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5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중간에 끼인 이유

LNCK 2015. 9. 6. 15:04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중간에 끼인 이유        행5:1~11           출처

 

*원제목 : 능력만 보면 제국으로 망하며, 성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bKBkUvjU3Ts  이 설교를 축약했습니다.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나오는데요.

본질적인 교회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초가 초대교회에 나와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힘이 있었습니다. 성령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사명을 감당했던 교회로, 아주 건강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가 위대한 이유는,

많은 능력과 기적이 나타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만 갖고 사도행전 교회가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능력과 기적을 단순비교 할 수는 없지만,

더 초자연적인 역사와 능력은 구약에서도 우리가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사건과 비교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구약에서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초대교회에 나타났던 능력과 기적만으로

사도행전교회가 위대한 교회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기적과 능력이 나타나,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 돌아오게 한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될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초대교회 안에 나타났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위대한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내적인 정화

 

오순절 사건 이후, 성령이 임한 초대교회는 놀라운 역사의 역속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많은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주목해야할 점은, 이런 일들이 그 당시 기독교가 전파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고통과 환란과 핍박의 환경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들이,

모든 것이 평화로운 시대 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예수 믿기 가장 어려웠던 고통과 고난과 핍박의 현장 가운데

그 일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오신 실제적인 결과는,

교회로 하여금 고난과 환란을 이길 수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이 일이 특별한 것입니다.

 

복음서의 제자들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의 변화를 한 마디로 말해보면,

복음서의 제자들은 고난과 핍박 앞에 무릎을 꿇고, 거기서 도망갔습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환란이 오고 어려움이 왔을 때,

복음서의 제자들은 그 고난 앞에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인물인데, 사도행전의 제자들은, 성령충만했던 제자들은,

고난과 핍박이 더 심하게 다가왔지만 그것을 뚫고 나갔다는 겁니다.

이것이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핍박의 부흥의 정점은, 8장에 나타납니다.

7장에서 스데반의 순교 이후로, 8장부터 성도들이 흩어져서

유대와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행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그 고난과 부흥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습니다. 왜요? 우연일까요?

 

사도행전 교회 가운데 성령님이 임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들이 풀어지는데,

그 가운데 갑자기 잘 나가던 교회 안에, 갑자기 찬물 끼얹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그냥 주님의 소유를 내가 떼어먹었기 때문에,

내가 이제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까, 속이면 안 돼.

성령님을 속이면 벌 받아!’ 이런 식의 단순한 해석이 아닌 것이죠.

 

8장까지 놀라운 부흥과 기적의 연속이었는데, 그 중간에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일어나게 하심으로써

교회를 더욱 내적으로 더 정화시키신 것입니다.

 

그저 성장과 확장이 궁극적 목적이 아니라,

교회는 정화되고, 성숙되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

그 부흥과 성장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없었다면,

어쩌면 초대교회의 놀라운 부흥이, 절반 밖에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정화되지 않은 교회, 성령님을 속이는 교회

계속 부흥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성령님을 속이는 그 상태로, 초대교회가 계속 부흥만 거듭했다면,

마치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오히려 나중에 크게 잘못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행8장 이후의 놀라운 복음의 확장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행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교회를 정결케 하신 것입니다.

 

외적인 핍박

 

핍박이 그 땅에 왔을 때, 기독교 안에 핍박이 임할 때 오히려 기독교는 더 강해졌어요.

 

성령 받았다는 것은 뭡니까?

능력이 나타나고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도 물론 성령의 역사 중의 한 가지 이기는 하지만,

진짜 성령이 나타난 증거는.. 고난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앞에서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십시오. 고난 없이는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교회를 정결하게 하시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정화시킬 때마다,

그들을 강하게 만드실 때마다, 하나님께서 즐겨 쓰시는 방식이,

외적으로는 고난을 통해서입니다.

 

지금 같은 종교적인 신앙으로는, 이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갖고 있는 설교로는, 머리로만 알고 있는 성경 지식으로는,

고난 근처에 접근 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것입니다.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합니다.

 

7장까지 복음은 예루살렘 안에만 갇혀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행1:8절의 언약의 성취를 무엇으로 이루고 계십니까?

 

어떤 능력?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귀신을 떠나가게 했던 능력? 병 고쳤던 능력?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 일이 확산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은 놀랍게도

1) 내적인 정화를 통해서

2) 외적인 핍박을 통해서,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1:8절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power을 받는다는데,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성령을 받은 자에게 임한 권능이 무엇입니까?

 

1) 내적 정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2) 핍박을 이기게 하십니다.

그 결과 나타나는 것이, 8장 이후의 복음의 전파인 것입니다.

 

 

외적 핍박도 큰 도전이지만, 내적 부패도 어쩌면 더 큰 도전

 

우리는 이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여러분, 고난은요,

바깥의 환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그들에게 핍박이란 환경이 있었어요. 고난은 외형적 문제입니다.

 

그런데 진짜 고난의 문제는, 내면의 문제입니다.

오늘 복음서의 제자들도 바깥의 핍박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들은 고난을 이겼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행8장에서 그들이 이기기 전에,

본문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 이 사건을 부흥과 핍박의 사건들 중간에 두셨을까요?

 

초대교회 성도들이 고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으며,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이길 수 있었던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해봐야 됩니다.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권능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성령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1:8절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물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이 임한 사람,

성령을 받은 사람의 권능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성령의 능력이 있다면, 그 실체는 과연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 핍박과 환란이 증가되기 이전에

초대교회 안에 일어났는데, 바로 그 사건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 안에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기적과 능력이 나타났고,

그리고 그 결과는 초대교회의 부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코이노니아가 형성된 공동체에 있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살피는 일들이 있었고,

여러 기적과 능력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이런 승리하는 공동체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까?

하나님은 왜 이 사건이 중간에 일어나게 하셨습니까?

 

단순히 하나님께 드릴 얼마의 소유를 속였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사건으로 단순히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것만으로 바라보기에는 사건의 상흔이 너무 큽니다.

주님은 이 사건을 온 교회가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레슨을 주기 원하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요.

 

성령 받은 사람과 공동체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입니다.

 

우리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안에 나타난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초대교회와 성도들의 신앙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대교회가 엄청난 능력으로 일어난 것 같고, 대단한 교회 같았습니다.

5장 전까지는요.

 

그러나 이 사건은, 부끄러운 사건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있었던 신앙적 수준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갖고 있는 그 정도 수준으로는,

8장의 핍박을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셔서, 주님이 이 일들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복음사역자들의 문제를, 하나님은 자꾸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저 사람은 신앙이 있다.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데,

그건 뭘 보고 그렇게 얘기합니까?

 

얼마나 많은 능력을 나타내고, 얼마나 많은 업적을 이루고 있는가?

얼마나 외적으로 잘 되고 있는지, 많은 축복을 받았는지..

그게 신앙이 깊은 기준이 됩니까? 신앙의 수준의 척도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런 면으로 볼 때, 한국교회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어내었습니까?

그런데 그 얼마나 많은 일들을 이루어낸 것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까?

그 생명력이 계속 지속되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지가 않다면,

생명력은 끝까지 가는 것인데, 생명력은 지속되는 것인데,

오늘 내 안에 지속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중요한 것입니다.

 

유럽 전체 기독교가 여러분, 국교로 승인되었을 때,

모든 사람이 기독교를 믿었던 중세가, 그 신앙의 수준/레벨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중세를 신앙의 암흑기라고 봅니다.

 

또 어떤 기독교의 힘을 가지고 전 세계를 제패하려고 했던, 다스리려고 했던

십자군 군대가 일어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십자군은 기독교 역사의 수치입니다.

 

보십시오. 그 십자군의 힘이 그 당시에는 능력 잇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역사로 볼 때, 수치의 대명사였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능력은, 외형적인 능력이기 보다는,

보다 본질적으로 중요한 개념의 능력인데요,

 

성경은 겉으로 보여지는 어떤 외형적 인물이 아닌,

그 외형적 인물에 진짜 실체인

속사람의 됨됨이를 더 중요시 여깁니다.

 

여러분이 보여지는 어떤 겉모습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어떤 행위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성경은, 혼과 육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영의 속사람을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떻게 접근해야 합니까?

 

그냥 하나님을 속인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성령을 속였느냐는 것입니다.

그냥 물질적인 어떤 속임을 저지른, 물질적 피해를 입힌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렇게 성령님을 속인,

그 속사람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 행위를 가능하게 했던 속사람,

이게 근본적으로 해결되어야, 내 안에 돌파가 있습니다.

오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은, 철저하게 그들의 속사람과 관계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성령을 속였다고 말씀합니다. 5:3

땅 값을 얼마 떼어먹은 그 경제적 손실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부흥하는 교회 속에 있었던, 그 외식

그 외적으로는 그럴 뜻하면서도, 속으로는 탐심과 속임이 가득했던 현실.

그 상태로는, 핍박도 이길 수 없고, 복음도 전파할 수 없으므로,

하나님은, 부흥하는 교회를, 그 사건을 통해, 정화시키셔야 했습니다.

 

모든 돌파는, 바깥의 환경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속사람이 변하면 돌파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부부싸움의 문제,

여러분, 누구 상담가한테 가서, 심리치료 받고 해서, 해결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는, 겉치레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근본적 부부간의 문제 해결은,

내 안에 있는 영적인 속사람이 바뀌어나갈 때,

내 안에 있는 영적인 속사람이 변할 때, 이것이 성숙하다는 개념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지만, 어디에서 브레이크가 걸렸습니까?

바로 아나니아 삽비라의 속사람의미성숙된 부분이 하나님의 능력을 멈추게 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이 능력이 우리 각자 가운데, 계속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여러분의 속사람을 성숙시켜야 됩니다.

 

이 속사람을 성숙시키지 않으면, 아나니아 삽비라와 같이 반드시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여러분, 그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주의 씨앗을, 악한 씨앗을 뿌리게 되고, 그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악하고 괴로운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온 교회에게 경종을 울렸고,

초대교회는 이 일로 말미암아 초대교회를 정비할 수 있었습니다.

 

5:11 온 교회와 이 사건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였다.

 

이 사건을 정점으로, 그들이 한 단계 도약하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제국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저는 이렇게 표현해 보았습니다.

(5장의 사건이 없었다면, 어쩌면 초대교회가 제국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무조건 확장으로만 방향을 정하고 계속 나아갔다면 말입니다.)

 

기독교가 능력과 힘에 기초한 제국이 되기로 결정했을 때,

기독교는 가장 심한 영적 암흑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교회가 제국이 되기로 결정할 때, 교회가 왕국이 되기로 결정할 때,

교회는 암흑기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는, 제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전파했으며,

그 핵심은 어린양 예수의 성품과 사랑에 기초한 그들의 속사람이었습니다.

 

제국은 전혀 미성숙한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에게,

총과 칼과 같은 위험한 힘을 쥐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힘이 있으나, 그 힘을 성숙함으로 다룰 줄 아는,

성숙한 성인의 모습과 같습니다.

 

보십시오, 히틀러는 대단한 사람이었고, 엄청난 제국을 꿈꾸었던 사람입니다.

그 준비되지 않은, 어린 아이같은 그 속사람에게 힘이 주어지니까,

가장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준비되지 않은 속사람에게 권력과. 무기가,

힘이 임하니까, 그것은 흉기가 되어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세계라는, 욕망이라는 기차는, 수많은 역사 안에서 브레이크가 없이 달려가다가,

제국이라는 이름 안에서 파멸로 그 끝을 맺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제국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제국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숙함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요, 용서요, 회복입니다.

 

제국을 전할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전할 것입니까?

성령이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능력, 성령은 예수를 증거하십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은, 성령은 예수를 증거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나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오늘 그런 나의 어떤 모습,

내 안에 있는 예수의 형상을 증거하셔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헐크의 형상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모든 것을 가지셨지만,

권세 있는 분이셨지만, 낮아지셨고, 그 분은 너무나도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이셨어요.

 

겸손과 온유함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 어린 양의 성품은, 순종으로,

가장 극심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중하셔야 합니다. 환경에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신중은, 환경에 휩쓸리지 않는 것입니다. 심사숙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안에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고민하지 않게 하지만 고민해야 합니다.

분주함과 경솔함을 멀리 하십시다. 내 안에 있는 분주함이나 경솔한 영역.

어린양을 깊이 묵상하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이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똑같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런 일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분류 없음 > 2015'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아온 칠십인  (0) 2015.09.09
종말시대와 대환란 / David Pawson  (0) 2015.09.08
지옥 HELL / David Pawson  (0) 2015.09.05
천국, 지옥, 세상 끝 / David Platt  (0) 2015.09.03
복스러운 소망  (0) 2015.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