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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LNCK 2014. 4. 30. 08:40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행18:18, 딤전5:23           14.04.13.인터넷 설교 녹취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행18:18

 

 

▲본문 18절은,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여러 날’이라고 하면 통상 한 주간 미만의 기간을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우리 말 “여러” 라고 번역 된 헬라어 ‘히카노스’는

충분한, 혹은 충분히 많은, 이라는 뜻의 형용사입니다.

 

바울을 집요하게 배척하고 괴롭히던 유대인 회당장 소스데네가

유대인들을 동원해서 바울을 기습적으로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했지만

오히려 소스데네 자신이,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에게 집단 폭행당하는 사건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사건이 있은 뒤에도,

바울은 충분한 기간 동안 계속 고린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상황은 예전과는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그 사건 이전에는..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면

그 사건 이후에는.. 바울은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유대인들로부터

지속적인 배척과 괴로움, 억울한 모함과 고발까지 당했던 결과는

예상치 못한 복음 전도의 자유로움으로, 귀결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처럼 언제나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고 신비롭기만 합니다.

 

 

◑18a절을 보시겠습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설교 내용은 맨 아래 주1)을 보세요.

 

 

◑18b절 입니다.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안디옥의 수리아를 향해서 귀로에 오른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기 위해서, 고린도의 외항인 겐그레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얼핏 보면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무슨 서약을 하면서, 삭발을 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사람이 무슨 서약을 하거나 중대한 결심을 실행할 때

삭발을 단행하는 관습이 있어서, 그렇게 오해하기 쉽습니다만..

 

‘바울에게 일찍이 서원이 있었다’는 것은

바울이 이전에 고린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주님께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깎지 않고, 고스란히 손대지 않고 있다가,

겐그레아에 와서, 그 서원기간이 끝났으므로, 머리를 단정히 깎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나지르’는 구별하다는 의미로서,

나실인의 서약은, 남자든 여자든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정결하게 구별해서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서약을 뜻합니다.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이 준수해야 될 사항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1) 첫 번째 준수 사항은, 독주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반드시 음주와 관련된 술의 의미만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물이 석회수인 팔레스타인에서, 포도주는 물의 대용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주식인 빵으로 식사하면서,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주 개념이 아니라

식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우리나라의 물(또는 국물)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 서약을 한 사람은

희뿌연 석회수를 마실지언정, 포도주를 자기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해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2)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이 지켜야할 두 번째 준수 사항은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머리는, 심장과 함께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약기간 동안에 머리에 칼을 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은, 그 서약 기간 동안에 장발이 될 수밖에 없었고

서약 기간이 끝난 뒤에라야, 장발로 자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것은

고린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했던 바울이,

서약 기간이 끝나고 이제 고린도를 떠나면서

장발로 기른 머리를, 비로소 단정하게 배를 타기 직전에 잘랐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한 것은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간 고린도에,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아굴라 부부를 미리 포진시켜두고 계심을 확인하고서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주님께 자기 자신을 더욱 구별하여 드리기 위함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교회를 짓밟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의 터키 땅인, 수리아의 안디옥에서부터 두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유럽 대륙의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숱한 박해와 모함과 중상모략과

심지어는 죽음의 돌팔매질 속에서도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바울은, 자기를 온전히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런 바울이라면, 새삼스럽게 ‘나실인의 서약’ 같은 것은 불필요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나실인으로 고린도에서

(아마) 1년 6개월 동안, 머리에 칼을 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하루 세 끼 주식인 빵으로 식사할 때마다

그 빵을 맹물과만 먹었던 것입니다.

 

오늘 날 햄버거는 탄산수화 함께 먹는 것은 상식입니다.

햄버거 집에 가서 햄버거를 맹물과 먹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더욱이 1년 6개월 동안 햄버거를 맹물로만 먹는 사람은

전 세계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2000년 전에 빵을 포도주와 함께 먹는 것은, 팔레스타인과 서방세계의 식문화였습니다.

그 땅의 물이 석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무려 1년 6개월 동안, 빵을 맹물로만 먹었습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먹었던 맹물은, 우리의 지하수와 같은 청정수가 아니었습니다.

보기에도 희뿌연 석회수였습니다. 그 석회수가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신묘한 은혜로 자신과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자신을 나실인으로 드리기 위해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매일 석회수만 마셨습니다. (일종의 금식이었지요.)

 

바울이 나실인의 서약을 주님께 드린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바울 자기 자신을 위함이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자기 자신의 삶을 구별해서, 자신을 주님께 나실인으로 드리는 것은

자기 믿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자기의 영성의 깊이를 심화시키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동역자이자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던 디모데

바울에게 배운 대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말년에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였던 디모데에게 써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서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배운 대로, 자기 삶을 구별해서 주님께 나실인으로 드리기 위해서

석회수만 먹다가, 속(위장)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그와 같은 삶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그 구별된 삶을 존중하면서

단지 디모데의 속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포도주를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속병을 다스리는 약으로 조금씩 쓰라는 의미였습니다.

 

위대한 사도바울과 디모데도 영적 도약을 위한 나실인의 서약이 필요했다면

하물며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이야, 두 번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을 기리는 고난 주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절대로 당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으시는 속죄의 제물이 되기 위해서

그 참혹한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녕 이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나를 위해 예수님의 심신이 로마 군병들의 채찍질로 갈갈이 찢어지고

예수님의 머리가 가시관으로 터지고

예수님의 손과 발이 대 못에 박혀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려 마지막 한 방울의 피와 물까지 다 쏟고 돌아가심으로

 

내가 내 마음, 내 머리, 내 손과 발, 썩어 문드러질 내 몸뚱아리로 지었던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그 숱한 많은 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속에서 깨끗하게 씻겨졌음을 진정으로 믿으십니까.

 

그 사실을 믿는다면서도, 이번 고난 주일 역시 단지 입술의 고백만으로 끝나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이번 고난 주일 역시 연례행사로 끝날 뿐,

우리의 믿음은 또 한 번의 고난 주일을 맞고서도, 아무런 진보도 이룰 수 없지 않겠습니까.

 

▲마치는 말

오늘 우리는 본문 앞에서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자취하신 주님께

우리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드리는 나실인의 서약으로써

우리 믿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십시다.

 

남자들은 석회수를 마실지언정 그리스도인으로서 금해야 할 것.

끊어야 할 것을 미련없이 과감하게 삶에서 도려내고

그리스도인으로 행하여야 할 것은, 반드시 행하는 21세기의 '바울'이, 디모데가 되십시다.

 

끊어야 할 것을 끊어내지 못해서

고작 은 30냥과 주님을 맞바꾸었던 가룟 유다의 어리석음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마십시다.

 

여자들은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됨을 알아

외적 미모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어

자신의 집안과 이 세상을 주님의 생명으로 감싸 안는

그 영혼이 참되고 고운 믿음의 어머니 브리스길라가 되십시다.

 

어떤 경우에도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이는

선악과의 겉모양에 현혹되어

자신과 남편을, 자기 가정과 자기 시대를, 나아가 후손의 삶까지 파멸시키는

미련한 하와가 되지는 맙시다.

 

우리의 집안과 이 사회, 이 땅의 교회는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는 만큼만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보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 제물되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구별하여 나실인으로 드린다는 의미요.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를 통로로 삼아, 더 크게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주1)

행18:11절의 증언처럼,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이 지나서

바울이 보기에 고린도 교회가 이제 자생력을 지녔다고 판단되자

바울은 자신이 전도한 고린도 교인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본거지인 수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는 귀로에 오르기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기록되어있지 않았지만, 이 이후 사도행전 전개 내용으로 봐서

이 때 바울의 동역자였던 실라와 디모데도, 바울과 함께 동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아굴라 부부 역시, 고린도를 떠나는 바울을 따라 나섰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혈혈단신 고린도를 찾아갔던 바울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도움을 준 조력자들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천막 제조업자였는데,

본래 그들의 사업장은 제국의 수도 로마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후 49년 수도 로마에서 거주하던 유대인들이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자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에

로마 시민권을 소지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모두 로마에서 추방해버렸습니다.

그때 로마에서 추방당한 아굴라 부부가 새로 이주한 곳이 (바울을 만나게 된) 고린도였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로 이주한 직후에, 아무 연고도 없는 고린도를 찾아간 바울이

천막 제조 판매업자인 아굴라 부부를 만나, 그들을 도우면서

그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고린도를 떠날 때 즈음에는

행18:2절에서 살펴본 것처럼

주후 51년 고린도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이스트미야 경기 대회로

아굴라 부부가 특수 경기의 효과를 톡톡히 보아서

그들의 천막 제조 사업이 고린도에서 탄탄하게 뿌리를 내렸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계속 머물면서, 그들의 사업을 확장하려 하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저버리고 바울의 동역자로 고린도를 떠나는 바울을 따라 나섰습니다.

 

바울과 함께 1년 6개월을 지내면서, 바울로부터 전해들은 복음 덕분에

그들의 인생관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복음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인생의 참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들이 바르게 터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인생관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생명이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유한한 것들을 생의 목적으로 삼는, 세속적 가치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주일마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 뿐, 주님을 믿는 신자일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육체를 지니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이 세상의 것들도 반드시 필요하고 또 중요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주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의 것들은 그것이 무엇이던 단지 수단이요 도구일 뿐

그 무엇도 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이 사실을 정확하게 터득한 참 된 그리스도인이요.

이 세상 그 무엇에도 속박당하지 않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아굴라 부부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그 위대한 바울의 동역자로 기록되는 영광을 입은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본문에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의 이름보다 더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름의 순서는 서열을 의미했습니다.

이름이 먼저 불리거나 기록되는 사람은

그 뒤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에 비해서 직책이 더 높거나

나이가 더 많거나 더 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남편 아굴라와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연이어 등장할 때,

남편 아굴라의 이름이 아내의 이름보다 먼저 기록된 구절은

단 한 구절밖에 없는 데에 비해, 행18:2

 

아내의 이름 브리스가, 혹은 그녀의 애칭 브리스길라가

남편의 이름보다 먼저 기록된 구절은, 본문 18:18절을 포함해서 네 군데나 됩니다.

 

그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유대사회에서, 남편의 이름이 반드시 아내의 이름보다 앞선다는 것은

그 누구도 뒤집을 수 없는 불문율이었습니다.

 

소위 민주사회를 이루고 있다는 오늘 날에도 선진국에서 조차

남편의 이름이 당연한 듯 아내의 이름보다 앞서지 않습니까.

 

그러나 2000년 전에 기록된 오늘의 본문에는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의 이름보다도 더 먼저 기록됨으로써

아내 브리스길라의 믿음이 남편 아굴라의 믿음보다 더 출중했음을

본문은 우리에게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고린도를 찾아간 그 홀몸 바울을

아굴라 부부가 자기 집에서 숙식을 제공해 주었던 것도

새로 이주한 고린도에서 탄탄하게 사업적인 입지를 다진 아굴라 부부가

그 모든 것을 미련 없이 포기하고 바울의 동역자가 되어 바울을 따라 나선 것도

(다음 본문에 이어서 나오지만)

그들이 바울의 지시에 따라서 복음의 미개척지인 에베소에서 복음의 통로가 되었던 것도,

 

로마서 16장 4절과 5절의 증언처럼

그 이후에 그들이 제국의 수도 로마로 되돌아가서 가정 교회를 일구었던 것도

심지어 위험에 처한 바울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이 자기의 목숨까지 걸었던 것도

모두 아내 브리스길라의 주도로 이루어졌던 일이었던 것입니다.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남편 아굴라보다 먼저 나오는 것으로 봐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브리스길라의 남편 아굴라는 형편없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편 아굴라는, 자기보다 영적으로 앞서가는 아내 브리스길라를

탓하거나 제동을 걸기는커녕, 매사에 아내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것은 남편 아굴라의 영적 그릇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주님 안에서 두 몸이 아니라

명실공히 한 몸을 이룬 진정한 믿음의 부부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남자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만드신 뒤에

남자와 여자로 하여금 한 몸을 이루어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남자는 여자의 바른 도움 없이는, 스스로는 인생을 완성할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바르게 돕지 못하는 것은

남자의 인생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자와 한 몸을 이룬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망치는 짓이라고도 했습니다.

 

잠언14:1절이 한 집안, 혹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여자에게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구약의 열왕기서가 왕들의 어머니 이름을 의도적으로 밝히는 등

성경에 누누이 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성형 왕국, 패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여성들이 외적 미모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외적 미모를 추구하는 것은 여성의 특성이지만

그러나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한 집안을 지키고 한 사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은

여자의 외적 미모가 아니라, 여자의 바른 믿음입니다.

그래서 지혜의 책이라고 불리는 잠언서. 마지막 장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잠언서 31장 30절에서 31절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여러분 지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외적 미모의 고움과 아름다움이, 거짓되고 헛됨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외적 미모가 아름다워도, 세월이 흐르면 어쩔 수 없이 쇠하지 않습니까.

 

영원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현재 진행형으로

사라지고 있는 중인 것을 의미함으로, 거짓되고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영원하신 하나님 말씀만 영원히 참되고 곱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칭찬을 받습니다.

 

그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집안과 이 사회를 바르게 지켜내는

그 영이 참되고 고운 하나님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날 우리 사회는 가치관의 혼돈과 법, 질서의 실종,

그리고 정체성의 부재로 매우 어지럽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사익만을 꾀할 뿐, 공익을 위해서 헌신하거나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피해는 머지않아 고스란히 국민 모두에게, 즉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 불 보듯 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브리스길라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외적 미모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어

참되고도 고운 영혼으로 아내의 자리와 어머니의 자리를 바르게 지키면서

자기의 가정과 이 사회를 바로 세우는 브리스길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