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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령된 자가 있을까..

LNCK 2012. 4. 20. 14:13

◈망령된 자가 있을까..         히12:15~17          12.04.15.설교일부스크랩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린.. 에서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요, 실리주의자였습니다

당장 눈앞에 들어오는 것만 해결하려고 하는, 전형적인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런 류의 사람을 가리켜서 육에 속한 자, 육신을 따르는 자라고 합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보면 에서만큼 매력적인 사람도 드물지요.

성경에 나오는 그의 모습을 보면 세상적으로는 통이 큰 사람입니다.

인정도 많고 솔직합니다.

남자답게 배짱 좋고 담도 큰 사나이였지요. 

친구들도 많았고, 원수도 별로 없었습니다.

 

만약 결혼 적령기에 있는 우리 자매들 앞에 아무런 설명 없이

야곱과 에서를 나란히 세워놓고 남편감으로 선택하라면,

아마 열이면 열 다 분명히 에서를 선택할 겁니다.

 

야곱은 간교하고 쫀쫀하지만, 에서는 남자답고 늠름하고 통이 큽니다.

그만큼 에서는 인간적으로는 정말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지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육신의 허우대는 멀쩡했는지 모르지만 영혼은 장님이요, 앉은뱅이요,

속이 텅 빈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육신 따라 사는 사람에겐 신앙이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는 이삭의 집에서 태어나고,

하나님이 언약하신 아브라함 가문에 호적을 올려놨다 하더라도

믿음과는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뭐겠습니까?

믿음은 비전입니다.

히브리서 11:1절 말씀대로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내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것, 그게 믿음이라는 겁니다.  

 

현실의 눈을 가지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바로 훗날의,

미래의 것들을 보는 게 믿음이고 비전인 거예요.   

 

그런데 불행히도 에서에겐 이 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고픈 것 밖에 보이지 않았고, 죽 한 그릇 밖에는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장자의 명분 안에 들어 있는 그 엄청난 축복을 알지 못한 것이지요.    

도무지 장자로서의 믿음이나 비전을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는 겁니다.

 

여러분! 장자의 축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1) 먼저 장자는 그 가문을 대표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제사장이었고 이삭도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가문에 오실 때는 꼭 그 가문의 제사장을 찾으셨습니다.

 

해서 아브라함을 찾으시고 이삭을 찾으시고, 이제는 에서를 찾으실 차례였는데

그게 무산된 겁니다.

 

하나님과 만나는 제사장의 제일 큰 권리는 축복권입니다.

해서 제사장이 손 들고 축복하면 축복이 임하고, 저주하면 저주가 임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사장을 찾아 오신다, 그것은 거기에 완성과 완전이 있는 겁니다.

만약 하나님이 나를 찾으신다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이지요.

모든 게 해피엔드인 겁니다.

그러니 장자들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것입니까?

 

우리 역시 예수님을 믿는 고로 모두가 다 영적인 장자가 됐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또 장자에겐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지금 현재는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그 땅을 허락하시마 약속하셨어요.

 

해서 앞으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후손은

의당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거기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의 역사는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다만 에서 대신에, 야곱의 후손이 들어갔다 뿐입니다.

 

3) 한 가지 더 있는데, 바로 그 장자의 혈통에서 전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실 거라는 겁니다.

바로 메시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의 혈통에서 태어날 복을 주신 것이지요.

 

이런 모든 복이 장자라는 권리 안에 다 들어있었는데

에서만 그 혈통에서 제외된 겁니다.  주1)

 

에서는 이런 특권을 볼 줄 알고 누릴 줄 알아야 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 모든 권리가 자기에게 통째로 굴러 들어올 텐데

그걸 보지 못한 겁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기업을 이어갈 비전도 없었고,

그런 꿈이 없으니 ‘장자권이 죽 한 그릇만도 못하다’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 비전없이 현실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사람, 이것보다 천박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단지 그의 말 한 마디 듣고, 장자권을 야곱에게 넘긴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에서의 맘에 품고 있는 그 의도와 동기와 믿음을 모두 보시고, 판단하신 것이지요. 

 

“아! 이 놈은 장자권을 줄 필요가 없는 놈이군!

귀한 것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천박한 놈에게는 줄 이유가 없지”

그러시지 않았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영적인 장자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겐 축복권이 있고 영적 가나안인 천국을 유업으로 받았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 문제에 부딪혀서 이런 귀한 것들을 우습게 여기고 이런 장자권을 내팽개친다면

그것이야말로 망령된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겁니다.    

 

사실 우리 역시 에서가 될 때가 많지요. 

철저히 눈 앞의 것만 보고 그 뒤의 것은 파악 못하는

한심한 믿음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겁니다.

 

‘눈 앞에 팥죽 한 그릇’을 놓고 그게 다인 줄 아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본문 히12:16절에서는, ‘음행’과 동격으로 쓰고 있다는 점도,

간과하지 마십시다.)

 

그 ‘팥죽 한 그릇’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꿔놓을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다. 

 

현실주의자가 되고 실리주의자가 되고 물질주의자가 되는 것은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내다 파는 망령된 행동임을 기억하십시다.

 

대신 보이지 않지만 믿음의 세계에, 영적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매일 영혼을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성령충만의 삶을 사십시다.

 

그럴 때 우리는 결코 에서 같은 치명적 실수는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복이 여러분과 저에게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25: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장자의 명분을 어떻게 했다구요?

옛날 성경에는 ‘경홀히’ 그랬는데, 가볍게 여겼다는 겁니다.

오늘 두 번째 이야기는 바로 거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떤 가치를 놓고 소중히 여기느냐 가볍게 여기느냐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격의 요소이기 때문에 그런 가치는 서서히 익어 가는 법입니다.

 

무슨 얘기냐?

에서가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판 것은

하루아침에 즉흥적으로 내려진 흥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을 거쳐서

그렇게 될 만한 분위기와 배경이 진행되어져 왔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 집중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판단하는 가치란 순간의 것이 아닙니다.

오래 동안 누적되어 왔던 생각과 습관의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에서가 장자권을 우습게 여기고 한 순간에 팔아 버린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팔 생각을 해온 결과라는 겁니다.  

“이까짓 장자권이 뭔 의미가 있어?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뭐 팔자가 늘어지나?”

평소에 이런 생각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야곱이 그것을 알아차렸지요?

그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것을 가로 챈 겁니다.

 

여러분! 가치관이라든가 선악의 분별이라든가

우선권의 결정 같은 것은 우리 인격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바로 선정하는 감각만큼

인격형성의 중요한요소가 없다’고 했고

 

또 조지 엘리엇이라는 사람은 “인간에게 냉혹한 법칙이 하나 있다.

평소에 반복하는 선악의 선택이 점점 그 사람의 개성을 형성하고

나중에 어떤 중요한 행동을 유발하는 준비작업이 된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말을 요약하면 뭐냐?

평소에 내가 어느 것을 소중하게 여기느냐 하는 것은 습관이 되고,

그 습관이 인격을 형성하고, 그것은 나중에 어떤 중요한 시점에서

행동을 일으키는 근거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게 하루 아침에 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사실이 중요한 것은 왜일까요?

우리 역시 똑같이 이런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번 단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은 무릎 꿇고 10분 기도하는 것과

친구로부터 받는 10분간의 전화 가운데 어디에 더 무게를 두십니까?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느냐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정말 둘 중에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 그 말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예배드리는 그 시간과, 다른 시간 중에

어느 것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까?

 

여기 부모님들이 계신데,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자녀가 믿음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공부 잘 하는 것 중에 어느 편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부인들은, 여러분의 남편이 돈을 좀 못 벌어도 예수 잘 믿는 것과

예수는 좀 적당히 믿더라도 돈을 잘 버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교회 나오는 시간과 자기 시간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있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까?

 

이 모든 대답은 여러분의 몫이 될 겁니다.

아울러 거기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닐 겁니다. 

또한 그 답은 바로 여러분의 평소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겁니다.

 

그리고 그런 여러분의 모습은 인격과 신앙으로 나타날 것이고,

언젠가 인생의 중요한 결단의 시점에서 평소 생각한 모습으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읽은 아주 흥미있는 문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사회조사연구소 교수인 프랭크 설로웨이라는 분의 얘긴데,

이 분이 어떤 통계를 내다 깜짝 놀랄 만한 결과를 발견한 겁입니다.

 

뭐냐 하면 이 사람이 어느 한 때, 한 가족의 형제 또는 자매들 가운데

누가 세계 여행을 많이 했나 그것을 조사해 봤더니,

놀랍게도 장남 또는 장녀들은 뒤에 태어난 동생들에 비하면

여행 빈도 수가 절반도 안 되더라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볼 때 첫째들이 기회가 더 많을 것 같은데

통계는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교수가 여기에 흥미를 느끼고, 다른 분야에까지 연구를 확대해 봤습니다.

해서 심리학, 유전학, 사회학, 정치학 등 모든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사람을 조사해 봤는데 

거기서도 똑 같은 결과를 얻은 거예요.

 

첫째들은 둘째 셋째에 비하면 각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빈도 수가

너무나 미약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분이 하나의 가설을 세웠는데 뭐냐 하면,

“첫째로 태어난 자식은 안정지향적이기 때문에

모험이나 위험을 회피하는 보수적인 성향을 갖고,

후순위로 태어난 자식은 도전적인 성향을 갖는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각 분야의 혁명적인 일을 일으킨 사람들은

대부분이 둘째 이하더라는 겁니다.

 

그 동안 각 시대마다 낡고 잘못된 생각들을 폐기시키면서

대변혁을 일으켰던 사건들이 있지요?

 

예를 들면 지동설이라든가 만유인력의 법칙, 종교개혁, 프랑스 혁명,

진화론, 일반상대성 이론, 정신 분석학 등등

 

이런 것들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사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주도한 사람들을 보니까

맏이는 별로 없고, 거의가 다 동생들이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 6566 명의 전기 자료를 통해서 결론을 내리고

책을 써 내게 됐는데, 책 제목이 <역사는 둘째 셋째가 바꿨다>입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서는 <타고난 반항아>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됐는데,

관심 있으신 분들은 구입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에 이 얘기가 생각난 것은,

이런 결과가 혹 인류의 시조라 볼 수 있는

야곱과 에서 형제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습니다.

 

어쩌면 에서는 이미 갖고 태어난 장자권이

본인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늘 그게 불만이었을 거예요. 

 

‘왜 복은 형이 몽땅 받아야 하나? 왜 제사장은 장남만이 해야 되나?

왜 귀한 것은 모두 형 차지가 돼야 하나? 내 죄는 둘째로 태어난 것뿐인데..’

 

이런 생각들을 오래 하다 보니까 그런 마음이 든 겁니다.

‘그래 언젠가 기회가 주어지면 내가 꼭 장자권을 뺏고 말 거야!’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도 야곱이 그다지 예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은 다 차치하고라도 무엇보다 장자권을 소중하게 생각해서

그것을 간절히 바라는 야곱이 에서보다는 더 믿음직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약점이 많다 하더라도 장자권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옳게 쓸 자에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어갈 사람은

장자의 권한을 헐값에 팔아버리는 망령된 사람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쩌면 야곱의 그 불만을 ‘거룩한 분노’로 봐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좀 전에 예들은 설로웨이 교수의 이야기는

어떤 유전적이고 기질적인 형질에 따른 분류이지

어떤 영적이고 신앙적인 근거로 쓸 수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장자가 됐든 차자가 됐든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아야 한다는 겁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역시 야곱이 품었던 거룩한 욕심이 필요할 것이고

역대 차자들이 가졌던 타고난 반항심을 가져야 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장남들의 타고난 안정지향적 성향과 차남 이하들의 도전적인 성향은

태생 때문이 아니라

본인의 자세와 태도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두를 위해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에서처럼 주어진 믿음이나 주님의 선물을 가볍게 여기지 않기 위해서는

아주 조그만 데서부터 잘 선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최우선시 하는 가치가 필요합니다.

 

가룟 유다가 처음부터 예수를 팔려고 맘 먹었겠어요?

요한은 그를 가리켜서 돈 맡은 자로서 도둑이라 그랬습니다.

그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 그건 습관이 됐고,

결국 돈 앞에서는 동료고 선생이고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태도가 습관이 되고 습관이 운명이 되어 버린 사례가

어디 가룟 유다 하나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조그마한 것에서부터 에서처럼 세상적인 것들을 선택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중요한 시점에선 두말없이 세상을 선택하게 될 겁니다.

 

지금 바로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그건 여러분의 운명이 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성령과 은혜가, 우리에게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간구합시다. 내 힘으로 안 되니까요!

 

따라서 늘 교회중심으로 사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결코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게 아닙니다.

 

나름대로 자기와의 투쟁과 거룩한 욕심과 오랜 습관과

조그만 선택의 연속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은 괜찮을지 모르지만 중요한 결단의 시기가 오면,

여러분은 믿음을 팥죽 한 그릇에 바꿀 사람들입니다.

 

믿음 팔아먹고, 십자가의 보혈을 무효화 시키면서, 활활 타는 지옥에 가시렵니까?

새벽기도와 금요기도회의 나오라는 말씀을 건성 건성 듣지 마시고,

그것을 선택과 습관의 관점에서, 그리고 오늘 말씀과 관련해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현실주의자 에서!

구원과 장자권을 가볍게 여긴 에서!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에서와는 다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다짐하신 대로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것처럼 여기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 내일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조그만 일로부터 주님이 바라시는 쪽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생애에 에서에게 있었던 망령됨이라든가 중도탈락의 위험성은

자취를 감출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으로서, 복의 근원으로서,

여러분은 새 가나안 땅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 복이 오늘 여러분과 저에게 충만히 내려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주1)

에서가 바른 길을 갔다면, 성경은 이렇게 쓰여졌을 것입니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라”(출3:6).

 

또 십계명 돌판을 주신 후에 하신 말씀으로써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여기서 떠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출33:1).

 

그리고 신약의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나오는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에서를 낳고 에서는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1:2)   

 

그런데 <예정론>에 의하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정론’을 운명론처럼 생각하면.. 그것도 극단입니다.

위 말씀을 ‘예정’이 아니라, ‘경고’로 보면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는 말씀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가능성이 매우 높으니까, 극히 조심하거라’ 이런 뜻이라 봅니다.

 

그런데 에서를 포함한 우리 모든 인간들은, 너무나 연약해서,

하나님의 경고를 뻔히 알고도.. 그 경고를 무시하고 살다가..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언대로 되었다’고 할까요? 그러나 예언대로 안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 결과가, 모두 예정대로 된 것이라면,

우리는 에서를 비난할 필요도 없고, 가룟 유다를 비난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은 예정에 충실한 역할을 했으니까요.

 

그러니까 ‘예정’을 더 자세히 말하면

‘경고성 예정’(그렇게 될까 조심해라)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상의 해석은 ‘성경을 유기적(유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동의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편집자도 계속 연구 중에 있습니다.

 틀렸으면.. 앞으로 고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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