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youtube.com/watch?v=i2CqORmwuKY
▲<예레미야서>에 이어서 <예레미야애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입니다.
성경에도 두 권이 붙어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레미야가 우는 내용입니다.
이 책은,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슬픈 책 중 하나입니다.
저 파슨은, 이 책을 욥기와 나란히 놓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개인적인 비극 때문에 슬퍼한 반면,
예레미야는, 국가적 재앙 때문에 슬퍼했습니다.
이 책에 보면 뭔가 어떤 일이 이 전체 백성에게, 전체 나라에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그가 사랑하는 도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눈물로 씌어져 있습니다.
제가 한 남성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데요,
그는 크리스천이 되면 무서운 일을 겪는 그런 나라에서,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집을 불태웠는데, 집안에는 그의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모두 불에 타서 죽었지요. *그는 외부에 있은 모양입니다.
그는 제게 편지를 써서 이 일에 대해 말했고,
그는 푸른색 잉크로 편지를 썼는데, 제가 보니까 편지지에 눈물자국이 있었고
글씨는 번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그들을 용서합니다.
왜냐면 그리스도께서 저를 용서해 주셨으니까요.’
그 나라는, 예수를 믿는 신자가 되면, 자기 생명이나
자기 가족의 생명을 대가로 치러야 되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제가 <예레미야애가>를 읽을 때도, 그런 비슷한 느낌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애가를 읽을 때는 페이지마다 눈물이 떨어져 있으며, 잉크가 번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에, 그의 마음이 터질 듯이 우는 한 사람 예레미야가 있습니다.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할 때, 이 책은 ‘눈물’로 이름 지었습니다.
구약 히브리어로 이 책의 이름은 ‘어떻게 How’입니다.
왜냐면 두루마리를 펴면, 보이는 첫 글자가 '어떻게 How' 입니다.
*히브리어로 ‘에이카’ 영어로 How, 우리도 낭패를 당하면 ‘어떻게 해?’ 하죠.
헬라어로는 그 책을 ‘눈물 Tears’로 지었는데,
헬라어 다음에 라틴어 성경이 나왔는데,
그 라틴어 성경에서, 지금 우리가 쓰는 Lamentation 이 나온 것입니다.
영어로도 그 뜻은 ‘눈물’입니다.
여기 우리는 매우 슬픈 책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위로’는, 부스러기처럼 아주 조금만 발견됩니다.
이 책은, 그가 예루살렘 도시가 완전히 파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면서 쓴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히로시마가 원폭으로 불타는 그림을 마음에 그리시면,
예레미야가 지금 하나님의 도성을, 그런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도시와 성전 등이 모두 파괴되는 것을 그가 보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불에 탔고, 황폐되었습니다.
그 전에 엄청난 포위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두려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엄마들은 자기 어린 자녀들을 잡아먹었습니다. 신28:57의 성취
심지어 자기 아기를 낳자마자, 잡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모든 게 다 슬픈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레미야가 울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시인이었음을 압니다.
왜냐면 그의 대부분 예언들은, 시적인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래들을 썼습니다.
예언과 음악 사이에는, 놀라운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언의 영이, 시적 표현이나 노래를 만들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스가랴가 예언할 때,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음악을 연주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그는 예언했습니다. 에스겔도 음악을 들으면서 예언했고
다윗도 어떤 의미에서 모세와 엘리야 이후로 가장 큰 선지자인데,
그가 죽을 때,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자기는 선지자였으며,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삼하23:1
다윗이 성가대장을 임명할 때마다, 그는 언제나 선지자를 임명해서 성가대를 이끌도록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그런 필요성을 느끼시나요?
제가 자란 교단에서는 이런 말이 곧 잘 회자되었습니다.
‘만약 마귀가 교회에 침입한다면, 그는 성가대로 들어갈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음악이 정도를 떠나, 음악적 기교만 드러낸다면,
그게 전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조심스러워하며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나는 선지자로서 노래하는 자를 원한다.’ 바로 아삽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아삽을 성가대장으로 임명했습니다.
왜냐면 아삽은 예언할 줄 알았고, 하나님의 길을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교회에, 음악 연주자들이 예언적이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분들이 찬양인도자이면, 그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지금 우리는 교회 음악을
젊고 숙련된 음악인들에게 맡기고 있는데,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음악을 통해 나타내기 원하시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합니다.
어쨌거나 예레미야는, 노래들을 작곡했고, 그는 또 다른 애가도 지었는데,
그것은 역대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대하35:25
이 애가는 젊은 요시야 왕이 실수로, 주님의 예언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가 애굽 군대를 물리칠 것으로 생각해서 전장에 나갔다가 므깃도에서 전사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사했을 때
애가를 지었던 것처럼, 삼하1:16~27
예레미야도 젊은 요시야 왕이 전사했을 때도, 나라 전체가 부르도록
애가를 지어서, 그 요시야의 통치가 일찍 끝나게 되었다고 슬퍼했지요.
▶그래서 예레미야는 종종 이런 노래들을 지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애가는, 그가 현장에서 목격하면서 지은 노래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예레미야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애가를 읽으실 때
그는 지금 예루살렘의 다 허물어진 건물들과 황폐된 거리들을 보면서, 그 가운데 서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그를 남겨두었죠.
여러분은 그가 그 거리에 서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 볼지어다.” 1:12
왜냐하면 그 땅에 사람들이 조금은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쳐다보면서, 평화롭던 과거를 생각해 봅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이 재앙이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이 애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것은 정말 슬픈 애가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폐허를 한 번 보십시오.
당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이 슬프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이 예레미야애가는, 전체가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냥 자기 슬픈 감정을 마구 쏟아놓은 게 아닙니다.
매우 세밀한 구조로 씌어졌습니다.
이 책에서만, 장 구분이 제대로 잘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다른 책은 장 구분이 잘 되지 못했다는 뜻
이 책은 모두 5장인데, 5개의 슬픈 노래로 잘 끊어져 있습니다.
그 5개는 모두 아름답게, 그리고 정교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알파벳 시 6:45~
여기에 약간 모순이 있는데요.
한편으로는, 그가 자기 슬픈 감정을 막 쏟아내기 때문에, 무질서하게 쓰여진 것 같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애가가 매우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모순입니다.
그가 애가를 ‘알파벳 시’ 형식으로 기록했는데요. *acrostic
알파벳시란, 알파벳 순서대로 노래나 시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도레미송 처럼
이 책에 나오는 5개의 시 중에, 적어도 4개가 알파벳 시 형식입니다. 1~4장
그래서 22절로 되어 있거나, 22배수의 절로 되어 있는데, *1, 2, 4, 5장이 22절, 3장이 66절
히브리 알파벳이 22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어는 알파벳이 26개죠.
영어는 a, b, c, d, e, f, g.. 이렇게 알파벳이 26개인데, 히브리어는 22개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에는 a, e, i, o, u. 같은 모음이 없습니다. 오직 자음만 씁니다.
그래서 ‘rabbit’을 쓸 때는 히브리 식으로 ‘rbt’라고 자음만 쓰죠.
그들은 이 22개의 자음만 쓰고, 모음은 쓰지 않는데
그래서 알파벳이 영어 26개에 비해서, 22개 뿐입니다.
1) 첫째 시 애1장은 22절로 되어 있는데요.
알파벳 하나로 한 절씩 시작하며, 한 절은 각각 3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절의 3행은 A로 시작하고, *알렙
2절의 3행은 B로, 그렇게 마지막 22절까지 계속되죠. *베트
이것이 바로 알파벳 시 형식입니다.
2) 두 번째 노래 (2장)도 알파벳 노래로 부를 수 있도록, 그렇게 씌어졌어요.
22절이 각각 3행으로 되어 있는 알파벳 시 형식입니다.
거기서 각 절의 첫 단어는 알파벳 순서로 시작하죠.
3) 셋째 애가 3장은 많이 긴데, 모두 66절입니다.
알파벳 한 단어에 3절씩 구성됩니다.
제가 아까 잘못 말했는데요 1, 2장에서 3행이 모두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는 게 아니고,
오직 그 절의 첫 행만 알파벳 순서로 시작합니다. 각 절은 3행으로 되어있죠.
*절 verse과 행 line 구분요. 한 절에 보통 3행으로, 또는 2행으로 구성.
그런데 3장에서는 3절이 모두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합니다.
각 절은 3행으로 되어있죠. 3장은 다른 시들보다 3배로 깁니다.
3장이 가장 중요한 장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볼 건데요. 주1)
4) 4장은 다시 22절로 돌아가는데, 각 절이 2행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1, 2장처럼 한 절씩으로 된 알파벳 시입니다.
5) 알파벳 순서를 따르지 않는 시는, 마지막 5장입니다.
5장은 알파벳 시 형식은 아니지만, 똑같이 22절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애가는 인위적인 구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부러 머리를 써서, 이런 형식으로 만든 거죠.
▲그럼 실험적으로, 제가 스스로 질문해 보았어요.
‘왜 그는, 자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알파벳 시 형식으로 썼을까?’
제가 생각해 보니, 그게 먼저는 외우기에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외울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자기의 극한의 슬픔을 모두 다 표현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
마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시작부터 끝까지 완전히 다 슬프다는 식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이렇게 알파벳 시로 쓴다고,
자기 슬픈 감정이, 다 잘 표현되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작은 실험을 해 봤습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네요.
제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a, b, c, d, e, f, g, 이렇게 26개의 알파벳을 쭉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했어요, 혹시 이게 내가 예레미야애가의 교훈,
즉 이 책의 주제를 담아내는데 도움을 줄지 모른다고요.
혹시 우리가 뭔가 쓰려고 할 때, 사실 운(행의 시작)이 잘 떼지지 않는데,
알파벳으로 먼저 운을 쭉 적어놓으면, 그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제가 한 번 실제로 해보니, 도움이 되더라고요.
제가 영어 알파벳을 쭉 먼저 종이에 적어놓고,
그 순서대로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를 쭈욱 적어 내려가 보았는데, 2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인데, 바로 이런 이유로, 그가 알파벳 시 형식을 썼다고 봅니다.
왜냐면 그는 너무 슬퍼서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알파벳 운(서두)을 쭈욱 적었지요.
저도 해 보니까, 그런 형식으로 시를 짓는 것이, 훨씬 더 쉽더라고요.
먼저 운(서두)이 정해져 있으면, 어쩌면 쓰기가 더 쉽다니까요.
제가 쓴 것을 지금 읽어드릴 텐데요, 이것을 다 적는데 불과 1분30초 걸렸습니다.
*서두의 운이 정해져 있으니, 순식간에 다 썼습니다.
제가 잘 썼다는 뜻은 아니고요.
그러나 서두가 정해져 있으니, 정한 범위 안에서 오히려 술술 써 지더라고요.
이 생각, 저 표현으로 고민할 필요 없잖아요.
제가 쓴 것을 지금 읽어볼게요. 사실 이것은 예레미야애가의 요약과 같습니다.
제가 a, b, c, d 의 서두를 먼저 쭉 적어 놓고, 거기에 따라 써내려갔지요.
Awful is the sight of the ruined city, 폐허된 도시를 보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Blood flows down the streets 피가 거리 곳곳에서 흐른다
Catastrophe has come to my people 파국이 내 백성에게 이르렀다
Dreadful is their fate 그들의 운명이 얼마나 끔찍한지
Every house has been destroyed 모든 집은 파괴되었고
Families are broken forever 가족들은 영원히 이별되었네
God promised He would do this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Holy is His Name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시다
I am worn out with weeping 나는 우느라 지쳤다
Just broken in spirit 나의 깨어진 심령이여
Let me dies like the others 내가 다른 사람들처럼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My life has no meaning 살아있는 내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Never again will I laugh 나는 다시는 웃지 않으리라
Or dance for joy 혹은 다시는 기쁨으로 춤추지 않으리라
Please comfort me Lord 주님 저를 위로하소서
Quiet my spirit 내 영혼아 잠잠하라
Remind me of your future plans 당신의 미래 계획을 저로 기억케 하소서
Save your people from despair 당신의 백성을 재앙에서 구원하소서
Tell them you still love them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소서
Understand their feelings 그들의 절망한 감정을 이해하소서
Venture your anger them that destroy us, exterminate our enemies
우리를 공격한 대적들에게 당신의 노를 발하셔서 그들을 이 땅에서 끊으소서
We will again exalt your name 우리는 다시 당신의 이름을 높이리라
Zeal us your reputation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 일을 행하소서
쓰고 나서 보니까, 예레미야애가에 나오는 모든 느낌을 다 살린 것 같습니다.
제가 알파벳을 순서대로 쭉 쓴 것이, 이 시를 짓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 예레미야도, 알파벳 시 형식으로 이 책을 지은 것 같아요.
그는 자기의 슬픈 감정을 종이에 쓰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를 몰랐어요. 운이 쉽게 떼지지 않았아요.
그래서 그는 그냥 히브리 알파벳을 쭈욱 적어내려갔지요.
제 파슨 에게는, 그게 쓰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제 추측이 틀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제 생각에, 이것이 알파벳 시 형식으로 쓴 이유라고 봅니다.
그게 그가 쭈욱 써 내려가는데 도움을 주었을 겁니다.
다음 줄에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지,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써 나가는 겁니다.
여러분도 원하시면, 한 번 그렇게 해 보세요.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며,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또 스스로 질문했어요. ‘왜 그가 이 모든 것을 썼을까?’
제가 깨달은 것은,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함께 울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 애가를 함께 부르기 원했던 것입니다.
제 생각에, 그는 이것을 써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보내기 원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들도 거기서 이 애가를 부르며, 자기들의 슬픈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요.
만약 여러분들이 재앙을 만났을 때, 한 가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자기의 슬픈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잔인한 것입니다.
‘오! 그녀는 너무 담대해서,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어.’
그건 너무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 슬픈 감정을 표현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유대인과 가톨릭은, 신자 중에 장례가 나면 아주 정성스럽게 합니다.
상을 당한 가족과 함께 밤새워 지내줍니다. 그리고 함께 눈물을 흘려줍니다.
성경에서도, 눈물을 흘리는 것을 권장합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눈물을 흘리세요. 나오는 눈물을 억누르지 마세요.’
저는 영국의 공립학교가 가르치는 스토아주의(금욕주의)를 염려합니다.
그것은 헬라 스토아주의에서 내려온 것인데요,
‘너희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말합니다.
‘항상 뛸 준비를 하라’
제가 염려하는 것은, 우리는 서구 문명이라서 울지 않는 사람을 존경합니다.
이것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겁니다.
그것은 헬라적 사고이며, 히브리적 사고가 아닙니다.
한 미국 부통령이 자기 선거 모임에서, 눈물을 비추었어요.
그의 이름은, 후보 명단에서 즉시로 제거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는 연약한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똑같은 일이, 호주에서 밥 호크 후보에게 일어났어요.
그는 텔레비전에 출연했는데, 사회자가, 마약 중독에 걸린 그의 딸에 대해 물었어요.
그때 그는 눈물을 흘렸지요.
그때부터 강인한 호주 사람들이 밥 호크를 무시하기 시작했을까, 저는 염려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이스라엘 군인의 무덤 앞에서 울지 않는 사람은
절대 수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이고, 히브리적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우는 것을 인정합니다. 서구와 다른 게 흥미롭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예루살렘을 보시고 사람들앞에서 우셨고,
이 책에서 예레미야도 울고 있습니다.
그건 계집아이들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울 때 울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남자다운 겁니다.
◑이제 애가 시를 살펴보겠습니다. 15:20~
이 시에 관하여, 다음으로 유의해야 될 것은,
각 장마다 <인칭대명사가 바뀐다>는 점입니다.
1) 첫째 시(1장)에서 인칭대명사는 she 입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도시나, 그 도시의 백성들을 가리키지요. ‘딸 시온, 딸 유다’입니다. 1:6, 1:15
*개역은 she를 번역하지 않았는데, 차라리 잘 했지요. 번역하면 더 헷갈리니까요.
도시도 문법적으로 ‘여성형’이고, 그 도시의 사람들도 ‘여성형’입니다. feminine
이 전통이 영어에도 이어집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도시가 아예 상징적으로 ‘여자’입니다. female
계시록 끝에 보면, 바빌론도 ‘여자 she’로,
더러운 음녀나 예루살렘도 다 ‘여자 she’로 나오지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부도 ‘여자 she’입니다.
그래서 ‘그여자 she’는 도시, 또는 그 거주민을 뜻합니다.
2) 둘째 시에서는, 인칭대명사가 ‘그 He’로 나옵니다.
*‘2장’ 하면 될 것을, ‘둘째 시’라 부름은, 파슨 박사는 장/절 구분을 싫어해서 아예 언급을 안 하십니다.
두 번째 시는, 이 재앙을 불러온 분에 관한 내용인데 ‘그 분 He’로 나옵니다.
*역시 개역은 2:3,4,6절에서 주어 He를 생략하고 번역했는데,
우리말은 경어체가 있어서, 하나님을 함부로 낮추어 번역할 수 없었을 겁니다.
3) 셋째 시에서, 5장 중에서 가장 긴 시죠. 이 시는 매우 개인적 감정을 잘 표현했습니다.
모두 예레미야 자기 자신이 주어 ‘나 I’로 등장합니다.
매우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많이 드러낸 시입니다.
4) 다음에 4장에서 그의 시선은, 이스라엘 나라로 향합니다.
그래서 ‘그들 they’가 나옵니다.
"그들이란, 예루살렘에서 공격받은 자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4장에서 "그들"은 동족 이스라엘을 얘기합니다. 공격한 '그들'은 5:11절에 한 번 나오긴 합니다.
5) 마지막으로 5장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과 동일시합니다.
그들이 언젠가 돌아올 것을 말하면서 ‘우리 We’라는 대명사를 씁니다. 5:3, 4, 5, 6, 7, 8등
다시 말씀드리지만, 여러분이 성경을 연구하실 때, 주의 깊게 하셔야 합니다.
작은 단어 한 개, 인칭대명사의 변화까지도 눈여겨 살펴야 합니다.
그 작은 단어 한 개 한 개에, 모든 게 다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저 예레미야애가를 읽어 가신다면, 다 읽고나서도
여러분은 그냥 읽은 것 뿐이지, 여기에 5가지 다른 주제가 나온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실 것입니다. *주어가 5개로 다르니, 주제도 달라지겠지요.
▲저는 그 5개에 각자 다른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첫째 시는 “대파멸” 파괴된 도시와 그 딸들(거주민)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둘째 시는 제가 “원인”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하나님이 파괴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셋째 시는 제목이 “치유”, 그는 스스로 깨달았어요.
하나님의 자비는 여전히 유효하며, 그분의 신실하심은 여전히 살아있고,
그래서 그는 그 모든 것을 되돌리실, 그분의 신실하심을 부르짖어 간구하지요.
넷째 시는 “결과” 이 모든 일의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나요?
마지막으로 5장은 “부르짖음” 그의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부르짖음입니다.
주어가 ‘우리 we’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미래를 위하여 탄원합니다.
이 5편의 시들은 매우 감동적이지요.
◑그러면 이 시들을, 더 자세히 살펴보십시다. 18:10~
▲1. 첫째 주제인 “대 파멸”에 대해서는, 더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어요.
여러분이 그게 뭔지 다 잘 아시니까요.
도시 전체가 포위를 당하였다가, 나중에 파괴되었지요.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졌습니다. 성전도 사라졌습니다.
집들도, 사람들도 다 사라졌고, 남은 것은 폐허와 공허와 황무함 뿐이었어요.
첫째 시에서 파멸에 대한 그 묘사가 너무나 생생합니다.
▲2. 둘째 시에서, 예레미야는, 정말 일어날 필요가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더 슬픈 일이었어요.
피할 수도 있었던 일이거든요. 그러나 피하지 못했어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그의 조언이 받아들여졌더라면,
그래서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더라면
그 도시는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건 정말 안 일어나도 될 일이었거든요.
이제 여러분도 보십시오. 사람들이 망했어요.
왜냐면 그들은 여러분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건 매우 고통스런 일이지요.
당신이 그들을 도와서 그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당신이 알게 될 때 말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시는, 예레미야의 정신적 고통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피하게 하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그걸 약속하셨어요.
그들이 회개를 했다면, 하나님은 파멸시키기로한 마음을 바꾸실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유기적으로 봐야지, 파멸이 기계적으로 작정되었다고 보면 위험합니다.
그래서 그는 망연자실했지요. 그 백성들이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둘째 시에, 그런 예레미야의 감정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5개의 모든 시에, "하나님의 분노"가 5번 다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분노도 끓어오르실 때가 닥치거든요. 참다가 참다가..
성경에는 두 종류의 분노가 나옵니다.
-속으로 삼키는 분노와,
-겉으로 표출되는 분노.
제가 잠시 여러분께 질문하겠는데요,
당신의 분노는, 위 둘 중에 어떤 부류입니까?
분노를 속으로 삼키는 스타일의 사람은, 화가 나면 조용해지고 말을 안 합니다.
그리고 속에서 분노의 불이 활활 타오르죠.
이것은 서서히 화내는 것입니다. 속에서 끓고 있는 거죠.
오래 동안 이렇게 끓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폭발하겠죠.
반대로 급히 분노하는 스타일도 있습니다.
순간 분출되어 불사르며 폭발적입니다.
여러분은, 두 스타일 중에,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시는지요.
여러분 각자는, 둘 중에 하나는 갖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둘 다 갖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번 손을 들어 보십시다.
분노가 속으로 삼켜져서, 속에서 부글부글 끓는 분은, 지금 손들어 보실래요?
반대로 분노가 밖으로 분출되시는 분, 손들어 보실래요?
저 파슨은 방금 손을 안 들었는데요.
저는 아마 후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분노는, 둘 중에 어떤 종류일 것 같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 답은, 양쪽 다입니다.
여러분 주부님들, 난로 위에 우유를 냄비에 담아서 끓이다가, 깜빡 잊으신 적 있으시죠?
그런데 갑자기 집에서 뭐가 타는 냄새가 납니다.
그러면 미친 여자처럼 부엌으로 달려가지요.
그래서 냄비를 들어 옮기지만, 벌써 다 타버렸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거기 서서, 우유 끓는 것을 지켜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그러면 우유를 태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유가 끓기 시작하면 보글보글 표시가 나거든요. 맞지요?
여러분이 그걸 지켜보신다면, 우유를 끓어 넘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전체적인 강조는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는 것을 보거든,
회개해서 그 분노를 중지시켜서, 그게 끓어 넘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으면,
그게 지금 끓고 있는데도 그걸 보지 못하면,
그게 끓어 넘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재앙이 닥치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 교훈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진노’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와 같은 교훈이지요.
그가 로마서 1장에서 말한 것은, 하나님의 분노가 이미 끓고 있으며,
그게 끓고 있다는 전조가 거기에 나오는데요.
우리가 지켜봐야할 전조 중 하나가, 증가하는 동성연애입니다.
여러분은, 동성연애가, 하나님의 분노가 끓고 있는 전조임을 깨달으십니까?
로마서 1장을 읽어보십시오.
사람들은 순리적인 관계를 바꾸어, 역리로 관계를 맺습니다.
또 다른 하나님의 분노의 전조는, 반사회적인 반항 행동이며
또한 가정을 깨트리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주의해서 관찰하시면, 이런 일들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증상(전조)들입니다.
이 모든 죄들이, 계속되면 하나님의 분노가 끓어 넘치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분노를 보게 되죠. 계시록에도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래서 5편의 애가 시에, 모두 하나님의 분노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가진 문제는, 그게 끓고 있는데도,
그걸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게 끓어 넘쳐버렸죠. 넘치기 전에 조치를 취했어야 했죠.
그리고 위기가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정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노가 우리를 향해 끓기 시작할 때, 우리가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야 끓어 넘치지 않지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분노입니다.
▲3. 세 번째 시는, 예레미야 개인적인 감정의 시이며,
거기에 아주 사랑스런 구절이 있는데, 잠시 후에 우리가 부를 것입니다.
왜냐면 그것은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영원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우니♪ 3:22~23
예레미야는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노로 모든 백성들을 쓸어서 없애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그들을 바벨론에 보내셨습니다. 그들은 다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비록 포로지만
백성들은 완전히 다 멸절되지 않은 것입니다.
나라도 다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하기를 “그 이유는, 당신의 긍휼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3:22
‘소멸된다’는 말은, 완전히 100% 멸망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자비가, 셋째 시에서 찬양되고 있습니다.
멸망당한 고통이 지금 현재 느껴지는 가운데서, 그는 하나님의 긍휼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아침에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제가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입니다.
늘 그렇지는 않지만, 때때로 아침에 깨면, 제가 크리스천임을 느낍니다.
제가 한 밤 중에, 호주에서 전화가 와서 깰 때는, 저는 크리스천이 아닌 것 같아요.
이유는, 그들이 전화 통화 끝에, 저의 크리스천의 친절한 말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잠을 깨워서
어떤 분이 한밤 중에 제게 전화를 걸어서 저를 깨우고는 이렇게 말해요.
‘제 생각에, 제가 박사님이 침대에서 막 일어나실 시간에 맞추어 전화를 드린 것 같군요.’
그런데 그때가 새벽 3시였습니다.
그는 ‘제가 새 시계를 샀는데, 전 세계의 현재 시각을 가리켜주는 시계입니다.’
제가 ‘그 시계를 맞췄나요?’ 세팅했나요?
어쨌거나 제가 아침에 깨면, 때때로 제가 크리스천임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 층으로 내려가서 차를 끓입니다.
제 아내는, 항상 매일 아침에 집 정리를 합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집 정리를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집 정리하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집이 유지되지요.
그래서 제가 아래 층으로 내려가서, 냉장고에 우유가 없을 때는
대문 밖에 나가서, 우유 두 병을 집어서 집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죠. 땅 집인듯
바깥 공기가 차고 신선합니다.
그 신선한 공기를 쐴 때마다, 저는 항상 애3장의 구절을 떠올립니다.
“당신의 긍휼이 아침마다 신선하니” *어떤 번역엔 ‘자비가’ ‘새로우니’
그렇게 실내로 돌아와서는, 저는 재빨리 ‘하나님의 긍휼’을 되새깁니다.
제가 지금 늙어서 연금을 받게 된 것도 그만큼 오래 살은 것도 긍휼이지, 제 권리가 아니었어요.
오늘 제게 할 일(사역)이 있어요. 그것은 제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우리 부부가 살 집이 있어요. 머리 위로 지붕이 있지요.
이것도 권리가 아니라, 주님의 긍휼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런 것들 중에 아무 것도 받기에 합당한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버지, 당신의 긍휼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인자가 크심이로소이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능력으로 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능력위주 사회’입니다. meritocracy.
사람들은 자기가 일한 만큼, 돈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삶의 기본 원리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세상은 자기 권리를 강하게 주장하며, 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나는 내 권리를 찾을 거야!’라고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저는 아무 권리가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받기에 자격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긍휼을 받아서 살아가며, 당신의 긍휼은 매일 아침마다 새롭습니다.’
이것은 참 아름다운 구절이죠. 개인적인 시(3장)의 중간에 나옵니다. 3:22~23
이것은 그가 개인적으로 느낀 것인데, 그가 그 패허의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자들을 다 소멸시키지 않으시는, 그래서 일부를 남겨서 다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긍휼이 매일 아침마다 새롭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를 사랑합니다. 잠시 후에 우리가 같이 찬송으로 부르겠습니다.
▲4. 그는 이제 4장으로 옮겨가서 주어가 ‘그들’이 나옵니다.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죠.
이제는 ‘자기 자신’이 주어가 아닙니다.
그는 회상하기를, 백성들이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었는데,
그들이 회개치 않아서, 하나님은 그들을 벌주셔야 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결과는, 지금 너희들이 보고 있는 바로 이것 완전한 파멸 이다.'
예레미야는, 모든 사람들이 이걸 보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애가의 메시지를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통곡으로부터, 그는 다음 주제로 옮겨갑니다.
▲5. 마지막 시 5장은 "기도"입니다.
장래에 어느 날 하나님이 나라를 다시 회복시켜달라고, 그들을 다시 이 땅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하나님의 긍휼을 탄원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분노’ 말고, 애가의 전체에 나타나는 다른 주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주제가 전체에 계속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죄’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최근에 어떤 글을 읽었는데요, 제가 믿을 수 없어서 직접 확인해 보았는데,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죄가 그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죄’라는 말로, 어떤 때는 죄의 행위로.
구약에는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구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약의 거의 모든 페이지마다 구원이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죄’가 가득 나오지요.
예레미야는 정직하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죄 때문이다’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긍휼을 부르짖습니다.
자기들의 죄로 당연히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들이 받기에 합당한 것(죄의 결과)보다, 더 위에 있는 어떤 것(긍휼)을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 긍휼이 그들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상으로,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애가들’이라고 복수로 부르는 이유입니다. Lamentations
왜냐면 이 책은, 5개의 다른 애가와 슬픔의 노래를 모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예수님과 너무 흡사합니다 28:22~
오늘날까지, 예레미야애가 전체가, 매년 한 번씩 모든 유대인 회당에서 노래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특별한 날을 정해서 부르는데, 아빕월 9일입니다.
우리의 달력으로 7월입니다.
이 노래가 매년 불려지는데, 왜냐하면 그 날이 바로 바벨론이 성전을 파괴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매년마다, 유월절에 출애굽을 기억하는 유대인들은,
아빕월 9일에 성전을 잃어버린 것도 같이 기억합니다.
매년 7월에 여러분이 회당에 가시면, 그들이 아주 슬픈 목소리로
예레미야애가를 노래하는 것을 들으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랍비가 애가를 읊는 소리를 직접 들어보시면, 아실 텐데
우리 마음을 울리는 그런 노래를, 저는 여태껏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한 번은 예루살렘의 '야드 하셈' 마당에서 연설했습니다.
거기는 홀로코스트(대학살)에서 희생당한 6백만의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곳입니다.
거기 마당에 수 백 명의 유대인과 크리스천들이 모였었고,
그 뒤에는 나무들이 열을 맞춰 심어져 있었는데,
이 나무들은 의로운 이방인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코리 텐 붐 여사를 추모하는 나무도 있고,
또 홀로코스트 동안에 유대인들을 구한 여러 이방인들을 기념하는 나무들이 서 있었습니다.
제가 거기 서 있었고, 행사는, 캐나다인 멜브 & 멜라 왓슨 부부가
애가를 연주하며 노래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멜라 왓슨은 일어서서 슬픈 마음으로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수염을 가진 한 랍비가 일어서서, 애가를 불렀습니다.
저는 그런 애가를, 예전에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연설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행사는, 이틀 동안 열리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첫 날에, 하나님이 크게 능력으로 그 자리에 임재하셔서,
우리는 이튿날 행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또 한 번 더는, 못 하겠어요’라고 말했지요. 그만큼 임재가 강력했습니다.
슬픈 애가를 부를 때, 뭔가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그 랍비의 애가에는, 그들의 모든 역사가 담겨 있었습니다.
참 슬픈 노래인데, 여러분도 매년 7월에 회당에 가시면, 들으실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아빕월 9일이, 그들이 첫 번째 성전을 잃어버린 날일뿐만 아니라 솔로몬성전
주후 70년에 디도가 두 번째 성전을 허물어뜨린 날도, 똑같은 날이었습니다. 헤롯성전
첫째 성전을 상실해서 애가를 불렀던 똑같은 날짜에,
그들은 둘째 성전을 잃었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그런 날이 올 것을 예언하셨죠.
이 사실은, 제게 매우 중요한 통찰력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첫째 성전이 상실될 것을 경고했던 것과 똑같이
예수님도 둘째 성전이 상실될 것을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예레미야가 흡사하다고 종종 인정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그들은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시 나타난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당신은 예레미야의 환생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당시 사람들이 그렇게 연결지었을까요?
아마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연결지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분은 선한 목자이셨는데,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바 그대로입니다.
그 분은 다윗 가문의 왕, 구속자, 그리고 치료자이였는데,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바 그대로입니다.
▲그보다 더한 것은, 예레미야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사람의 대적이 그의 집안 식구리라’
이건 예레미야에게 일어났던 일인데, 예수님도 그러하셨죠. *예레미야의 고향 아나돗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 했음
왜냐면 예수님도 처음으로 죽을 뻔 했던 적이, 나사렛 고향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가서 벼랑에서 밀쳐 버리려 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해 시도를 다섯 번이나 피하셨습니다.
예레미야도 그랬지요. 그도, 한 번 이상 여러 번 거의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고, 벼랑 끝에서 밀쳐 버리려 했고,
여러분이 성경을 읽어보시면 5번의 살해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풀려나셨고, 말씀하시기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성전을 청소하실 때, 채찍으로 유대인들에게 휘두르셨을 때,
성전을 탐욕스런 환전상들의 본부로 만든 그들을 향해 말씀하실 때,
하필 예레미야서의 말씀을 인용하셨어요.
‘너희가 어찌 내 아버지의 집을, 감히 강도의 소굴로 만들 수 있느냐?’
이렇게 예수님은, 예레미야이셨습니다.
대중들은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예레미야가 다시 나타난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죠.
‘너희들은 선지자들을 돌로 치고, 그들의 기념비를 세우는구나’
예레미야 자신도 한 번은 그렇게 말했었죠.
‘나는 도살장으로 끝려가는 어린 양과 같음을 느낀다.’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예수님
▲가장 놀라운 우연의 일치는 바로 이점입니다.
예루살렘 북쪽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유대 전통에 의하면,
그곳은 ‘예레미야의 동굴’로 불립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이, 그가 외롭고 상처입고 고통당할 때, 가서 기도하던 장소로 믿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가시면, 그 동굴을 지금도 볼 수 있습니다.
골고다라 불리는 언덕에 있는 동굴입니다.
그것은 ‘무덤 동산’의 모퉁이와. ‘해골’ 지형의 전면에 위치해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동굴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곳이라 여겨지는 장소의 바로 옆에 있습니다.
제가 하루 밤을, 그 언덕에서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언덕 안쪽에서 제가 밤새 지냈는데,
무덤 바로 옆의 동굴에서였습니다.
제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깨어 있었습니다.
그건 제게 가장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침낭에 누워서, 예레미야가 기도했던 그 동굴에서,
그리고 거기 바로 아래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던 장소이고
옆에는 빈 무덤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예수님을 닮은 것입니다. 내내요.
▲갈보리로 올라가시는 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중에 한 가지는,
제가 종종, 사람들이 성경을 깊이 아는지 알기 위해, 질문하는 것인데요, 여기서도 해 보겠습니다.
제가 어떤 말을 할 터인데, 이 말이
신약성경의 말씀인지, 구약성경인지, 셰익스피어의 말인지 맞춰보세요.
한 번 손을 들어보겠습니다.
자 문제 입니다. ‘만약 그들이 푸른 나무 사이에서 이런 일들을 한다면,
마른 날에는 어떤 일이 되어질까?’
“나무가 푸른 계절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하거든, 하물며 나무가 마른 계절에야 무슨 일이 벌어지겠느냐?" 눅23:31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 자신들을 위해서 울라.
그 날이 올 것이다’고 말씀하셨을 때입니다. 눅23:28
그리고 예수님은 가리키시기를, 주후 70년, 그러니 앞으로 40년 후에,
40년 동안 시험기간을 거치고, 즉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40년 동안이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응답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어요.
그러나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고, 40년이 지나자, 성전은 다시 무너져 내렸습니다.
놀라운 일치입니다. *예레미야도 예언기간이 총 40년, 그 후에 성전 불탐.
이제 거의 끝낼 시간이네요.
◑왜 <예레미야애가>가 성경에 포함되었을까요? 35:03~
왜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되죠?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한 가지는, 교회가 예레미야와 같은 운명으로 고난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의 신자들 앞에는, 두 가지 운명의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1) 하나는 울며, 소리를 지르며 울고, 이빨을 가는 것이고요. *지옥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항상 신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자기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신 거죠.
2) 또 하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에게 지어진 운명의 길은,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천국
어떤 면에서, 우리 앞에 놓여진 두 운명의 길은
-영원히 우는 길이거나 *지옥
-하나님이 우리 눈물을 씻어주시는 길입니다. *천국
저는 그 구절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큰 손수건을 가지시고 나와서 말씀하시기를
‘이제는 더 이상 울 필요가 없다. 여기로 오라. 내가 네 눈물을 닦아주겠다.’
이게 선하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 구절이 계시록에 두 번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 눈물을 모두 닦아주시리라’ 계7:17
그리고 ‘너는 이제 영원히 울지 않게 되고, 네 눈물이 닦아질 것이다.’ 계21:4
▲2. 계시록 뿐만 아니라, 세상도 이 책을 직면하고 있는데요,
왜냐면 예레미야서와 애가를,
다른 어떤 구약의 책보다 더 많이 인용하고 있는 신약의 책은.. 요한계시록입니다.
예레미야서에서 신약으로 인용된 구절들 중에 절반이, 요한계시록에 인용되었습니다.
그 구절들은, 바벨론 성에 적용되는 구절들입니다.
그 바벨론 성은, 세계의 최후의 금융센터입니다.
그 성은 멸망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이 무너질 때, 세상은 그걸 보고서, 통곡하며 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그때 크리스천들은 할렐루야 합창을 부를 것이다’ 계18:20
사람들이 <헨델의 메시야>, 거기 나오는 ‘할렐루야 코러스’를 많이 듣지 않는데요,
여러분은 그 합창곡을 아실 것입니다.
그 합창은, 세계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세계은행자본들이 모두 망하게 될 때
사람들이 건설한 전체 시스템이 붕괴될 때, 기념해서 부르는 합창이 될 것입니다.
그 날에, 크리스천들만 그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성도는 아무도 그 무너지는 곳에 없을 것입니다. 거기는 통곡과 애곡만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18장은, <예레미야서>와 <애가>의 구절들을 한 구절씩 연속해서 인용하는데, 렘48:1, 50:27 등
끝부분에서 ‘화로다, 화로다, 큰 성이여, 한 시간만에 무너져서 폐허가 되었도다’ 로 마칩니다.
그것은 적절한 노래입니다. 어느 날 세상은 그렇게 멸망을 울며 노래할 것입니다. ‘화로다, 무너졌도다’
그러나 세상이 그렇게 노래할 때, 우리 성도들은 ‘할렐루야 코러스’를 부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새로운 도시를 내려보내실 것입니다.
새예루살렘은, 마치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영원히 살게 되는 곳입니다.
우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함께요. 아멘.
.............................
주1) 애가 3장은
1, 2, 3 절이 각각 다 A(알렙)으로 시작하고, 각 절은 3행이고요.
4, 5, 6 절이 각각 다 B(베트)로 시작하고
7, 8, 9 절이 각각 다 C(김멜)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64, 65, 66절이 마지막 알파벳 타우로 마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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