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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사의 길 민20:1~29 출처, 정리
◑역사의 전환기에 들어선 광야 백성들
본문 민수기 20장은, 출애굽 여정 40년을 거의 끝내는 시점입니다.
이제 가나안 진입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역사의 전환기입니다.)
이때 너무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재들이 연달아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1. 먼저 미리암이 죽게 됩니다. 20:1
미리암의 죽음은, 한 여자가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도적인
아마 광야 이스라엘 250만명 그룹 중에서 '여성 회장'이 되는
그 여성 지도자인 미리암이 죽게 됩니다.
▲2. 모세가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됩니다. :12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의 현장에서
그만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얻게 됩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못 들어간다는 거.
우리가 존경하는 어떤 우리의 지도자가 같이 갈 수 없다는 거.
예를 들면 이런 것일 수 있을 거예요. 요번에 우리 수련회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만약 무슨 일이 있어서 목사가 못 가게 되었다면,
그러면 아마 수련회 존폐 자체를 재고했을지 몰라요. 꼭 목사를 좋아해서는 아니지요.
지도자라는 자리가 바로 그런 자리라는 겁니다.
근데 가나안 땅을 모세가 못 들어간다는 거예요.
지금 광야 40년을 백성들과 함께 했던 그 모세가 못 들어간다면,
그런 상황에 대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3. 또 아론도 죽습니다. :28
아론이 죽으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30일 동안 애곡했다고 그래요.
창세기 50장에 보면 야곱이 죽었을 때에 7일간 애도했다고 그래요.
근데 아론이 정말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락을 같이 했던 그 아론이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정말 때때로 광야생활이 힘들 때마다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원망/불평하고.. 그들을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기도 했지마는
정말 40년간의 고락을 같이 한 그 정과 사랑,
이게 ‘30일 동안 애곡 했다’는 사실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슬프겠어요.
지금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데 아무리 ‘복지’라고 하지만
낯선 땅 아니겠습니까? 그 낯선 곳을 가는데..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던 그 지도자 모세가 같이 동행하지 못하고
또 미리암과 아론은 죽고.. 그런 형편입니다. (아직 악재가 또 남아 있습니다.)
▲4. 에돔 족속의 대항 :14~:21
이제 가데스(가나안 남쪽 지역)에서 가나안 땅으로 진군(북진)하려고 할 때
바로 사해 남단에 에돔 땅이 위치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그 에돔 땅을 통과하면 너무 가까운 지름길입니다.
그 지름길로 지나가기 위해서 모세가 사신을 보내는데
그 협상이 실패하고
에돔 왕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대적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돔과 싸우지 말라고 하십니다. 과거에 형제 족속이라고요!
그러니까 먼 길을 우회해서 돌아가게 된 거예요.
이렇게 악재가 계속 겹치고 있습니다.
◑나는 구속사의 한 부분 일뿐! *구속사 : redemptive history
▲구속사는 영원하지만.. 인간은 한 부분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도대체 신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설정한다면 ‘길’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자, 미리암이 죽습니다.
아론도 죽었습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이스라엘 족속에서 곧 이탈할 것입니다.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길,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섭리하시면서 이끌어가시는 그 길이,
500년 전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 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구속사)의 길이
지금 계속해서 뻗어 나가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길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
하나님이 선택한 지도자들이, 자기 인생에서, ‘구속사의 길’에 올라섰다가
어느 특정한 구간을 걸어가다가.. 그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죽는 것입니다.
책으로 비유하면, 구속사가 5백 페이지짜리 두꺼운 책이라면,
모세든지, 아론이든지, 미리암이든지, 그 누구든지
길면 한 Chapter를 쓰는 것이고, 짧으면 한 줄 채우는 것이고..
길거나 짧거나.. 결국은 다 ‘구속사’에서 등장했다가, 또 퇴장하는 겁니다.
우리는 짧게 한 페이지, 한 줄을 장식하다 가는 것이고..
그렇지만 하나님의 (구속사의) 길은 계속해서 뻗어갑니다.
벌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얼마나 많은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까?
지난 40년 여정동안, 벌써 광야에서 약 2백만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니까 20살 아래에 있던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은
그 많은 어른들의 죽음을 광야에서 다 목도하면서,
이제 60살 아래의 성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미리암이 죽고, 아론이 죽고, 모세도 자기들 곁을 떠날 예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가나안 복지를 향한 역사는,
아브라함 때부터 계속해서 500년간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진행되고 있는 500년 동안에 수없이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 길에 올라서서 걷다가는 죽고.. 걷다가는 죽고.. 했던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의 본질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이끌어가시는 길을
나는 그 길에 올라서서
잠깐 걷다가 끝나고 마는 것이에요.
▲바톤을 넘겨주고.. 걱정/염려는 내려놓읍시다. 하나님이 구속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내 대代에서 레이스가 끝나지 않습니다.
레이스는 그것보다 훨씬 긴 것입니다.
나의 사명은.. 내가 골인 지점 끝까지 달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열심히 달리고.. 바톤을 넘겨주겠다는 관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니 아예 출발할 때부터, 바톤을 넘겨주는 지점을 쳐다보면서.. 달려야 합니다.
내가 골인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닌 경우가 많으니까요)
역사를 볼 때, 알렉산더, 나폴레옹.. 이런 ‘위대한 정복자’들의 과오를 들자면,
자기 시대에 어떤 쇼부(승부, 세계정복, 유럽통일)를 보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골인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내몰아.. 그 목표에 희생시켰습니다.
우리는 역사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 할 부분과 도리를 감당하고.. 겸허하게 바톤을 넘겨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자기 세대에서 쇼부를 보겠다고 하는 것보다요!
유럽의 어떤 성당들은.. 3백년에 걸쳐서 짓습니다. 지금도 계속 짓는 중입니다.
3백년이면.. 10세대라고 칩시다.
바톤이 10번이나.. 다음 세대로 계속 넘겨진 것입니다.
▲내 업적보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평가
한 때 ‘역사의 평가에 맡긴다’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까.. 과거 역사에 대한 객관적/정직한 평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대한 역사책과 같습니다.
거기에 등장한 모든 사람들에 대해.. 객관적/정직한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도, 하나님의 역사책에 반드시 기록되고 있고, 또 계속 기록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고후5:10, 계20:12
모든 믿음의 조상들처럼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내 이름이 소중하게 기록되는.. 그런 종들이 되시기를 소원하십시다.
................ 더 읽으실 분 ..............
◑길에서.. 불평하면.. 뱀에 물린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속사에 反하여,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내서 길을 가기도 합니다.
내가 길을 만들어내는 것이에요.
오늘 본문에 그런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에돔 땅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하셨음)
아라바(사해) 길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민21:4~6
결국 인생은 두 가지 유형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을 올라서서 일정기간 걷다가 내려오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을 불평하다가,
결국 불뱀에 물려죽는 그런 결과입니다.
결국 내 심령의 기쁨과 생명력이
내 불평에 물려죽고, 내 원망에 물려죽는 이유가 다 뭡니까?
하나님이 이끌어가시는 길을 순종해서 가지 못하고
그 길을, 불평하면서 가기 때문입니다.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외줄기 일 뿐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를 이 인생의 길들을 이끌고 가시는 동안
우리는 올라탔다가 잠깐 걷다 내려오는 자들입니다.
이 길을 바르게 걷는 자들만이 불뱀에 물리지 않을 것입니다.
◑외길, 외로운 길
자, 여러분,
이 두 가지 길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좀 비유적으로 설명드리면,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라는 시가 있습니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길은 한 줄기(외줄기)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한 줄기의 길이 있어요.
거기에 내가 참여할 뿐인 것이지요.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남쪽으로 삼백 리가 뻗어있어요.
외로운 외길을.. 그것도 먼 길(삼백리 길)을
나그네가 혼자 걸어간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근데 여러분,
이 시가 참 아름다운 것은 신앙적인 입장에서 해석을 좀 합니다.
자, 외줄기 남도 삼백 리 끝없이 걸어가야 되는 그 길을
혼자 걸어가야 되는 나그네의 고독함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근데 그 고독해 보이는 나그네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술이 익는다는 것은 인공적인 것이에요. 인간적인 것이고 인위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타는 저녁 놀. 이건 자연적인 거예요.
술이 익는다는 인위적인 행동도
또 노을이 지면서 붉게 하늘이 타는 듯이 물드는 그 현상도 모두가
다 열을 내는 작용이에요.
그래서 인간적인 생각의 발동, 인간적인 모든 의욕이 자연에 부합하고
자연과 조화되어져 가는, 자연의 저녁노을이 타가는 그 모습과
인공적으로 술을 발효시켜서 열을 내고 있는 그 모습이 합치되어지는 그 마음이
이 외롭게 보이는 나그네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외롭게 보이지마는, 이 나그네는 외로운 게 하나도 없어요.
그냥 자연과 벗 삼아 자연과 일치된 마음으로
외로워보이지만 외롭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남도 3백리 외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이게 무슨 뜻이에요?
우리가 신앙적으로 좀 해석을 한다고 하면 어떤 뜻이 되겠습니까?
그냥 하나님이 정해놓으시고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그 길을
내가 혼자 가는 거예요. 아내하고 가는 것도 아니고 남편하고 가는 것도 아니에요.
왜? 남편이 그 길에서 내려서는 죽음의 순간이 다르고
아내가 그 길에서 내려서는 죽음의 순간이 다른 것입니다.
외로워 보입니다. 혼자 가는 길입니다.
자식이 평생 같이 갈 것 같아도 천만의 말씀 아닙니까?
그러나 타는 저녁노을 대신에 하나님을 그 자리에 집어넣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저녁노을이 타는 것이 술 익는 마을로 연상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생에 대한 마음이 내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그 세상 그 마을 마을을 지나갈 때마다
내 삶의 환경과 내 삶의 순간을 지나갈 때마다
하나님과 일치된 마음으로 하나님으로 위로를 삼고
하나님으로 기쁨을 삼아가면서 하나님과 조화되고 일치되어서
이생의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어떻게?
구름에 달 가듯이.
무슨 말입니까?
환경에서 달과 같은 것을 끊임없이 우리는 잡으려고 하는 거예요.
돈이라는 달을 잡으려고 하고, 일류대학이라는 달을 잡으려고 하고,
인정과 명예 이런 달을 잡으려고 하고, 성공이라는 달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그네는 오직 술 익는 마을과 저녁노을이 붉게 타는 것이 일치하듯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해서 보여지는 수많은 달들. 성공이라는 달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말합니다. “저 달을 잡아라.”
그리고 좋은 대학이라는 달, 돈이라는 달, 사업의 성공이라는 달,
이런 달들이 수없이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 가운데
구름에 달 가듯이 그 달을 스쳐지나가면서 아무 것도 잡으려 하지 않고 지나가는 동안에
하나님과 일치되어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섭리가 이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런 삶, 이런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자, 다시 한 번 정리하면 하나님이 정해놓은 길을 우리가 올라타고
내려오라 할 때까지 가는 겁니다.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가는 동안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수많은 달들을
구름이 스쳐지나가듯이 스쳐지나갑니다. 마음으로 잡지 않습니다.
외로워 보이지만 그 마음은 무엇을 잡고 있습니까? 하나님과 일치되어서 하나님을 붙잡고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