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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펄전의 생애와 설교 P1

LNCK 2016. 9. 2. 09:53

찰스 스펄전의 생애와 설교 P1             6:55, 6:16                출처보기

 

서문강 목사님 강의를 녹취, 정리했습니다.

 


서론 /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고전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

 

하나님이 교회사 중에서 당신의 이름과 나라와 뜻과 영광을 위해서 쓰셨던

설교자들을 알아보고, 그리고 그들의 설교를 살펴보는 일은,

정말 우리에게 대단히 긴요한 일입니다.

 

오늘날 설교자의 권위와 설교의 중요성이

여타 다른 일에 점령당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설교자나 회중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태연해하며

그 다른 일에 분주하고, 또한 몰두하고 있는 기막힌 시대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Preaching and Preachers

   *참고로 이 책은, 1971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트 신학교에서

   로이드존스 박사께서 설교론 특강을 연속적으로 하신 것을 녹음, 녹취해서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이 책의 1장에서, ‘설교의 우위성을 강조합니다.

교회가 해야 될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설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설교하는 일은 설교자만 하는 일입니까?

회중들도 같이 하는 일입니까?

회중들은 가만히 앉아서 설교를 듣고, 연극장의 관객처럼 앉아서 구경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아닙니다. 설교는 설교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 속에서, 설교자가 교회를 대표해서 설교를 하는 것이고,

설교를 할 때 성도님들도 그 설교자와 함께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설교시간에, 말로 아멘을 하든지, 마음속으로 아멘을 하든지

그 설교 속의 진리를 아멘으로 함께 선포하는 것입니다.

회중들이 가만히 앉아 있지만, 사실은 회중들도 설교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설교자는 설교를 하고 있는데,

그 시간에 회중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딴 생각을 품고 있다면,

설교자의 메시지의 관점을 함께 공유하면서 청종하는 자세를 견지하지 못한다면,

이렇다면 회중들은 함께 설교하는 것이 아니겠죠.

 

그래서 저 서문강 목사도 교회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처음의 묵도부터 축도까지

구경꾼으로 참여하는 순서는, 한 순서도 없습니다.

나는 이 순서를 안 맡았으니까구경꾼으로 앉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이 기도할 때도, 장로가 혼자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회중들은 그 기도를 감상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장로는 회중들의 대표로 기도하는 것이고, 모든 회중들은 그와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회중들이 함께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의 자리를, 설교자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도 함께 지켜야 되고, 온 교회가 함께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잃어버리고 있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고 있지 않는 것처럼 태연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다른 일에 너무 분주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얼마나 설교자와 설교의 위치를 업신여기고 있는지를 알고

교회의 진정한 영성의 회복은, 바로 설교와 설교자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제자리를 찾게 하는데 있음을, 크게 외치기 위해서 제가 이 자리에서 강의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와 설교자의 위치를 다시 되찾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다울 수 없습니다.

 

진정한 영적인 부흥과 각성과 구원의 놀라운 일이

현저하게 드러난 '영광의 교회' 시대에는

반드시 신실한 설교자들과, 그들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교세가 대단한 시대라도, 진정한 영적부흥이 희소하였던 시대에는,

그만큼 기념할만한 설교자나 설교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중세 1천년의 장구한 세월속에서, 우리가 주목해보고 상기해볼만한 설교자는 누구인가요?

 

여러분, 중세시대에는 교세가 대단하고 어마어마했습니다.

당시 교세가 그 사회의 전 영역을 딱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에 가보면, 지금 시각으로 봐도 어마어마하니, 그 당시에는 얼마나 위세가 대단했겠습니까?

 

그런데 중세 시대에, 누가 설교를 잘했습니까?

여러분, 특별히 중세에 설교자로 기억되는 이름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중세시대에 교회의 세력은 대단했지만,

설교는 별로였다는 것이죠. 가톨릭교회가 원래 설교가 좀 약하기도 하지만요.

그렇다면 교세도, 외형적으로만 컸지

사실 그 영향력은 대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는, 그리도 사모하였던 부흥의 역사 속에

항상 바른 설교자와 진정한 설교를,

하나님은 보석같이 시대시대마다 박아놓으셨다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로이드존스 <부흥>이라는 책을 읽어보셨나요?

그 책에 보면, 부흥은, 그저 숫자가 많이 모이는 게 아닙니다.

회심하고, 영적각성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흥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사람은 다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는 것,

그래서 성령의 충만함과 복음의 영광속에서 거하고

 

생활이 변화되고, 삶의 방향이 자기를 위해 살다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영생 얻은 자로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사는,

그 성도들의 심령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런 변화가 띄엄띄엄 일어나는 게 아니라, 소낙비가 내리듯이

일정 기간 동안에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 이것을 로이드존스는 부흥이라 그랬습니다.

 

50년 동안에 일어나는 일을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면

불과 몇 개월만에 일어나버리는 이런 놀라운 역사,

이런 의미가 부흥입니다.

 

로이드존스는 이런 부흥을 늘 사모했고, 그렇게 정의했습니다.

교회성장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의 <부흥>이란 책에 수록된, 부흥에 대한 일련의 연속 설교를 보면,

진정한 영적인 각성과

부흥을 위해서 쓰임 받은 교회사 속에 걸출한 설교자들과 그 영향이

그 책에 계속 강조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바꾸시는데, 누구를 통해서 역사를 바꾸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정한 교회를 통해, 즉 진정한 설교자를 통해서 바꾸십니다.

 

종교개혁은,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를 바꾸시는데

설교자들을 세우셨습니다. 루터,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입니다.

 

우리는 칼빈 하면 신학자로만 알고 있지만, 원래 임무는 설교자였습니다.

설교자로서 신학을 연구한 것이죠.

이렇게 설교자가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로이드존스 목사는,

2천년 기독교회사 중에서 가장 영광스런 시대들에서

하나님이 세워서 쓰신 바른 설교자와, 설교와, 그 영광과 영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20세기에 세우신 설교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이드존스는 정규 신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신학교도 안 다녔는데, 어떻게 그는 그렇게 훌륭한 설교자가 되었습니까?

 

그는 교회사속의 설교자들을 독학으로 연구했습니다.

성경과 교회사 속의 영광의 시대(16세기 종교개혁, 17세기 청교도, 18세기 대각성 시대)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그때 나왔던 저작들, 그때 하나님이 쓰셨던 설교자들은

하나님이 말씀의 비밀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새롭게 하셨던 그 설교자들이 남긴 책들은

그냥 보통 책들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기 나름대로 깨달아서 쓴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역사하셔서, 복음의 영광과 비밀을

알게 하시고, 그 조명 속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설교, 그들이 남긴 목회의 족적,

이런 것들을 아주 집중적으로 그는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는 결혼 예물로 사모님께 무엇을 요청했느냐면,

시계나 반지가 아니라

<존 오웬의 전작집><존 칼빈의 전작집>을 사오라고 요청했습니다.

그게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설교집을 결혼예물로 요청하는 것을 보면,

그 분의 설교에 대한 남다른 열정, 보화를 보화로 볼 줄 아는 특별한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로이드존스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두권으로 된 전작집을 중고서점에서 사서 읽은 후에

자기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는 진술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바입니다.

 

그는 칼빈과 루터와 청교도 설교자들, 그리고 영적 대각성 시대와

진정한 부흥 시대의 설교자들과, 그들의 설교들의 족적을 살피기 위해서

수많은 책들을 탐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과 그 나라를 위하시고,

그것을 위해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양육하시는 방식은,

말씀에 대한 바른 설교를 통해서라는 확신을,

(로이드존스)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또 그를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처럼

복음의 말씀으로 매 시대마다 재창조를 하십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는 말씀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재창조되는 방편이.. 제일 결정적인 것이 말씀/설교입니다.

 

우리가 스펄전 목사를 기념하는 것도, 그런 줄기에서입니다.

스펄전 목사는, 모든 설교자의 모델이 될만한 설교자였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그를 기념하고, 그의 생애와 영적인 편력과 설교 사역을 주목하는 것은,

그의 방식과 그의 독특성을 모방하거나,

또 하나의 지식이나 정보의 양을 늘이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저 서문강 목사에게,

목사님,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를, 강단에서 그대로 설교해 봤는데,

그게 현장에서는 안 되던데요?’

 

제가 그분께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걸 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받고

그런 상태에서 목사님에게 주신 그 은혜를 따라서 설교 하십시오.

다윗이 사울 갑옷을 입고 싸우려 해서 되겠습니까? 자기 옷을 입어야 됩니다.’

 

우리가 로이드존스, 스펄전의 설교를 배우지만,

배껴서 그대로 따라 한다는 게 아니라, 그걸 먹고서 소화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설교하는 거죠.

 

이분들의 설교를 자료수집하는 차원이 아니라, ‘먹으시기바랍니다.

먹고서 그대로 살아서, 자기 살과 피를 만들어서, 그걸 설교하는 것이죠.

 

예수님도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하셨습니다. 6:55

그건 성육화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먹으라는 뜻입니다.

그저 지식으로 배우라는 뜻이 아니고요.

그 말씀대로 살아서,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로이드존스와 스펄전의 설교를 먹어야하는 것입니다.

지식으로 받는 게 아니라, 내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요?

 

6: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옛적 길 곧 선한 일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거기로 행하라하셨는데,

사람들은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고 대답합니다.

꼭 오늘날 우리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옛적 길은 옛날로 무조건 돌아가라는 뜻이 물론 아닙니다. 복고주의가 무조건 좋다는 듯이 아닙니다.

옛적에 알려주신 선한 길, 옛적부터 하나님이 행하신 그 선한 길, 그 본류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굉장히 변화가 급합니다.

핸드폰이 보급된 이후로, 더욱 급하게 움직이는 시대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가 가까이 되자

세상의 모든 일이 급해지고, 복음전파도 급속해지고 있습니다.

 

핸드폰, 인터넷, 컴퓨터가, 긍정적 측면으로는,

복음의 급속한 확산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변화의 시대에, 변하지 않는 그것을 붙잡아야

이 변화의 거센 물줄기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변화하는데 자신을 맞추면, 날마다 변화해야 됩니다.

변화의 파도를 타라그 파도 타다가, 나중에 엉뚱한 곳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변화의 시대에, 우리는 변하지 않는 본질을 붙잡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건 옛적 그 선한 길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자는 로이드존스의 <로마서 강해> 이런 책이

오늘날의 목회 환경에 맞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은 EQ (감성) 시대인데, 로이드존스의 설교가 한 마디로 너무 딱딱하다는 것입니다.

 

옛적 길로 돌아가면 안 된다는 주장인데요..

그렇게 현대적 트렌드를 잘 맞추면, 잠시 호응을 얻을지는 몰라도

그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디 가더라도, ‘옛적 그 선한 길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도, 설교의 황태자 the prince of preachers 가 된 것은,

할아버지 목사님의 서재를 통해, 17세기 청교도 서적을 어릴 적부터 접했기 때문입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도, 16,17,18세기의 기독교 고전을 접했기 때문에

한 시대를 살리는 설교자가 된 것이고요.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고전을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 고전은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하나님이 쓰게 하신 책들입니다.

신학생 때부터, 이런 고전들을 열심히 탐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번역이 안 된 게 많아서, 영어실력이 상당해야 할 터이지만요.

 

저희 교회에 어떤 집사님 한 분이,

제가 계속 영원한 복음만 가르쳤더니, 제게 한 마디 조언을 거들어 주셨습니다.

목사님, 영원 이런 얘기 좀 그만 하세요. 너무 현실감이 없습니다.

조금 타협해서,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 있는 설교도, 같이 섞어서 좀 해 주세요.’

 

그 분이 노환으로 지금 천국에 가 계십니다.

만약 지금 그 분과 대화한다고 가정해서, 제가 그 분께 물어봅니다.

지금 뭐가 현실이고, 뭐가 피부에 와 닿는 설교입니까?’


천국에 계신 그 분이 뭐라고 대답할까요? 

영원한 것이 우리 현실이군요. 다른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현실은, ‘오늘의 현실이 아닙니다.

진짜 현실은, 영원한 삶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설교 역시, 옛 설교, 현대적 설교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습니다.

설교의 본질은, 17세기 청교도 시대나, 18세기 영적 대각성 시대나,

19세기 스펄전 목사의 시대나, 오늘이나.. 그 언제나 똑같은 것입니다.

 

참고로, 모든 시대의 설교의 공통점은,

예수님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 믿어라를 설교한 게 아니라,

유럽 사회 자체가 전체로 기독교 사회입니다. 다 모태교인들입니다.

 

그들에게 회심해라, 변화되어라, 성숙한 크리스천이 되어라를 설교했습니다.

거듭나야 한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었죠.

 

모태교인에서, 뭔가 한 번 확 바뀌어서,

즉 회개를 통해서, 회심을 통해서, 변화transform된 성도가 되라고

공통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설교하는 현대와 다른 차이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역사의 전체 흐름을 주도하시면서

그 역사를 끊어서 보시지 않고, 하나로 보시고 계시며 (우리는 끊어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의 교회를 위해서 어느 시대를 위해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되

당신의 택하시고 빼내신 종들을 통해서, 특별히 강조적으로 보여주십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지금부터 약 150년 전에 사역하셨습니다.

그때 그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통해서, 말씀으로 그 시대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사마다 교회가 전체로 길을 잃지 않도록,

사도시대는 사도들을 주시고

중간중간 시대마다 이정표를 세우는 것처럼, 주의 종들을 세워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그래서 후대 교회들이 그것을 보면서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고전을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되는데요,

성경은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특별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가르치는 성령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계속됩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보면, 오늘도 가르치시고, 늘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런데 이전 시대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어떤 주의 종을 통해서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면,

바로 그 주의 종을 주목하고, 그 사람이 깨닫고 했던 설교, 그 분이 저술한 책을 연구해야 합니다.


즉 오늘날에 내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과거 역사에, 성령이 인도하신 선배 설교자들의 말을 잘 청종하는 방식으로,

오늘날 성령님이 내가 사는 시대에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다 한 줄로 연장선상에 있으니까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통찰력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인도를 바로 받으려면, 반드시 성경과 더불어

기독교 고전을 읽는 것이, 아주 지름길입니다.

 

어떤 분은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오직 성경과 성령만 의지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책은 다 버려야 합니다.’

 

이런 분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는 성령의 인도를 바로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기도도 깊이 해야 하지만,

앞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분들의 고전을 탐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올바로 이 시대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육에 있어서,

16, 17, 18, 19세기에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분들의 설교,

그것은 책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그것을 탐독하고 연구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날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의 진지한 연구는 필수적입니다.

 

우리 설교자들이 그런 공부를 안 한다면, 설교자로 단에 설 수 없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해결해야 될 과제입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오늘날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신학교에서 조차도

이런 중대성을 잊어버린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교를 공부하면서조차도,

이런 기독교 고전에 대해서 깜깜한 가운데서, 졸업하고 있습니다.

 

아니면 독학이라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시대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 원한다면,

앞선 시대에 성령의 인도함을 받았던 분들의 저서를, 마땅히 연구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역사성, 사도성을 일절 다 무시한 채

‘21세기에 역사하는 성령을 내가 받겠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잘못 인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 책들이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아서 쓴 책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이런 입장에서 <스펄전과 그의 설교>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호 P2에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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