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뜨림이 아니라 세움의 기도 계5:1~8, 눅18:1~8, 벧후3:13 계시록30강 일부녹취
◑1. 진정한 성도의 기도 -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대망함 계5:3~4
▲1. 사도요한이 울면서 드린 기도
계5:3, 하늘 위에나 땅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이가 없더라.
4, 이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하기에 합당한 자가 보이지 않기로 내가 크게 울었더니
요한이 큰 소리로 울었다. :4
왜냐하면 그 책을 펼 자도 없었고,
펴지를 못 하니 그 책을 볼 수 있는 자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책이 펴져야, 그 하나님의 재창조 사역이 계시되고,
또 성취되고, 완성될 터인데,
그 책을 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사도요한은 그래서 울었다.
왜 그 책을 펼 사람이 없는가?
아담이 타락하고, 죄를 짓고 난 후에, 모든 인간은 다함께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재창조, 구원 계획이,
그 책을 펴고, 볼 자가 없어서,
지연되거나, 유보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울음이었다.
그러니까 본문의 사도요한의 울음은,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염원이 담긴 기도였던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속히 이루어지게끔
안타까운 염원을 갖고 드린 기도였다.
▲2. 같은 맥락의 기도가, 계6:9에 나온다.
계6: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위 ‘하늘의 성도들’의 제단 앞 기도(6:9~10)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성도들’도 됨
앞서 살펴본 본문의 요한의 염원(5:3~4)과 마찬가지로
‘언제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까?’ 라는
안타까운 기다림이 담긴 염원이었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오매불망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성도의 진정한 기도이다.
그런데 언뜻 보면,
위 계6:10의 기도가 <원수에 대한 보복을 염원하는 기도>처럼 들린다.
그게 아니다.
그 이유를, 성경 전체의 맥락 속에서, 아래에서, 두루 살펴보려고 한다.
▲보복을 염원하는 기도는.. 올바르지 않다.
여러분, 혹시 이런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
‘우리 크리스천들을 조롱하는 저 못된 세상 사람들을 하루 속히 심판하시고,
하루 속히 본때를 좀 보여주십시오.’
‘하나님, 하루 속히 저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좀 상을 베풀어 주십시오.’
아마 대부분 이런 기도를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것이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기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이 땅에 사실 때,
보복성 기도가 아니라, 전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염원하는.. 그런 기도를 드리셨다.
하박국, 예레미야, 이사야, 모두 그런 안타까운 마음을 자신들의 글에서 표현하고 있다.
▲3. 일례로 하박국의 기도를 살펴보자.
합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3 어찌하여 나로 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목도하게 하시나이까,
대저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함이니이다.
위 하박국의 기도를 살펴보면,
위의 1.사도요한의 기도와 2.천국성도들의 기도와
맥락이 똑같다고 본다.
언뜻 보면, 어떤 울분이나, 원통함, 억울함에서 터져나오는 기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 ‘구속사역의 완성’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요한의 울음이나, 제단 앞에서 성도들의 기도나,
이 하박국의 기도를
‘단순히 하나님, 우리 원수를 언제 갚아줄 것입니까?’ 라고만 이해하시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위한 기도는,
단순히 우리의 원한을 이를 갈면서 품고 있다가,
하나님 앞에 일러바치는 그런 기도는 아니다.
우리 성도들이 평생 그런 기도를 드리다가, 자기 일생을 마치면 안 된다.
◑2. 성도의 기도는 향이다. 계5:8
▲기도는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
계5: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성도들의 그러한 기도가, 향이라고 말씀한다.
계8:3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향: 향기, 향기로운 연기, incense,
성도들의 기도를 이렇게 ‘향’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이 기뻐 흠향하시는, 그런 향기로운 냄새와 같다.
위 두 구절에서, 성도들의 기도를 ‘향’이라고 묘사한 것을 보면,
계5:4의 사도요한의 울음기도도 ‘향’이요,
계6:10의 제단 앞 성도들의 기도도 ‘향’이다. 전체 흐름과 맥락안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니까 지금 문제가 되는 계6:10의 기도가
‘보복을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복을 구하는 기도’는 향이 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도리어 악취가 될 것이다.
▲성소에 향은 항상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성전 혹은 성막에
성소의 향단에서는, 향이 항상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제사 때 향을 제물로 드렸다.
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에서, '향(예물)'을 항상 동반했다.
이스라엘의 향 제물은, 보통 숯불을 담은 냄비 안에서 만들어졌다.
그래서 그 숯불에서 나오는 연기가, 향과 섞여진 형태가 바로 기도를 상징한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시141:2,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드는 것이 저녁 제사같이 되게 하소서.
자기 기도가, 마치 향기로운 향처럼, 하나님께 올라가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향기로운 예물인 성도들의 기도가,
‘하루속히 제 원한을 풀어주세요, 저 원수를 빨리 죽여주세요.’ 만약 이런 내용이라면
그게 어떻게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올려지는 향이 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것은 악취가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의 기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원한 섞인 기도의 내용을 보면, 복음서의 어떤 부분이 생각나시는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생각나실 것이다.
◑3.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눅18:1~8절에, 원한에 사무친 한 과부가 나온다.
이 비유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관도,
과부가 귀찮게 찾아오면, 자기가 해야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그 원한을 풀어주는데..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전능하시고, 의로우신 공의의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너희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겠느냐.. 꼭 응답해 주실 것이다.. 를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나서, 금방 그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안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 는 내용이다.
강청하고 매달리면 하나님도 귀찮아서 들어주신다는 데.. 초점이 있지 않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과, 응답되지 않는 성도들의 기도에.. 초점이 있다.
여기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대조해서
뭔가를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신자들의 염원을 이루어주신다 라는 것을 강조하는 비유이다.
그러니까 낙망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이다.
눅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한의 울음이라든지, 위▲1
계시록의 천상 성도들의 기도라든지, ▲2
구약의 선지자들의 기도라든지, ▲3
또는 이 단락,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아직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서, 그들이 낙망하고 있는 그 기도는,
내용상 모두 다 같은 맥락의 기도이다.
그렇다면, 우리 신자들이 해야 하는 그 기도는,
전부 ‘내 원수를 갚아 주세요’ 하는 그런 기도일까? 아니다.
▲정리하면,
그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서, 풀어주셔야 할 것이 무엇인가?
원수를 갚아 주시는 것, 물론 그것도 포함될 수 있겠지만, 강조점이 거기에 있지 않다.
그 성도들의 기도의 핵심과 강조점은,
언젠가 최후의 심판 때, 우리의 대적들이 완전히 멸망하는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서 머문다면, 우리가 똑같이 악당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의 원한을 이를 꽉 물고 품고 있다가
절치부심, 와신상담하며 ‘이 원한은 꼭 풀고 말리라’ 하며 드리는 기도..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이 될 수 없다고, 앞서 말씀드렸다.
그러면 ‘네 이웃을 용서하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그런 '원수 갚음을 염원하는 기도'는 아닐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성도의 기도의 공통되는 맥락은,
‘원수를 갚아주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구속 사역을 속히 완성시켜 주소서’ 하는 기도이다.
더 나아가 그것은,
자기 속에 이루어져야 하는 자기 개인적 하나님의 나라,
즉 자기 구원의 완성을 염원하는 기도가 되어져야 한다.
아래 단락이, 이해를 도와 줄 것이다.
◑4.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은.. 심판이 아니라, 완성에 목적이 있다.
▲심판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다가 보니.. 심판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재판관은 단순히 법을 안 지키는 자들에게
형을 선고하는 자가 아니다.
재판관은 재판관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준행하며,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잘 살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재판관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수호하는 과정에서,
거기에 반대하는 악당들에게 벌이 내려지는 것이다.
그러한 정의의 선고를 내릴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러니까 복수, 원한을 갚음, 이런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성취하도록 세워진 사람들이 바로 재판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는 관심이 없고,
무조건 심판만 휘두르는 자는.. 온전한 재판관이 아니며,
성경에 나오는 의로운 재판관들은,
전부 다 의로우신 재판관이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심판이 아니라, 심판을 통한 완성인 것이다.
▲사사는 예수님을 예표
여러분 사사기를 영어로 <Judge, 재판관>이라고 한다. *한자로 士師로 번역
성경에서 사사들은, 전부 전쟁을 해서, 적을 쳐부순 사람들이라면
그들을 ‘장군’이라 불러야 마땅한데, 성경은 그들을 ‘재판관’이라고 부른다.
사사들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관영한 악을 몰아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 바로 사사기이다.
-그런데 그 분은 왼손잡이(에훗)의 모습으로,
-소 모는 막대기를 가진 자(삼갈)의 모습으로,
-연약한 아녀자(드보라)의 모습으로.. 그렇게 오신다는 것이 사사기의 교훈이다.
그러니까 사사들이 열심히 전쟁을 해서, 적군을 물리친 사건들은,
전부 하나님의 법을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악과 무지와 불법을 진멸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사기는 전체가 다 복음이다. 다른 구약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사/재판관이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단순히 악당을 죽여서 원한을 갚는 것이 아니라,
악을 진멸하고, 의를 세우는 일을 한다.
전자(악을 진멸)보다, 후자(의를 세움)에 더 강조점이 있다.
▲마치는 말
우리가 계시록과 누가복음 18장의 비유에서 보았듯이,
성도들이 드린 기도,
즉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저 악한 세력을 심판하시고,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시겠습니까?’ 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뤄주신다.
그것은 무엇이 이루어진다는 것인가?
단순히 원수를 갚아주겠다는 것이 아니다.
악이 진멸되고, 하나님의 의가 완성될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신다.
그 일은, 반드시 너희들에게 응답될 것이라는 것이다.
악이 진멸/보복되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굳건히 세워지는데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한 번 살펴보자.
만일 오늘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면,
여러분은 거기에 들어갈 자신이 있으신가?
지금 당장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추하고 엉터리 같은 모습이 남아 있다.
그래서 여러분, 스스로 많이 고민하실 것이다.
‘왜 나는 예수를 오래 믿고도, 여전히 이 모양인가?’
‘왜 나는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내 안에서 악이 가득한 행위가 나오는가?’
이런 고민들을 하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단순히 ‘저 악한 놈들을 빨리 심판해서,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가 아니라,
‘하나님 내 안에 있는 이 악한 것들이 언제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사는 자가 되겠습니까?
하나님, 하루 속히 내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이 오게 해 주십시오.’ 라는 내용이
오히려 주된 내용이 되어야 한다.
우리 성도의 기도는, 원수를 심판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내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가 지금 자기 꼴을 보면, 절대로 우리는 변할 것 같지 않지만,
내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라.
불의한 재판관도 자기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과부의 염원을 풀어주는데,
의로운 재판관인 내가 왜 너희의 그 향기나는 기도를 응답하지 않겠느냐,
그 날은 반드시 곧 속히 온다.’
그게 성도들의 향기 나는 기도의 내용이요, 기도응답이다.
단순히 ‘반드시 내 원수만 갚아주세요..’ 이것은 악취나는 기도일 것이다. (기도가 아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거룩과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하나님의 의를 염원하는 그런 기도가 되어야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기도를 '향기나는 향'이라고 성경은 표현한다.
▲그 나라는 완성되어져 있다.
사도요한은 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유보되거나, 지연될 것을 염려해서
지금 본문에서 큰 소리로 울었다. 계5:4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그 날이 이미 완성되어져 있다고 말씀한다.
벧후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But in keeping with his promise we are looking forward to
a new heaven and a new earth, the home of righteousness. / NIV
그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져 있는가, 아닌가?
이루어져 있다.
거기는 온전한 의가 이루어져 있다. ‘the home of righteousness.’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상태에 있다. 'looking forward to '
우리는, 아직 우리 인생속에서 하나님과 완전한 관계의 회복인 그 의를 추구하며,
염원하며, 그 완성의 날을 열망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셔야 한다. ‘왜 내 안에서, 그 의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면서..
그렇게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를
간절히 열망하는 자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이다.
그런 자들에게, 의가 완성된 천국이 반드시 약속되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6
▲우리는 신세 한탄하는 눈물이 아니라, 그런 눈물을 흘려야 한다.
대부분 교회에 와서 우는 사람을 보면, ‘우리 시어머니가 나를 너무 핍박해서..’
교회에 오르간 반주도 잔잔하니까, 그 설움이 북받쳐서 울고,
울고 난 다음에 시원하니까, 내가 은혜 받았다고 그러는데.. 그런 울음 보다는,
여러분, 이런 일로 우셔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완성된 그 의를 사모하면서 통곡해야 한다.
스펄전 목사님은 ‘성도들은 벧엘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김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보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엉엉 통곡하면서 운 곳이다. 삿2:5
벧엘(하나님의 집)에 도착하기 위해서, 반드시 이 보김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눈물을 좀 흘려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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