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분류 없음/2018

참된연합과 거짓연합의 차이...자유함 / 릭 조이너

LNCK 2018. 5. 3. 19:21

참된연합과 거짓연합의 차이...자유함                                                   스크랩

 

릭 조이너  "하나님의 강한 능력으로 역사하기"

 

해석학이나 교리에 관한 철저한 법칙을 만들려고 할 때,

규칙이나 연합의 외형적인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외부로 나타나는 규칙이나 연합이지 내부적인 것은 아닙니다.


억누르던 것을 푸는 순간 무엇이 참된 규칙이고 연합인지 볼 있게 되는데,

대개는 대혼란을 보게 됩니다.


마틴 루터는 "영적인 사람은 계약이 필요 없고 영적이 아닌 사람은 그것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성도들에게 교리를 따르게 하거나

인간이 만든 계약이나 서약대로 성도끼리 교제하도록 만들면,

참된 연합과 참된 교리에 이르게 하는 그들의 능력을 무가치하게 만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미래의 교회가 분열되도록 만드는 결과가 됩니다.


우리는 율법이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진리나 명예 또한 자신이 한 말에 책임지는 행동을 찾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주의가 율법이 없는 것에 대한 답은 아닙니다.

율법주의는 오히려 율법이 없는 상태를 키울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의 권능은 율법"(고전 15:56)이라 했고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 3:6)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율법은 개인에게 적용하게 되면, 은혜로 극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점을 지적하여서 더욱 악화시키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 인해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아주 심하게 압박하고 억누르면 그들을 다스릴 수 있겠지만,

압박이 풀리면 상태는 그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게 됩니다.


율법을 사용하면 죄를 범한 사람을 옥에 가들 수는 있겠지만 그를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는 동시에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속사람에서부터 나오는 진리를 구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실하면, 진리가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고 찾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새 언약을 넘어서는 외형적인 언약이나 서약으로

성도들을 속박해서 연합하게 하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연합이 되고 그 결과는 언제나 영적인 분열을 초래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려고 하겠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모두는 변화 과정 속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남아 있기 싫어하는 데도 강제로 붙잡아 두면

좀더 오래 남아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떠나고 맙니다.

그래서 교제의 모임이 더 큰 아픔과 눈물만 나게 할 뿐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와 속박이 강요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그분은 제자들이 떠나기는 쉽고 남기는 어렵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떠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까? 왜 마음에도 없는 사람들을 묶어 두려 합니까?

자유롭게 떠날 수 있지만 남아 있기를 선택한 사람만이 진심으로 함께 있으려는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언약들로 사람들을 묶어두면, 만들어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약간의 안심이 되겠지만,

그 자체는 거짓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세우신 것이 아니고

주님을 믿는 믿음이 아닌,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서 사람을 그 속에 가두고 안도의 숨을 쉬는 것과 같습니다.


언약을 만드는 일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범하면 우리에게 저주가 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결혼 서약인 새 언약만이 유일한 성경적인 언약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언약의 삶들이 만드는 어떤 것들보다 좀 더 많은 자유를 허락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연합한 것인데,

왜 또 다른 언약들을 만들어서 연합시키려고 합니까?


우리가 사람이나 회중 또는 영적 운동과 강제로 언약을 만들려고 하면,

그 언약은 신약성경 밖에 있는 언약이 됩니다.


신약성경과 교회 역사는 그러한 언약의 결말이 항상 좋지 않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자신은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왜 사람들에게 우리와 연합하거나 함께 일하자고 불필요한 압력을 넣습니까?

이는 우리의 지도력이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이며 주님의 임재가 부족함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리셨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분께 인도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적인 노력이나 재능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우리 자신이 한 일로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여 높이려하면,

필연적으로 사람들은 실망하고 흩어지게 되고 모두가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강제로 우리와 함께하도록 만들거나

우리의 일에 함께 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스스로 높이려는 것입니다.

.

.

.

종종 인간이 만든 언약이나 죄를 범하거나 압력을 넣을 때 모습을 드러내는 지배의 영은,

거짓 영의 권세가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만큼의 참된 영적 권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그분께서 그분의 교회를 확실하게 세우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분은 그것을 완전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편안함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영적 권세 안에서 사역하면, 그분과 함께 멍에를 지게 됩니다.

그분과 함께 멍에를 진다는 말은 그분이 멍에를 이끌어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우리가 이 멍에를 지면, 우리의 영혼이 참된 쉼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세우려 할 때, 힘겹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함은 참된 기독교인의 순례의 길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자유함을 더 많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어야 합니다.

자유함이 많아진다는 것은 더 성숙해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초신자는 성숙한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지도와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주된 이슈는 사람들을 강제로 속박하고 압력을 넣어서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영적 자유와 진리를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함이 없으면 절대로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