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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와 바디매오

LNCK 2015. 3. 15. 18:59

https://www.youtube.com/watch?v=yL68-v1WkGU 

 

◈삭개오와 바디매오               눅19:1~10                       스크랩, 정리

 

 

 

눅18장의 바디매오, (눅18:35~43)

 

눅19장의 삭개오.. (눅19:1~10)

 

둘 다 여리고성 사람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18장과 19장으로 분리되어 있는데요,

 

성경에 연이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리고 성 입구에서 구걸하던 바디매오를 만나셨고,

 

성 안에서 삭개오를 만나신거죠.

 

 

 

그런데 묘하게도, 두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방식에 있어서 큰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디매오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불렀고,

삭개오는 <소극적>으로 예수님을 갈망했던.. 그런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즉 바대매오는 자기가 예수님께로 적극적으로 나아갔고

 

반대로 삭개오는, 자신은 소극적인데, 예수님이 그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뽕나무 아래로요.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그럼 바디매오와 삭개오,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요?

 

삭개오 쪽이 더 가깝다는 것이, 이 글의 주제입니다!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 예루살렘 북동쪽 36Km 지점,

요단강이 사해에 합류하는 곳으로부터 북서쪽 15Km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아주 비옥한 땅이었고, 지금도 비옥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틴 지도를 보면, 여리고는

사마리아, 베레아, 이두메 지방을 서로 이어주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유다지방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중요한 관문 역할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여리고에는 지방간의 교역을 감시하면서 세금을 징수하는 많은 세관들이 있었고,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삭개오는 이들 세관들을 모든 관장하는 세관장이었습니다.

 

 

 

 

 

 

 

◑1. '삭개오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체코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토마스 할리크는

 

불확실성과 혼돈의 시대에 진정한 교회의 길을 여는 길잡이로

 

본문의 ‘삭개오 이야기’를 제시합니다.

 

 

 

점점 개인주의로 나아가는 오늘날,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삭개오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곧 오늘의 삭개오들에게,

 

즉 예수님과 기독교를 알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수동적인 그들에게

 

수줍어하는 그들에게

 

 

 

(바디매오처럼 적극적인 사람도 있지만

 

삭개오처럼 뽕나무 위에 숨어서 바라보는, 그런 소극적인 사람이 더 대세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먼저 찾아가서, 따스한 시선을 보내며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는 자세,

 

그들과 손을 맞잡고 진실한 만남으로 나아가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성도의 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토마스 할리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멸시하며 오만하게 삭개오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삭개오를 바라보는 시각’으로 세상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 ‘예수님의 태도’로 삭개오를 만나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삭개오의 시각’이란, 사람들에게 밀려나 예수님을 멀찍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이며,

 

돌무화과나무 위에 몸을 숨긴 채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시선입니다.

 

 

 

삭개오가 큰 부와 세력을 지녔지만, 내적으로 황폐하며 공동체에 제대로 속하지 못한 이였듯이,

 

오늘의 삭개오들인 현대인들도 복잡한 사회 안에서, 고립감과 내면의 부자유로 고민하고 번민합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움츠리고 있던 ‘키 작은’ 삭개오를

 

사람들 앞에 나서게 한 것은 그를 부르신 예수님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만한 모습으로 미리 준비된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눈을 맞추시며, 그가 용기를 내도록 이름을 불러 주시고

 

그의 집에서 묵으신 예수님의 태도가,

 

언제나 문밖을 맴돌던 삭개오를 마침내 진리의 문 안으로 이끌었습니다.

 

 

 

▲기독교 방송 TV에서, 정말 성심을 다해 봉사하시는 한 목회자를 보았습니다.

 

교회 주위, 동네의 많은 가련한 사람들에게, 반찬도 해 주고, 차량 봉사도 해 주고..

 

그렇게 열심히 섬김과 봉사를 하면서, 그는 '주일날 교회에 나오라'는 권면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목회자의 봉사를 받는 노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이 불편하기도 하고, 이발 상태나, 입고 나갈 옷이 마땅치 않기도 하고..

 

 

 

오늘날 전도가 ‘교회로 나오라’고만 하기보다는, (그것도 필요하겠지만)

 

그가 사는 그 옹색한 집을, 교회로 여기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거기서 예수 믿는 도를 전하면 될 것을,

 

오로지 '교회 나오라'는 말 한 마디 밖에 할 수 없다면.. 복음에 대한 더 철저한 배움이 필요합니다.

 

 

 

 

 

▲새신자 양육에 관한 달라스 윌라드 박사의 조언

 

 

 

(질문자) 우리는 새신자들이 예수님과 좋은 교제를 갖기 위한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무엇이 새신자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달라드 윌라드의 답변 :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홀로 있는 것>과 <배움>입니다

 

 

 

그들에게 따로 시간을 떼어내어

 

혼자 스스로 (기독교를, 성경을) 공부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홀로 있는 것 Solitude’ 은

 

가장 기본적인 훈련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도를 하든지, 성경을 보든지, 경건서적을 읽든지, 설교를 듣든지 하겠지요

 

 

 

여러분은 그들이 혼자 있는 시간에

 

스스로 기독교 신앙에 대해, 자습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거나, 추천 도서를 소개할 수 있겠지요

 

 

 

그러고 나서, 그게 어느 정도 무르익으면

 

또한 다른 성도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면서 대화를 하고

 

자기 자신의 중요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기 전에 벌써 소그룹에서

그 앞서 벌써 혼자 자기 집에서

기독교 신앙을 탐구, 연구할 수 있는

홀로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라는 것입니다

(무조건 교회부터 나오라가 아니라요)

 

 

 

그리고 다른 성도들과 함께

 

그것들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게 자연스럽게 인도합니다

 

이런 것들이 새신자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의 모습에 따라

 

개인적인 성장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다양한 권면들을 할 수 있겠지요

 

 

 

새로운 신자들에게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는 새신자들을 양육할 때

 

우선 먼저 조용한 골방에 가서 앉아서

 

홀로 잠깐이라도 잠잠하게 있는 시간을 가지도록 권면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잘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주님 앞에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새신자는

 

주님의 경외로움,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것은 영적 훈련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경외로움 아름다움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래서 새신자들이 때로는 찬양을 통해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찬양은 주님의 경외함 또는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도와주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홀로 있는 것을 배우는 것과 스스로 성경과 신앙을 공부하는 법을 배우고

 

그 다음에 다른 성도들과 함께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다른 성도들과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이것이 제가 제안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삭개오가 보이지 않던데요?

 

 

 

어느 날 초등학교 선생님이 자기 반 학생들에게 숙제를 냈습니다.

 

'집에 돌아가면 불쌍한 사람을 찾아가서, 작은 것 하나라도 도와주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날 학생들은, 대부분 숙제를 해 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학생들은 "아파트 단지 동네에, 불쌍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우리가 눈여겨 찾지 않으면, 우리 주위에 삭개오는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뽕나무 나뭇잎 속에 숨어있듯이,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기도하며, 잃어버린 양을 찾는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면

 

그들은 우리 주위에 반드시 있습니다.

 

가까운 친척 가운데도 있을 수 있고, 외로운 부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는 어르신도 많고요,

 

20대 30대에 벌써 인생의 고배를 마시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가 어디 눈에 띄지 않게 숨어있다기 보다는,

 

삭개오를 "보는 눈"이 내게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변의 많은 삭개오들을, 무심코 지나치고 있지요.

 

이제 그렇다면, 삭개오를 감화시킬 수 있는 영력(영적 영향력)이, 나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저 '교회 나오세요!'만 말하지 말고요.

 

그 분들도, 교회 못 나오는, 나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니까요...

 

 

 

 

◑2. 내가 손을 내 밀어야 합니다.

 

 

 

살면서 거절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게 됩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려서부터 자주 눈 맞추며,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많이 안아주고, 부름에 적극적으로 응대해야 한다는 교육학의 가르침을 자주 듣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 거절감의 상처가 있으면

 

그는 커서도, 다른 사람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기 때문이죠

 

 

 

내가 가진 장애 때문에, 다른 외모 때문에, 독특한 성격 때문에,

 

주위 환경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소외당하고 내쳐지는 경험은, 비단 아이들의 일만은 아닐 것입니다.

 

본문의 삭개오처럼 어른이 되어서도 고립되어지고 외롭게 살기 쉽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내 안에 숨어 들어가 안주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여리고의 소경에게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소리질러 예수님을 부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소경이면 요즘도 차별을 받는다고 하는데

 

당시에 굉장히 많은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 차별은, 육체적 장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이유로도 왔을 것입니다

 

너는 죄인이니까 소경이 되었다는 논리입니다

 

 

 

그렇지만 소경 바디매오는 그런 상황에서 꽁꽁 숨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것이 그의 훌륭한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손을 잡아 주려면,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믿음이었습니다.

 

 

 

 

 

◑3. 자신을 낮추는 자만이, 예수님을 부를 수 있습니다.

 

 

 

막10:46에 '디매오의 아들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고 나옵니다

 

성경에 '누구의 아들' 이라고 나오는 것은 그가 유력가문 이었음을 뜻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절반 이상은 ‘누구의 아들’ 이란 표현이 안 나옵니다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이라도

 

그의 가문은 그냥 보통 가문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바디매오는 소경이면서도 ‘디매오의 아들’이라고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력 가문의 아들인 그가

 

비록 소경이라 할지라도 길가에 구걸하듯이 앉아 있을 필요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먹고 살만한 것이 없어서 거기서 구차하게 남들보기에 구걸하고 있었을까요?

 

왜 유력가문의 아들이, 소경이라 할지라도, 구걸했느냐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전통에는,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낮추는 자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다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잣집 아들인 바디매오가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춘다는 표시로

 

길가에 앉아서 다른 여러 거지들과 함께 구걸했던 것입니다

 

 

 

돈이나 음식이 꼭 필요했다기 보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는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을 간절히 구하는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성경에 '티끌과 재 가운데 앉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소경 바디매오가 그렇게 겸손히 길바닥에 앉아서 구걸했다는 것입니다

 

그 낮은 자리에서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소리지르며 부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낮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윗의 자손. 구원자를 뜻합니다

 

즉 오늘날 표현으로 예수님 구원자여, 나를 불쌍히 여기고서

 

이렇게 우리가 기도할 때는, 내 자세를 바짝 낮추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내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출 때 주님은 반드시 그를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눅18:42

 

 

 

 

 

 

 

◑4.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심방을 통해 여러 가정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한 목회자의 관찰에 의하면,

 

집이 크고 화려할수록, 거기에 사는 사람 숫자가 적고, 웃음이 적고..

집이 작고 허술할수록, 거기에 사는 사람 숫자가 많고, 웃음이 많다는 것입니다.

 

 

 

큰 평수의 아파트를 들어가노라면, 현관 입구에서부터 냉기가 쫙 흐르는데

작은 연립주택을 심방하노라면, 그 집 주인이, 복도가 왁자지끌할 정도로

너무나 큰 웃음으로 맞이하며,

심방하는 목회자를 환대해 준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빈집은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할까요?

 

백 평 가까이 되는 큰 아파트, 갖가지 호사스러운 실내장식과 값비싼 고급 가구들,

그리고 안락하고 편리하기 그지없는 세간장치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집에 살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크고 호화로운 집일수록,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친적들, 심지어는 친 형제들도.. 방문하기를 내키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집에 사는 사람들 스스로가, 이웃의 접근을 막으려고

자기 마음의 높은 담을, 둘러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은, 싸늘한 무덤과 같습니다.

제 눈에는 초호화 고급 아파트와 호화 묘지가, 비슷한 느낌으로 와 닿습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서로 사랑을 나누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곳에 참 행복이 있습니다.

 

세관장 삭개오는, 돈이 많은 사람입니다.

돈 속에 묻혀 갖가지 영화와 향락을 누리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돈은 그에게 안락과 편리를 주지만, 기쁨과 행복을 주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손길, 따뜻한 눈 빛, 향기로운 미소가 절실했던 그의 집에, 예수님이 오십니다.

삭개오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눅19:8)

 

 

 

 

그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빈손이 되었지만 행복합니다. 행복을 얻었습니다.

 

물질과 행복, 둘 다 가지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물질을 움켜쥐고자, 소중한 인간관계, 가족관계,

 

심지어 '하나님과 관계'를 모두 버리게 됩니다.

 

 

 

삭개오의 훌륭한 점은,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서, the best

 

즉 최선을 얻기 위해서, 차선까지 과감히 버렸다는 점입니다. the good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내가 너무 마음의 담벼락을 높이 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요..

 

 

 

◑5. 하루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최근 실명한 한 자매와 나눈 대화가 제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고 안쓰러웠던 저는 무어라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하다가, 겨우 운을 뗐습니다.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많이 답답하시지요?" 그러면서 제가 농담조로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천사 같은 분의 눈을 감기시다니!"

 

 

 

저는 한 순간 엉겁결에 나온 말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면서

 

혹시라도 제 말에 상처라도 받지 않으셨을까 걱정하면서, 자매님의 얼굴을 살폈습니다.

 

 

 

그러나 웬걸!

 

자매님은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로(제 세속에 찌든 삭은 얼굴과는 비교가 안 되는 얼굴로)

 

해맑게 웃으시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정 반대예요. 요즘 하루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요즘 제 육체의 눈은 감겼지만, 영혼의 눈이 떠졌다는 것 아세요?

 

 

 

물론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하루 온종일 신앙 방송 라디오를 들으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답니다.

 

요즘 저는 오히려 육체의 눈을 감겨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 드리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회심을 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참으로 큰마음을 지닌 분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진정 영혼의 눈을 뜨신 분, 이미 천국을, 구원을 살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신앙의 연륜이 더해가면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노력이 바로 육의 눈을 조금씩 감는 노력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영의 눈을 뜨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장담컨대 새 세상이 반드시 열립니다.

 

영의 눈을 뜨는 순간, 천국이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정 새 인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영의 눈을 뜨기 시작할 때,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육신적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영적인 눈을 뜬다는 것은 한 인간을 외모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결과로만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깊은 상처를 헤아려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여리고의 소경은 간절하게 예수님께 부탁드립니다.

 

"주님,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제 영혼의 불구를 고쳐주십시오."

 

"매사를, 이웃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영적인 눈으로 분별하게 도와주십시오."

 

 

 

 

 

 

 

◑6. 신앙 여정에서 '혼자', '일회성 만족'은 안 됩니다.

 

 

 

삭개오 본문에서, 두 가지 면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혼자”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 문제를 혼자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혼자 찾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날은 모든 것이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문화적 환경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로 택배로 주문하면 되고,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인터넷 “다음”이나 “네이버”등의 지식검색에서 찾으면 다 채워줍니다.

 

개인의 문제마저도 혼자서 위로를 찾고,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회성 만족”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은, 기도와 하나님의 만남이 이런 일회성 만남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내적 문제가 생겼을 때만 예수님께 다가가 “위로”와 “평화”를 청합니다.

 

답답하고 뭔가 해결 안되면, 교회에 나가 위로를 찾습니다. 일회적입니다.

 

만약 어느 정도 그것을 해결하면, 또 신앙은 오랜 방학에 들어갑니다.

 

 

 

마치 성당이나 예수님이 “박카스”와 같은 “피로 회복제” 역할을 하는 것에 익숙한 것이죠.

 

'일회성 위로'.. 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삭개오,

 

개인적이고, 일회적 만남을 추구하기 쉬웠던 그에게,

 

예수님은 오늘 이 관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진정 당신을 만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당신이 직접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관계”, 다시 말해 “만남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하시는 말씀은,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삭개오나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직접적인 만남이라는 것입니다.

 

"혼자"나 "일회성"이 아니라, 친밀하고도 계속적인 상호 교제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여는 것(개방)입니다.

 

예수님은, 내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나에게 찾아오시거든요!

 

 

 

또한 성도들도, 예수님이 부족한 삭개오를 받아들여 같이 지내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도 부족한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 “함께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적 자세가 필요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만나고 영적으로 더 깊어지는 것은 어떤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그분과 세상을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또 다른 성도와 만나는 것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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