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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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TTS (Text To Speech)로 스크랩, 녹음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편.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왜 심판을 하실까요?
용도가 다 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심판해야 하는 이유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는 내용입니다.
그 심판의 내용은 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곧 이 세상의 모습이 애굽과 그 성격이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심판 당하는 이유를, 구약의 애굽을 통해서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애굽을 심판했나요?
그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계16:6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하더라”
저희란? 큰 의미에서는 이 세상 전체를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교회에 주신 말씀이므로 거짓 교회의 심판을 말합니다.
영적인 의미에서는 사단의 세력입니다.
교회사 적으로 말하면 복음을 방해하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입니다.
이들이 누구를 죽였나요?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심판의 성격은, 하나님이 그 아들들의 죽음을 원수 갚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왜 내 아들들을 죽였느냐고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을 왜 심판했나요?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다짜고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하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한꺼번에 쏟지 않았습니다.
순차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회개치 않았어요.
이는 그들의 완악 함들을 고발하기 위함입니다.
바로를 일컬어 “강퍅하다” 고 합니다.
강퍅이란, 고집이 세고 목이 곧은 것을 말합니다.
말을 안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재앙을 당하여도 회개치 않는다고 합니다.
꼭 구약의 바로 왕과 같습니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으로 그렇게 혼이 나고도 고집을 피우다가 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로의 손에서 빼냈는데도
바로는 끝끝내 쫓아와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붙잡아서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자기 종노릇을 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홍해에서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바로는 고집으로 결국엔 죽음으로 그 값을 치루고 만 것입니다.
왜 바로가 그렇게 고집을 피웠을까요?
이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였습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무시하고 대적한 것입니다.
▶보통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보고 ‘고집이 세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왜 부모의 말을 안 듣습니까?
부모를 우습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왕 노릇하고 싶어서입니다.
그것이 고집피우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를 낳아준 부모라 할지라도 나를 간섭하면 싫어합니다.
이것이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않고 대적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바로 죄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면 다냐? 날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 라는 것입니다.
이걸 목이 곧다고 합니다.
죄가 뭐냐?
불순종입니다.
왜 불순종하나요?
자기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적은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 생각을 갖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자로 서 있게 됩니다.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은 자기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들 생각으로는 광야 길을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광야 길을 가면서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 뜻과 충돌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바로만 강퍅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강퍅합니다.
우리도 한 고집을 하잖아요.
▶바로는 회개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은 회개 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둘 다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서 하는 짓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 나와서 하나님을 원망한 자들을 향하여
“너희는 애굽의 바로처럼 열 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한 자” 라고 합니다.
이는 바로와 같이 회개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란? 단순하게 “내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울고불고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니에요.
물론 울면서 잘못을 뉘우치는 것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본질적 의미는 “가던 길에서 돌아오는 것” 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 집 밖에서 가슴치고 통곡하는 것이 아니고,
수치를 무릅쓰고 “아버지 잘못 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라고 아버지 앞에 와서 무릎 꿇고 자기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탕자처럼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함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처럼 죽어도 자기 자존심을 챙기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죄인은 본질적으로 회개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게 해 주셔야지만 가능합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종자들이 아닙니다.
죽어도 안 돌아옵니다.
이게 죄인의 특징입니다.
우리는 회개하라고 하면 내가 돌이킨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우리는 자발적으로 돌이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강제로 돌이키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간섭하는 것이지,
우리가 알아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출애굽 하였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이스라엘은 출애굽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습니다.
애굽에 내려지는 열 가지 재앙을 뻔히 보고도 애굽을 나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자발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강제로 하게 하시기 때문에 요만큼이라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의 본성은 하나님을 싫어해요.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불편해요.
그래서 틈만 나면 호세아의 아내 고멜처럼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신랑 되신 하나님을 버리고 외간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떠날 때마다 하나님은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끝에는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가 나와야지,
“하나님 나 잘했지요“ 가 나오면 안 되어요.
그게 바로 목이 곧은 것입니다.
▶성도라고 해서 세상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을 우리도 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짓을 우리도 하고 있습니다.
경중을 따지면 도낀 개낀이에요. 즉, 거기서 거기에요.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성도를 달리 대우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가 뭔가요?
정체성입니다.
살아가는 삶에 지향성이 다릅니다.
소속이 달라요.
신자나 불신자나 살아가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에요.
크게 다르지 않아요.
한 가지 다르다면 살아가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가치로 살고, 불신자는 땅에 가치로 삽니다.
신자는 말씀이 양식이고, 불신자는 떡이 양식입니다.
신자에게는 떡이 부분이지만,
불신자에게는 떡이 전부이고 생명이에요.
하지만 신자라 할지라도 떡을 먹어야 사는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한은
육신의 소욕이 몸을 주장하고자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자들 안에서는 늘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일컬어 ‘가나안 전쟁’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가나안 전쟁을, 영적으로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간의 전쟁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중심축을 이루면서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전쟁이 개인적으로는 성도 안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에덴동산을 떠나온 인간은 전쟁으로 역사의 장을 열게 됩니다.
전쟁이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두 민족이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 집안, 한 국가, 한 교회 안에 두 민족을 심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집안에서부터 출발을 합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그 형제들,
사울 왕과 다윗 왕,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오시자 예수님 편과 그 반대편으로 나타납니다.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으로 나누입니다.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로 나누입니다.
이것이 의의 싸움으로 나타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의냐!
인간의 의냐!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냐!
아니면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행함이냐!
언약 적으로는 옛 언약과 새 언약으로 나타납니다.
율법이냐!
은혜이냐!
우리 몸은 전쟁터에요.
오늘 살펴볼 <아마겟돈 전쟁>은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어요.
세상 전쟁을 통해서 영적 전쟁을 볼 수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영적인 의미로는 <아마겟돈 전쟁>이 어느 한 시대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부터 늘 있어 왔던 것입니다.
옛적에도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장차도 일어날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스라엘의 전쟁으로 나타났고,
신약의 교회사 속에서는 영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종말에는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영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신앙적 싸움으로 일어나고,
육적으로는 세상 전쟁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신앙적 전쟁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고수하는 신본주의 신앙과,
인간의 행함을 의로운 것이라고 하는 인본주의 신앙과 싸우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럼 <아마겟돈 전쟁>의 성격을 알아봅시다.
계9:14-15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말하기를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 하매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
마병대의 수는 이만만이니 내가 그들의 수를 들었노라”
하나님께서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만 만이나 되는 마병대가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을 16장에서 누구인지를 설명해 주는데 동방에서 오는 왕들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브라데 강이 마르자 동방에서 오는 왕들을 아마겟돈으로 모으지요.
동방에서 오는 왕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지요.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정학적 의미를 알면
동방에서 오는 왕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유브라데 강 저편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무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바벨론과 앗수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들입니다.
앗수르는 북쪽 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바벨론은 남쪽 유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 놈들이 종말에는 교회를 타락케 합니다.
그래서 종말에 교회를 타락케 하는 세력을 ‘바벨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7장에서 타락한 교회를 상징하는 음녀가 앉은 곳을 ‘바벨론’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교회가 바벨론 화 되었다는 뜻입니다.
마귀는 항상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어떻게 어지럽혔느냐 하면, 인간의 생각을 집어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게 하여서 망하게 하였습니다.
최초에 타락은 에덴동산에서 나타났습니다.
뱀이 여자에게 자기 생각을 심어서 선악과를 따 먹게 하였습니다.
이건 영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다가 뱀의 말을 섞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걸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하늘에 말과 땅에 말이 섞이면 홍수가 일어납니다.
마치 노아 시대처럼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여 홍수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이 합하여 일어난 홍수는 겉으로 나타난 것이고,
영적인 홍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혼인하는 것은, 궁창 윗물과 궁창 아랫물의 섞임과 같습니다.
이걸 요한계시록 17장에서는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은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고 하지요.
그러자 그 길로 동방의 왕들이 옵니다.
강이 마르니까 동방의 왕들이 쉽게 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동방의 왕들은 적그리스도 세력이에요.
교회 안에 적그리스도 세력들이 들어 와서 사단의 회를 만들어 버렸어요.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구별이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히브리인 조상이 되었습니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강을 건너온 자”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을 경계하는 것이 강입니다.
옛날에는 강을 두고서 서로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강을 건너 왔다는 것은 저쪽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종말에는 유브라데 강이 말랐다고 합니다.
강이 마르자 길이 생긴 겁니다.
그러자 강 저쪽에 있던 동방의 군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 민족이 하나로 섞이게 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유브라데 강은 에덴동산에서 흐르던 강입니다.
유브라데 강물이 말랐다는 것을 지정학적인 의미보다 영적인 의미로 접근을 하세요.
에덴에서 흐르는 네 강은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 문지방에서부터 흐르는 강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러면 에덴동산이 성전이 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장에서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라고 합니다.
생명수 하면 퍼뜩 떠오르는 게 있지요.
예수님이 수가성 여자에게 주고자 하신 물입니다.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그 생수의 강입니다.
예수님은 그 생명수를 성령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서 흐르는 생수는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성령이 어디에서 온다고 합니까?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온다고 하였지요.
이것이 창세기에서는 에덴에서 발원하는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유브라데는 에덴에서 흐르던 강물입니다.
그런데 그 강물이 말랐어요.
‘에덴에서 흐르는 물이 말랐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로 보면 영적 기갈을 당하였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의 심령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여야 하는데,
생수가 말라서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심령이 강퍅해지는 것입니다.
심령이 강퍅해지면 사람 노릇을 못하고 짐승 노릇을 해요.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고 심령이 강퍅해지면 이방인이 되어요.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기 몸뚱이 중심으로 살아가게 되어요.
이러한 상태를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말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늘에 가치로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몸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사는 자에요.
사람의 딸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이 땅에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하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왜 이 땅에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자기 몸을 위하여 살아가는 뱀의 후손들인 땅에 사람을 좋아 할까요?
이는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추상적이고 떡은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 거민들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우상이 땅에 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언약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늘에 것을 바라고 사는 자에요.
그런데 곁에 사는 이방인들을 보니까 눈에 보이는 땅에 것을 움켜쥐고 사는 겁니다.
쉬운 말로 손에 떡이 가득한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떡을 좇아가게 된 것입니다.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몸뚱이를 배부르게 해 주지 못해요.
몸뚱이를 배부르게 하는 것은 떡이지 말씀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녀도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으로 살게 되는 겁니다.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에 복을 주는 예수를 믿고 싶은 겁니다.
이 일을 누가 주도적으로 하는가 하면 사단의 종들이 해요.
▶오늘 본문을 봅시다.
계 16:12-16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
13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14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16 세 영이 히브리 음으로 아마겟돈이라 하는 곳으로 왕들을 모으더라.”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그러자 유브라데 강물이 말라 버립니다.
강물이 마르니까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지요.
동방의 왕들은 이스라엘의 적이에요.
신약식으로 말하면 교회의 적이에요.
교회의 적이 누구인가요?
마귀의 세력입니다.
뱀의 후손들입니다.
언제 뱀의 후손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활개를 치는가요?
말씀이 사라질 때에요.
성령은 반드시 말씀과 일을 하세요.
말씀이 사라자면 성령의 역사도 사라져요.
말씀이 사라지니까 교회 안에 각종 더러운 영들이 역사하기 시작을 한 겁니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귀신의 영이라고 합니다.
13절을 보세요.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지요.
더러운 영이란 말은 거룩한 성령과 반대 되는 말로서 거짓 영이란 말입니다.
악령이라는 뜻입니다.
계시록 13장에 용이 나오고, 짐승이 나오고, 거짓 선지자가 나오지요.
이 놈들이 무엇으로 미혹하던가요?
땅에 것으로 미혹해요.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 와서 무어라 하던가요?
“예수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살아야 할 것 아니냐!”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라고 하잖아요.
이 때 예수님이 어떻게 응수했나요?
“마귀야 내가 사는 이유는 세상에서 성공하여 영웅이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야!”
이걸 한마디로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땅에 짐승이 무엇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던가요?
이적으로 사람들 마음을 훔치는 겁니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제시한 이적이 뭔가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라는 거지요.
뛰어 내리면 누가 받쳐 준다고 하나요?
천사들이 받쳐 준다고 하지요.
이러한 것을 이적이라고 해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도 다 이적에 속한 것이에요.
여기에 누가 말려드는가 하면 말씀이 없는 자들이 말려들어가요.
육에 속한 자들이에요.
땅에 짐승이 이적으로 미혹해서 무얼 하던가요?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게 하고 666 짐승표를 받게 하지요.
666 짐승표로 무얼 하나요?
매매하잖아요. 떡을 사잖아요.
애굽의 열 가지 재앙 때 개구리가 어디에 들어가던가요?
떡 반죽 그릇에 들어가지요.
이것은 애굽의 양식을 말해요.
애굽의 양식을 한마디로 떡이에요.
그러니까 더러운 개구리 영들은 땅의 신인 뱀의 영인 겁니다.
뱀인 귀신의 영은 세상 것을 주어요.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
입에서 나오는 세상 것을 추구하는 기복주의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속에 진리의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둠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밤에 울어요.
개구리 영이 교회 안에 들어 왔다는 것은 교회가 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 가치로 가득 채워졌다는 뜻입니다.
성도 안에 하늘에 소망은 없고 땅에 것만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니까 세속주의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그러해요.
교회가 강도의 굴혈이 되었어요.
돈의 가치로 세워졌어요.
교회가 하늘에 가치를 버리고 세상 가치를 택하였어요.
말씀을 버리고 떡을 택했어요.
말씀을 버리자 기근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말씀을 버리니까 성령의 역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니까 마귀가 일곱 귀신을 데리고 진을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게 신약에서는 오늘 본문 다음 장에 이어지는
요한계시록 17-18장 음녀 이야기로 나타나요.
음녀가 음행의 포도주로 여황처럼 사치하고 연락을 누렸는데
하나님께서 맷돌을 바다에 던지듯이 일순간에 멸망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자 거기에 빌붙어서 왕 노릇하던 자들이 애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일곱 대접으로 심판하는 것이
다음 장인 음녀의 심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싸웠어요.
마귀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혹하여서 타락케 하였거든요.
그래서 종말에도 하나님은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밖은 이미 심판을 받은 자들이에요.
하나님은 거기엔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자기 백성들이 있는 교회에 관심이 있어요.
그러니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아마겟돈 전쟁>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종말에는 세상에 큰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적인 전쟁이고 영적 전쟁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혼합주의 적그리스도 세력과의 전쟁이에요.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 안에 있는 세상 가치관과의 전쟁이기도 해요.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벌리는 전쟁인 겁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말씀의 전쟁이에요.
◐아마겟돈 전쟁의 예표인, 갈멜산 대결.
아마겟돈이라는 말은 “하르 므깃도” 라고 하는데,
“하르”는 “작은 산”을 의미하는데 이는 “므깃도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므깃도 골짜기에는 늘 전쟁을 하였어요.
그래서 므깃도 골짜기를 전쟁의 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여기에 유명한 전쟁이 있었어요.
바로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간에 참 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갈멜산 전투입니다.
엘리야와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 850명과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이 전쟁은 신앙의 전쟁이에요.
누가 섬기는 신이 참 하나님인지를 드러내는 전쟁이에요.
그러므로 이 전쟁은 종말의 영적 전쟁을 예표 하는 전쟁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전쟁이에요.
아합은 이스라엘 제 7대 왕으로 북이스라엘 왕조 가운데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에요.
아합은 국내외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기 위해
이방나라인 시돈 왕 엣 바알의 딸 이세벨과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였어요.
시돈 왕 엣 바알은 바알과 아스다롯의 제사장을 겸임한 자에요.
엣 바알이란? “바알의 사람”이란 뜻이에요.
그런데 아합이 그의 딸 이세벨을 왕후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이건 여호와의 신앙을 버린 것과 같은 것이에요.
이게 이스라엘을 타락케 한 원흉이에요.
이세벨이 시집을 오면서 그가 섬기던 신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이 때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데리고 오면서
그들이 섬기던 신인 바알 신상과 아세라 목상을 가지고 와서 아합으로 하여금 경배케 했어요.
이 때 이스라엘의 궁중의 거짓 선지자들이 그들과 합류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를 친근하게 하려고
바알의 이름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여호와 신앙에 섞어 버린 것입니다.
백성들에게 바알을 섬기라고 하면 안 섬기니까,
바알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둔갑을 시켜 놓은 것입니다.
껍데기는 하나님이고 그 속은 바알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을 섞어 놓은 겁니다.
성질이 다른 것이 섞이면 타락해요.
짝퉁 신앙이 되는 겁니다.
이 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건 영적으로 혼합주의가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아합이 화가 나서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비가 오지 않은 것은 당신이 이방 신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누가 진짜 신을 섬기는지 내기를 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몽땅 갈멜산으로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와서 그들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라고 합니다.
자신은 여호와께 제사를 지내겠다고 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누가 진짜 하나님의 종인지를 알려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에게는 너희가 언제까지 두 사이에 머뭇거릴 것이느냐?
여호와를 택하든지 바알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각 자의 방식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먼저 바알 제사장들이 자기들 방식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하루 종일 제사를 지냈는데도 소식이 없는 겁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입니다.
엘리야는 먼저 무너진 단을 수축합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이건 백성들의 여호와를 섬기는 신앙의 형식이 다 무너졌다는 뜻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여로보암이 북쪽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예루살렘과 다른 짝퉁 신앙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도 날아가요.
형식은 그릇과 같아서 형식이 무너지면 내용을 담을 수가 없어요.
그럼 외식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은 형식과 같아요.
은혜를 담는 그릇이에요.
은혜는 반드시 율법을 통해서 드러나요.
그러므로 율법과 은혜는 짝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는 버려야 하지만 율법은 버려서는 안 되어요.
법이 없으면 은혜도 사라져요.
이 시대 왜곡된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신앙의 형식을 다 버리고 있어요.
교회의 모임도, 교회의 봉사와 헌신도, 헌금도 다 버렸어요.
복음 아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해요.
그러다 보니까 이방인과 같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너지니까 삶이 육신의 편안함을 쫓아가는 방탕과 방종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건 바알 신앙과 같아요.
그래서 엘리야가 무너진 단을 수축하는 겁니다.
그리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서 엘리야의 제단에 제물들을 다 태운 겁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것은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바알이 하나님이냐!
여호와가 하나님이냐! 입니다.
누가 진짜 하나님인지 알라는 것입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둔갑을 시켜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바알로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
바알이 어떤 신인가요?
풍요와 다산을 주는 신이에요.
쉬운 말로 이 땅에 복을 주는 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겼다는 것은, 이 땅에 복을 추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알 선지자들을 저 절간의 중들로 생각하지 마세요.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산다고 가르치는 교회 안에 있는 거짓 목사들이에요.
거짓 목사들은 우상 숭배적 신앙을 가르쳐요.
우상 숭배적 신앙이란? 무얼 얻기 위하여 신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신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신과 거래하는 것이에요.
거짓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하나님을 이 땅에 복을 주는 신으로 가르쳐요.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 자들이 다 바알 선지자들이에요.
이런 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바로 개구리 영이 하는 말이에요.
귀신의 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제단에 불을 내림으로써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그러자 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너희를 거짓 것으로 가르친 바알과 아세라의 거짓 선지자들을
기손 시내로 데리고 가서 다 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동안 비가 없어서 타 죽어가던 초목들이 생명을 얻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엘리야가 백성 들 속에 있는 거짓 신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자 가물어 메마른 심령에 은혜의 단비가 부어진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의 회복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종말에도 두 증인들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타락된 교회로 나아갑니다.
가서 땅에 거하는 자들과 전쟁을 합니다.
두 증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예언을 한다는 것은 회개 운동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죽인 기손 시내가 바로 므깃도 골짜기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유브라데 강이 마르니까 동방의 왕들이 아마겟돈으로 모이는 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을 심판하는 갈멜산 전투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의 왕들을 하나님의 큰 잔치를 위하여 모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의 전쟁은 영적 전쟁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 종말에 일어날 <아마겟돈 전쟁>의 성격을 알 수가 있겠지요.
타락한 교회와 싸우는 것입니다.
세속주의 신앙과 싸우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뭐라고 했나요?
자기만 남고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을 쫓고 있다고 했지요.
이는 그 당시 백성들의 신앙관을 엿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타락을 했나요?거짓 선지자들 때문이에요.
교회의 타락은 항상 목사들 때문에 일어나요.
교인들은 어떤 목사를 따르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질이 결정이 되어요.
땅에 속한 목사를 만나면 땅에 것을 추구하고,
하늘에 속한 목사를 만나면 하늘에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땅에 속한 자들은 땅에 속한 목사를 만나게 하고,
하늘에 속한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목사를 따르게 하였어요.
유유상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종자가 달라요.
양과 염소는 종자가 달라요.
이처럼 하늘에 속한 성도와 땅에 속한 교인은 그 종자가 달라요.
하늘에 속한 성도는 땅에 말을 하는 목사를 따르지 않아요.
반대로 땅에 속한 교인은 하늘에 속한 목사의 말을 따를 수가 없어요.
이건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하지요.
타인의 음성은 목자가 아니므로 듣지 않는다고 하지요.
엘리야가 뭐라고 했나요?
자기만 남고 온 이스라엘이 다 바알을 쫓고 있다고 합니다.
이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던가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남겨진 7천 명이 있다고 하지요.
이들은 거짓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자들이에요.
그래서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남겨진 것이 이들의 실력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것입니다.
종말에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교회가 다 타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남겨진 자들이 있어요.
큰 교회 숲에 숨어 있으니까 미미하여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에요.
P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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