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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하나님처럼 산다’

LNCK 2011. 11. 17. 08:06

www.youtube.com/watch?v=0kQwVkleBAo

◈성도는.. ‘하나님처럼 산다’               롬6:1~7                  10.09.30. 설교녹취

   

 

▲같은 삶이지만, 차원이 다르다.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식물이 살아있고, 동물도 살아있고, 사람도 살아있다.

천사도 살아있고, 물론 하나님도 살아계신다.

그러나 그 ‘살아있음’이 다 같지는 않다.

 

무슨 뜻인가?

식물의 삶은, 동물의 삶에 비하면.. 죽은 것과 같다.

또 동물의 삶은, 사람의 삶에 비하면.. 역시 죽은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람(자연인)의 삶은, 하나님의 삶에 비하면.. 역시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마치 별의 영광이, 달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달의 영광이, 해의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똑같이 살아 있지만, 다 다른 것이다.

 

▲1. 인간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은..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받았다’는 말은..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그 무한한 가능성은 바로 이것이다.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8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해 지는 것’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종결이다.

 

다시 말해서, 결국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 영은, 끊임없이 성장, 성숙, 변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영이, 계속해서 성숙해질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

어디까지?

하나님의 온전하심까지.

 

그 가능성을 우리가 갖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더 큰 은혜, 더 큰 영광을 사모하고 간구해야 한다.

 

이 밤에 우리가 모인 것은

기도, 철야, 중보하기 위해서 모였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더 온전해지기 위해서

이 예배에 함께 모인 것이다.

더 큰 영광을 사모하기 때문이다.

 

▲2. 이러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는가?

이것을 우리가 잘 알아야 한다.

 

과연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어떻게 그 온전함에 이를 수 있는 길이 열렸느냐 하면,

그 시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에게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롬6:6~7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6:2 죄에 대해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제 우리는,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의 옛사람이 함께 죽은 것이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가 온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다시는 우리는 타락한 인간으로서, 죄에게 종노릇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우리 옛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이고, 죄의 몸이 죽었기 때문이다.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자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사람이 십자가에 함께 죽은 자들의 정체성,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의 정체성,

그것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이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이다.

그리고 이제는 의에 대하여 사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을 때는

‘죄에 대하여 살았다.’ 즉, 타락한 인간으로서 죄에 종노릇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자가 되었다.

 

그 길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질 수 있는 길의 시작이다.

 

▲자연인처럼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죽은 것이다.)

 

롬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여러분, 동물은.. 동물의 삶을 산다.

식물은.. 식물의 삶을 산다.

천사는.. 천사의 삶을 산다.

사람(자연인)은.. 사람(자연인)의 삶을 산다.

타락한 인간도.. 타락한 삶을 산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살아있는 삶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것들은 다 죽은 삶이다.

 

그러나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야 하는 삶은,

이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러한 식물의 삶, 동물의 삶, 타락한 사람의 삶

이런 것들은 ‘살아있는 삶’이 아니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삶, 즉 살았다 하나 죽은 자이다.)

여기에 타락한 사람의 삶도 포함된다는 것을 유의하시라.

그것은 살아있는 삶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 받아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짐승 차원이다.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 사는 것은.. 타락한 인간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살아있는 삶’으로 보지 않고,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사람(자연인)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타락한 인간처럼 살아서도 안 된다.

왜냐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옛사람이 죽었다. 타락한 옛사람, 옛 인간이 죽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러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사람(자연인)의 삶을 살면 안 된다.

타락한 인간의 삶을 살면 안 된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살아있는 삶으로 인정해주지 않으신다.

 

▲3.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     ←설교문 제목/ 주제

요즘 제 마음을 붙잡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나의 타락한 옛사람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제가 곰곰이 주님 앞에서 묵상을 했다.

“그럼 나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그렇다면 제가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건 사람의 삶이 아니다.

이제는 나처럼(하나님처럼) 살아야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서는 살아있는 자들이다.

고후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는가?

단순히 여러분을 천국가게 하기 위해서 죽으셨는가?

여러분을 교회 다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한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바로 이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삶이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처럼 사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아야 한다.

이 말은, 하나님처럼 살아야 된다는 말이다.

 

왜요?

우리는 옛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사람, 타락한 인간의 존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 사람(자연인)처럼 살면 안 된다.

하나님처럼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해 살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의 의미이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처럼 살자”이다.

 

▲4. 하나님처럼 사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벧전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자가 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우리 인생으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

사람(자연인)처럼 사는 것도.. 거룩한 삶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처럼 살 때에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거꾸로) 거룩한 삶을 살 때만.. 하나님처럼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죄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

늘 죄를 지으며,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즉 죄의 종노릇하며 살 필요가 없어졌다.

 

저와 여러분이 거룩한 삶을 살 때,

하나님처럼 사는 것이다.

 

       ...........................

 

※위 설교와 모순적이며, 반대적 내용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그래서 <사람은 도저히 가망이 없다. 오직 은혜로 거룩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둘은 서로 모순적이지만, 둘 다 필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상호 모순적이지만, 둘 다 수용해야 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일례로 사랑과 공의가 상호모순적이며, 은혜와 진리가 서로 모순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