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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David Pawson's Unlocking the Bible

창세기 3 피조물과 진화 / David Pawson

LNCK 2015. 4. 15. 09:53

 

창세기  3  피조물과 진화                       영어 녹취록                   

 

이름 짓기와 그 중요성

 

여러분, 우리는 이미 2장을 강의 했습니다. 아직 48장이 남았지요.

지금부터 창세기 2장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장의 전체 스타일, 그리고 내용이 모두 아주 다르고, 더욱이 사건의 각도를 보십시오.

 

1장 같은 경우는, 만약 눈을 감고 있으면 위에서 아래로 보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제2장을 읽으면서 눈을 감으면, 위에서 아래로 보는 느낌이 아니라,

마치 땅에 서서 사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왜 이러한 느낌이 들지요?

이는 제2장의 주인공은 인간이기 때문이죠.

 

1장의 주인공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그분의 각도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2장에 들어와서 전체 화면의 주인공이 사람으로 바뀌었지요.

 

인간도 특별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지요.

1장에서 통칭하였지만, 2장에서는 인간에게 특별한 이름이 붙여집니다.

 

1장에서는 다만 남, 여로 인간을 통칭하였지만

2장에서는 남, 여라고 부르지 않고, 아담과 하와라고 하였지요.

이것은 인간이 남, 녀 각각이 특별한/고유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1장에서는 하나님을 그냥 하나님 (엘로힘) 이라고 했는데

 

2장에서는 하나님이 이름이 있습니다.

2장에 와서부터 그분을 '여호와 하나님'(야웨 엘로힘)이라고 불렀습니다. 2:4

 

야훼 엘로힘을 영어성경에 보면, 대문자“LORD”라고 번역했지요.

이것은 히브리 원본 성경에 원래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다는 표시입니다.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 이름을 다만 자음 4자로 했지요.

여호와(야웨 YHWH)란 이름이 이렇게 생성된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맞붙이는 것이 틀렸지요.

히브리어 요드를 응당 Y라 하고와우를 응당 W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영어 발음으로 응당YHWH 라고 했지요.

 

여기서 얻어진 것이 야웨입니다Yahweh)

그래서 새예루살렘성경에는 직접 이 이름을 쓰지요. “Yahweh God”

 

여러분 기억나십니까? 지난 강의에서 항상 always”이라는 단어가

야웨라는 단어의 의미와 아주 가깝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존재한다 be’는 동사의 분사형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존재하는 being always’ 이런 뜻이 되겠습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2장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고요,

남자가 이름이 나오고, 2장 끝에 여자도 이름도 나옵니다.

이 장에서 많은 이름이 나타나는데, 인명뿐 아니라 지명도 나옵니다.

다시는 육지라는 통칭이 아니고, 개별적인 고유 지명이 나옵니다.

하윌라, 구스, 앗수르 같은 이름입니다. 그밖에 에덴 같은 것입니다.

 

육지만 이름이 생긴 것이 아니고 하천도 이름이 생겼습니다.

여기서 4대강을 말씀하고 있고,

그중 두 개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힛데겔(티그리스)과 유프라테스 강입니다.

 

그러니 에덴은, 강의 위치를 통해 볼 때, 터키 동북쪽이거나 아르메니아 근처일 것입니다.

아라랏 산은 현재도 여전히 터키에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방주의 흔적을 찾으러 갑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그 지점을 추측할 수 잇지요.

하지만 이름의 중요성은 다만 이렇게 위치를 알려주려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이름은, 더욱 구체적으로 관계 relationship 를 나타냅니다.

 

 

2장에 나오는 첫 번째 주요 사건은, 바로 인간이 많은 관계의 중심점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도 바로 관계에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3가지 측면으로 나누는데,

위로의 관계, 아래로의 관계, 또한 옆으로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로 하나님과 수직 관계가 있고, 아래로 대자연과 관계가 있으며,

그밖에 나와 타인과의 수평적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토론하기 전에, 먼저 한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1장에서는 하나님을, Elohim 으로 통칭하였는데,

이 단어는 삼위 three’라는 표시입니다. 이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단수 동사이지요.

이 하나님이 인간과 같지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과 하나님은 동일하게 한 가지, 영원한 infinity의 특징이 있지요.

어떠한 피조물에도 없는 특징이지요. 어느 동물에게도 이 특징을 주지 않았지요.

 

여러분은, 침팬지가 기도하는 모습을 결코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짐승들과 다른 한 가지 특징이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인간만 유일하게 창조주와 닮았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닮았지만, 물론 인간과 하나님은 다르죠.

하나님은 절대 인간과 같지 않고, 인간도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 사이에서 균형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과 같은가 하면, 또 같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균형을 얻을 필요가 있지요.

그래야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같다면, 하나님은 우리더러 그분에게 친밀히 가까이하라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달라서, 우리더러 그분을 경외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친밀함과 경외함 사이의 균형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예배할 때, 당신이 하나님과 익숙하듯이 그분과 호형호제하듯이 할 수 있지요.

또는 반대로 겁이 나거나 위축되어서,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할 수 있습니다만, 균형이 요구됩니다.

 

하늘에 계신 성부께서는 우리와 같기도 하고, 동시에 우리와 같지도 않지요.

우리도 그분과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지요. 우리는 이 균형을 유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첫 부분인 1~2장은, 그 균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흙으로 처음 사람을 지었다는 뜻이고요,  

그의 아내 이름은 하와, ‘생명이 있는 lively’ 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이름 모두는, 묘사하는 의미가 그 이름에 담겨있습니다.

심지어 의성어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 이름을 들어 보면, 그냥 어떤 물건의 소리와도 같습니다.

마치 뻐꾸기가 뻐꾹 하는 소리로 이름 지어진 것과 같습니다.

 

사실 남자가 하나님의 분부대로 동물에게 이름을 지을 때,

그가 그 동물을 묘사한 바가 바로 그 동물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 이름은, 묘사하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따르는 권세도 있습니다.

이름을 짓는 사람이, 지음 받는 자를 다스릴 권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모든 동물에게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아담이 동물들에게 권세를 행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담이 또한 아내의 이름도 지었지요.

그래서 오늘날 여자들이 결혼 이후, 남편의 성을 따르는데, 이러한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남편의 권위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아주 중요합니다.

창세기2장에 나오는 이름들이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 함께 <인간관계의 3 차원>에 대해서 살펴봅시다

 

1. 첫 번째 관계는, 인간과 하나님이 지으신 생물들과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생물을 관리해야 하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물을 주어서, 그들이 인간을 섬기라는 것이었지요.

이는 인간의 권세가 동물들을 학대하거나 소멸해서 멸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물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만큼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점이 아주 중요하지요.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 관점을 아주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줄게요.

전에 제가 유럽에서 여자들 몇 명이 '바다표범을 해치지 말라'는 시위하는 것을 보았어요.

하지만 그들은 낙태하는 것에는 아주 쉽게 결정하는 사람들이지요.

이 세상은 정말로 이상한 세상이지요. 바다표범의 가치를, 사람의 가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2천마리의 돼지 떼를 희생시키면서, 한 사람을 도와 가족 곁으로 보냈습니다.

우리는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과 동물은 확실히 다른 가치를 가집니다.

 

동물은 사람 아래서, 사람을 섬기라고 창조된 것이지요.

심지어 홍수 이후에는, 동물이 사람의 음식이 되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홍수 후에는, 채식주의를 취소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 다시 씨 있는 채소만 먹으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하위의, 자연과의 관계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위 자연계와 잘 관계해야 하며, 즉 자연계를 잘 다듬고 관리해야 합니다.

아주 재미있지요. 인간이 필요한 환경을 반드시

우리가 아름답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실용적이면서 아름답게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인간을 광야 가운데 두지 않고, 인간을 동산에 두었고,

뿐만 아니라, 그곳을 실용적이고 아름답게 가꾸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치 영국의 농부가 자기 밭에 절반은 제비꽃을 심고, 절반은 감자를 심어서

실용적이고 아름답게 가꾼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은 다만 실용적인 것만, 필요한 것도 아니고, 다만 식물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아름다움도 필요한 것이지요. 인간은 타고난 심미적 감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는 개를 못 보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타고난 하나님과 같은 특징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사람은 그저 생존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주변의 사물들도 감사하고, 즐길 필요가 있습니다.

 

 

2. 두 번째 관계는, 인간과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두 그루 나무가 아주 중요하지요. 한 나무는 장수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한 나무는 생명을 단축시키는 나무지요.

 

그 두 그루 나무가 사실 본래는 아무런 마술적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치 성찬처럼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질적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과 저주를 전달하십니다.

그래서 규례대로 성찬에 참여하지 않으면, 사람이 병이 들고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아무런 신비한 힘이 없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적 통로를 통해, 그분의 은혜와 심판을 전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이 두 그루 나무가 아무런 영적인 신비한 작용이 없다고 봅니다.

그냥 영적인 원칙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물질을 통해, 영적인 일을 전달하시지요.

그중 한 나무는 생명나무 입니다.

이로 보아서 아담과 하와는, 태생적으로 장생불사하게 창조된 것은 아니고,

사실 그들은 사망의 가능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애초에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그들이 만약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면,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아직 사람이 왜 죽는지, 정확히 아는 과학자는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여러 요인으로 인해 죽는다는 것만 알지요.

하지만 인간 속의 그 시계 바늘이 왜 점점 정지되어 가고 있지요.

 

사실 인간의 몸체는 마치 정교한 기계와 같아서, 계속 잘 먹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운동을 하면, 몸체는 자체적으로 보완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몇 주마다 피부가 한 번씩 새로 바뀌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침실에 많은 먼지가 있는 것은, 대부분 우리 몸의 피부에서 떨어진 잔해들입니다.

몸체는 자기 스스로 신진대사를 하지요. 아주 정교한 기계 같습니다.

 

근데 왜 우리 몸의 기능이, 영원히 잘 돌아가지는 못할 까요? (왜 죽는가요?)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주는 과학자는 아직 없습니다. 그들은 불로초를 찾고 있지요.

바로 생명 대사 활동이 정지되지 않고, 계속 돌아가는 비결을 찾고 있지요.

하지만 그 비결은 바로 생명나무에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동산에 생명나무를 놓았지요.

사람이 이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면 영원히 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죽지 않는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공급하는 생명을 끊임없이 공급 받으면 죽지 않게 됩니다.

 

또 다른 한 그루의 매우 중요한 나무가 있습니다. ‘선악을 아는(. 야다) 나무입니다.

그 나무 이름에 담긴 안다는 단어는 사실 경험이라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안다는 말은, ‘경험으로 아는 앎을 뜻합니다.

 

아담이 하와를 알고”(. 야다), 그래서 하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4:1. 한글은 동침하매의 히브리어는 알고

 

성경에서의 알다는 단어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친히 어떤 사람이나, 어떤 일을 경험으로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들이 선악 알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요.

이 뜻은 간단히 말해서 사람더러 순진함을 유지하라는 뜻과 같습니다.

 

비극적인 것은,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마다, 더는 순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단 잘못을 저지르면, 다시는 이전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혹시 당신이 이미 용서 받았지만, 순진 innocence 의 본성을 잃을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엄중한 손실이지요. 왜냐하면 행복은, 순수 innocence 할 때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했지요.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라.’

순진함이 바로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더러 순수함을 유지하라고 하면서,

왜 선악과(지식의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었을까요?

그분은 그들에게 나는 너희들에게 도덕적 권세를 갖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뜻이지요. 너희들은 자기 임의대로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말고,

내가 너희들의 옳고 그름을 알려 주겠다는 것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가, 자식이 부모의 충고를 잘 듣기를 원하고, 자식이 고생하면서 배우기를 바라지 않고,

자식이 부모의 충고를 잘 듣고, 틀린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지요.

이는 부모의 도덕적 권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간에게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지구의 주인이 아니고,

너희는 그냥 세 얻어 사는 사람이고, 내가 집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에게 어느 것이 너희에게 선하고, 어느 것이 해롭다는 것을 가르쳐 줄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인도를 들으려고 하지 않고,

굳이 자신이 한번 체험(야다) 해보려고 합니다.

 

이러한 결과가 순수함을 잃어버리고, 다시는 이전과 같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실로 비극이지요! 이것이 바로 선악과(지식의 나무)가 대표하는 함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식의 나무를 더불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나는 너희들에게 도덕적 권세가 있고, 너희들의 옳고 그름을 내가 결정한다고 말씀합니다.

 

 

3. 그럼 이젠 인간의 타인과의 관계를 논해봅시다.

인간은, 아래로 자연계와 관계할 필요가 있고, 또 옆 사람과도 관계(상호 작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습니다.

 

연금 타서 살아가는 노인에게, 관계할 대상이 고양이 뿐이라면, 이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교제하고 삶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뜻을 아시겠습니까?

 

사람이 만약 하나님과만 교제하고, 타인과 이런 수평적 관계가 없다면, 그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는 수평적 사람과 네트웍을 맺고서 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샬롬이란 단어를 아주 좋아합니다. 저는 매번 제 책에 싸인을 해 줄 때마다,

샬롬을 먼저 쓰고, 그 밑에 제 서명을 합니다.

 

샬롬, 이 단어는 참으로 아름다운데 조화 harmony”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조화, 하나님과의 조화, 타인과의 조화, 자연계와의 조화...

이보다 더욱 좋은 축복이 담긴 언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과, 하나님과, 타인과, 자연과 조화로운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기 창세기2장에 조화의 광경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시기를;

아담아, 만약 네가 이 조화를 깨뜨리면 너희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당장은 죽지 않았지만 인간의 시간은 점점 정지되어 갔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런 작은 죄를 지었는데 처벌은 너무 중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렇지요.

너희가 일단 죄악을 지으면, 나는 반드시 너희 생명에 한계를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악이 영원히 너희 안에 존재할 것이다. 이 말뜻을 잘 이해하였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배신한 인간이 영원히 살아가게 하신다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영원히 훼손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덕적 권세를 받아들이지 않은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에 한계를 두셨습니다.

 

또한 인간은 수평적인 관계가 필요한데, 바로 돕는 베필(알맞는 동반자)입니다.

애완동물인 고양이, , 새 같은 동물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인간 사이의 우정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밖에 창세기 1장에서, 남녀가 존귀함에 있어서, 동등하다고 했지요.

후에 또 보면 타락과, 그 운명(쫓겨남)에 있어서도, 남녀는 동일한 상태에 처해 짐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남녀를 논할 때 이렇게 말했지요.

남녀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는 남녀가 서로 다른 기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아래 4가지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여자는 남자로부터 지어졌다. 그래서 여자의 존재는 남자로부터 나왔다. “from man”

 

둘째, 남자가 먼저 지음 받고, 여자는 이후에 지음 받았다. “after man”

그래서 남자는 장자 firstborn 의 책임을 담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뜻이 창세기3장에서 더욱 확실하게 설명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의 책임을, 하와가 아닌 아담에게 대표로 물으셨고,

아담은 반드시 하와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여자는 남자를 위해 지음 받았다. “for man”

아담이 장가들기 전에, 이미 하던 이 있었지요. 남자는 을 위해 지음 받았지요.

하지만 여자는 관계를 위해 지음 받았습니다.

이는 남자는 관계를 맺지 않아도 되고, 여자는 밖에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중점은 하나님께서 남녀를 지을 때, 남녀 각각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넷째, 여자는 남자와 동반하도록 지음 받았다 "with man") *동영상에 안 나오지만 삽입

남자가 여자를 위해 이름을 지었는데(작명은 권세 아래 둠),

그렇지만 두 사람 사이는 동반자 partnership 관계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민주적 동반자 관계는 아니지요. 두 사람이 똑같이 한 표를 가지면 어떻게 표결이 되겠습니까?

동반자 관계이지만, 그 중 한쪽이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하지요.

그렇다고 남자가 리더십을 임의로 행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연합 Cooperation 의 관계이지요.

만약 리더십 쪽이 상대방을 지배하려 할 때, 다툼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자는 리더십에 반발하면, 조화는 망치게 되는 것이지요.

 

 

부부와 가정   

 

창세기 2장에서는 많은 일들을 얘기합니다.

모두 오늘날의 우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기서 성관계는 좋은 것이라고 말하지요.

원래 성관계는 사악한 것이 아니고,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매우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성관계는 인간더러 동반자가 되게 하는 것이지, 부모가 되라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한데, 그래서 피임 문제도 이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피임이 죄가 아니라는 뜻인 듯)

 

성관계의 기쁨은 일부일처 사이의 고유한 권리이지요.

일부일처의 뜻은 부부 쌍방이 종신토록 이 배우자뿐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결혼에 관해 두 가지 요소로 설명하지요. 떠남과 연합입니다.

결혼은 반드시 육체적/사회적 양 방면에서 모두 떠남과 연합입니다.

그중 어느 한쪽이라도 부족하면 결혼이라고 하지 않지요.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성관계를 하지만, 그것이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결혼한 것이 아니라, 음란이라고 합니다.

또 결혼식을 올려서 사회의 인정은 받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합일이 없다면,

이러한 것도 결혼이라고 볼 수 없죠.

 

여기서 중점은, 결혼 관계는 다른 어떤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모든 것을 잘 준수한다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또는 장인 장모가 사위를 흉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꼭 기억하십시오.

 

배우자의 중요성은 타인과의 관계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심지어 자녀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부부는 모든 관계에서 반드시 서로를 제1 우선순위에 두어야 합니다.

 

 

여기서 부부 사이의 제일 이상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바로 서로 사이에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하고,

서로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고, 상대방에게 완전히 열어 놓아야 합니다.

참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오랜 후에 예수님께서 신약성경에서, 바로 이 관계를 가지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여기서 더 많은 중요점들을 강의 할 수 있지만요.. 여기서 줄입니다.

 

인간에게는, 여러 관계가 그물망처럼 얽혀있습니다.

마치 위로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수평으로 동반자/동료와의 관계이고, 아래로 자연계와의 관계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아래의 자연계를 통치해야 하고, 반드시 위로 하나님께 순복해야 합니다.

또 반드시 자기 옆의 동반자들과 서로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어야 할 3가지 기본 관계이고,

우리는 이 3가지 관계를 올바르게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죄가 들어와서부터, 이러한 관계가 하나 하나 파괴 되었습니다.

모든 연결 관계가 파괴 된 것입니다.

 

이상은 창세기2장에서, 창조 초기 지음 받은 인간의 각도에서 본 인간입니다.

여기에서의 메시지는 아주 분명하고 또한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과학적으로 두 가지 문제가 제게 됩니다.

우리는 이 단원에서 간단하게 토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선사시대의 인간 해석      

 

먼저 한 가지 문제는, 우리가 선사 시대의 인간을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바로 현대인과 선사 시대의 인간이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문제는 인간이, 동물과 육적으로 직접 관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화론 문제입니다. 만약 동식물만 본다면 진화론을 쉽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인간을 연관하여 끌어들였기 때문에 중대한 갈등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 인간과 선사 시대 인간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세계 몇몇 곳에 선사 시대 유적지들이 발견되었지요.

특히 리키 부자父子, 케냐의 올두바이 협곡 등 몇곳에서 유골을 발견했다고 해요.

그리고 그가 선포하기를, 인간의 기원은 성경이 말하는 중동이 아니고,

아프리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양 의문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선 현대인과 선사시대 인류의 관계를 살펴봅시다. 과학이 어떻게 말하고,

성경이 어떻게 말하고 있지요? 이 둘이 서로 부합합니까? (아니죠)

 

우선 먼저 성경이 인간의 기원을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봅시다.

성경이 분명히 지적하기를 인간과 동물이, 모두 다 한 가지 재료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동물도 흙으로 지어졌고, 우리 인간도 이 지구상에 널린 흙덩어리를 재료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저의 몸에 포함된 모든 광물()의 합친 값이 고작 85펜스 정도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의 self esteem (자기 존중감)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나중에 이 원재료들은 다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죽어서 매장을 하면, 인간은 결국 모두 자기가 나왔던 흙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러니 인간과 동물은 모두 같은 재료로 만들어 졌습니다.

 

창세기2장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영어로는 living soul 로 번역했습니다.

그 말에 혼동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영으로 혼동하지 마세요, 그냥 혼 soul입니다.)

이 단어가, 창세기 1장에 동물을 형용하였는데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생물 living thing을 다스리라1:28

 

히브리어에서는 living’이란 말은, 단순히 숨을 쉬는 육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짐승이나 사람이나 다 living’ 존재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죠.

 

그래서 당신의 몸의 호흡이 정지되려고 할 때,

당신은 곧장 SOS (Save Our Souls) 구조 신호를 보내게 되는 것이지요.

SOB 대신에요. (Save Our Bodies)

 

이 사실은, 바로 당신의 호흡이 있는 생명'을 구조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저 동물과 같은 육체가 아니라요, 이것은 히브리어 각도에서 본 것입니다.

 

런던 하이드팍 공원 모퉁이에서, 사람들이 한번은 주교에게 물어보기를

사람의 영혼은 어떤 형상입니까?’ 그때 그는 직사각형의 길쭉한 모양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답은 신학적으로 맞습니다. 저의 몸체가 직사각형처럼 길쭉하니,

생령의 모양도 직사각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직사각형 관속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저의 영혼의 형상입니다.

 

사람들이 또 물어보기를 사람의 영혼은 몸속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그것은 음악이 마치 풍금 속 어디에 있는냐?’라고 묻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대답했지요.

이것도 성경에 부합한 대답이지요.

왜냐하면 만약 당신이 피아노나 풍금을 뜯어도, 그 안에서 음악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음악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풍금은 연주자에 의해서, 살아있는 음악을 연주해 내고 있습니다. 이 점이 너무 중요하지요.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사람은 특별한 존재인데,

이유는 창2장에 말씀하듯, 생령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그 구절에서 생령은 다만 호흡이 있는 육체(네페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혼-푸시케는 아닙니다)

 

하지만 창세기2장에 명백하게 지적하기를, 인간은 아주 특별하게 지음 받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과 유인원의 조상은 같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모순이 있는 이론입니다.

이유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그분이 직접 흙으로 지었고, 동물로부터 진화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 아주 특별한 피조물인 것입니다.

 

창조하다는 ‘Bara’ 이 히브리 단어가 세 번 나타나지요.

물질matter을 창조하셨고, 생명life과 사람man을 지을 때, 세 번 나타나지요.

인간은 새로운 창조이고 매우 독특합니다. (짐승과 다릅니다.)

 

우리 함께 과학자들이 하는 말씀을 봅시다. 제가 먼저 인간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살펴봅시다.

역사는, 인류의 조상은 동일한 한 종족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성경에서,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할 때, 하나님이 한 혈통에서 만민을 지었다는데

그 말씀이 참말입니다. 제가 알기에 지금은 많은 서로 다른 혈통들로 나눠져 있지만요,

하지만 역사학에서 지적하기를, 인류의 조상은 한 혈통이었다고 증거합니다.

 

제가 농업고고학을 조금 섭렵했는데, 아주 재미있어요. 농업고고학에는

인류 최초로 옥수수를 심고 가축을 키운 곳이 바로 성경에 있는 에덴이라는 것입니다.

초기 농업을 한 곳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처음은 터키 동북부와 아르메니아 남부이며,

그 곳은 바로 에덴동산이 있던 자리입니다. 저는 이 점이 아주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학의 견해를 물으면, 많은 학자들은 우리에게 틀린 명제를 제시합니다.

과학이 선사시대의 인류에 대한 연구가 틀린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이 우리에게 틀린 정보를 기록한 것일까요?

한쪽은, 다른 한 쪽을 서로 틀렸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그들이 말하기를 필트다운인 piltdown man’을 발견했는데,

그들은 날조된 가짜 인류라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영국 서섹스에서 출토된 필트다운인, 써쎅스 필트다운의 간이주점 근처에서 발견했는데,

하지만 후에 사실 그것은 돼지의 턱뼈라고 증명 되었지요.

 

현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를 들고 외치기를 할렐루야 하면서

봐라, 과학이 틀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성실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누가 필트다운인이 날조된 증거라고 발견했습니까?

크리스천이 발견한 게 아니고, 과학이 발견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필트다운인이 가짜이기 때문에, 과학은 틀렸다 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과학이 바로 이 속임수를 발견해서 바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학이 맞을 때는 맞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도 과학이 해골을 발견하였는데, 인간과 매우 닮은 해골들이지요.

(※이 강의 이후에, 더 최근에 발견된 인류학, 인류의 기원, 진화론에 대해서는,

화면 아래 링크를 참조하세요. 데이빗 파슨)

 

여기서 몇 가지 다른 명칭들이 나오는데, 네안데르탈인, 북경인, 자바인, 호주인 같은 것입니다.

리키 박사가 선포하기를 아프리카에서 400만년 전의 사람 뼈 화석을 찾았다고 해요.

그래서 현재 과학자들은 모두, 인류의 조상은 중동 사람이 아니고, 아프리카인이라고 동의하고 있습니다.

 

각종 선사 시대의 연대 발견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3만년 전, 네안데르탈인은 4~15만년 전, 스왕스콩인은 20만년 전,

중국의 직립원인과 자바인은 30만년 전, 호주인은 50만년 전,

최근에 발견한 아프리카인은 250~400만년 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우선 우린 명확하게 지적해야 합니다.

(첫째) 지금까지 인류는 반 원숭이 반 인간같은 선사 시대의 해골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반 원숭이 반 인간같은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방금 이야기 했던 사람은 우리의 조상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 점은 과학도 승인합니다. 그래서 인류학적 주장이 변화 단계에 다달았고,

이 사람들은 우리의 조상이 아닙니다.

 

셋째, 여기나온 여러 선사시대 사람들은 점차적인 순서대로 진화를 하지 않았지요.

이런 사진을 본 적 있지요? 처음에는 작은 원시인이었다가

나중에 차츰 모습도 사람으로 변하고 두개골도 점점 커져가는 사진...

(그런데 각기 다른 지역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한 혈통으로 진화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도 이런 방법으로 비행기 강의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그림은 초음파 비행기 진화/발전 과정이라고, 보기에 정말로 진짜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비행기는 이러한 식으로 발전한 게 아니지요.

단지 그림으로 차츰 발전해가는 모습을 추측해서 그린 것뿐입니다.

 

그림이 아무런 증명도 못합니다.

사실 이런 것은 사람이 자기 머리로 상상해서 그려내는 그림이지요.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보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초기 인류의 유골이, 오늘 사람들 보다 크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직립 보행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실 오늘 다수의 과학자들의 공통된 주장은, 이것은 우리의 조상이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대인의 조상이 아닌데, 그럼 누구일까요? 세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 선사 시대 인류는 성경속의 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발굴해낸 선사 시대 인류의 유골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아담과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1장에서의 인간은, 구석기 시대의 사냥꾼이고,

2장에서의 인간은 신석기 시대의 농부라는 것입니다. 이 점이 한 가지 가능성입니다.

 

둘째, 선사 시대의 인류가, 어느 시대에 와서, 성경중의 사람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물 같은 인간, 혹은 사람 같은 동물이, 갑자기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한 사람만 변했느냐, 모든 사람이 다 변했느냐 인데,

여기에 대해선 더 논의가 필요하고, 지금 논의 중입니다.

 

셋째, 선사 시대의 인류가 성경중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외모가 다소 사람과 비슷하고, 도구도 사용할 줄도 알지요.

하지만 누구도 그들이 종교를 가졌거나, 기도할 줄 안다는 증거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저는 어느 게 맞다고 제 의견을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인류학이 현재 시시각각 변화해가는 단계이기 때문에,

지금 단계에서 이 물음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설령 우리가 한 대답을 결정한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러고 보니 두 침팬지가 다투는 장면이 연상되네요. (유머)

서로 말하기를 '내가 지킴을 아우인가요?'. (침팬지라서  말을 엉뚱하게 함)

 

 

진화론에 관하여       

 

그래요. 여러분 우리 계속 합시다. 진화론에 대해 살펴봅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지요.

우리와 선사시대 인류와의 관계가 아니고, 우리와 동물과의 관계를 얘기해 보지요.

 

제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용어들을 먼저 설명 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진화론은 찰스 다윈이 제출한 이론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아닙니다.

 

먼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출한 이론입니다.

후에 현대인인 에라스무스 다윈(찰스 다윈의 조부)이 확대해서 이 이론을 제출했지요.

다윈은 이 이론을, 무신론자인 그의 조부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어쨌거나 찰스 다윈으로 인해, 이 이론이 온 세상에 알려졌지요.

 

몇 가지 용어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변이 variation”인데이는 세대로 내려가면서, 점진적인 작은 변화가 나타남을 말합니다.

매 세대마다 작은 변화가 나타나면서, 다음 세대에 유전해 물려주는 것이지요.

 

둘째, 이러한 변이 현상 가운데, ‘자연 도태 selection’ 가 일어납니다.

바로 적자생존이라는 것입니다.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요인들만 살아남아 유전되는 거죠.

 

예를 들면, 영국의 동북부에 어느 한 곳에 석탄 구덩이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색 나방과 검은색 나방들이 있어요.

하지만 검은색 나방이, 흰색 나방보다 더 쉽게 자기를 숨기지요.

그러니 흰색 나방은 쉽게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때문에 결국 모두 죽고, 검은색만 남게 되었지요.

 

현재 영국 동북부의 석탄 구덩이가 차츰 없어지니, 흰색 나방이 다시 생기기 시작하고,

검은색 나방도 점점 적어지고 있지요. 이런 것이 바로 자연의 도태로 일어나는 적자생존 현상입니다.

그 환경에 잘 적응하는 생물만이 생존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도태는 외부 개입이 없어도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자연계의 자동 발생 현상입니다.

자연계는 처한 환경에 적합하게 생존하는 생물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 완만하면서 점차적인 변이 이론은 오늘날 이미 바뀌어졌지요.

어느 프랑스인 라마르크가 말하기를, 완만하면서 점차적인 변화가 아니라 갑작스러운 대 변화라면서,

이를 돌연변이 mutation’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계단과 승강기의 차이이지요.

이 두 가지 이론이, 지금까지 계속 서로 변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개의 단어를 더 살펴봅시다.

하나는 소 진화론 Micro-Evolution’입니다.

소 진화론은, 어떤 특정 동물 그룹 안에서,

즉 개나 말 같은 같은 동물 그룹 안에서 일어나는 제한된/작은 진화를 믿습니다.

현재 과학은 소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증명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지만 대 진화론 Macro Evolution’은 믿기를,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모두 동일한 기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동물들 서로 간에 모두 진화적인 관계가 있고, 모두 동일하고 간단한 생명체로부터 나와서,

그리고 점차적으로 더욱 복잡한 생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건 증명 안 되었지요

 

또 한 단어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경쟁 struggle”이라는 단어입니다.

경쟁, 바꾸어 말하면 적자생존 survival of the fittest’입니다.

경쟁20세기 현대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짊어지고 살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다른 사상, 이념보다, 경쟁 때문에, 사람들은 힘들어하지요.

이 점에 잠시 후 제가 다시 해석 해 드리지요.

 

여기서 저는 진화론의 참과 거짓을 변론하지 않고,

다만 진화론은 그냥 하나의 이론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진화론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화석의 증거가 많다 하더라도,

이 화석이 각종 생물들의 진화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화석 증거가 나타나면, 다수의 동물들은 캄브리아기에 빠른 속도로 나타난 것이지,

그들은 점차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고, 동시에 생긴 것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복잡한 생명체와 단순한 생명체가 동시에 나타난 것이지,

단순한 생명체에서 복잡한 생명체로 진화한 과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두 생물 사이의 진화 중간 과정에 해당하는 화석을 찾은 증거가, 거의 없습니다.

 

넷째, 모든 생물들이 처음부터 매우 복잡하고 DNA가 그 안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다섯째, 돌연변이는 일반적으로 기형을 초래하거나 또한 죽음까지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동물들이 혼합 교접이, 일반적으로 번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통계 숫자로 보면,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고 시간상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이론이 생겼지요. 생명의 기원은 다른 어떤 행성이라고.

생명체가 어떤 행성에서 떠돌다가, 지구에 착륙했다는 것입니다.

통계적 수치로 보면, 진화가 발생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이 미치는 사회적 파장     

 

다음으로 제가 한 가지 다른 맥락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바로 이 이론이 인류에 미친 영향입니다. 진화론은, 인간의 교만을 주장하는 것인데,

바로 우리는 미래로 갈수록 반드시 끊임없이 진보하고 위로, 위로, 위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이것은 어느 영국 수상이 외쳤던 구호이지요.

그것보다는 차라리 기본으로 돌아가자가 좀 좋은 구호인 것 같습니다.

 

진화론에서 파생한 경쟁이라는 단어로 초래한 결과는 어떤 것일까요?

미국의 자본주의에서는 경쟁을 잘 볼 수 있지요.

 

록펠러는 말하기를, ‘사업/ 경영은 적자생존의 경쟁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관념이 참으로 사람더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초래하지요.

 

독재주의에서도 경쟁을 볼 수 있지요.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경쟁 my struggle>이라는 책을 썼지요.

그는 적자생존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게르만 혈통 가진 사람만이 적자생존 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니 유태인은 당연히 생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공산주의에서도 경쟁을 볼수 있지요. 칼 막스가 쓴 책에 논하기를,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사이의 경쟁에서, 반드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민주의가 전 세계에 유행했던 시절에도 경쟁주의를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에서는 진보라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없애 버렸지요.

 

저는 생각하기를, 또 반드시 담대히 지적하는 바로는,

이러한 적자생존의 경쟁 관념이 사람에게 적용된다면,

이로써 받게 되는 고통은, 세상의 다른 어떤 관념/철학보다,

사람을 더욱 많이 고통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두 갈래의 큰 선택 앞에 서게 되지요.

그것이 어떤 선택인지, 앞으로 남은 몇 분 동안 이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로 정반대로 대치되는 사상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둘 중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합니다.

 

먼저 정신적 측면에서의 선택입니다.

 

만약 당신이 창조론을 믿는다면 따라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Father God 를 믿어야 하고,

만약 당신이 진화론을 믿는다면 아마 쉽게 대지의 어머니 mother nature 를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여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창조론을 믿는다면, 이 우주는 한 인격이 선택한 결과(창조)라는 것을 믿게 되며,

진화론을 믿는다면, 이 우주는 비인격체에 의해, 우연히 생긴 것을 믿게 됩니다.

 

창조론은 우주가, 어떤 목적에 의해 창조되었고, 진화론은 우주가 우연히 생긴 것입니다.

창조론에서, 우주는 초자연적인 산물이고, 진화론은 우주가 스스로 운영되는 체제라고 믿게 됩니다.

 

창조론에서, 우주는 개방적인 상황이고,

사람과 하나님이 수시로 개입과 영향을 준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진화론은, 자연계는 스스로 운영되는 밀봉된 체제라고 믿게 됩니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것을 믿고,

그분이 피조물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모든 피조물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사실fact 을 믿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상상을 믿지요.

이는 다만 하나의 이론에 불과합니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자유롭게 만물을 창조하고,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자기 임의로, 상상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조론과 진화론이 주장하는 차이입니다.

만약 우리가 눈길을 더욱 멀리 두고 보면

배후에 도덕적 선택 moral choice 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의 의문은, 사람들이 왜 진화론을 꼭 붙잡고 놓지 못하는 것일까요?

참으로 진화론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데,

해답은 사람의 마음속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는 반드시 진화론을 선택할 것입니다.

 

창조론은 하나님이 주재 Lord 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인간이 주재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우리는 하나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인간이 자치권이 있고, 자신 임의로 모든 일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창조론은 옳고 그름을 선택해 줄 절대적인 분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다만 상대적 진리만 있다고 믿습니다.

 

창조론은 책임과 의무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요구와 권리를 주장합니다.

 

창조론은, 창조주께 무한한 의존을 강조하는데,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하늘의 아버지께 의존하듯이요.

하지만 진화론은 나는 스스로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교만이 있지요.

이런 뜻이지요. 우리 이젠 장년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인간의 타락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인간의 진보를 강조 합니다.

 

창조론은 약자가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강자 생존을 강조합니다.

히틀러의 배후에는 철학자 니체가 있었는데, 니체는 기독교를 몹시 미워했지요.

그 이유는, 신앙이 약자에게 계속 약하게 살아라고 한다고, 그는 기독교를 싫어했던 것입니다.

 

또 기독교는 병자를 배려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주게 되지요.

하지만 니체의 철학은 강자 생존이라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공의가 능력이며, 공의를 행하면 큰 능력이 생긴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힘 있는 사람이 정의라고 주장합니다.

당신이 힘이 있다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은 맞다는 것입니다.

 

창조론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전쟁을 초래하지요. 항상 이렇게 진행되어 왔습니다.

 

창조론은 자아의 순종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진화론은 자기 집착을 강조합니다.

 

창조론은 우리가 믿음, 소망, 사랑, 이 삼대 미덕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우리는 다만 숙명, 무기력, 운세라고 강조합니다.

 

창조론은 사람을 하늘로 데려갑니다.

하지만 진화론은 사람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이상의 분석에서 알다시피, 만약 사람이 진화되었다고 생각하면 어떤 결말이 있을까요?

아이가 학교에서 10년동안 이것을 배우게 되면 나중에 계속 주장하기를,

인간은 동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하는데, 이런 아이가 장래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이미 여러분에게 대략적으로 이 주제를 알게 도와주었습니다.

다음에는 우리 사람이 어떻게 타락되었고, 타락이 어떻게 가족에게 영향을 주고,

또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번역 / LCY, K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