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은총 막2:1~12 12.07.08.설교 인터넷에서 스크랩
*원제목 : 죄사함의 유효함
▲때로는 우리가 믿는 것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하여
우리가 믿는 것을 부정해봐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 내가 막연하게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들,
내가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것에 대해서, 다 부정해 보고 바닥까지 내려가 보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 바닥위에 다시 나의 생각과 신앙과 가치관을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쌓아올린 것은 더 이상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1970년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어느 날 메릴 스트립이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떠나갑니다.
아이와 남편을 버려두고. 남편은 갑자기 혼자 아이를 키워야 되는 입장에 직면합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하고 허둥지둥하지만, 어느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익숙해집니다.
같이 아침식사를 만들기도 하고 학교에 데려다 주기도 하고..
그러던 어느 날 떠나갔던 아내가 불쑥 나타나, 이혼을 요구하면서 양육권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사이에 양육권을 둘러싼 법정소송이 시작됩니다.
이 소송이 남편에게 점점 불리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변호사가 이런 조언을 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아이의 양육권을 원하느냐. 집에 가서 종이에 줄을 긋고
한쪽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장점을 써 보고, 다른 쪽에는 단점을 써 봐라.
이 두 가지를 비교해 보고 당신이 정말로 키워야 될 이유가 분명해 지면, 이 소송을 계속하자.’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와서 아이를 재운 후에 변호사의 말대로
A4 용지에 줄을 긋고 한쪽에는 장점을, 한쪽에는 단점을 쓰기 시작하는데
장점은 별로 생각나는 게 없고, 단점만 떠오릅니다.
직장 생활하는데 제약을 받고, 사생활에 제약을 받고,
아이 봐주는 사람을 구하느라고 늘 신경 써야 되고 등등.
그런데 이 아버지가 갑자기 종이를 내려놓고
아이 방에 가서, 잠자는 아이를 꼭 껴안고 이 말을 합니다.
‘얘야, 아빠는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한단다.’
계산은 끝난 것입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게 소위 바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을 부인해 봤을 때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바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이와 같은 경험이 유익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을 비교할 때, 한 가지 현저한 역사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는, 지난 이천년 동안에 엄청난 철학적 · 신학적 · 학술적 비판에
직면한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군데에서 온 비판이 아니고 여러 군데에서 온 비판입니다.
-진화론의 등장으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도전에 직면하지를 않나,
-정신분석학의 등장으로 죄의식에 대한 신앙이 도전에 직면하지를 않나,
-자유주의신학의 등장으로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도전에 직면하지를 않나,
-여러 이단의 등장으로 기독교 교리가 도전에 직면하지를 않나,
-심지어 공산주의의 등장으로 신앙의 자유 자체마저도 심하게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끝나지 않았고 살아남았고 오히려 번성했습니다.
더 강건해지고 더 지혜로워졌습니다.
반대로 이슬람은 비판의 자유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코란에 대한 비판, 모하멧에 대한 비판, 이슬람 교리에 대한 비판,
-역사성에 대한 비판, 합리성에 대한 비판, 역사 · 문화에 대한 비판,
이러한 모든 비판과 토론을 금지했습니다.
이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기독교도 아니고, 서구문명도 아니고, 생각의 자유에요.
자유롭게 생각하는 (비판의) 분위기에서 이슬람이 생존할 수 없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슬람 테러리즘은,
이들의 신앙에 도전하는 세력에 대한 광신적인 저항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판의 자유 · 생각의 자유 · 양심의 자유 · 종교의 자유가
기독교에 엄청난 도전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더 강건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닌,
설득과 회심과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와 진리에 의하여
사람들이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각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이 강요에 의해서 믿는 것이 아닌,
자신의 믿음, 하나님의 감동, 성령의 도움, 진짜 회심에 의하여
믿음에 이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전도자였던 D. L 무디가
미국 무신론자협회의 초청을 받아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무신론자협회는 이것이 기독교의 모순을 지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일부러 무디를 초청한 것입니다.
그런데 무디는 강연을 하러 와서 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가정에 대해서 말하고, 자녀에 대해서 말하고, 사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리고 강연을 끝내면서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을 사람이 있다면
일어나라고 했더니.. 무신론자 중에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하여 저항하는 이유는
이것이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사람들의 의사나 인격을 고려하지 않고, 강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나는 약하고, 하나님에게는 카드가 많고 나에게는 카드가 없고,
하나님은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갖고 계시고
나는 지옥을 면하기 위해서는 순응할 수밖에 없는
독선과 강요에 의한 신앙에 대하여 저항하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의 핵심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착한 행위를 강요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야단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야단맞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님에 의한 야단이든, 선생님에 의한 야단이든,
경찰관에 의한 야단이든, 종교인에 의한 야단이든, 야단은 야단이에요.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또 싫어하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내 죄를 지적하고 야단친다는 생각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래서 현대인은 죄를 설명해 버릴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설명해서 버릴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죄의식의 문제, 죄의식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을까.
심리적인 방법으로, 인류학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죄의식의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면
인간은 더 이상 죄의식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심리학 · 인류학 · 생물학 이런 것이 인간의 종교 심리를
어느 정도는 설명해주는 듯 했습니다.
학습효과 · 환경 · 원초적 부끄러움..
이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죄란 원래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죄의식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자동차 계기판에 엔진오일이 떨어졌다는 빨간불이 들어올 때
망치를 가져다가 그 계기판을 부숴버리면 불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빨간불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다고
엔진오일이 떨어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의 양심에 빨간불이 들어오는 것을
양심을 무시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평강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빨간불의 문제. 양심이 내가 부인할 수 없는 빨간불, 마음의 평강이 부재한 상황,
이것은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평강이 없는 것.
내가 하나님을 부인하면 정말로 자유해질 줄로 생각했는데.. 자유해지지 않았고,
내가 죄를 부인하면 마음이 편할 줄 알았는데.. 편함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죄의 문제는 죄를 부인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죄 사함을 얻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죄의 문제는 죄를 부인한다고 없어지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얻음으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 중풍병자든 그를 데리고 온 친구들은
예수님이 죄 사함을 선포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 사함을 얻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 모든 이유는 다 정당합니다.
인생의 고독함 때문에 오는 사람도 있고, 마음의 허전함 때문에 오는 사람도 있고,
또 일평생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에 와야 된다고 생각하고 오는 사람도 있고,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공짜 점심을 얻어먹기 위해서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모든 이유는 다 정당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사람이 찾아오든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모든 사람이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죄 사함인 것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것이 우선순위입니다.
다른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이전에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축복을 받은들, 죄 사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 축복이 그에게 유익이 될 수가 없는 것이고
몸이 건강한들, 죄 사함을 얻지 못하면
그 건강이 그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중풍병자든 그의 친구가 기대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며, 사죄의 은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이유는, 죄 사함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가면 죄를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죄를 말하는 목적은 죄 사함을 선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불편한 진실이 아닌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평강을 주기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정말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죄 사함을 받아본 다음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은 다음에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그의 병이 나은 것은 죄 사함을 받은 결과요 이후에 일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병 고침을 통하여 이 사람은 죄 사함의 유효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죄 사함의 유효함을 깨달음으로 죄가 진짜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평강을 얻은 다음에 우리는
과거에 얼마나 번민에 시달렸는가 하는 걸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신 그 순간에
죄 사함을 얻은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이미 죄 사함을 얻었으나 알지 못했던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죄 사함은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처럼
죄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해질 수 있고,
신앙이 담대해질 수 있고, 믿음으로 기도할 수가 있고,
믿음으로 섬길 수가 있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여전히 죄의식에 흔들리는 사람은,
기도에도 확신이 없고 신앙에도 확신이 없고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말씀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분이.. 예수님이에요.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그것을 믿을 수 없지만
예수님의 입에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선포하셨기 때문에
이 사람은 그것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의 다른 문제들이 해결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말씀하시는 목적은 죄 사함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듣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피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숨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나의 어두움 속에 숨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죄가 많이 있을수록, 내가 번민이 많을수록
더 빛 가운데 나아가려고 애를 써야지,
내가 죄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스스로 숨기려고 하고 또 피하려고 하고
하나님을 외면하려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찾으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찾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숨는 게 아니고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게 아니고
죄가 있기 때문에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으나 병든 자라야 필요하다 말씀하신 것처럼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께로 가면 나를 맞아주시고 나를 사랑하사 용서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부인하고 죄의식을 부인하려는 이 세대는
진정한 죄 사함의 유효함을 통하여
그들이 그렇게 애써 부인하려고 했던 죄의 실체에 대해서 인정해야 되고
숨기려고 하지 말고, 그것을 고하고, 고백하고, 긍휼을 구하고,
그때 비로소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었던 큰 짐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렐루야!
쉼, 안식, 예수님만이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분류 없음 > 201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더 크리라 (0) | 2012.10.15 |
---|---|
말세에 준비된 교회가 반드시 있습니다 (0) | 2012.10.14 |
성령에 이끌리어 / 젠센 프랭클린 (0) | 2012.10.11 |
운명의 골짜기 (0) | 2012.10.08 |
설교자의 할 말 (0) | 2012.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