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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동사로 본 하늘 여정

LNCK 2011. 10. 1. 16:40

◈다섯 동사로 본 하늘 여정                히11:23~27            11.07.31.설교녹취

 

 

▲신앙생활은 천로역정 

성경은 크리스천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설명한다.

본향, 천국을 향해가는 여행으로 표현한다.

 

존 번연이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을 썼는데,

천국을 향해가는 순례자의 길’이란 뜻이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로, 천국의 순례자/나그네로서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 이 ‘순례자/나그네로서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 이것이 설교의 주제이다.

 

이 설교 제목이 <다섯 동사로 본 하늘 여정>으로 잡은 이유는,

제가 어느 날 성경을 읽어가던 중에,

본문 히11:23~27에서 다섯 동사가 제 눈에 갑자기 확 들어왔다.

 

그러면서 ‘야, 그래 맞아! 이런 다섯 동사의 자세로

천국을 향하는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례로 살펴보면...  물론 이 5동사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전체가 ‘일맥상통’한다.

 

 

◑1.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히11: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3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가 그랬듯이, 무서워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천국 백성들은, 무서워할 대상과, 무서워하지 말아야할 대상을 잘 구별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반드시 두려워 해야할 대상이 있는가 하면,

동시에 절대 두려워해서는 안 될 대상이 있다고.. 가르친다.

 

마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하나님)를 두려워하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해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질 것인가?

1) 그것은 하나님과 친밀해야 한다. 역설적 진리이다.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2) 말씀과 친근하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다.

‘말씀을 인하여 떠는 자들’ 이란 표현이 성경에 나온다.  사66:2, 5 

말씀에 친근히, 깊이 들어가다 보면, 떨며 주님을 경외하게 된다.

 

정리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

바꾸어 말해도 마찬가지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주님과 친밀하다.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성경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빠진다’고 했다. 잠29:25

       사실 사람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다. 그것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두려워(친밀히)하고 사는 성도이다.

 

시91: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 하리로다

 

진실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성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 안 한다.

그러나 성도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을 다 두려워하게 된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두려워하며 살고 있다.

이 세상 사방은, 모든 두려워할 것으로, 꽉 차 있다는 뜻이 된다.

 

▲크리스천은 돈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히13: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그래서 모세의 부모도, 모세도.. 파라오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히11:23, 27.

당시 파라오의 권세는, 북한 김일성의 권세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그는 당시에 ‘사람’이 아니라, ‘신’이었다. 그러나 모세 가족은, 파라오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당신은 오늘날 세상의 두려움이 많으신가?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님을 두려워(친근히)하면,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다른 모든 것은 일절,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모세의 부모들처럼(히11:23), 또한 모세처럼(:27)

 

 

◑2. 거절하고

 

히11: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계시록에 7교회에 공통적으로 주신 말씀은

‘이기는 자에게’이다.

 

이렇게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거절하는 것’이다.

 

모세가 거절해야 될 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천국 순례길을 가는데 있어서, 거절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신앙생활에 성숙해진다는 것은, 점점 ‘끊는 것’을 의미한다.

1년, 2년이 지날수록.. 끊는 것이 늘어간다. 수준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이.. 재미가 없어졌고,

오히려 과거에 지루하게 여겼던 주님과 교제가.. 점점 더 재미가 있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거듭난 이후로, 술 담배를 단번에 못 끊을 수도 있다.

그러면 그가 아직 거듭나지 않은 것인가? 아니다. 분명히 거듭났다.

그 증거는, 아직 술 담배를 완전히 끊지 못했지만,

자기 마음에, 이제 술 담배를 하는 것이 괴로워졌다는 것이다. 이전과 달리..

 

술 담배를 예로 들었지만, 다른 면도 마찬가지다.

비록 아직 완전히 끊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은 (과거와 달리) 그런 삶을 사는 것이.. 썩 편하지 않고, 오히려 불편해졌다.

 

이것이 바로, 그가 점점 성화의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이며,

앞으로 완전히 끊게 되는 날도, 곧 오게 될 것이다.

 

여러분, 5년 전, 10년 전과 비교해서, 내가 ‘거절한 것’이 무엇인가?

만약 그것이 없다면.. 근본부터 내 신앙을 다시 재고해 봐야 한다.

 

성도는.. 천국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점점 거절하게 되어 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전문가일수록, 짐이 작다. 자꾸 자기 짐들을 내어버린다.

짐이 많으면.. 여행이 힘들기 때문이다.

 

유혹도 마찬가지다.

유혹을 자꾸 거절해야 한다.

왜냐하면 유혹이 주는 ‘가치’와, 내가 주님께 받을 상급의 ‘가치’를 비교해서

나의 귀중하고 값비싼 ‘상급’을.. 값싼 ‘유혹’에 팔아넘길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절 히11:25~26과 연결해서 보면,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을 거절한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3. 더 좋아하고

 

히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더 좋아하는 사람은, 한 쪽을 버리게 된다.

둘 다 선택하지 않는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버린 쪽이 무엇인가? -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었다.

모세가 선택한 쪽이 무엇인가? -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쪽’이었다.

 

신앙은 불가피하게 (더 좋아하는 쪽의) 선택을 요구한다.

 

여러분, 한 명의 자매가

두 명의 형제를 놓고,

‘나는 둘 다 좋아하는데 고민이야..’ 라고 말한다면,

그건 사실 둘 다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자매가 진짜 한 형제를 좋아하게 되면,

그 외 나머지 다른 형제들은.. 일절 무관심하게 된다.

 

대중가요에 ‘총 맞은 것처럼’이란 가사가 나오는데,

A에게서도 총 맞고, B에게서도 총 맞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

총은 한 사람에게서만 맞으면 된다.   

 

계시록에 7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께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는 책망을 들었다.

 

예수님도 좋고, 세상도 좋고,,

예수님 때문에, 세상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미지근한 사람을, 매우 견디기 어려워하신다.

그래서 ‘내가 너를 토하여 내치겠다’는 극언을 하셨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안 믿는 불신자보다, 세상을 더욱 집착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신자가 되고, 교회에 들어오는 것은,

자기가 가진 세상 욕심을,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소위 기복신앙으로 기독교 신앙을 시작한 사람은,

평균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세상에 집착한다.

그러다가 실족해서 결국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쉴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원 받았다고 착각할 수 있다.

 

예수 믿고서, 세상 사람들 가지는 것 다 가지고서, 아니 더 갖기 원하고,

또 거기에다 영생까지 덤으로 더 가지려는 사람들.. 이런 욕심쟁이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원하는 제자들은,

자꾸 세상을 ‘버리는’ 깊이를 더해 가야 할 것이다.

(‘버린’ 다음에, 주님이 새롭게 주시기도 하신다.)

 

A. W. 토저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의 공적을 시험하는 날에,

우리가 얼마만큼 아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를 사랑했으며, 무엇을 사랑했는가..

하는 그것이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것이다.”

 

이 말이 얼마나 제 가슴을 찌르는지..

제가 이 말을 들은 이후로, 오늘까지 줄곧 이 말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 우리 중에 일부는, ‘많이 아는 것’이 곧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아니다. 아는 것에 관계없이,

내가 얼마나 주님을 위해 얼마나 세상을 포기 했는지..

그것이 중요하게 심판될 것이다.

 

 

◑4. 바라봄이라

 

히11: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바라본다’는 뜻은,

코앞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내다보는 것이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결코 자기 눈앞만 보고 달리지 않는다. 멀리 천국을 바라보며 가게 되어 있다.

내가 도착해야할 그 지점을 바라보는 것이다.

 

모세는 멀리 심판대에서 상 주심을 바라보았고,

아브라함도,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았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11:10

 

※그런데 우리나라는 <교회 조직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이다.>는 사상이 강하다.

교회 조직에 충성하지 말라는 말은 아니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유럽인들 중에서 독일인이 특별히 ‘조직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다고 한다.

그들이 2차대전을 일으키고, 유대인을 학살한 것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위(조직)에서 시키는 일을 충성스럽게 수행하는 것이..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상 때문이었다.

 

그런 과거에 뼈아픈 상처를 겪은 독일은,

그 후로 ‘대학교 졸업식을 하지 않는 문화’가 생겼다고 한다.

졸업식에서 모두가 가운을 입고 성대한 식을 치르는 것이,

어떤 ‘권위주의적 (묻지마) 조직충성 문화’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초등학교에서도 ‘합창, 제창’ 이런 것이 없고, (군중심리, 조직의 힘이 생길까봐)

그래서 음악시간에도 개인적으로 리코더(피리)를 부는 식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물론 ‘조직의 힘’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게 군중심리처럼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버린, 과거 역사를 뼈아프게 반성하면서,

독일인들은 ‘(무작정) 조직의 힘’을 가지는 것을, 사전에 매우 조심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봐야지,

무조건 교회조직에 충성하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정답이 아닐 수 있고,

교회의 부패에 (나의 충성심이) 일조一助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독일처럼, 우리나라도 ‘조직충성문화’가 강하다.

세상 직장에서는, 점심시간에도 가끔은 ‘조직적으로 점심’을 먹고, (단체로 먹을 때)

마치고 ‘회식, 노래방’에서, 넥타이로 자기 머리를 동여매고, 노래도 불러야 하는 등

막무가내로 ‘조직에 충성하는 문화’가 너무 발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작정 조직에 충성하기 때문에, 단체로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우리가 바라봐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교회조직에 충성하는 것도, 하나님 뜻 가운데서 조직에 충성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있어야, 조직이 건강할 수 있다.

아니면 ‘과거의 독일’ 되어 버린다.

 

썩을 면류관을 위해 달리면 안 된다.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생각이지만,

지금 우리가 사도바울을 생각할 때, 대단히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지만,

사도바울 당시에,

그가 ‘지금 우리가 인정하는 그런 큰 대접/인정’을 받았을까?

-제 개인적으로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의 서신서 곳곳에,

자기가 당하는 환란, 괴로움,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하나님이 사도인 자기를 ‘만물의 찌끼요, 구경거리’로 두셨다고 했다.  고전4:9, 13

 

사도바울은, 달리는 방향이 올발랐다.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이다.

 

오늘날 내가 여러 가지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달리는 방향이 틀릴 수도 있다. 즉 ‘썩을 면류관’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현실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더라도,

달리는 방향이 올바르고, 하나님만 바라보는(멀리 내다보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같이 반드시 최후 승리하게 될 것이다.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5. 참았으며..  (믿음의 인내)

 

히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제가 성경을 찾아보니까, 믿음과 인내는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발견했다.

믿음은, 다른 말로 '인내'이다.

 

롬8:24~25,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믿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라는 뜻이다.

 

본문 히11:27에도,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며,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모세가 힘들었던 것은,

파라오는 보이고, 파라오의 군대도 보이는데,

하나님은,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니.. 힘들었던 것이다.

 

아브라함도, 오래 참아서, 그 믿음이 인정을 받았다.

     히6: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다시 말하면.. ‘참는 것’이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처럼 참고 사는 것이다.

 

▲참았으며..

여기서 ‘참는다’는 말은.. 그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참아야할 무엇이 있다.

참아야 할 그 모양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이 세상에 힘들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나 혼자 뿐인 것 같지만,

여러분 그렇지 않다. 힘들지 않는 성도는 한 명도 없다.

사람마다 그 모양이 다르지만, 다 참아야 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제가 유학할 때 보니까, 미국에 젊은 1.5세 A목사님이

결혼해서 자녀를 넷 두었는데, 막내가 2살이었다.

어느 날 병원에서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몸은 점점 야위어 가고, 음식은 전혀 먹을 수가 없었고,

그런데도 그 분은, 주위의 많은 분들에게 간증을 남겼다.

끝까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신뢰했으며,

‘내가 죽을 때가 오더라도, 말씀을 전하다가 죽겠습니다!’ 하며 살았다.

 

그 분이 돌아가신 다음에, 들은 이야기다.

하루는 사모가 그 A목사님께 ‘여보, 힘들지 않아요?’ 하고 물었다.

 

그때 그 남편 A목사는 ‘내가 어떻게 불평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나의 이러한 약함까지도 다 사용하시고 계심을 나는 믿어요.’

그 분의 이런 ‘끝까지 참음’이 주위 사람들에게 큰 은혜가 되었다.

 

▲없는 사람은 없다.

주님은

-내 믿음의 분량을 키우기 위해서

-또는 주님의 뜻과 사역을 이루시기 위해서

-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깊은 섭리의 역사로

지금 나에게 ‘믿음의 시련’을 주신다.

 

우리가 천국 길을 향하여 순례길을 떠나는 가운데,

꼭 필요한 것은 ‘오래 참는’ 것이다.

 

     믿음은.. 다른 말로 ‘참는 것’이다.          *관련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데...

     성경적인 '믿음'의 정의는.. 뭘 믿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참고 견디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믿음의 사람인가?

     다시 말해서 잘 참고 견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