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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 진지함을 유지하기 P2 / 스펄전

LNCK 2014. 3. 28. 13:08

www.youtube.com/watch?v=8CuszJcYlKg

◈21장. 진지함을 유지하기 P2                욥39:14~17, 민3:4                  도서 요약    

찰스 스펄전 <목회자 후보생 들에게> 21장 내용을 요약 정리했습니다. 크리스천 다이제스트 출판사.  

▶목회자는, 강단에서의 구령에 대한 관심, 진지함이.. 진실해야 합니다. 꾸며낸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진지함을 일부러 꾸며내는 것을, 가끔씩 볼 수 있습니다. 음성을 변해서 흐느끼거나, 아니면 열정이 결여된 고함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가짜로 꾸며낸 사실을, 즉시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설교자가, 자기 발을 구르고, 강단을 내리치고, 힘주어 소리치고 또는 일부러 감정적인 이야기를 시의적절 하게 연출합니다.  

 

그러나 이런 꾸며냄과 연기로.. 영혼을 감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연기가 아무리 좋아도, 연기는 연기일 뿐입니다.  

자기에게 열정이 식었다면, 차라리 식은 그대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최소한 역겨움은 주지 않습니다. 뻔뻔스럽다는 비난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강단에서 연기를 일삼는 자들은,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그 훌륭한 연기로, 성령님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는 자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진지해야 하고, 또한 평소에 자기 삶이 진지한 사람은, 강단에서 그것이 배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강단에서 불길 속에 치솟기 원하는 사람은, 평소의 삶에서, 불길 속에 휩싸여 살면 됩니다.  

평소에는, 싸늘하거나 무디게 지내다가 갑자기 강단에만 올라가면, 음성이 뜨거워지는 사람은.. 스스로 경계해야 합니다.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을 드리다가, 하나님께 진노를 받았는데, 민3:4 이런 ‘꾸며냄’이.. 오늘날의 ‘다른 불’인 것입니다.

즉 ‘성령의 불’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마음이 무뎌져 있으면, 그 무뎌짐을 그대로 드러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지쳐 있으면, 말도 천천히 하고, 목소리도 힘없이 단조롭게 구사하십시오.

그게 좋은 모범은 아니지만, 차라리 ‘연기자/ 가면’보다는 낫습니다.  

 

▶구령의 열정에 진지한 설교자는, 설교 후에도 계속 기도합니다. 성실한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놓은 후에, 방치하지 않습니다.

계속 물을 주고, 계속 밭을 관리합니다. 그런 농부만, 영혼의 수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이작 와츠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1674~1748  

‘여러분이 강단에서 들인 수고가 과연 성공을 거두기 위하여 큰 갈망을 가지십시오.

뿌린 씨에, 계속해서 물을 주십시오.   공적인 기도만이 아니라, 은밀한 기도를 통해서 그렇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끈질기게 간구하십시오. ' 

 

타조는, 모래 위에 알을 낳고서, 그것이 살든 죽든 그냥 내버려두는데, 욥39:14~17 그런 어리석은 타조를 닮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연구와 설교가, 영혼들에게 열매로 나타나도록, 끊임없이 수고하고, 살피고, 기도하십시오.  

 

리처드 백스터(1615~1691) 목사의 책의 어디에선가 읽은 내용입니다.  

‘아무리 명석하고 훌륭한 재능 있는 사람들도, 지극히 탁월한 설교가들도, 심지어 설교자 자신이 진정 신앙이 깊을 때라도,  

구령 사역의 성공을 사모하며 열심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그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으면, 

괄목할만한 목회의 성공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설교를 통해서 영혼들이 구원받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소홀함 때문에 영혼들이 지옥에서 정죄를 받게 된다는 이 끔찍스럽고도 중요한 생각이,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겔이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 집의 파수꾼으로 세움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위험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영혼들이 우리의 소홀함 때문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멸망한 영혼들의 피 값이, 우리 파수꾼들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겔3장)  

 

▶이런 점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고, 싱싱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설교자의 상징으로 아주 적절합니다. 내 주위 사람들은, 나를 떠올릴 때,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나요?  

 

우리의 목회사역은, 구령의 열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기둥 구름기둥 같은 영적인 파워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이 시대에, 복음으로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습관이, 평소에 늘 열정적이어야 하며, 자기 자신이, 자신을 그렇게 관리해 나가야 합니다.  

 

불이 식었으면, 자기 스스로를 빨리 다시 불붙여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불을 식게 만드는 잡다한 대화, 자기 정신을 분산시키는 불필요한 일들로부터

자기 스스로를 멀리 떨어져 있게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데 우리가 한 번 거룩한 진지함을 얻었다가도 쉽게 식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이 안타깝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혹자는 자기 책에서 이렇게 말했는데, 저는 참 명언이라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난한 시골 목사의 생각은, 알렉산더 대제가 가졌던 생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고 그는 간파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제가, 세계를 정복하는 일도 쉽지 않았고,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군대도 있었고, 참모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시골 목사는, 자기 혼자 동떨어져 있고, 주위에 거의 아무도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자기가 스스로 마귀와 대적하며 싸우면서 자기 마음과 생각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어쩌면 알렉산더의 세계정복보다 더 힘들다는 것입니다.  

 

저 스펄전은, 그 책에, 이런 말을 더 보태고 싶습니다.

“목사가, 자기의 거룩한 싸움에서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는 알렉산더보다 더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그럼 외로운 시골 목사만, 영적 나태에 노출되어 있고, 도시 목사는 안전할까요?

아닙니다. 도시의 목회자들도, 형태는 다르지만, 똑같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온갖 잡다한 일’의 위험입니다.  

 

불타는 장작을 한데 모아놓지 않고, 이리 저리 흩어 놓으면, 금방 불이 꺼져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도시 목회자는,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이.. 그의 열정을 차츰 식게 만듭니다.

 

잡다한 일로 인하여, 열정이 분산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일례를 들면, 도시에는, 한가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목회자를 찾아옵니다.

그런 잦은 방문, 쉴 새 없는 만남이.. 목회자의 구령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기도 합니다.  

모종의 조치를 취해서라도, 목회자는 자기가 방해 받지 않는 개인 경건의 시간, 묵상의 시간을 꼭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 가운데, 자기가 주님으로부터, 불을 당겨 와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열정을 계속 뜨겁게 유지하는 길 한 가지가 <연구>입니다. 연구를 소홀히 하는 목회자는.. 반드시 식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의 저서를 읽거나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연구’함으로써..

목회자는 계속 뜨거운 열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영국군대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영국 군대가 전투에 진지하게 임하느냐 하는 것은, 음식을 배부르게 먹었느냐에 달려 있다.’  

 

성도들은 마찬가지고, 목회자 자신부터가 ‘굶주린’ 상태에서는, 전투에 성실히 임할 수 없습니다.  

목회자 자신부터가, 서재에서 복음의 양식을 잘 받아먹어야 합니다.

그 배부른 용사가, 전투에서도 왕성하게 활기 있게 자기 사명을 잘 감당할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부르지 못한 군대에게서, 최상의 전투력을 이끌어 낼 수는 없습니다.

군대의 용맹성과 용기는.. 충분한 양식을 공급받은 다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미 이루어졌고, 장차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반드시 예정되어져 있습니다.  

그러한 모든 승리는, ‘배불리 먹은’ 건강한 군대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른 뼈다귀 같은 군대로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절대 동참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경박스런 대화를 조심하십시다. 특별히 동료 목회자들 간의 잡담, 오랜 시간의 쓸데없는 한담(한가한 담화)..

이런 것을 통해서도, 목회자의 진지함이, 크게 손상 받을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보통 친한 친구 목회자를 만날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러한 만남과 교제가 필요하지만, 지나치게 될 때 그 공허한 대화는, 오히려 목회자의 영성에 해를 입힙니다.  

대화는 유쾌해야 하지만.. 경박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무슨 말을 하든.. 그 대화가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져야 합니다.    고전10:31  

 

이것은 마치 노련한 항해와 같습니다. 한쪽은 ‘경박함’의 모래톱이요, 다른 한 쪽은 ‘우울함’의 암초입니다.

그 둘 사이 좁은 틈을, 사고내지 않고 노련하게 헤쳐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목회자가, 자기 열정을 식게 만들 때가 있는데.. 아주 차가운 사람과 만날 때입니다.

자기가 크리스천이라 하면서도, 사실은 ‘젖은 담요’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설교 후에, 이 ‘젖은 담요’들이 몇 마디 싸늘한 논평을 날리면, 일부 목회자는, 그만 자기 열정이 확 식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경박함’과 ‘우울함/싸늘함’사이의 그 비좁은 해협을 잘 헤쳐 나가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다 하더라도, 남에게 약간 남은 불씨마저 확 꺼트려버리는 ‘젖은 담요’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하찮은 것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하찮은 말 한 마디에,

상대방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가진 진지한 구령의 열정, 성령충만의 애절한 마음도, 큰 공격에 무너져 내리는 게 아니라,

(큰 공격에는 자기가 각성해서, 오히려 강하게 반응합니다) 하찮은 말 한 마디에..

쓸데없는 말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습니다.  

 

교회 직원이 ‘젖은 담요’인 경우에는, 정말 목회자가 지치게 됩니다. 그것은 마치 천사가, 빙산 속에 갇히는 것과 같습니다.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메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지요?)  

소처럼 열심히 일하는 짐승과, 나귀처럼 게으르게 움직이는 짐승을 한 멍에에 메우면.. 쟁기질이 매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계속해서 수고했으나, 눈에 보이는 성공이 없을 경우에,

목회적 열정이 식어지기가 쉽습니다.

올바른 시각에서 보면, 그때야말로 7배나 더 부지런히 수고해야 할 때인데도 말입니다.

 

토머스 풀러는 “하나님께서 열심히 수고하는 많은 목회자들을,

모래와 돌이 가득한 아라비아 사막에, 비를 내리기위한 구름으로 만드심으로써

그들을 낮추셨다”고 간파했습니다.

 

목회적 토양이라는 것은, 대체로 보면,

비옥하고 기름진 형편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대단히 척박하며, 농사짓기 어려운 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축 쳐지게 되는 데요..

 

성공이 없는 것 때문에, 우리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된다면, 그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에 빠져버리거나,

특히 성공을 거둔 형제들에 대해 시기심을 품게 된다면,

우리 자신을 심각한 걱정으로 바라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사역에 임했을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사역이 외적으로 꼭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도록 성공하지 못하면, 마음이 무거워 사역을 계속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자기의 진지함을 배가시킨다면

언젠가는 더 풍성한 수확을 얻게 될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우리의 기나긴 기다림이, 풍성하게 갚아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분명히 약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기다리나니” 약5:7

우리는 열심에서 나오는 거룩한 인내로써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고,

또한 시온이 은혜를 입을 때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란 본래 연약한 존재요,

본성적으로 침체 상태로 기우는 성향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이끄사 봉사의 일을 하게 하신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하셔야만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오로지 활시위를 당긴 힘에 의해서만 (타력에 의해서만)

계속해서 목표물을 향해서 날아가는, 화살과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또한 스스로 날 수 있는 능력을 구비한, (자력으로 나는) 새들과 같은 존재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의 바람의 힘에 의해서 계속해서 전진해 나아가는

바다의 배들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그런 바람의 힘이 없다면, 앞을 향하여 항해해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설교자들은 한 번 태엽을 감아 놓으면

정해진 곡조를 계속 울리는 노래 상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숨을 불어넣어야만 소리를 내고, 숨을 불어넣지 않으면

전혀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팔과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전혀 짖지 않고 게으름만 피우는 ‘벙어리 개’에 대한 일야기를 읽습니다만

이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56:10

 

하나님의 은혜가, 미리 예방시켜 주지 않으면,

우리 모두가 ‘벙어리 개’들이 될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무관심한 심령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라오디게아 교인들처럼 뜻뜨미지근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영혼구령 사역에) 진지해야 하고,

가짜 진지함을 보여서도 안 되고,

또한 진지함을 잃어버리기가 매우 쉽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이제는 우리의 모든 열정을 지속시키고

또한 그것을 배가시키는 방법과 수단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기로 합시다.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진지함의 불을 지펴야만, 목회적 열정이 지속될 수 있습니다.

꺼지지 않는 불꽃이란, 오직 하나밖에는 없습니다.

곧, 그리스도의 사랑의 불꽃입니다.

 

그 불꽃은 물을 아무리 퍼부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습니다.

하늘의 태양에서 지펴진 불꽃은, 그 근원이 되는 태양과 마찬가지로

영구하게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 불을 가진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무리 괴로움을 당해도, 아무리 실망스런 일들을 당해도,

언제나 충만한 열정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생명을 위한 열정이 지속되려면,

처음부터 하늘의 생명의 열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과연 이 불꽃이 있습니까? 우리의 심령 속에서 진리가 불타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입술에서도 불타오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은혜의 진리들이 우리의 일부분이 되어 있어야 하고,

우리 존재의 근본으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래 우리를 창조하신 그분만이, 그렇게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영혼들을 향한 사랑을 주셨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심히

그저 감정으로 그치지 않고, 생명의 원리가 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과연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계십니까?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 있는 열정이, 그저 인간적인 느낌에 불과합니까?

 

이 점에 대해서, 우리는 마음속으로 심각하게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진정한 목회 소명에서 나오는 그런 거룩한 불길이,

우리 속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   ▶스펄전의 통풍 (자기 병을 기도로 못 고쳤네요. 이게 현실입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 1869년 불과 35세의 나이에, 과로로 인해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로 그의 병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다 마마까지 겹치더니 결국은 통풍이라는 괴로운 병을 얻고 말았지요.   이 병은 혈액이 관절에서 응고되어, 팔이나 다리에 심한 통증을 일으키고 점점 온 몸으로 확산되어 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이 병으로 스펄전 목사는, 어느 때는 한쪽 다리를, 또 어느 때에는 양쪽 다리를 모두 쓰지 못하는 괴로움을 당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참으로 말로 형용치 못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이 가져다주는 고통 속에서, 절망하고 있지만 않았습니다. 늘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감사했습니다.   다음은 그의 병상 일기입니다.   "일주일간을 계속 모로(세로로) 누워 있어야 하는 고통은 참으로 컸다. 긴 밤이 지나는 동안, 한 시간 만이라도 잠이 들었을 때는 그 기쁨이, 마치 먹구름으로 가득 덮인 하늘에서, 한 뼘의 푸른 하늘을 발견하는 기쁨과 같았다.   그러나 안락의 반대편인 환난의 때에도, 주님의 크나큰 자비는 나타난다. 이 자비를 힘입어, 우리는 십자가를 달게 지며, 고통과 질병조차도 감사하면서 견디는 것이다."   또한 스펄전 목사는 투병 이후 이러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아픔을 느끼는 순간은 아울러 체험의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희의 육신의 자녀들이 몸이 아파 고통을 받을 때 우리 육신의 부모들도, 자녀와 함께 괴로워하며 고쳐줄 길을 사방으로 구합니다.   하물며 사랑이 풍성하신 아버지께서, 은혜로 구원하신 아들을 버리시겠습니까! 믿습니다. 이 어두운 시간의 고통 중에서, 저를 붙들어 주실 줄을 확실히 믿습니다.'   나는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습니다. 내가 높은 곳에 있을 때나 낮은 곳에 있을 때나,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룩한 경지에 이르도록 경주합시다." (이 단락 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