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에 성령이 임하다 행2:1-13 16.06.26.스크랩, 출처
오순절은 교회의 탄생일입니다. 물론 그전에 부활절도 있습니다.
그보다 이전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베드로의 고백과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기점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라는 한 공동체가 자체 조직을 갖추고, 또 그 공동체가 추구하는 분명한 비전을 담고서,
세상을 향하여 공개적인 활동을 시작한 날을 한 조직의 탄생이라고 본다면
교회의 탄생일은 오순절이 맞습니다.
◑성령은 계속 임하십니다
교회의 출발을 가능하게 했던 사건은 내적인 각성이 아니라 외부적으로 주어졌습니다.
바로 성령의 강림이었습니다.
열두 사도와 함께 120명으로 구성된 교회 공동체가 이른 아침에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위에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 소리가 다락방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어서 불이 혀처럼 갈라지며 각 사람 위에 임하였습니다.
강한 바람, 소리, 불 모두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이 모습은 마치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임재 하시던 때를 연상하게 만듭니다.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19:18-19)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탄생했듯이
이번에는 성령이 임재하심으로써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를 탄생시켰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이 거룩한 영이 임했다는 것은
그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임재는 교회가 한낱 인간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약속하신 그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이제는 민족 단위인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입니다.
▲성령은 그래서 오순절에 한 번만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의 한계에 부딪칠 때마다 임하셔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 말은 행2장의 성령의 단회적 임재의 그 의미를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 중대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성령이 그 후로 계속 임하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 강림 외에도 세 번이나 더 보도되고 있습니다.
먼저는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이곳에 빌립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도 믿는 자들의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이곳을 방문해서 안수 기도하자 성령이 임했습니다.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더라.
이에 두 사도가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8:16-17).
사마리아는 이스라엘에서는 버림받은 민족으로 취급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마리아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으셨다는 사인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자 성령이 임했습니다.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10:44-45)
할례 받은 신자 곧 유대인들이 놀랐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죄인들로 생각했던 이방인들에게도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이방인의 오순절이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는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받으셨습니다.
인간의 편견과 한계를 돌파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세 번째 성령의 임재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던 자들에게
주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때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19:6)
이들은 세례 요한의 증거를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소종파주의자들입니다.
정통신앙에서 벗어난 자들입니다. 이들이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였을 때
이들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사인으로서 성령이 임했습니다.
인간은 가르고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경계를 뚫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에만, 초대교회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2천년 교회사를 통하여,
또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임을 확증하기 위해서 임재하십니다.
구약이 성부의 시대요, 시간의 중심에 성자 하나님의 시대가 있었다면,
오순절 이후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 함께 하십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성령의 역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성령의 축’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성령의 축은 곧 선교의 축입니다. 지구를 한 바퀴 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그리스로, 로마로, 영국으로, 아메리카로, 태평양을 건너 한국으로,
이제는 중국을 넘어 중앙아시아와 회교권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땅 끝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그 선두에 성령 하나님이 계십니다.
▲교회사에서 우리의 신앙이 식어갈 때 성령 하나님은 어김없이 임재하여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중세의 수도사들에게, 성 프란체스코에게, 종교 개혁기에는 루터에게, 퀘이커 교도에게,
감리교 운동을 이끌었던 요한 웨슬리에게 임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개인적으로는 올더스게이트라는 곳에서 회심의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에 페터레인이란 곳에서 철야기도를 하다가 강력한 성령체험을 합니다.
1739년 1월 1일자 웨슬리의 일기입니다.
“미스터 홀, 킨친, 잉함, 휫필드, 허친스, 그리고 나의 동생 찰스가
우리의 형제(모라비안) 60여 명과 함께 페터레인 애찬회에 참석하였다.
끊임없이 기도하기를 새벽 3시까지 계속하였다.
그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강하게 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놀라운 기쁨으로 소리쳤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러졌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경외와 놀라움으로 사로잡힌 우리는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 하나님, 우리는 당신을 찬양합니다. 오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성령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사건과는 별개로 성령의 충만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주님은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했을 때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능력 있는 사람들로 세상에 드러났습니다.
성령 충만할 때 능력 있는 삶,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위에도 이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 각 사람들도 이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방언으로 말함
성령이 임했을 때 함께 동반되던 대표적인 현상이 바로 방언입니다.
4절 말씀입니다.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다른 언어가 곧 방언입니다.
이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 이후에 언급하고 있는 신비적 방언과는 다릅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통역이 필요했습니다.
아마 황홀경이나 무아경 속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신비적인 말이었을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풍미한,
의식이 뚜렷한 상태에서 하는 방언과도 약간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순절에 터진 방언은 이처럼 뜻을 모르는 방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나라 언어였습니다. 이는 6절의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8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여기서 분명히 ‘자기 나라 언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에는 천하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듭니다.
노년에 예루살렘에 와서 정착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자기들이 살던 민족의 언어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외국어를 전혀 모를 것 같은 사람들의 입에서 그런 외국어가 흘러나오니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7) 고 반문한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때 ‘방언 통변이 임해서 알아들었다’고 해석합니다
.
그것은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적 방언으로는 복음을 알 수 없습니다.
자기 나라의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어야 이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출범하자마자 그 복음을 이미 땅 끝까지 선포했습니다.
9절부터 11절까지 나와 있는 민족 명단이 그렇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방언은 2장이나 그 후에나 똑같은 본질의 방언인데,
행2장에서 16개지역 사람들이 알아들은 것은, ‘방언 통변’이 그들에게 임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죠.
성령의 능력이 이처럼 방언의 형태로 나타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동쪽 끝인 야만인들의 땅인 바대와 메대로부터 서쪽 끝이며
로마제국의 심장인 로마까지 언급되고 있습니다.
비록 이들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이지만, 복음은 첫 순간에 이미 땅 끝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수도 로마에는 복음이 전파된 적이 없지만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을 환영하던 신앙인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가 복음을 믿게 되었던 자들이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성령강림이 오순절과 연결된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오순절을 처음에는 맥추절, 칠칠절이라는 봄 농사 축제로 지켰지만
이후에는 오순절을 율법을 받은 날로 기념했습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날이며 이때가 유대력으로 정월 14일입니다.
이들이 애굽을 나와서 시내 산에 이른 것이 삼월이었습니다(출19:1).
그러니 대충 따지면 오순절 무렵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십계명 율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대 미드라쉬의 해석에 의하면 시내 산에서 율법이 주어질 때
당시 세계의 모든 언어라고 생각했던 70개국의 언어로 선포되었다고 합니다.
율법은 모든 백성들이 들어야 될 생명의 말씀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오순절의 방언은 복음 선포의 의미가 있습니다.
전 세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부활과 주되심을 각국 언어로 선포한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민족과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바벨탑 이후 흩어졌던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 아래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던 민족들이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있습니다.
같은 나라 방언을 쓰고 있지만 서로 통하지 않고 대화가 단절 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복음이 그 담을 무너뜨리고 서로를 통하게 합니다. 하나 되게 만듭니다.
◑놀람과 술 취함
성령이 임했을 때 세상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첫째는 놀람이요
둘째는 술 취했다는 비난이었습니다.
이는 성령이 임재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보였던 공통적인 반응은 놀람과 두려움이었습니다.
7절입니다. “놀라고 기이히 여기다”
12절입니다. “놀라고 당황하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세상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놀라는 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매일 놀라고 당황해야 합니다.
칼 바르트라는 대신학자는 신학자를 신학자 되게 만드는 첫 번째 요소는
놀람이라고 하였고, 두 번째 요소가 당황이라고 하였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깨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칼 바르트는 놀람을 잃어버린 자는 신학자이기를 포기하라고 경고하기조차 합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렘 3:22-23)
예레미야는 자기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이것을 깨닫고는 자신의 놀란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온통 기적으로 가득 차 있는 이유는 우리를 놀라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육체의 한계와 피상성을 뚫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기적이라는 형식이요 우리는 그 기적 앞에 놀라고 당황합니다.
기적을 선포하지 않는 설교는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연성에 위기를 가져옵니다.
성령에 취한 초대공동체를 향한 세상의 판단은 “새 술에 취하였다”(13)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지금은 아침 아홉시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정말 취한 사람과 같습니다.
취한 사람은 용감합니다. 담대합니다. 말이 많습니다. 즐겁습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봅니다.
그는 갈릴리 시골 사람입니다. 학문을 배우지 않은 범인입니다(4:13).
예수님이 체포당하던 때는 어린 계집종 앞에서도 두려워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수천 명이 모인 사람들 앞에 담대히 섰습니다.
그가 설교를 하는데 구약 말씀을 유창하게 인용합니다.
취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성령에 취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면 담대해집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열정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열정이라는 단어는 엔쑤지애즘(enthusiasm)입니다.
이 단어는 안에(en-) 신을 모시고(thus-) 있다는 뜻입니다.
신을 내 안에 품고 있을 때 우리는 주체할 수 없습니다.
취한 사람처럼 뜨겁고 담대해집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며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20:9)
내 안에 불이 있는데 어찌 잠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지식입니까? 몰라서 못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족한 것은 열정입니다.
우리에게는 필요한 것은 불입니다.
성령에 취한 사람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습니다.
행동하지 않고는 답답하여 참을 수 없습니다.
어떤 위력이나 장벽도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성령에 취한 사람은 또한 즐겁습니다.
13절에 “새 술에 취했다”라고 할 때의 ‘새 술’이라는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헬라 어로 ‘글뤼코스’입니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바로 글루코오스 라는 ‘단당류’입니다.
영어로는 ‘sweet new wine’입니다. 달콤합니다.
새 술에 취한 사람은 즐겁습니다. 사도행전에 가득 찬 것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2:26)
기쁨으로 재산을 나누었고 늘 함께 모였습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2:46-47)
핍박을 받아도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도들을...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5:39-40)
성령은 우리를 달콤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즐겁고 기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글루코오스입니다.
이 영으로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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