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8 나그네를 사랑하라 이재훈목사 - YouTube
◈나그네를 사랑하라 신10:17~19 17.01.08 출처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에 필요한 소명을 주십니다.
한국 교회에 주셨던 많은 시대적 소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그러한 일반적 소명 외에 특별한 소명.
그 역사적 상황 속에 주시는 소명들이 있었죠.
일제시대에는 신사 참배에 항거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이끌어가는 것이 시대적 소명이었습니다.
시대마다 헛된 우상들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는 그것이 한국 교회의 소명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주어진 한국 교회의 소명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시대적 소명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소명은 단순히 잘 살게 되는 것 아닙니다.
잘 살건 못 살건, 우리의 상황과 상관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소명입니다.
그 하나님의 소명은, 형태와 내용은 다를지라도
동일한 원리가 그 안에 숨어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어느 시대에 살건 오고 오는 시대에
그 시대에 필요한 소명을 발견할 수 있는 까닭은
그 원리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좇아 살아갈 때
그 시대에 필요한 상황에 맞는 소명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시고 그들과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내가 너희들과 함께 약속하였으니 너희도 약속을 지키라.’ 그런 소명 주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으니 너희도 나를 선택하라.’는 소명 주셨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민수기에서는 ‘내가 너희와 동행하니 너희도 나만 따르고 의지하라.’
신명기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도 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전체 말씀을 통해서 ‘나는 사랑이니 너희도 사랑으로 살아라.’
그 사랑으로 살 때,
그 시대에 주어지는 소명의 형태는 다르지만 원리는 같은 것이죠.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10:17~18절 말씀에
우리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보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소명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10:17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이시며 위대한 하나님이시며
강력하고 두려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사람을 겉모양으로 보지 않으시고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18 그분은 고와와 과부의 사정을 변호하시고
이방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사랑하시는 분이다.
‘신의 신, 주의 주’ 이것은 히브리어로 최상급 표현입니다. :17
가장 위대하시고 가장 강력하시고 그리고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무엇이냐?
그분은 공의로우신 그분은 바로 고아와 과부를 그리고 이방 사람들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은 힘이 있으면 자기를 위해서 쓰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거죠.
그래서 하용조 목사님께서 아주 오래전에 젊으셨을 때 쓴 칼럼집 제목이
<힘은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입니다.
하나님은 그 강력한 힘으로 능력으로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냐면
사랑을 행하시는 일!
지극히 연약한 자,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지극한 필요 속에 있는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일.
그것이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일이에요.
고아와 과부, 나그네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기에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은 그분을 따라 행하는 것이고
그분을 닮아 행하는 것이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랑을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일에 우리도 관심을 가지는 일.
이것이 우리의 시대적 소명입니다.
시편 146편 9절에도 여호와는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좌절시키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이 시대의 소명입니다.
특별히 이 말씀 가운데 제일 마지막, 사랑의 대상인 이방 사람들.
그것을 개역개정에서는 나그네라 했죠.
나그네라는 단어가 우리말로도 정감이 있어서
저는 이 나그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나그네가 있습니다.
▶1. 첫째, 나그네는 고향을 빼앗긴 나그네입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고향을 빼앗긴 나그네들은 누구입니까?
전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난민들이에요. 우리나라에는 탈북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6천530만명의 사람들이 분쟁, 폭력, 갈등, 박해, 전쟁, 인권 유린
등으로 살아남기 위해 탈출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다 모아 나라로 만들면
전 세계에서 21번 째 크기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숫자는 매일 증가하고 있어요. 매일 3만4천 명,
1분당 24명의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 중 18세 이하의 어린아이들의 난민의 비율이 51%나 되고요.
2014년 41%에서 크게 증가 중입니다.
최다 난민 발생국들은 3개 국가입니다. 시리아, 아프간, 소말리아.
시리아 490만 명. 아프간 270만 명. 소말리아 110만 명.
전 세계 난민의 54%가 이 3개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발생 중입니다.
이들을 수용하는 나라들을 보면 터키가 가장 많이 250만명을 수용하고,
요르단, 레바논, 파키스탄, 남아공, 우간다, 차드. 에디오피아.
전세계 GDP의 1.9퍼센트에 불과한 저소득 국가들이
전체 난민의 절반 이상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장 부유한 6개국은 6% 이하만 수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가장 본인들도 살기 어려운 차드나 이런 나라들은
본인들도 살기 어려운 나라에요. 근데 수많은 난민들을 수용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수용 능력이 있는 부유한 나라들은 6%만 수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런 나라들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그 시각으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난민들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이 시대 지구촌에 사는 하나님 자녀들의 소명입니다.
한 번도 우리가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나지도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한다면
만일 이들의 아픔을 외면한다면
불과 우리나라가 5, 60년 전에 6.25 전쟁 이후에 폐허가 되었을 때
왜 전 세계에서 우리를 도울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6.25 직후에 폐허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를 도왔던 그 도움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겸손한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전세계 수많은 6천350만명의 난민을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극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자가 되는 거죠.
우리 교회 선교 사역을 통해 난민 사역을 행하고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 요르단과 레바논에 캠프가 두 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그 캠프에서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 난민 캠프가 굉장히 효율적이죠. 마음이 열립니다.
그 본국에서는 법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요르단이나 레바논은 굉장히 종교에 대해서 관대하고요.
최근에 요르단 대사가 저희 교회에 찾아오셔서 제가 뵌 적이 있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요르단 대사가 교회 목사를 찾아오다니.
난민 문제에 대해서 함께 대화를 나눴습니다.
‘우리 요르단은 환영한다. 요르단은 타 종교에 대해 관대하다.
난민들을 수용하는 이 일에 교회가 함께 도왔으면 좋겠다.’
그래서 요르단에 캠프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사랑을 해주고 교육도 해주고
그리고 선교하시는. 우리가 직접 시리아에서 복음을 전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리아 난민들이 요르단에 와 있기 때문에
그 캠프 안에서는 요르단의 법의 적용을 받고
그나마 우리가 자유롭게 선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간다에서 남수단 난민 사역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M미션회도 우리나라에 온 난민들을 섬기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고향을 빼앗긴 많은 탈북민 나그네들이 있습니다.
인권 탄압과 자유를 찾아 탈북한 많은 분들.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시대적 소명입니다.
국내 탈북민들은 3만 5명입니다. 작년 12월 14일 통일부 발표입니다.
2001년도에 1990명이었던 탈북민이 15년만에 3만명이 되었습니다.
저희 교회에서 탈북민들을 위하여 하는 사역들이 있습니다.
한터공동체, 하나공동체, 한사랑공동체. 그 외 여러 사역들을 하고 있고
캠퍼스에도 확장하고 이들을 섬기기 위한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2. 두 번째 나그네들이 있습니다. 이 나그네들은 고향을 떠난 나그네입니다.
스스로의 의사로 스스로의 의지로 더 잘 살기 위해 떠난 사람들입니다.
이주민들, 디아스포라. 어떤 목적, 비즈니스건 교육이건 어떤 목적을 위해서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이주민들. 그리고 이주노동자들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전세계 이주민들이 2억 4천 4백만 명이나 됩니다.
2억 4천 4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여러가지 다양한 목적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증가 추세를 보면
2000년도에 1억 7천 3백만 명이었던 이주민들이 2015년에 2억 4천 4백만 명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전 세계적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전세계를 복음화하기 위해서 입니다!
물론 선교사님들을 파송합니다.
그러나 선교사님들이 2억 4천 4백만 명이 파송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국경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거예요.
한민족이 다른 민족과 자발적으로 섞임으로써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교회가 선교적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세계적 선교운동인 로잔 운동의 케이프타운 서약에 보면
이런 시대의 이주 현상에 대하여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교적 목적이 있다.
그래서 이 이주 현상을 통해서 우리는 선교적 기회를 전략을 수립하고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주 현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배타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선교적 기회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이 이주를 통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것이 지금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 아니겠습니까.
유럽에 수많은 이주민들이 있고 노동자들이 왔을 때
처음엔 유럽 사람들이 노동력이 필요해서, 출산율이 저하했기에 노동력을 위해서 받아들였어요.
이주민을 받아들인 목적이 우리가 더 편하게 살기 위해서 받아들인 거예요.
경제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것이 그 목적으로 끝난다면 심각한 사회 문제가 있습니다.
결국은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언했죠. 왜 그랬겠습니까?
우리 일자리 다 빼앗아간다는 거예요. 보기 싫다 이거에요.
그런데 그것을 적극적으로 사회가 교회가 선교적 기회로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면서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복음화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시킨다면
오히려 유럽은 더 멋진 대륙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이 지금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이주해 들어오는 많은 이주민들이 있습니다.
국내거주 이주민 현황을 보십시오. 현재 197개국의 200만명,
전체 인구의 3.8% 국내 거주 해외 이주민입니다.
증가 추세를 보십시오. 2008년도에는 100만 명이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1948년도부터 60년동안 증가한 인원이 100만 명인데,
지난 8년동안 증가한 인원이 100만 명입니다.
60년 동안 증가한 인원과 동일한 숫자가 지난 8년간 증가했고
앞으로 5년간 100만 명이 더 증가할 추정입니다.
그러면 2021년도에는 300만 명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가 함께 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단일 민족이야.’ 라는 의식에만 사로 잡혀 있으면
심각한 배타주의에 빠집니다.
그 긍지는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 긍지가 교만이 되고 배타주의가 되면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리게 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사회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나라의 어떤 위기보다도 더 심각한 소용돌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역사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하고
시대 소명을 통해서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온누리 이주민 사역은 지금까지 지난 31년 동안 많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안산에 온누리M센터를 작년 봄에 우리가 준공하여 완공했죠.
15개 예배공동체가 있습니다.
러시아, 몽골, 스리랑카, 필리핀, 캄보디아, 네팔, 미얀마, 태국, 베트남, 중국.
그 외에도 우즈벡,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죠.
서빙고와 각 캠퍼스에서 10개 공동체가 지금 이주민 공동체가 있습니다.
이들을 우리가 대할 때 사역의 대상으로 보면 안 되고
온누리 성도로 맞이해야 합니다.
제가 이러한 관점으로 볼 때 회개했어요. 온누리 교적을 부여하거나
온누리 성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저 긍휼의 대상이라고 생각했지..,
이 땅에 계속해서 살아가는 물론 그들 가운데
떠날 사람도 있고 정착할 사람도 있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을 우리 온누리 교회 성도로 맞이하고 있는가요?
그저 피부색이 같고 언어가 통하고 문화가 같은 우리들끼리의 교회를 꿈꾼다면
온누리 교회가 아니라는 거죠.
그 이름에 주신 하나님의 소명.
그것은 이 시대에 우리나라의 많은 이주민들을 가장 많이 품고 사랑하고
그들이 변화되는 일에 쓰임 받는 교회가 온누리 교회가 된다면
온누리 교회는 시대적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다짐을 해봤어요.
우리 한국인들이 온누리 교회에 증가하는 비율보다
이 이주민들이 증가하는 등록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캠퍼스에서도 특별히 이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 근처에 있는 캠퍼스들은
우리 한국인들이 더 많이 오는 걸 환영하는 것보다
오갈 곳 없고 고향을 떠나온 이주민들이 등록하고 함께 찾아오는 것을
더 기쁘게 환영하는 온누리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또 다른 30년이 지났을 때 외국인 이주자들이 300만이 되고 400만이 되고
그 숫자가 불어날 때 이것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요.
우리도 유럽보다 더 심각한 인구절벽의 시대. TV에는 연일 뉴스에는 쏟아집니다.
인구 감소, 출산율 저하, 인구절벽 시대!
정부가 지난 10년동안 100조 원을 쏟아 부었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어요.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적인 현상. 현상 속에 우리나라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주민들이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여러 이유로.
그럴 때 우리가 배타적으로 나간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전세계에 이주민이 있죠.
디아스포라 700만 명이 넘는 한인 디아스포라가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흩어졌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고 있어요.
전 세계에 정말 필요한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우리 1.5세, 2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한인 디아스포라를 이렇게 많이 전세계에 흩으셨을까요.
그 중 하나의 해석이 이겁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의 바울을 세우고 계십니다.
바울이 헬라 문화권, 유대 문화권, 이중 언어권에 있었기 때문에
문화적응력도 뛰어나고. 그 언어적 능력을 통해 문화적 능력을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또 다른 바울을 세우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신약시대 바울뿐만이 아니라 김바울, 최바울, 백바울, 이바울.
수많은 바울들을 세우고 계세요.
놀라울 정도로 한인 디아스포라들을 세우고 계세요.
하나님의 놀라운 한민족을 향한 시대적 소명입니다.
▶3. 세 번째 나그네는 고향을 망각한 나그네입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현실 안주자. 이들은 잘 살기 때문에 나그네 됨을 잊고 살아가는 거예요.
떠나기 싫은 사람들. 그러나 고향을 모르기 때문에 정처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는 나그네라는 것을 망각하고
이 세상에 안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걸 망각할 때
인생은 정처 없게 되는 거예요.
제가 어렸을 때 TV에서 여러번 들었던 아주 오래된 가요가 있죠.
고려성 작사, 이재오 작곡, 백년설 노래. <나그네 설움>.
가사만 읽어보면 너무 절절합니다.
어렸을 때 이 노래를 들어도 공감이 된 건 웬일일까요.
“오늘도 걷는다만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 땅 밟아서 돈 지 10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 속엔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꿈을 불러 찾아보네.
낯익은 거리다만은 이국보다 차가워라.
가야 할 지평선엔 태양도 없이 새벽별 찬 서리가 뼈골에 스미는데.
어디로 흘러가랴 흘러갈쏘냐.”
참 옛노래들은 철학이 나름대로 있어요. 이 가사 속에 보면 낯익은 거리인데도
이국보다 차갑다는 거예요. 정처없는 인생. 그 나그네의 설움을 잘 노래했죠.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설움을 삼키며 정처없이 떠도는 나그네가 아닙니다.
왜 낯익은 그런 거리가 이국보다 차갑습니까.
우리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걸 망각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이 고향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고향이 있기에
우리는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가는 여행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경에서는 나그네된 거류민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Resident Aliens, 나그네된 거류민이라는 것은
법률상 주거가 가능한 사람이지만 시민권은 없는 신분입니다.
저는 예전에 이 땅에도 있고 하늘에도 시민권,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이 땅에 시민권이 없어요.
우리가 이 땅에 갖고 있는 국적, 시민권, 거주권한은 다 Resident Aliens,
나그네된 거류민으로 갖고 있는 일시체류증일 뿐인 거예요.
우리 시민권은 오직 하늘에 있습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신명기 10장 19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이방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는 너희 자신도 이집트에서 이방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시대 나그네들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도 동일한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에 동쪽, 에덴 동쪽으로 떠나
거기 성을 쌓았다고 그랬어요.
타락한 후손, 노아의 후손들도 성을 쌓았어요. 바벨성을 쌓았어요.
왜 이 타락한 자들이 성을 쌓았을까요?
오늘 이 시대 사람들은 성을 쌓는 것에 익숙해서
그 해석이 실감 있게 안 납니다.
그러나 그 시대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
‘너는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그 명령에 보면
성을 쌓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었어요. 왜 그랬습니까?
땅에 충만해야 할 때, 땅을 정복하고 퍼져나가야 할 때
그들은 나그네 됨을 거부하고 안착하길 원했다는 거예요.
성을 쌓았다는 것은 나그네 인생을 살 때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보호를 의지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카인이 성을 쌓고 노아의 후손들이 바벨에서 성을 쌓는 것을
하나님께서 흩으신 거죠.
‘흩어져라. 너희는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라.’
성을 쌓게 되면 우리는 성을 의지해요.
그러나 우리가 나그네 삶을 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창세기 47장 9절에서 야곱이 바로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9.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하게 함으로 나그네가 되게 하셨죠.
그러므로 유럽 민족이 되게 하신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생의 본질이 나그네라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하신 거죠.
그래서 구약의 율법인 레위기 말씀에 보면 토지를 영영 못 팔게 했어요.
레위기 25:23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는 이 땅에 나그네로 살아가기에 토지는 다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다윗도 이런 고백을 했죠.
역대상 29:15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좋게 살건 힘들게 살건 우리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다면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안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은 곳을 다 여행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래도 역시 집이 최고야.’
아무리 힘든 곳을 여행해도 견딜 수 있는 것은 돌아갈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그네된 여정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때
이 땅에 나그네된 자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12절입니다.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우리를 심판하실 때의 기준 한 가지가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너희가 주의 우편에 서 있는 자들을 향하여 축복하시면서
너희가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 나를 먹이고 재우고 입혔다.
우리가 언제 주님을 입혔습니까. 이 땅에 있는 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
좌편에 있는 자들에게 저주하실 때
‘내가 나그네되었을 때 네가 나를 먹이지 않고 입히지 않았다.’
‘주님, 언제 우리가 주님을 먹이지 않고 입히지 않았습니까.’
‘이 땅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땅에 있는 수많은 나그네들을, 우리가 이 땅의 나그네됨을 기억하고
그들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우리 이 시대 이 땅의 선교적 소명 중에 가장 중요한 선교적 소명 중 하나가
나그네를 사랑하라!
이주민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다시 파송하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
난민들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소명 앞에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타자 J.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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