
그 알이 뭡니까? 그게 바로 죄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미운 일본 극우파 의원들
요즘 언론에, 독도 망언을 일삼는 일본 극우파 의원들이 종종 나옵니다.
참 보기에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보실 때, 일본 극우파 의원의 인격 속에서 ‘죄’라는 알만 빼내면,
하나님에게는 그들이 마치 복어국과 같은, favorite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하시고, 너무 예뻐하시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오해가 있습니다.
어떤 오해가 있냐 하면, 오늘 요나가 보여주는 오해예요.
‘내가 하나님이 선택해 주신 선민이다’ 이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러한 마음의 기조로부터 어떤 상태가 발생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내 마음에 안 맞거나, 그 사람이 싫어지게 되면,
하나님도 그 사람을 나와 같이 싫어하는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게 되면
서로가 하나님 편이 되면서
하나님은 마치 자기편인 것처럼 얘기하면서, 상대방을 마귀 편이라고 얘기해요.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도 똑같이 싫어할 것처럼 여기게 되는 증상이 있습니다.
이게 미숙함의 문제라는 것이에요.
▲요나가, 그런 이유로, 니느웨 사람들을 싫어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욘4:5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그걸 구경하겠다고, 라이브로 목격하겠다고,
(아마 40일이 지난 후에) 지금 산에 올라가서, 성이 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요나의 심리가 잘못된 것은,
‘선민인 내가 저들을 싫어하니까, 하나님도 저들을 싫어하신다’고
스스로 결론 내려버린 것입니다.
‘복어에서 알만 빼면, 복어 마니아가 되시는 하나님’을
요나는 전혀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용감하게 하나님께 대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 왜 성 내냐? 네가 성 낼 권리가 있느냐?”
이렇게 말씀하고 요나서가 끝납니다.
◑적용하면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누구를 굉장히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 하십니다.
‘OO야, 네가 성내는 게 마땅하냐?’
그러면 우리는
‘제가 죽을지언정 마땅합니다, 저 사람 그대로 두시려거든 차라리 나를 죽여주세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미 회개한 상태임을.. 내가 모르는 것이지,
알아도.. 내가 인정을 하기 싫은 것인지,
아니면 과거에 내가 그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깊어서인지..
‘복어에서 알만 빼면, 복어 마니아가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는 서로 미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A집사, 너무너무 미울 수 있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서로 얼마나 미운지, 서로를 ‘비단구렁이’라고 불러요.
서로를 서서히 칭칭 감아 질식시킨다는 거지요.
그러나 비단구렁이 같은 그 장로님에게서 ‘알’(죄)만 제거하면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복어 성도’가 됩니다.
내가 아무리 미워해서
내 마음에 적개심과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대상이 있더라도,
그에게서 죄라는 알만 없애면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아하시는 ‘복어 성도’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자식을 기를 때도 마찬가지에요.
이 세상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다 ‘알 품고 있는 복어들’이에요.
하나님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독성이 있는 알이 빠지기 전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세상에서 잘 나가는 복어, 빛나는 복어, 돈 잘 버는 복어들
이런 복어로 키우려고 하지 마세요!
‘알(독, 죄)을 제거한 복어’로, 즉 늘 회개하는 자녀로 키우는 것입니다.
그가 정말 훌륭한 부모요,
자녀를 위해 올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는 부모입니다.
▲알을 어떻게 뺍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며 묵상할 때,
그 머리에 가시면류관 쓰여 있지요?
내 머리를 쓰지 않는 것이, 죄의 악을 제거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머리를 쓰잖아요? 그게 죄에요.
하나님 앞에서 내 자아가 (살아서) 내 인생의 일들을 스스로 손대지 않습니까?
내가 내 인생의 길을 찾아 떠나지 않습니까?
그게 죄에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최고로 말고
다른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까? 그게 죄에요.
그런 내 자아, 내 생각, 내 판단, 내 감정
이 모든 죄의 알들을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달려 죽으면 되는 거예요.
▲마치는 말
사람을 대할 때에, 내가 아무리 싫어해도,
‘저 사람 속에서 죄악의 알이 빠져나가서,
하나님이 너무너무 좋아하실 '복어'가 되었다면’
나도 그를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상대방을 대하는 관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그를 아무리 사랑해도 (예를 들면 내 자녀)
‘그 속에서 죄악의 알이 빠져 나가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받는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죄의 권능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녀로 키우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을 볼 때에, 이렇게 우리 눈이 좀 성숙해질 때가 되지 않았나요?
우리는 너무 육신의 눈으로, 상대방을 보고 있지 않나요? 요나처럼요!
내 감정의 거품에 매여 허탄한 일을 우리가 도모하는 중에는
하나님께서 너무너무 좋아하실 사람들을.. 내가 다 묵살하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는 궤도를 이탈해서, 딴 방향으로 달리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늘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께 날마다 회개해서,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정말 복어국 진미를 드시듯이 기뻐하시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이런 인정을,
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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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각도> 펀 글
사람이든 식물이든 물건이든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위치와 각도가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아름답게 보이기도 하고, 추하게 보이기도 하며
날카롭게 보이기도 하고, 부드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사진작가들이 카메라를 들고 그냥 찍지 않고,
그 각도(앵글)를 잡으려고, 이리 저리 카메라를 돌려대며 애를 쓴다.
우리는 나무 한 그루를 옮겨다 심을 때도,
보기에 좋은 위치와 각도를 잡아 심는다.
아무렇게나 심지 않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명 그 사람에게도 좋은 점이 있을 텐데
그것은 찾아보지 않고,
자기가 보고 싶은 방향과 시각으로만 줄곧 바라보면서,
그를 미워하거나 무시한다.
사람은 그가 누구냐인 것보다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의 중요도와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
오늘은 그를
어제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으면.. 한다.
그러면 사람마다 다른 성격과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통해
새롭고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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