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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18

영적 판단력과 분별 / 마틴 로이드존스

LNCK 2018. 9. 5. 21:44

https://www.youtube.com/watch?v=hobWnW_NPh4 

◈영적 판단력과 분별                       마7:6                     스크랩

마틴 로이드존스 '산상 설교' 중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아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7:6) 

- 본문은 ‘비판하지 말라’는 이 문제의 결론으로,

본 주제에 대한 올바른 균형과 완전한 진술을 주시기 위해 추가된 말씀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본문 말씀은 앞에 말씀하신 진술에 비추어 볼 때 예기치 않은 말씀으로 보인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혹평하지 말라고 권면 하시는 한편 분별을 잃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분별력을 구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영들을 증명하고 시험해’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오류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돕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는 분별의 영을 소유해야 하며, 티와 들보를 알아보고,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 주님은 이제 본문에서 다른 사람들을 다루고 취급하고 분별하는 문제에 대하여 교훈하고 계신다.

진리는 거룩하며 진주로 비유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의 메시지,

이 비할데 없이 훌륭한 산상 설교에서 주께서 말씀하고 계신 바로 그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개는 마을의 썩은 고기를 먹는 짐승이요, 바로 이 말은 치욕을 의미했고

사납고 위험한 반 야생동물이었다. 돼지는 유대인들에게 불결하고 울타리 밖에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용어는 사람을 분별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며 사용하신 용어이다.

진리에 관련해서 ‘개’, ‘돼지’ 에 속하는 자로 서술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 이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께서는 사람의 유형을 명백히 분별하셨다. 사복음서를 읽으면 주님께서는

사람을 똑같이 다루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나다나엘과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을 다루시는 방법에 차이가 있다.

바리새인을 대면했을 때와 세리와 창녀를 대면했을 때의 태도와 방법이 전혀 달랐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주님께서 대답하셨지만

헤롯의 질문을 받을 때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이처럼 동일한 진리의 관점을 다루실 때도 그들을 다르게 다루셨고,

가르침도 각자에게 다르게 적용시키셨다.

 

사도들도 주와 같이 행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13:46) 그는 거룩한 이것을 그들에게 계속해서 전하려 하지 않았다.

 

“저희가 대적하거늘 바울이 옷을 떨어 가로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행18:6)

 

그들은 개와 돼지들처럼 거듭 등을 돌리고 반대하고 신성모독을 말하고 진리를 밟아 버렸다.

사도는 그들로부터 돌아서서 다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을 것이며,

이방인들에게로 향하여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

 

첫째, 우리가 사람에게도 여러 유형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분별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에게 증거함에 있어 기계적인 방법처럼 비극적이며 비성경적인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어느 사람이나 똑같은 방법으로 진리를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보다 더 높은 특권은 없다. 세일즈맨도 상품을 팔려면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무언가 좀 알고 접근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단순히 자신의 증거와 증언을 하는 일에만 신경을 쓰지 않고,

분별과 이해가 중요함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모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어’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

 

증거하는 일에 개와 돼지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알지 못했으며 올바른 방법으로 증거하지 못한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둘째, 각 타입을 구별하는 법만을 배워서는 안 되며, 각 타입에게 무엇을 주어야할지 아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를 보아야 하며 그들에게 민감해야 한다.

 

우리는 눈에서 들보를 빼내었고 비편적인 요소를 모두 제거하였고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 옳은 일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게 되며,

각 특수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무엇이 적절한지를 알게 된다.

 

셋째, 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달라야 한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불신자를 향하여 ‘구원 받았소?’라고 묻는 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때 이것에 화를 내고 진리에 이끌려오지 않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이 같은 질문은 주님이 지금 서술하고 계신 반응 곧 개와 돼지의 반응, 곧 발로 밟고, 찢고,

신성을 모독하고 저주를 낳을 것이다. 아무에게도 신성을 모독하거나

저주할 이유를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방법이 아무리 완전하다고 해도 이렇게 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러할 때는 우리에게 책임이 있지 않으며 바울처럼 우리도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잘못이 우리에게 있어 진리를 무가치한 방법으로 전하는 과오를 범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항상 사랑 가운데서 전해야 한다. 설사 이들에게 거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되어야 하겠고 설교자에게 거슬리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가르치고 계신다.

 

넷째, 진리의 어떤 특정한 면이 어느 경우에 적절한가를 배워 알아야 한다.

이것은 불신자의 경우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교리 이외에는

아무 것도 제시하지 말아야 할 것을 의미한다.

 

신자가 아닌 사람과는 다른 교리를 토론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4장의 주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답의 기록은 이 점의 완벽한 실례가 된다.

 

그 여인은 여러 가지 다른 문제들, 곧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을 구별하는 여러 가지 차이점을 토론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일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그녀 자신을 살피게 하셨다.

곧 죄 많은 생활과 그녀에게 구원이 필요함을 상기시키셨다. 이것은 신자들에게도 적용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그들이 아직 유아들이기 때문에 고기를 줄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이 완전한 지혜를 영적 깨달음을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주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 추론

 

첫째, 타락의 결과로 사람에게 온 죄와 악의 결과는, 사람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하여

개와 돼지로 만들었다. 진리는 사람에게 진리에 대한 적대감을 준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라고 바울은 말한다. 곧 개와 돼지의 성품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아니하며 또 할 수도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거룩한 것의 진가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며 영적 진주에 대하여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줄 모른다.

그들의 진상을 인식할 때에 비로소 우리 주님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신 이유와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가운데 마음에 큰 슬픔을 느끼신 이유를 깨달을 것이다.

 

중생 이외에 사람으로 진리의 진가를 인식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성령으로 소생함을 받아야 한다.

 

둘째, 진리는 젖과 굳은 음식과 같은 다양성이 있다.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내가 앎에서 자라가고 있는가? 나는 보다 심오한 진리들로 나아가고 있는가?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 진리에 대한 설명이 여러분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면,

어째서 이 진리들을 이해할 수 없는가 자신에게 물어 보라. ‘완전한 데로 나아갈 지니라’

 

셋째, 본문에 성경의 무분별한 배포 문제와 관련해서 경고가 들어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성경을 영적으로 개와 돼지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닿는 곳에 두는 것이 옳은가?

 

이런 일들이 참람된 것으로 이끌어감을 자주 본 바 있다. 항의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인격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을 통해서 진리를 제시하는 방법이다.

 

성경을 해석할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성경을 무분별하게 놓거나,

영적인 개나 돼지들에게 인도자도 없이 성경을 두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성경의 보관자요 해석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받아들인다면,

연구와 준비와 기도가 절대 필요함을 보게 될 것이다. 성경을 단순히 배포하는 일만으로는

오늘의 문제의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여전히 진리를 해석하고 설명하기 위해 우리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며,

말씀은 가졌으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빌립과 같은 사람들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리를 균형 잡히고 충만히 제시할 수 있기 위해서, 뭇 영혼들의 유익을 위해서,

이런 일들에 균형과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출처: 자기부인 / 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