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낮게 오셨다 빌 2:5-11 2014.12.25 *원제목: 거리로 오신 예수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낮은 자리에 처하십시오.
예수님은, 낮게 오셨고, 낮게 사셔서, 세상에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라는 주제의 설교문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
https://www.youtube.com/watch?v=DFqVmneGqQI&feature=youtu.be
▲'키엘케골의 왕자의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날 왕자가 시골을 시찰하려 내려갔습니다.
시찰하던 중 길을 지나가던 아름다운 처녀를 목격합니다. 그 순간 왕자는 그 처녀에게 사랑에 빠집니다.
마침내 왕자는 그 처녀 때문에 상사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이 왕자는 그날부터 어떻게 하면 그 처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왕자는 내가 그 처녀를 찾아가 고백하면, 신분 차이로 거절할 것이 분명한데..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왕자는 마침내 평민 옷 차림으로, 그 처녀가 사는 옆집으로 이사를 가서 이웃하며 살아가다가
그 처녀와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 둘은 마침내 서로 사랑하게 되자
왕자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사랑을 고백하여, 결실을 맺어, 결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나 사랑의 이야기는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주는 이야기 입니다.
키엘케골은 이것이 성탄의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왕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어느날 손오공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랬으면 그 왕자처럼 사람들이 예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그에게 육신의 옷을 입혀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우리의 옆에서 태어나게 하여 살게 하시다가
어느날 그 왕자처럼 이 세상에 자신을 공개하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인간의 옷을 입고 온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길이고 진지이고 생명이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요14:7,9)
▲예수님이 탄생하실 것을 처음 세상에 예언한 선지자는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BC 750-700년 사이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때 이미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가 탄생하실 것임을 예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계획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미리 준비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날 즉흥적으로 갑자기 일 하시지 않으십니다.
출애굽을 위해서 80년 전에 모세를 준비하신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양육을 위해서 믿음과 역사의식이 있는 어머니를 준비하셨고
그를 양육할 공주를 준비해 놓으신 하나님이십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예언한 그대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 과정이 아주 특이 하고 상상을 초월합니다.
◑오신 모습이 특이합니다.
▲1. 예수께서 태어나신 시점이 특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태어나시는데 여행중에 태어나십니다.
여행중에 산기가 있다면 낭패일 것입니다.
어떤 산모는 진통이 시작되어 병원에 가다가 택시안에서 해산한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병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해산한 분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정혼자 요셉의 고향으로 호적하러 가던 도중에 해산하였습니다.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입니까.
▲2. 만왕의 왕이 태어나셨지만 아무도 모르게 태어나셨습니다.
700년 전부터 오시리라고 계시된 메시야가 태어나는데, 또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
아무도 모르게 태어났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왕의 아들이 태어날 때 보십시오. 거의 국가적인 경사가 치러집니다.
그런 점과 비교할 때, 예수님의 탄생은 너무도 특이합니다. 다,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낮게 임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아래에서 자세히 설명합니다.)
세상 일은 태어날 때나, 여행이 행차가 거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세상에 태어나시는데,
그것도 700년 전부터 떠들썩하게 예언된 그 분이 오시는데.. 아무도 모르게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여행 길 도중에 말입니다. 더 극적인 것이 한가지 더 있습니다.
▲3. 태어나신 장소가 아주 특이 합니다.
여행중에 여관방이 없어서 추운날 말 우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말은 길거리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데, 이런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그 모습이 아주 특이하게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무슨 의도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에 무슨 메시지를 주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습니까?
여기에 깊은 뜻이 들어 있고, 하나님의 의도가 들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아들을 종으로 보내신다는 의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데, 그 아들이 군림하는 아들이 아니고
종으로 보내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은, 세상에 아들을, 종으로 보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노예들도 말구유에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는데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이 예수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세상에 오셔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종같이 대접을 받았습니다.
고난도 받았습니다. 업신여김도 받았고 배척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죄인으로 죽임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남기신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도 종이 되라,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라, 수고하라, 남을 섬기라“고 하신 가르침 입니다.
▲겸손과 섬김의 예수로 보내신다는 싸인입니다.
세상에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그 영웅들의 일대기를 보면 하나같이 내용을 가미하고 첨가하였습니다.
대체적으로 2가지를 가미합니다.
-하나는 유년시대 때 신동으로 천재로 묘사합니다. 김일성은 빨지산의 영웅으로 묘사합니다.
전투에서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이 늘 승리만 하였답니다.
김정일은 백두산에서 태어나 백두혈통임을 과시합니다. 그는 실제는 소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골프를 잘해서 한경기에서 홀인원을 두 번씩이나 하고
한 경기에서 40언더 32타를 쳤다고 선전합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세상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그런 짓을 감행합니다.
그리고 오늘 김정은을 미화하는 것을 보십시오. 김정은이 양어장을 시찰했는데
순간 잉어들이 김정은을 보자 펄쩍펄쩍 뛰면서 반갑게 맞이했다고 선전했습니다.
나도 그 양어장을 지나가면 잉어들이 펄쩍 펄쩍 뛰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잉어들에게3-4일만 굶겨 놓으면, 사람들이 그 곁을 지나가기만 해도
잉어 떼들은 뭘 얻어먹을까 해서 펄쩍 펄쩍 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그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역사에 너무 많은 조미료를 넣고 있습니다.
-그렇게 미화를 하는가 하면, 또 하나는 더 초라하고 더 무능하게 더 어려운 여건으로 소개합니다.
링컨은 켄터키의 산꼴에서 태어났음을 강조하는데, 그것도 더 초라하게 가미한 것입니다.
존 뉴턴은 초등학교때 낙제를 하였고
톨스토이는 대학때 낙제를 하였고
아인슈타인은 4살 때에야 말을 시작했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모두 천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재/위인들은, 미화하거나 반대로 더 초라하게 홍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실 그대로를 미화도 가감도 없이 소개합니다.
초라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초라한 부모 밑에서 자랐음을 그대로 말하고
본문에서 소개하기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군림하는 예수가 아닌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시려고 오시는 분이라는 점을 메시지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서 사용하실 때, 그 부르심의 기준 중에 중요한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삼으신 것은 그의 겸손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보실 때 “내 마음에 합한자”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이 후에 통일왕국을 이룬 후에 교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끝까지 겸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나라를 무궁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천성적으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을 좋은 조건을 갖춘 사람이었고 천재였고 능력자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아주 흠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목회자로 청빙도 받지 못할 조건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가 목회자를 모시려고 이력서를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한분이 이런 이력서를 보내 왔습니다.
“나이는 50세, 아직 미혼, 감옥에 여러번 갔다 왔음, 키는 작고 신체는 왜소하며 시력이 나쁨,
말은 어눌해서 설교를 잘 못함, 설교시 졸다가 넘어져 죽은 사람있음,
설교시 오직 예수만 설교함, 그래서 재미없음, 교회 여러번 옮겼음“.
청빙할 목회자의 이력서를 읽어 내려가자 청중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을 우리교회에 청빙할 수 있느냐고 고성이 오갔습니다.
그때 사회자가 말 하기를 “그 분이 사도바울입니다”하고 말하자 아무 말이 없었다고 합니다.
오늘 이런 이력을 가진 분이 어느 교회에 이력서를 제출하였다고 하면
과연 청빙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오늘 사람들이 얼마나 이력을 중시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들을 불러 사용하실 때는 이력을 보시는 것이 아니고, 그 기준이 겸손입니다.
사람들이나 이 세상이 아무리 조건을 본다 할지라도, 사실은 겸손자를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도바울을 외모를 보지 않고, 그의 겸손을 보고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도 갈릴리로 가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려고 예루살렘 대학으로 가서
조건이 좋고 공부잘하고 엘리트를 뽑으려고 했어야 합니다.
그 시대 엘리트는 모두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시대에 뒤쳐지고 가난하고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갈릴리 해변에서
고기잡아 먹고 살아가던 그곳으로 가셔서 제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은 어부들 중에 실패를 경험하고 배고픔도 알고
고기는 아무렇게나 해도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아는 사람들 중에서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은 그 시대에 겸손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제자로 삼으셨다는 말입니다.
◑또 예수께서 오시는 모습이 가혹할 만큼 초라한데
그것은 그 예수는 <장차 수난의 인생을 살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께서 태어나실 것을 700년 전부터 예고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막상 태어났는데 아무도 모른채 태어나셨습니다.
그것도 여행중에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장소도 은신할 곳이 없어 짐승들이 기거하는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길거리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무슨 메시지를 주시고자 하는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장차 이 예수께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입니다.
즉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철두철미 하게, 수난의 인생을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가난한 자들의 이웃으로 삶을 살고
철저하게 수난의 삶을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수난의 삶 통해 남기신 것 - 평화
예수께서 그렇게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삶을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남기신 것은
세상에 평화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평화입니다.
평화는, 잃어버리고 깨진 후에야, 사람들은 비로소 그 소중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화를 깨는 것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하였고, 주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평화를 위해서 수고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함을 받을 것이라고, 주님은 팔복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특징은, 평화를 깨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원수맺고 갈등하고 싸우고 죽입니다.
평화는 말 한마디로도 깰 수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평화도 깨고, 갈등도 유발하고, 불화를 야기합니다.
▲예수는 철저한 고난을 받으심으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평화는, 수고와 고난과 십자가를 져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를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으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십자가를 회피하거나 지지않으려 하면, 평화가 조성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십자가를 질 때 세상에 평화가 주어지고
가정에 평화가 만들어지며 교회에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역사가 토인비가 런던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너희는 역사의 주인이 되라, 그리고 역사를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수께서 대답하기를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빛난 사람들이 있는데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시대를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그 시대를 위해서 짐도 지고 십자가도 기꺼이 지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평화가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왜 그렇게 초라하게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것은 스스로 제물 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과 화해하는데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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