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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돌이킨 사무엘의 성장기 삼상2:17~35 12.07.15.설교일부녹취
사무엘은, 자기 시대를, 신앙의 본질로 돌이킨,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었다.
대표적으로 삼상7장의 미스바의 회복이 성경에 나온다. ☞신앙의 본질이 회복되었다는 증거 6가지
이사야가, 열심히 예언활동을 했지만.. 그 시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지는 못 했다.
예레미야가, 열심히 예언을 선포했지만.. 그 시대를 여호와께로 돌이키지는 못 했다.
그런데 사무엘은, 자기가 살던 시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놀라운 사명을 감당했다.
※이렇게 단순비교 해서, 사무엘이, 이사야나 예레미야보다 더 뛰어난 선지자라는 뜻은 아님.
오늘날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주의 종들이 나오기를 바란다.
즉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를..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신앙의 본질로 돌이키게 하는)
사명과 역량을 갖춘 사무엘과 같은 종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렇게 기대할 때, 사무엘이 어떤 소년기와 성장기를 보냈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1. 사무엘은,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자라났다.
그의 잠자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언약궤 앞이었다.
삼상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사무엘의 잠자리가 지성소 안은 아니었다.
그 언약궤가 있는, 성소 안이었다는 뜻이다.
이 구절 가운데서 우리가 느끼는 점은,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자라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일례를 들면 모세는, 또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가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세상의 그 모든 안락, 부, 명예, 천상의 능력이 함께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만큼,
주님이 임재해 계신 그곳에..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추구했다.
다윗이, 바울이 다 그랬다.
다윗도 ‘다윗의 장막’을 소중히 여기며, 그 임재 안에서 거하기 원했다.
위 삼상3:3절은,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 있기 원했고,
그것을 사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앞으로 사무엘과 같은 종이 나타나려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며, 주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기를 구하는
그 임재 안에서 자라가는 청소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연합 찬양 저녁예배를 3개월에 1번씩 드리는데,
그날은 제가, 외부 집회 인도하러 갔다가, 뒤늦게 참석했다.
그런데 시작한지 2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아직 찬양집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제가 벌써 예배당 입구로 들어오는데, 그 열기와 임재하심을 멀리서도 느끼게 되었다.
많은 성도들이 참여해서, 정말 주님의 임재가운데,
그 분을 구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주님 품 안에서 안식하는 것을 보았다.
여러분, 그런 자리, 주님의 임재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자리에
빠짐없이 꼭 참석하게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임재 체험 간증 (강추)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주님의 임재 가운데 성장하기를, 소망하고, 기도하시라.
어려서부터, 주님의 임재의 자리를, 체험하고, 사모해야 한다.
사무엘이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 청소년이 나중에 커서.. 사무엘 같이 될 것이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고, 한 시대를 여호와께로 돌이킬 것이다.
▶어떤 분이, 하루는 저를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셨다.
자기 자녀가 말을 너무 안 듣는단다.
자기가 부모로서, 신앙적으로 얘기하고 잘 타이르면.. 반발하고,
더 심하게 말하면 ‘아파트 창문에서 뛰어 내리겠다’고 부모를 협박하니,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가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그 자녀가 자라날 때,
하나님의 길에 서지 않아도, 아무 말도 안하고 엘리처럼 자녀를 가만 놔두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편한 대로 하도록.. 가만히 놔 둔 것이다.
신앙생활도.. 정말 하나님의 길에 서도록 인도하지 않고,
자녀가 원치 않으면 가만히 놔두고,
수양회에 가기 싫다 그러면.. 가만히 놔두고
예배드리기 싫어하면.. 가만히 놔두고
설교가 자기 마음에 부딪혀 와서 부담된다고 그러면 .. 가만 놔두고
그러다가 이제 아이가 다 커서 성인이 되었는데,
자녀가 하나님의 길로 안 행하니까, 그의 삶에 여러 가지로 환란이 심하다.
안타까운 부모는, 아무리 신앙적인 좋은 말로 권면해도..
도리어 반발심만 더해지는 것이다. 지금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자녀를 키우는 것도 그렇다.
지금 현실은, 자녀가 고등학생만 되면, 예배에 형식적으로 빨리 마치고,
부모는 학원에 보내야 한다며.. 예배를 빨리 끝내달라고 한다.
그래서 적지 않은 교회가, 중고등부 예배를 기껏해야 40~50분 드린다.
시험 때는, 아이들을 교회에 보내지도 않는다. 그렇게 키워가지고 뭐 하시려는가?
그렇게 하면, 출세한다는 보장이 있는가?
설령 출세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참 인생인가?
오늘날, 적지 않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편한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둔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하다가는.. 나중에 더 어렵게 될 것이다.
자녀나 부모나 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여호와의 길’로 행할 때..
자기 삶에 참 만족과, 참 행복과, 참 의미가 있다.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임재 아래서 자라났듯이,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라나도록 사모하자.
◑2.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자라났다.
삼상3장에 보면, 하나님이 성소에 자고 있던,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른 줄 알고, 엘리에게로 갔다.
그렇게 하기를 3번 했다.
3번 후에, 엘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깨달았다. 여차 여차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니, 삼상3:10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말씀하실 때, 어린 그는 주님 앞에 엎드렸고
주님은 그때부터 말씀하시는데, 아마 이런 느낌이 느껴진다.
‘말벗을 간절히 찾던 어떤 분이, 드디어 자기가 말을 할 때, 들어줄 상대를 만나자
그냥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놓는 것처럼
하나님이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지도하고, 인도해가기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계획을 그에게 알리기 시작하셨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사무엘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가운데 자라났다.
우리 자녀도, 이렇게 자라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이다.
◑3. 사무엘은 구시대의 질서 아래서 자라났지만, 구시대를 답습하지 않았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자라났다.
엘리가 영적 어두운 시대
제사장도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하던 시대에
사역을 자기 수단으로 삼고, 눈이 철저히 멀어서,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던 시대
그렇게 영적으로 어두웠던 시대, 그런데 사무엘은 거기서 자라났다.
사무엘은, 구시대의 질서 아래서 자라났지만, 그러나 구시대를 답습하지 않았다.
너무 중요한 말이다.
삼상2장과 3장에 보면, 사무엘이 자라는 과정을 기록하면서,
그 시대에 타락한 사람과 사무엘을, 반복적으로 대조시키고 있다.
‘그 시대가 이랬다’ 라고 말씀하시고는,
‘그런데 사무엘은 이랬다..’는 식으로.. 성경은 반복적으로 대조하고 있다.
①번째 대조
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이렇게 말씀한 다음에 곧바로 이렇게 대조적으로 말씀하신다.
2:18 (그러나)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코람데오’라는 말이 있는데, 사무엘은 코람데오의 삶을 어려서부터 살았던 것이다.
소년들과 사무엘이 대조되고 있다.
②번째 대조
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엘리의 아들들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시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대조적으로 선포하신다.
2: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사무엘은 구시대의 질서 아래서 자라났지만, 구시대를 답습하지 않았던 것이다.
③번째 대조
2:34,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으리니 그 둘이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이 말씀이 끝나자마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대조시키신다.
2:35,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
여기에 ‘충실한 제사장’은 훗날 예수님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사무엘에 대한 예언이었다.
④번째 대조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곧바로 하나님은 사무엘이 어떻게 그와 대조적으로 자라났는지 강조하신다.
3: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렇게 성경은, 구시대와 새시대의 여명을 대조하고 있다.
엘리는 제사장으로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궤 앞에서 예배드리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자기는 편히 안락함 가운데 지냈다.
그런데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자랐다.
그래서 ‘자기 시대를 여호와께로 돌이키는’ 그런 주님의 종이 되었던 것이다.
사무엘은 늙어서도, 계속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래 구절을 보면, 사무엘이 라마 자기 집에서도,
계속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고 했다.
삼상7:15~17,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에 자기 집이 있음이니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사무엘은, 젊은 제자를 택하여, 제단 쌓는 일을 맡겨놓고,
자기는 편하게 쉬지 않았다.
일평생,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면서,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의 청소년/ 청년들이 그렇게 자라나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판단하는 눈을 버리시라. 영적인 우월감을 버립시다.
우리가 그렇게 우월감을 가질 만큼, 절대로 더 낫지 않다.
우리 자신이, 사무엘처럼 자라나기 위해서, 애통하십시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자라나고,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가운데 자라나고,
-구질서 가운데 자라나되, 구질서의 악습을 답습하지 않고 자라나는,
사무엘처럼 그렇게 서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다.
왜 이 부분을 말씀드리는가 하면,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시대를 탓하고, 지도자들을 탓하고 있다.
‘오늘날 지도자들이 문제라서 한국교회가 이렇다’고 탓하는데,
그 말이 일면 맞지만,
그런 시대 한 가운데서, 사무엘이 태어나고, 성장했다는 것이다.
만약 사무엘이 그렇게 시대를 탓하고, 그 시대의 지도자들을 탓했더라면
그는 절대로 그 시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사람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절대로!
사무엘은 그렇게 비판, 남의 탓 하지 않았다.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되, 자기도 그렇게 모델로 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지도자를 판단하고 비판하는 대열에 서지 마시라.
자기도 모델로 살지 못하면서, 비판까지 더한다면,
죄에 죄를 더해서, 자기가 비판하는 사람보다 더 잘못되게 된다.
▶사무엘은 자신이 먼저 신앙의 본질 위에 섰다.
이렇게 사무엘이, 자신이 먼저 신앙의 본질로 자라났기 때문에
그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주어져서, 하나님의 길이 보여졌고,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은 그 시대를 하나님의 길로 돌이킬 수 있었다.
엘리 시대는, 영적 분별력이 어두웠던 시대라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없었다.
그런데 사무엘 시대에는, 저들이 돌이킬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가 먼저 신앙의 본질로 살았던, 사무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무엘에게 이같이 하나님의 길(신앙의 본질)이 보여진 것은,
사무엘 그 자신이 먼저 신앙의 본질 위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이 보여졌다.
그래서 그 시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었다.
사무엘은 자신이 먼저 신앙의 본질 위에 섰다.
(물론 이 배후에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가 있었다. 그것을 전제로 말씀드리는 것이다.
지금 설교는 다른 관점을 말씀드리는 것임)
사무엘 시대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면,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줄로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무엘이 먼저 자신이 신앙의 본질 위에 섰던 것처럼
우리 각자가 먼저 그렇게 설 때, 하나님이 우리도 사용하실 것이다.
우리가 먼저 신앙의 본질에 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고,
이 시대를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가 먼저 그렇게 신앙의 본질을 살 때,
내 주위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하면서,
작은 물방울이 모여서 거대한 강물을 이루듯이,
궁극적으로 시대가 하나님께로 돌이켜지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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