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종교, 구원자 눅10:30~37 출처 164강
The Robber, Religion and the Redeemer_ Jentezen Franklin
저는 오늘 세 가지에 대해 나누기 원합니다.
강도와 종교, 그리고 구원자에 대해 말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탕자의 이야기와 연관시켜 하나의 큰 그림으로 보기 원합니다.
복음을 새롭게 체험하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먼저 강도가 상징하는 바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야기에 나온, 여리고로 내려가던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거의 죽은 채로 놔두고 가 버린 강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강도는 죄를 상징합니다.
*저는 처음 듣는 해석이네요. 상징적인 해석 말입니다.
아래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를, 선한 사마리아인은 복음, 구원자를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요 10:10)
죄는 여러분의 잠재력을 앗아갑니다.
여러분의 관계를 파괴하고 삶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굉장한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죄악된 습관에 중독되면,
그들의 삶에 안 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굉장히 좋은 기회와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순간들이 있었는데
우리의 ‘죄’라는 도적이 쳐들어옵니다.
마지막 줄을 유심히 보십시오.
도둑은 멸망시키려 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우리는 어떤 생각을 심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계속해서 머리에 심습니다.
죄는 언제나 하나의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잠언 23장 7절을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즉, 어떤 생각을 계속해서 심으면 그에 따른 행동을 거둡니다.
아주 오랜 시간 생각하면, 이제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어떤 생각을 품고, 그 옳지 않은 생각에 계속해서 머물면
결국 어떤 행동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을 계속해서 행하게 되면 습관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세워진 습관은 나쁜 인격을 형성하게 됩니다.
나쁜 인격은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칩니다.
생각에서 행동, 행동에서 습관, 습관에서 인격.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거나, 심지어 파괴하기까지 합니다.
죄가 처음에는 기분이 좋고,
나빠 보이지도 않고, 재미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죄는 강도와 같습니다.
죄는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갑니다.
그리고 첫 번째로 우리의 인격을 앗아가려 합니다.
두 번째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떳떳함입니다.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요일 3:21)
▶우리는 이 이야기의 다른 인물들을 보게 됩니다.
그 남자가 땅에 누워 있을 때, 자신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둘은 검은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이고, 다른 사람은 구약 율법에 있어 전문가인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상징합니다.
이 둘은 피를 흘리며 반 죽어있는 그를 봤습니다.
레위인과 제사장은 그를 보고 피해 지나갑니다. 그를 피해서 옆으로 말입니다.
이 둘은 회당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한 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둘은 아마 저녁에 강의하기 위해 회당으로 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종교는 우리가 정말로 궁금해 하는 것들에 관해서는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의 실제적인 아픔과 필요는 피하며
마치 실제적이지 않은 것처럼 태도를 보입니다.
여기 한 남자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종교는 그를 지나쳐 갑니다.
그 강도만난 사람은 속으로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종교는 여러분을 지나쳐 갈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고통받고 상처받은 가난한 이들,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주위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못 본체 하는 사람은, 종교인인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누구를 도와줄 만한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격이 있는 자들을 쓰시지 않고,
기꺼이 순종하여 행하는 자들에게 자격을 주십니다.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는 자들을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시고, 그 위에 은혜를 부으시고
이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행하기에 충분합니다.
▶내가 남의 불행에 관여하기 싫은 이유들을 어떻게든 찾고자 한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문이, 바로 여러분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는, 굳이 자기가 관여하지 않아도 될 일을.. 찾아서 했습니다.
굳이 자기가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을.. 자원해서 나선 것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이요, 복음에 순종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남의 일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사람은, 사실은 종교인인 것입니다.
그는 관여하기 싫다면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 일을 했죠.
1) 첫 번째로 그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다친 자에게 마음이 이끌렸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위생병들은
전장에서 자신이 치료하는 아프가니스탄 병사의 눈을 보지 못하도록
훈련시킨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객관성을 약화시키고, 효율성을 떨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리를 두고, 순수 의학적인 관점에서 보고
그곳의 모든 사람이 의학적 도움을 필요로 하니
한 사람에게 너무 감정적으로 밀착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은 이와 정반대의 태도를 취합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을 보자
말씀에 의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느꼈습니다.
2) 두 번째로는 면허 없이 의학적 치료를 행했습니다.
그가 진짜 의사였는지는 모르지만,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부었습니다.
응급조치를 취한 것인데, 사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죠.
그렇지만 요즘 같은 세상에선 조심해야 합니다. 불법의료행위가 될 수 있으니까요.
어쨌거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떤 리스크를 무릅썼다는 것입니다.
그 강도만난 자, 길바닥에 쓰러져 피흘리는 자가
기름이나 포도주에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어떤 것이든 시도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몇몇 분들은 어떻게든 변명만 하려 합니다.
"우리가 깨어진 사람들을 돕지 말아야 할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어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
3) 세 번째로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옮겼습니다.
오늘날 아주 기초적인 의학적 지식에 의하면,
결코 다친 사람을 옮겨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혈전으로 인해 다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죽은 사람의 가족이 여러분을 고소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에 끼어들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로 가는 길에 그런 상황을 만나면
피해 지나가라고 합니다.
4) 네 번째로 사마리아인은, 다른 사람의 빚을 본인이 감당합니다.
다친 사람이 회복되기까지는 엄청난 금액이 필요할 텐데
사마리아인은 그가 치러야 할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구약을 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빚을 대신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빚보증을 서지도 말라고 하셨죠.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그는 영적인 모습으로 자신이 왜 이 일에 관여하면 안되는 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먼저 그 구원자는 그가 있던 곳으로 왔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회복되는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즉 선한 사마리아인은, 복음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것은 너무나 아름다운 이야기이며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와 아주 적절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잠시 탕자의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집을 떠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흥청망청 낭비합니다.
죄의 쾌락에 빠져 살아갑니다.
결국 오물로 가득한 돼지우리에서 살게 됩니다.
깨어지고 좌절한 채 말입니다. 피를 흘리며 깨어진 채 말입니다.
지금 본문의 ‘강도 만난 자’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여리고로 떠났습니다.
여리고는 저주받은 곳이었고, 예루살렘은 축복받은 곳이었죠.
이 두 이야기의 유사점이 보이십니까?
그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결국 돼지우리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다 부서졌습니다.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 집으로 가겠어.
다시 나의 집으로 가야겠어. 아버지가 나를 아들로 받아주실 것은 기대하지 않아.
그저 아버지 집의 하인으로라도 지낼 수 있다면...
하루 세끼를 먹고 나를 덮어줄 지붕만 있어도 지금 내 삶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그렇게 그는 다시 집으로 향합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꼭 깨달으셨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돼지우리에 살던 소년에게 말입니다.
여기서 질문하겠습니다. 왜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에게로 달려갔습니까?
여러분이 결코 잊지 몰할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저 또한 결코 잊지 못합니다.
케자자 kezazah라는 것이 있습니다.
"단절의 의식"을 뜻합니다.
구약 시대에 탕자와 같이 유산을 가지고 집을 떠난 자가
유산을 모두 낭비할 경우 탕자는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법을 어겼으며 온 마을을 욕되게 했습니다.
만약 그렇게 행한 자가 고향으로 돌아오고자 하면
마을의 장로들과 주민들은 마을 입구에 섭니다.
모두들 항아리를 손에 들고 한 곳에 모입니다.
그러다가 탕자가 마을에 가까워지면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장로들과 주민들은
탕자 앞에서 항아리를 땅에 던져 깨뜨렸습니다.
그에게 이런 메시지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너는 우리와 단절되었다. 이곳에 네 자리는 없다. 아무런 권리도 없다.
너는 이 마을을 욕되게 했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어겼으니
네가 이 마을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너를 돌로 쳐 죽일 것이다."
돌아온 탕자는 다시 떠나는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 죽으니까요.
자 그럼 다시 탕자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왜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달려 나간 것입니까?
아버지는 예복을 걷고 뛰쳐나갔습니다.
"장로들과 마을 주민들이 법으로 그에게 닿기 전에
내가 먼저 사랑으로 아들을 맞이해야겠다.
아들에게 심판이 내려지기 전에 내가 은혜로 먼저 가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달려나간 것입니다.
아버지는 달리기 위해서, 자신의 옷을 걷어 올렸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부끄러운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자신이 감당한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 나갔고,
성경을 보면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아들을 입혔습니다.
아들이 목욕을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여하튼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더럽고 추한 것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종은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지만
한 집안의 아들들은 신을 신었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얼른 신을 가져오라 해서 신깁니다.
"너를 다시 나의 아들로 받아들인다."
아들의 과거를 덮어주며 다시 아들로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내가 아직 너를 사랑한다. 너는 우리 집안에 속한다.
네가 실수하고 잘못한 것은 알지만 너는 아직 내 아들이다.
너를 다시 내 아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에 가락지를 끼웁니다.
아들에게 은사를 다시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못했을 경우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여러분은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은사를 다시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한 번 상상해 봅니다. 탕자가 마을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서
장로들이 항아리를 깨려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탕자를 배척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탕자는 아버지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신과 가락지를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버지는 또 놀라운 이야기를 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저는 농부가 아닙니다. 그러나 살진 송아지에 대해 이것은 알고 있습니다.
송아지는 하루 만에 살진 송아지가 되지 않습니다.
살을 찌게 만들려면 아주 오랜 시간 여물을 줘야 합니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여기서 아버지가 말하는 의미를 되새겨 보십시오.
"아들아, 네가 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때 나는 네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때 나는 송아지에게 여물을 먹였다.
'아들이 곧 올 거야.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 꼭 올 거야.
나는 기다리고 있을 거야. 계속해서 믿으며 놓지 않을 거야. 꼭 집에 올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송아지를 계속 먹였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우신 구세주입니까! 할렐루야!
은혜로 인해 아직 주님과 이어져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회복시켜주시고 기름과 포도주를 부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고후 5:21)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을 죄로 삼으셨습니다.
한 번역본에 따르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죄가 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여러분과 제가 저지른 모든 죄를 짊어지고 계셨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저지른 모든 죄 말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모두 예수님께 부으셨고
예수님이 우리의 죄가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은 31번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입니다. 31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달 내내, 우리는 매일 한 번씩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묵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보며 기억하십시오.
내가 기분이 어떻든, 어떤 행동을 했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입니다.
나의 죄가 씻겨지고, 아들 됨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과 가락지를 받았으며
주님께 용서받았고 회복되었음을 말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주시고 우리 빚을 청산하셨어요.
잠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빚을 청산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설교하면서 제가 행복해지네요. 여러분이 어떤 구원을 얻으셨는지 아시나요?
여러분이 하나님께로 회복되었음을 아십니까?
여러분의 노력과 행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의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거두신 것입니다.
아버지가 여러분의 부끄러움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죄가 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왜 구세주가 필요한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는 과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죠.
그러나 주님은 그리 하실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과거로 돌아가 어제의 죄를 말끔히 씻기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 아십니까?
예수님 없이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순간
언제나 동일하신 그분이 어제의 죄를 해결해주시고
현재에는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우리의 미래를 인도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고 씻김을 얻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습니다. 결코 죽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을 때 우리의 생명은 영으로서 계속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영생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저는 결혼할 때 서약했습니다.
"예"라고 대답했지요.
모든 사람은 아내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도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입으로 시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예수님은 두 팔을 벌리고
우리에게 입으로 서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이 입으로 시인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택하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씻기고 받아들이시겠다고 서약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팔을 벌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어디서 저를 보고 계시든 감옥이든 병원이든 집에서든
여러분이 어디 있든
예수님은 당신의 보혈을 통해 여러분의 과거와 현재를 치유하시고
여러분의 미래를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목사님, 변화가 필요합니다. 용서가 필요합니다. 새롭게 변화하기 원합니다."
이렇게 고백하시는 분,
또 어떤 분은 지금 중독이나 어떤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마음에 임하시면 모든 것이 변하게 됩니다.
지금의 엉망인 상황으로부터 기적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이 믿음으로 한 걸음씩 인도하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예수님은 이미 두 팔 벌리시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이 바로 그 기회입니다.
우리 함께 소리 내어 다음과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 제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오직 주님만 믿습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보혈이 나를 씻깁니다.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예"라고 대답합니다. 입술로 시인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왕, 나의 주, 나의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DNA를 제게 부어주십시오.
예수님의 DNA가 나의 중독을 이겨낼 것입니다.
예수님의 DNA가 나의 과거를 극복할 것입니다.
내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극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DNA가 나의 죄를 이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타자 K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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