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의 약속을 받은 백성 출19:1-6 15.12.13 출처
※연말연시에 딱 맞는 설교입니다. 끝까지 읽어보세요.
▲직장 생활을 하는 젊은이의 90%가
이직을 고려한 적이 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직을 고려하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 물어봤더니
대다수가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 요즘 취업문제로 고민하는 젊은이들이 많지만
취업을 한다고 비전이 보인다는 보장이 없다는 얘깁니다.
가끔 성도님들 중에 저보고 "목회에 비전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저희 교회로 올 것인가를 결정하기 앞서서
제 목회비전이 뭔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럴 때마다 저는 난처한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설교로 말하는 사람인데, 저의 설교를 오랫동안 듣고도
제가 제시하는 비전이 뭔지를 모른다면, 그걸 설교를 듣고도 모른다면
그건 제가 몇 마디 말씀을 한다고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저는 윤리를 별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행함, 행위에 대해서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하자." 이런 식의 말씀을 별로 드리지 않고,
"시대적인 사명" 이런 거창한 말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다가 "만 명 전도", "천 명 제자" 이런 식의 현수막을 걸어놓지 않습니다.
그것은 북한에서나 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이대로가 좋다. 장군님을 옹위하여 군사대국을 만들자."
북한은 그런 식의 현수막 걸어놓기를 좋아합니다.
그건 선전이에요.
저는 인간의 신앙이 그런 방식으로 고취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을 설교하느냐?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설교하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설교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어떻게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느냐를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양, 경배,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고, 지킬 수 있고, 믿음을 사용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의 많은 의구심의 맞서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신앙을 변증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신앙인들이 겪는 고뇌에 대하여 성경이 어떤 해답을 제시하는 가를 말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병들고 연약한데, 그들을 끌고나가 천리마운동을 하려는 것은
그건 부정직한 목회방식이라고 봅니다. 그건 실적위주의 목회라고 봅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으면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기가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스스로 알게 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누가 빌립 집사에게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복음 전하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가 은혜를 받으니깐 스스로 사마리아에 내려가고,
에디오피아 사람에게 전도하고, 이렇게 하는 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예수님 말씀 그대롭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네 증인이 되리라"
누가 땅 끝까지 주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강요한게 아니에요.
주님도 그것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사람들이 권능을 받으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요구한다고 되는게 아니에요.
예루살렘이든, 온 유대든, 사마리아든, 땅 끝이든, 성령이 인도하실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 재학 시 다니던 미국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원래부터 캠퍼스와 인연이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캠퍼스와 30-40분 거리에 있는 완전히 그 대학과 인연이 없었던 교회였는데,
어느 날 장로님들이 환상 중에, 거인이 서서 한 발은 산 위를 딛고,
한 발은 평지를 딛고 그 입에서 더러운 것을 대학교 캠퍼스 위에 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환상 중에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로님들은 이것이 마귀라고 판단을 하고, 그 마귀를 꾸짖고 대적하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그 대학에서 그 교회를 출석하는 학생들이 생기기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제일 많이 나오고, 열심히 믿는 교회가 됐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사람의 뜻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사람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성령이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아버지가 내게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로 올 수 없느니라" 말씀하셨어요.
예수님도 당신의 의지로 누가 당신에게 나올지를 정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로 올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많은 사람들이 "비전, 비전, 비전 비전을 가져라. 비전을 가져야 된다."
당신의 비전이 무엇이냐라고 말하지만, 비전은 갖고 싶다고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비전은 어떻게 생기느냐?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면 생깁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과 똑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처럼
비전도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으로 생깁니다.
◑아래부터 본론 시작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공통의 비전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서 ‘그 땅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이것이 그들의 비전이었는데,
이 비전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약속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이냐?’
그건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됩니다.
그걸 누가 대신 여러분에게 말씀해드릴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신하여 그 자식에게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깨닫게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깨달아야 됩니다. 스스로 믿어야 됩니다. 스스로 구해야 됩니다.
남편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부인이 대신 전해줄 수 있는게 아니에요.
본인이 스스로 깨닫고 믿어야 됩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고민과 번민을 허락하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엎드리게 하기 위한 것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평소에 워낙 엎드리려고 하지 않고, 여쭈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깐
고난이라도 있어야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을 것입니다.
탕자가 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까?
아버지가 그리워서, 아버지를 사랑해서? 아니에요. 배가 고팠기 때문이에요.
주렸기 때문에 그제야 아버지를 생각한 거에요.
그건 탕자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좋아서 돌아가는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그리워서 돌아 가는게 아니고, 배가 고파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니깐 비로소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양식이 얼마나 풍족한고, 내가 일어나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인간은 이러한 존재에요.
▲제가 10대였을 때 저의 꿈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자가 뭐를 하는 직업인지도 모르고 그냥 과학자가 멋있어 보였어요.
그런데 누가 과학자가 되도 돈을 별로 벌지 못한다는 한 마디에
그 꿈이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니깐 그건 진짜 비전이 아니었다는 얘기죠.
그래서 그 다음에 제 꿈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여기 의사선생님들 많이 계시지만,
저 역시 의사가 뭘 하는 직업인지 알지도 못하고, 정말 의사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의사가 돈을 잘 번다는 이유만으로 의사가 되면 좋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만 17세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로 영접한 다음에
마음속에 자연스러운 소원이 생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이었어요.
그걸 누가 강요해서 된 것이 아니고,
저희 가족 중에 누가 그런 일을 한 분이 계셨기 때문에 한 것도 아니고,
그것이 돈을 잘 버는 직업이기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마음속에 그런 소원이 생겼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한 번에 소원으로 모든 비전을 갖게 됐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 이후로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고, 많은 기다림이 필요했어요.
제가 목회자가 되고자하는 소원을 갖자마자
‘나는 장차 강남구 도곡동에 교회를 개척하리라’라고 생각한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집니다.
40년을 광야에서 지내면서 매일같이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에 인도를 받아 따라가야 했습니다.
그것은 성도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40년 동안 인도를 받아 그리고 가나안땅에 들어간 입니다.
가나안 땅에 가는 것을 알아요. 그 쪽으로 가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장 들어간 것이 아니고,
매일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간 것인데,
어두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가 더 뜨겁습니다.
어두울 때에 하나님의 인도가 더 밝아요.
밝을 때는 슬슬해도 되지만, 우리 인생이 어두울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인도가 더 뜨겁습니다. 더 확실합니다.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을 비교해보자면
이스라엘도 사회였고, 우리나라도 사회를 구성했죠.
사실 사회라는 말은 창세기에는 사회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적어도 믿음의 백성들에게는 개인과 가족만이 있었어요. Family.
창세기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은 가족 단위였어요.
그러다가 이들이 애굽에서 나올때에 비로소 국가와 사회를 이르게 됩니다.
사회라는 것은 혈통이 다른 사람들끼리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사회.
▲그래서 이스라엘이 사회를 지탱하기 위하여 세 가지를 가졌습니다.
첫째는 공통의 율법을 가졌습니다.
왜 하나님이 창세기가 아닌 출애굽기에 이르렀을때에 십계명을 주셨느냐?
왜 그때에 율법을 주셨느냐?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 함께 살기 위해서는 공통의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그 말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규율을 몰랐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그 이전에는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간음이든 이게 나쁜 줄 몰랐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에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야 공식 율법을 주셨다는 말은
그들이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이 사회를 형성하기 위하여 필요했던 것은 공통의 아픔의 경험입니다.
공통의 아픔의 경험. 그들의 민족의 identity가 혈통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공통의 믿음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것도 너무 추상적인데
정말로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공통의 아픔의 경험이에요.
40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그 서러움이
그들을 하나로 민족의 identity를 갖게 만든 것입니다.
세 번째는 공통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는 사실이에요.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이 민족 모두에게 공통으로
아버지, 할아버지, 손자, 조카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신 하나님의 약속.
"내가 너와 내 후손에게 이 땅을 영영히 주리라"
그 하나님의 약속이 이들에게 공통의 비전이 되어서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어디로 갈 것이냐? 무엇을 해야 될 것이냐?
무엇을 인내해야 될것이냐? 를 깨닫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사회와 오늘날 우리 사회를 비교하자면
우리는 그들처럼 공통의 법도 있고, 공통의 고난의 경험도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과거의 가나안 혼동,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시름,
지금도 우리가 겪는 많은 사회적인 모순 이런 공통적인 아픔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졌는데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바로 공통의 약속, 왜 우리사회가 하나 되지 못하느냐?
왜 우리 사회가 늘 다투느냐? 그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공통의 약속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이 통일을 약속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비전이 될 수 없어요. 우리는 엎드려서 기도해야 됩니다.
어떻게 하면 약속을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받을 수 있는게 없어요.
"각양 좋은 선물이 위로부터 내려오느니라" 할렐루야. 야고보서 16장 1절 말씀이지요.
각양 좋은 선물. 은사는 위로부터 내려온다고 했어요.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우리가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민족의 차원에서, 교회 차원에서, 가족, 개인의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실 약속을 구해야 됩니다.
◑비전을 구하십시오.
▲아브라함의 질문이 우리 모두의 질문이에요.
‘여호와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여러분이 그것을 기도해야 됩니다.
‘여호와여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아브라함도 그것을 물어봤어요.
우리 각자가 하나님에 물어보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나이다"
그 말은 열매를 아직 맺지 못했다.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목적지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얘기에요.
내가 아직 목적을 이르지 못하였는데 ‘하나님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얼마나 중요한 질문입니까? 우리는 그러한 간절함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페이스북에 누가 올린 글을 읽어보니까
상당히 학술적인 뒷받침이 있는 그런 내용에 글이었는데,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자원을 가진 나라가 미국이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이 미국 땅 밑에 엄청난 양의 석유와 천연가스가 매장돼있는데
과거에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을 개발할 기술을 갖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이 발전됐다는 것입니다.
그게 이제 프래킹이란 방법인데
사우디아라비아보다도 더 많은 양의 에너지가 저장이 돼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개발하게 되면 미국은 에너지를 수입할 필요가 없어지고,
오히려 수출하는 국가가 될 수가 있고, 가장 타격을 받는 나라는 러시아가 될 것이고,
중국은 결코 미국을 경제적으로 따라 잡지 못하게 될 것이고,
중동은 지금까지 산유국이라는 이유 때문에 세계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지만
장차 중동은 별 볼일이 없는 그런 지역이 될 것이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에너지의 분량이 수백 년은 갈 수 있는 분량이다라는 내용이죠.
과거에 누가 나라를 구했길래 이런 혜택을 입는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남의 일만 부러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기독교 국가가 돼야 됩니다.
대한민국이 하나님을 높여야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구해야 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니라" 구하는 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여러분 중에 아마 지친분이 많이 계실 겁니다.
직장에서 지치고, 가정에서 지치고, 심지어 신앙생활을 하다가도 지칠 수가 있는데
사람이 지치면 하나님이 지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지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졸지도 않으시고, 무엇도 아니하시니라?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니라"
우리가 힘을 얻는 길은 관광도 아니고, 휴가도 아니에요.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0장 말씀에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그냥 힘을 얻는게 아니고 새 힘을 얻으리니.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오늘날 새 힘을 얻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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