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함이 있는 믿음 약2:1-26 인터넷에서 스크랩
약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저는 어려서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서 사 먹은 적이 있는 국밥 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속까지 후련한 국밥 참 맛있죠.
그런데 국밥 중에서도 따로 국밥이란 것이 있습니다.
대개 국밥은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주는데, 따로 국밥은 국물 따로, 밥 따로 줍니다.
밥과 국을 함께 말아서 주는 국밥이든, 따로 주는 국밥이든 참 맛있습니다.
그런데 ‘따로 국밥’이 아니라 ‘따로 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것 따로, 행하는 것 따로인 신앙입니다.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말씀에서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 따로 노는 신앙, 행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켜서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이 시간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나의 믿음은 과연 살아 있는 믿음인가? 죽어 있는 믿음인가?
잠자고 있는 믿음인가? 아니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믿음인가?
차갑게 얼어 붙어 있는 믿음인가? 불처럼 활활 타오르는 믿음인가?
스스로 점검해 보고,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로, 살아 있는 믿음은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오늘 말씀 전반부인 1-13절에서 당시 교회에 있었던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교회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좋은 자리로 안내를 했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오면 거기 서 있든지,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고 말하였습니다.
왜 이처럼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할까요? 부유한 사람에게 잘 해 주면
그 사람에게서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시하거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을 이해관계에 기초해서,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이런 생각을 ‘악한 생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는 것이 왜 악한 생각입니까?
5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으로 부요케 하셨습니다.
고후 8: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없이 부요하신 분이시지만
이 땅에 오셔서 부유한 사람들만 상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비천한 말구유로 오시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상대하신 사람들은 주로 병든 자, 귀신들린 자, 세리, 창기들,
그 시대의 밑바닥 사람들. 사마리아 여인이나, 삭개오처럼 소외된 자들,
그 시대의 왕따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제자들도 예루살렘의 엘리트들 중에서 선택하지 않으시고,
갈릴리의 시골 어부들 중에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부요케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28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그랬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전에 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죄로 고통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쓸모없는 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잘 나고 똑똑하고 배경 좋은 사람만 골라서 선택하셨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택함 받은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목자도 되고, 선교사도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만약에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어버리고 뭔가 있는 사람, 잘난 사람만 우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차별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시겠습니까?
더구나 6b,7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부자들 잘 대해 주었더니 오히려 그들이 거만해져서, 성도들을 법정에 고발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 예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케 함을 주러 오신
예수님의 그 아름다운 이름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8,9절을 봅시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람을 공평하게 사랑하지 않고 차별하여 대한다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죄는 그것이 살인죄든, 간음죄든,
사람을 차별하는 죄든 다 똑같은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우리 신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져야 할 자세는 차별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이 무엇입니까? 긍휼은 조건없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서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던 없던, 그것에 관계없이
그 사람 자체를 불쌍히 여기고 그 아픔에 동참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수 애양원에 갈 때마다 한편으로는 은혜를 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애양원 원장이 1대부터 5대까지
다 외국인 선교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을 거두어 주며 그들의 살 공간을 만들어 준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가 처음으로 나병환자들을 수용해서 돕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500명, 600명이 모여 들었습니다. 지금의 봉선동에 땅을 사서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었는데, 집값 떨어진다고 나병환자 수용소를 옮기라고
윽박지른 사람들은 다름 아닌 광주시민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데리고 간 곳이 여수 애양원이었습니다.
포사이드는 미국 프린스턴 의대를 졸업한 수재입니다. 그가 뭐가 부족해서
가난한 나라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동족들조차 싫어하고 차별하는 나병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봐 주었을까요? 그것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오직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 이후에도 윌슨등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와서 헌신했습니다.
다행히도 지금 원장은 우리 한국인 의사인 김인권 장로입니다.
그는 서울의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이지만
나병 환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여수에 내려와서
지금까지 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나병 환자들 뿐 아니라
연세가 오래되신 노인들의 휜 다리를 아주 저렴하게 수술해서 재활해 주는 데
세계적인 권위자요, 명의로 꼽히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얼마든지 사람들을 차별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실력과 명성으로 힘없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배척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 합니다. 실력으로, 힘으로, 권력으로, 부족한 자들, 없는 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냉대합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경제논리, 힘의 논리입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아니꼬우면 너도 출세하라’고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부익부 빈익빈의 차별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세상논리가 은연중에 교회까지 침투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사랑이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가 얼마나 삭막해지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다시 1절로 돌아가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우리는 경제논리, 힘의 논리, 이해관계에 기초해서 사람을 대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에 기초해서 사람을 대해야만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한마디로 긍휼의 마음입니다.
힘없고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자들을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만약에 긍휼과 자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우리는 생명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한 영혼에 대한 불타는
목자의 심정, 긍휼의 마음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목자의 심장이 멎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 가지가 부족해도,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돌아보고, 기도해 주고,
섬겨주는 긍휼의 마음이 있다면 그 교회는 살아 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넘치는 교회,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합시다.
“차별대신 긍휼을 주시옵소서” “차가움 대신 따뜻함을 주시옵소서”
“냉철한 지식보다 불타는 목자의 심정을 주시옵소서”
야고보는 13절에서 긍휼은 하나님의 심판도 이기고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7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습니다.
올해 우리가 소원 있는 양, 소원 없는 양. 가능성 있는 양, 가능성이 희박한 양.
재목감, 손이 많이 가는 양. 그렇게 차별하지 말고,
주님이 보내주신 모든 사람들을 다 귀히 여기고 적극적으로 도와야 하겠습니다.
한 영혼을 우주와 같이 귀히 여기고, 그래서 그를 어찌하든지 죄로 부터 구출하고,
그 마음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감당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때 양도 살려내고, 우리도 살아나는 생명력이 충만한 교회가 될 줄 믿습니다.
◑둘째로, 살아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믿음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는 것, 부활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을 굉장히 소중히 여깁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을 달달 외우기도 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 마가복음 9:28절을 크게 써서 붙여 놓은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삶이 따라가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돌아보질 않습니다.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주께서 축복주시길 원합니다”
축복의 말만 그럴싸하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질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유익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분명히 믿음은 믿음인데, 살아 있는 믿음이 아니고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아는 믿음, 이론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 그것은 아무런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19절에 보면 그런 믿음은 귀신들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마가복음 5:7절에 보면 거라사 광인이 예수님을 보고 그렇게 외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그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귀신같이 알아보았습니다.
귀신들도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알기는 아는데 순종을 하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만약에 예수님을 지식적으로만 믿고 행함이 없다면,
귀신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굉장히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19절,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절,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허탄한 사람이다. You foolish man. 어리석인 사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useless, 아무 소용이 없다고 말합니다.
▶저는 믿음을 3단계로 분류해 보았습니다. 3개의 H를 써서.
Head Faith,
Heart Faith,
Hand Faith.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말씀을 공부하고 머리로 믿습니다.
Head Faith.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반드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Heart Faith. 가슴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심령이 뜨거워져야만 합니다.
가슴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가슴 신앙이 손발로 옮겨져야만 합니다.
Hand Faith. 내가 머리로 믿고, 가슴으로 느꼈으면 구체적으로 손발을 놀려 움직여야죠.
머릿속에서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하고 계획을 해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옛날에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해서 편지를 수 백 통 썼답니다.
매주 한통씩 쓴 것입니다. 마침내 그 여자가 감동을 받고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자가 결혼한 남자는 편지를 쓴 남자가 아니고,
편지를 전달해 준 젊은 집배원, 우편배달부였답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만하면 뭐합니까? 행동으로 보여 줘야죠.
직접 집으로 찾아가서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매주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따뜻한 미소로 편지를 전해준 배달부에게
여인은 더 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구주로 확신한다면
이에 따르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지 않을까요?
추운 겨울날 눈보라가 몰아치는 운동장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면서 설문지를 돌리며
핏싱fishing하는 행함이 있어야 신입생 한 양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종 예수님을 배웠으면, 직접 빗자루를 들고 교회를 청소하고,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고, 책상 의자를 정리하고,
선교사님에게 몇 줄이라도 힘이 되는 메일을 보내는 행함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저도 다 마음은 있습니다”
“저도 캠퍼스에 올라가서 전도도 하고 싶고, 제자양성도 하고 싶고,
청소도 하고, 선교사로도 나가고 싶습니다. 제 마음을 알아 주세요”
네 그 마음, 기특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과 말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행동으로 옮겨져야만 합니다.
요한일서 3:18절은 그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도 야고보는 행함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라합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이고, 믿음의 조상이고, 남자입니다.
라합은 이방인이요, 기생이었고,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다 행함으로 그 믿음을 보여준 살아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방향을 주십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이 많은 것도 아닙니다. 아들 하나.
그것도 천신만고 끝에 100세에 낳은 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을 아들,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애지중지 키운 아들입니다.
그런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니? 아무리 믿음 좋은 아브라함이지만 이를 행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한 부족에게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그 부족의 전속 무당이 추장을 찾아와서 말하기를 흉년이 그치고 비가 오게 하려면
추장의 딸을 산 채로 땅에 묻고 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필 추장의 딸은 하나 밖에 없는 외동딸이었습니다.
추장은 자신의 딸을 너무 사랑하지만 부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제삿날이 되어 모든 부족민들이 모인 가운데 구덩이를 파고, 추장이 딸을 안고
그 구덩이에 넣을 찰라였습니다. 딸이 말합니다.
“아빠, 잠깐, 아빠 수염에 흙이 묻었어” 하면서 그 딸이 앙증맞은 손으로
추장의 수염에 묻은 흙을 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죽을 줄을 알면서도 아버지 수염에 흙을 털어주는 딸을 보자,
추장은 그동안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추장은 그 딸을 꽉 껴안고 말했답니다. “난, 이 딸을 잃고 살 수 없소. 추장도 싫고 다 싫소”
하면서 추장 자리를 버리고, 딸과 아내를 데리고 다른 마을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했을 때 이삭이 그렇게 말하잖습니까?
“아버지, 나무와 불은 여기 있지만 번제로 드릴 어린양은 어디 있습니까?”
저 같으면 아들의 그 말을 듣는 순간, 믿음의 조상이고 뭐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그 길로 이삭을 데리고 하산하고 말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두 눈을 꼭 감고, 이삭의 두 손을 묶고 제단에 올려놓습니다.
“아들아,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단다” 말하면서 진짜 칼을 내리쳐서
이삭을 잡고자 합니다. 이미 이삭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깊이 인정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창22:12)”
이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행동하는 믿음을 보시고 그를 크게 인정하시고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 칭하셨습니다(대하20:7, 사41:8).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하나님의 벗이라는 칭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나와 대면하여 본 사람이다,’ 다윗에게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이런 말씀은 주셨지만 ‘내 벗이다’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셨습니다.
24절을 봅시다.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아브라함은 믿음 뿐 아니라 행함으로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믿음 지상주의를 경계합니다. 물론 믿음이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믿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행함을 보시고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보듯이 행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행함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순종은 자기 부인의 아픔을 수반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향해서 칼을 내리치는 순간,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칼은 이삭의 심장이 아니라
자신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행함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행함과 순종. 그것은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그랬는데,
그 자기 부인은 엄밀히 말해서 ‘자기 죽음’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물질, 결정적으로는 생명까지 내어 놓는 헌신.
그런 희생이 없이는 순종할 수 없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상천하지의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증거로 정탐군을 숨기는 행동을 할 때는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드러나면 이적행위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생명을 걸고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라합의 행동하는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사
라합을 다윗의 고조할머니로 크게 축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은 멋있는 말로만 진리를 설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삶으로 행함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고 낮은 세상에 직접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삶, 행함을 통해서 우리가 그 분의 사랑을 알고, 감동을 받고, 변화가 되는 것 아닙니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말합니다.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에게 과연 혼이 있는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살아 있는 믿음, 혼이 있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살아 있는 믿음은 따뜻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뜨거운 피가 돌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장에서 계속해서 뜨거운 피를 펌프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해서
끊임없이 사랑과 관심을 베풀고자 하는 열정의 펌프질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살리고 구원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좀 부족하고 서툴고 세련되지 못할지라도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공동체는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UBF 모임이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난 50년 동안 역동적인 모임으로 많은 젊은 영혼을 살려 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안에 거룩한 몸부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그저 이론적으로 공부하지 않고, 배운 말씀을 그대로 행하고자 하는 몸부림,
부족한 자신을 회개하고, 새롭게 결단하고, 방향을 잡고 투쟁하는 그 몸부림을 통해서
본국에서든 선교지에서든 병든 영혼들을 살리는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몸부림이 너무 힘들기 때문에, 버겁기 때문에, 귀찮기 때문에
멈춰 버린다면
그때 우리 모임은 서서히 굳어져서 마침내 죽은 모임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올해는 그 몸부림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내가 살고, 양을 살리고, 우리 민족과 세계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한 몸부림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감(즉, 영성일기) 쓰는 몸부림, 새벽기도하는 몸부림, 전도하고 심방하는 몸부림,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는 몸부림. 그것이 우리를 살아있게 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스피릿을 살아 있게 하고, 우리의 열정이 살아있게 하고,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가능성들이 꽃피게 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