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인다면... 행11:20~21 2015.02.13녹취
*원제목 : 문화적 굴레를 쓴 믿음
<주제 요약>
한국에는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영어권에는 '이웃집 잔디가 더 푸르러 보인다'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주신 고유한 사명과 사역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남의 사역과 사명이 크게 보이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는 주제의 설교문입니다.
또한 지난 세대와 비교해서, '과거 선배 세대는 잘 했는데,
지금 우리 세대는 잘 못 하고 있다.. ' 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 세대는, 자기 고유의 사명이 있는 것이고, 그것은 비교 불가능합니다.
오히려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보다 더 나은 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우리는 대단한 일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그런데 당시에는 그것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평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대단한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그와 같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그 당시에는
우리가 별로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우리의 부족함을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되돌아보면,
그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내가 그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좀 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했을텐데.’
‘좀 더 감사할 수 있었을텐데, 왜 그때는 그것을 대단하게 여기지 못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지금 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까?
그건 불필요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현재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그렇게 크게 느끼지 못하고
지금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큰 기대를 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는 사람들이 더 잘했는데, 내 차례가 되었을 때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불필요한 책임감을 과도하게 느낍니다.
▲ 삼성그룹을 보면,
그룹 경영권이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이건희 회장으로 넘어갔을 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염려했을 것입니다.
과연 창업자만큼 할 수 있을까? 염려했을 것입니다.
이건희 회장 자신도 염려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건희씨는 회의를 할 때마다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위기를 강조했습니다. 이건 본인이 위기를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과연 선친만큼 이익을 낼 수 있을까?
본인이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경영자들이 모일 때마다 위기감을 강조했을 것인데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사실 잘했지요.
그래서 삼성이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것이 아닙니까?
아마 그 당시에는 그렇게 될 줄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도 삼성이 만든 제품이 세계 어느 곳을 가든 그 나라 공항에 입국할 때에
제일 잘 보이는 자리에 삼성전자의 광고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인데
그런 결과들을 이루었고, 이제 경영권이 그 아들에게 넘어간 이후에
다시 똑같이 염려를 하는 거죠.
아마 본인도 염려할 것이고, 주변사람들도 염려하고 국민들도 염려하는데...
이것은 삼성뿐만이 아니고, 기업체뿐만이 아니고,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 아버지는 일을 못했지만 나는 더 잘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아, 내가 선친만큼 할 수 있을까?’
‘과연 환경이 옛날처럼 좋을 수 있을까?’ 다 염려합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당번이 되었을 때 염려하기 때문에
자기의 가능성이라든가 또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해서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적인 것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대에 사람들이
한국의 교회에 대해서 말할 때 하나같이 염려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같이 염려하는 말, 경고하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이, 똑같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십니다.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이 받았던 성령을, 똑같이 우리가 받았습니다.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이 가르치던 말씀을, 이제 똑같이 우리가 전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믿음의 선배들이 하던 기도를, 이제 똑같이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든 복음이든 성령이든, 그 본질은 바뀌지 않았어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내가 당번이 된 지금
내가 과연 이전만큼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염려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지만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낮춰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게 있는 은혜를 멸시해서는 안되고
지금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하나님을 지금 낮춰서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고 불신이예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과거의 선배들보다 더 훌륭하냐, 모자라냐, 미련하냐,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예요.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 모자랄 수도 있고, 부족할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똑같은 구원이요,
똑같은 성령이요,
똑같은 믿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간과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사람만을 보노라면 부족함이 보여요.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은 어차피 부족한 존재예요.
과거에는 어른들이 멀리 계셨기 때문에
그들의 부족함을 가까이에서 볼 수 없었던 것뿐이지
그들이 우리보다 본질적으로 더 다른 그런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가까이 보지 못한 것뿐입니다.
다만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더 가까워졌어요.
사람들은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 가까이 그 사람을 검토하게 된 것이 달라졌을 뿐이지
사람이 그렇게 달라졌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과거에 믿었던 분들이
더 거룩했다던가, 더 의로웠다던가, 더 충실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거기서 거깁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예요.
위대한 사람이던, 부족한 사람이던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예요.
사람이 그렇게 위대할 수 있다면 왜 예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거룩할 수 있다면 무엇하러 예수님이 필요하겠습니까?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예요.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는 있고, 당시의 환경을 반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제 우리가 과거로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40년대, 50년대, 60년대로 되돌아갈 수는 없어요. 그때는 지나갔습니다.
그때 예수 믿던 분들은 그 시대의 상황에 맞게 예수님을 믿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때로 되돌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예수님을 믿어야 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예요.
이 시대, 이 환경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예요.
과거를 부러워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되지 않습니다.
과거에 믿었던 분들도 그 당시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지금 이 시대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면 됩니다.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위대해보이고 자기는 미련해 보이는 그런 경향이 있어요.
이것이 믿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남의 믿음은 위대해보이고, 내 믿음은 항상 부족해보여요.
그러나 그것이 불신이고, 하나님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제 말을 되풀이하지만, 똑같은 하나님이예요.
똑같은 말씀이고 똑같은 은혜예요.
남의 떡이 더 커보일 뿐이지,
그것이 내 믿음을 제한한다던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건 불신입니다. 그건 믿음이 없는 것이죠.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남과 같이 했던 것처럼 나와도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어야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가 족합니다.
만약에 부족할 것 같으면 그건 은혜가 아니예요.
하나님의 은혜는 늘 족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를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남의 떡이 커보여요. 우리 민족이 그런 사상이 강해요.
외국에도 그런 격언이 있습니다.
"The grass is greener on the other side of fence."
가운데 담장이 있고 잔디밭이 있는데 남의 것이 더 푸르러 보인다는...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와 비슷한 것인데...
사람은 남이 더 행복해보이고,
남이 더 예뻐보이고,
남이 더 잘사는 것처럼 보이고,
남이 더 잘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고 보면,
그사람이 더 예쁘지도 않고 그렇게 행복한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렇게 잘 믿는 것도 아니예요.
다만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 뿐이죠.
여러분 우리는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이론적인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낮춰봐서는 안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하면...’
나는 부족할 수 있지만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아요.
거기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개혁이 필요합니다.
나를 얼마나 낮추어보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도 낮추고 계십니까?
‘아, 내가 얼마나 부족하면 하나님의 나와 함께하시는 은혜는 남들보다도 부족한 은혜일까.’ ‘
내게 주신 은사는 남들보다 부족한 은사야. ’
그건 여러분,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따라 해보세요. 불신!!
불신은 나쁜 거예요.
불신은 그리스도인이 범할 수 있는 실수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예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 누구는 병자를 고치는데 누구는 못 고칩니까?
왜 누구는 미래를 예언하는데 누구는 못합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안주셔서 그렇습니까?
아니예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너희의 믿음이 적은 연고라.”
다른 이유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영적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은사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고,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의 훈련으로 반드시 배워야할 것 중의 하나가
어떻게 하면 믿음을 사용하느냐?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해요.
어떻게 내 믿음을 사용하느냐를 배워야해요.
내 믿음, 내 믿음을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해요.
믿음이 있는 것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있는 믿음을 사용할 줄 알아야해요.
사용하지 않는 믿음은 있어봤자 헛것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사용을 해야하지요.
▲사람들이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코 살 이유가 없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보석으로 장식한 TV는 사지 말아라...” 라고들 합니다.
왜냐하면 10년 후에 TV기술이 월등하게 발전할텐데 그 후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구형 TV를 어디다 두겠습니까?
이처럼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인이 가장 실수하는 것이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면서,
‘남들과는 함께하시지만 나와는 함께하시지 않을거다.’
‘‘나를 통해서는 역사하시지 않을거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그렇게 위대한 하나님이 아니다.‘ 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위대한 건 맞는데,
나와 함께하는 하나님은 위대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왜요?
내가 위대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하는 하나님도 별로 대단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러분, 그것처럼 큰 불신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는 게 아니예요.
복음의 내용이 내 자신의 스토리가 아니예요.
내가 얼마나 위대하냐를 말하는 게 아니예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복음이예요.
그러기 때문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어떤 존재인가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가 놀랍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것을 우리가 전하는 것이죠.
거기에 우리의 메세지의 초점이 있는 것이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 안에 계신 성령님.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무명의 평신도들의 위대한 역할
오늘 본문을 보면,
안디옥의 성도들이 환란으로 흩어져서 안디옥에 가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대인에게만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중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 사람들은 남들보다 베짱이 있는 사람들이예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었어요.
예루살렘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어떤 편견의 틀을 벗어버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문화적인 틀.
문화가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영성에 씌워주는 그 틀이 있습니다.
문화적인 한계. 나의 문화적인 배경 이런 것들이 우리의 믿음을 제한합니다.
우리의 믿음에다가 철장을 덮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믿더라도 네 분수를 알아야지... 이런 식으로,
이게 문화적인 것입니다.
문화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눈치채지 못합니다.
내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문화가 나에게 씌워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 출신은,
안디옥에 갔을 때에
유대인들 이외에게는 복음을 전할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구브로와 구레네 사람만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생각을 했어요.
이게 생각의 틀을 깨는 것이었어요.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것이 이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온 천하에 다니며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구브로와(구브로는 사이프러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레네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어요.
그들의 이름을 누가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명의 용사들. 그러나 이 무명의 성도들이 기독교의 역사를 바꿔놓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평범한 사람들의 역할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한국 성도들이 "처음에 어떤 계기로 교회에 나오게 됐느냐?"를 조사를 해봤더니,
월등하게 많은 숫자의 성도들이 주위사람의 권유로 나오게 되었다고 답변했습니다.
주위 사람의 권유!.
거기에 비하면,
부흥회라든가 전도집회라든가 무슨 방송이라든가
이런 계기로 교회를 나온 사람들의 숫자는 극히 적고
월등하게 많은 사람들은 주위사람의 권유로 교회를 나오게 됐다고 말합니다.
노방전도로 교회를 나왔다는 사람이 제일 적었어요.
그건 무엇을 보여주느냐,
일반 성도들이 역할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복음이 반드시 어떤 소수의 유능한 전도자에 의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니고
이름을 알지 못하는 무명의 평범한 성도들에 의하여
대다수의 전도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예요.
안디옥의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도 같은 방법이예요.
이 구레네와 구브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말하고 있지 않아요.
이름을 말하고 있지 않아요.
그러나 이들은 복음에 있어서 엄청난 기여를 한 것입니다.
엄청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행11:21절에 무엇이 그들과 함께했다고 했습니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의 손이란 말은 주의 능력이라는 말이예요.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
은사가 무엇이었는지,
말을 잘했는지,
지식이 많았는지,
성격이 어떠했는지,
그런 걸 말하지 않아요.
한 가지만 말합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니라.”
이게 중요한 거예요.
주의 손이 함께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주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불신입니다.
왜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끝냈습니까? 성령이 당신의 일을 마쳤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그때 주의 손의 그들과 함께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와 함께할 것이라고 믿어야해요.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한번 따라 해보세요.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하십시다.
*타자 및 정리: S.M.
'분류 없음 > 2014'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은 교회를 이길 수 없습니다 (0) | 2015.03.24 |
---|---|
비즈니스와 선교 (0) | 2015.03.23 |
예언을 보는 시각 (0) | 2015.03.20 |
감사는 마음의 변화에서 일어납니다 (0) | 2015.03.19 |
2014 신년집회 4 (0) | 2015.03.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