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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안’의 이상을 실현코자 헌신한 김용기 장로

LNCK 2018. 9. 19. 18:38

 

가나안의 이상을 실현코자 헌신한 김용기 장로

 

출처 : 한국장로신문

 

김평일 장로<가나안농군학교 교장>

 

 

영웅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삶

 

아버지 김용기 장로는 하나님과 흙과 사람, ··(··)’의 연관성을 인생관으로 삼았다.

 

그래서 아버지는

첫째 하나님을 공경해야 하고,

둘째 흙에 의존하여 흙과 깊이 연관된 사업을 해야 하며,

셋째 서로 믿고 사랑하며 협조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아름답고 존귀한 인간 생활이라고 믿었다.

 

사람은 자기의 살 길을 스스로 안다. 어둠보다는 밝은 빛이 생명의 길이며,

순간보다는 영원한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내일 죽는다 해도 사과나무를 심는 것이고,

순간적인 것보다는 영원한 것을 남겨 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마니산을 흔들리게 하려고 아버지는 나이 열일곱에 난데없는 영웅심이 번뜩여서

강화도 마니산으로 향했다. 왜 마니산인고 하니, 일찍이 세종대왕이 보위에 오르기 전에

이 마니산에서 사흘 동안 기도를 하여 산을 세 번 흔들리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도 아버지처럼 서서 다니는 사람일진대

나라고 산을 흔들 기백이 없을 것이며,

나라고 해서 이 땅의 지배자가 못되랴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이 같은 생각을 소상히 글로 적어 부모님이 잠든 머리맡에 놓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강화도에 갔다.

그리고 마니산 중턱에 여승들만 기거하는 정수사라는 절이 있어서

아버지는 그곳에 방을 한 칸 빌어 짐을 풀었다.

 

새벽이면 마니산 꼭대기를 향해 뛰듯이 산길을 접어들었고,

산 아래에 엎드린 마을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오를 때라야

허기가 져서 터벅터벅 절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때때로 실의에 빠져 머나먼 서해의 누르무레한 수평선을 바라보며

산아! 제발 흔들려 다오라고 혼자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데 정수사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할머니 스님이

이따금 내 방으로 갓 찐 시루떡을 디밀곤 했는데,

어느 날은 방으로 들어와 네 소원이 뭐냐?”고 물으셨다.

 

아버지는 반갑고 고마워서 , 이 산이 흔들리는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할머니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호물호물 입매를 흐트리며 웃더니

엇다 그래, 네 녀석이 산을 흔드는 것 좀 보자이러시며 밖으로 나갔다.

 

기도를 시작한 지 꼭 마흔이레가 되던 날,

아버지는 그날도 마니산 꼭두머리에 앉아

이제 내가 이 나라의 임금이 되지 않아도 좋으니

여태까지 기도한 공로를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흔들리는 시늉을 해줘서 열일곱 먹은 이 사내의 체모를 살려 달라고 빌었다.

 

날씨는 여러 날에 걸쳐 맑았다. 썰물 때가 되어 바닷물은 십리만큼이나 빠져 나가고,

꺼멓게 드러난 갯벌 위에는 조개줍이들이 고물거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았으며 숲은 죽은 듯이 잠잠했다.

 

움직인다.’ 아버지는 자신의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산이 흔들려서 어쩌겠냐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소망는 무모하게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여기서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돌아가서 일을 하자.’

그 길로 다시 봇짐을 싸들고 경기도 양주에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복판에서부터 먹어보게

 

세계지도를 펴놓고 보니, 우리나라 땅은 너무나 좁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 인물에 비겨서 내가 일할 땅이 너무도 좁았다.

 

아버지는 마니산에서 내려온 지 일주일 만에 중국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때 우리 집에서는 닭을 수백 마리나 기르고 있었다.

때마침 어느 날 아버지가 달걀 판 돈을 장롱 속에 넣는 것을 보았다.

그 금액을 확실히 기억해낼 수 없지만 제법 큰 돈이었다.

 

아버지는 그 돈을 훔쳐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는 국경이 가까운 의주로 가는 열차를 탔다.

그때도 아버지는 부모님 머리맡에 긴 편지를 써 두었다.

압록강을 건넜다. 그리고 요동 칠백 리를 질러서 심양으로 가기에 앞서,

아버지는 천진에서 얼마간 머물렀다.

 

천진은 영국, 프랑스, 일본의 조계지역이므로 외국의 문물을 마음껏 접할 수 있는 곳이었다.

스물이 채 안 된 어린 아버지의 눈에는 그것들이 너무나 신기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세계를 내 손에 넣어야겠구나!’

아버지는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심양 땅에 발이 닿자, 아버지는 마적단이 있는 데를 찾아 나섰다.

사실 내가 천진에서 심양으로 온 것은 이 마적단에 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심양은 마적의 집결지였다.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려면 힘이 필요한데

아버지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마적단에 들어가서

그들의 두목이 된다면 세계를 지배하는 데 큰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했다.

 

심양의 서탑이라는 동네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아버지는 낯선 땅에서 마적을 만나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마침내는 이 서탑에서 묵게 되었다. 독립운동을 하는 조선사람들 가운데

마적단과 내통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건 교회가 있는 곳에서 묵었으며 주일 예배에는 꼭 참석했다.

그런데 서탑에는 조선인 목사가 예배를 보는 교회가 있었다.

마침 일요일이 되어 교회에 나갔더니 이성락 목사라는 분이 설교를 했다.

 

예배가 끝나고 나가려는데, 그 목사가 쫓아 나와 자넨 여길 어떻게 왔나?”하고 물었다.

후줄근한 두루마기를 입고 객지 살림살이가 든 노란 가죽 가방을 들고 있었으므로

한눈에 떠돌이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목사에게 이러이러해서 마적단에 들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다.

목사는 그 말을 다 듣고 나더니 , 그래, 잘 왔네. 자네가 예까지 왔으니

내 점심이나 삼세하고는 내 등을 툭툭치며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는 자못 용기가 생겼다.

 

목사가 아버지를 데리고 기름내와 짠내가 진동하는 시장 골목으로 들어서자

아버지는 적이 실망했다. 오랜만에 청요리를 먹게 되었다고 잔뜩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부침개집 주인더러 그 징빙 하나를 통째로 주시오라고 했다.

한 개로 두 사람이 먹어도 남을 텐데 저걸 통째로 달라니 웬일인가 했다.

목사는 그 뜨끈뜨끈한 징빙을 두 손바닥에 종이를 깔고 받더니

대뜸 내게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영문도 모르고 얼떨결에 두 손바닥을 펴서 받았다.

자네, 이걸 복판에서부터 먹어 보게.” 목사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는 단박에 마음이 상해서 어떻게 그렇게 먹을 수 있습니까?

목사님이 저를 놀리시는 겁니까?”라고 따지듯이 말했다.

 

이놈! 떡 하나도 복판에서부터 못 먹는 놈이 세계를 복판에서부터 먹으려고 들어?

지금 당장 조선으로 돌아가서 네 힘으로 주국부터 지도해. 썩 돌아가!”

 

아버지는 압록강을 건너 신의주로 돌아왔다.

모란봉의 부벽루에 올라 대동강을 바라보니 강은 푸르게 넘실거리며

어디론지 흘러가고 있었다. 욕망은 끝이 없고, 이루어지지는 않고.

 

부벽루 난간에 걸터앉아 긴 시간을 생각에 잠겼다.

평양시청 문 앞에는 칼 찬 일본인 순사가 왔다갔다 했다.

시장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무턱대고 시청 앞을 얼씬대다가 그 순사에게

너 무슨 볼 일이 있느냐?”라는 매서운 핀잔을 듣고는 을밀대로 갔다.

 

을밀대에서 하늘을 보고 누웠는데 갑자기 배가 뒤틀리듯 아파왔다.

급히 먹은 냉면이 체한 것이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고 일어나 앉을 수도 없었다.

 

내 교만한 야망에 눈이 어두워 그동안 기도를 잊고 있었던 아버지는

아픈 배를 움켜쥐고 가까스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여! 당신의 종이 오늘에야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교만한 종을 마음껏 벌 하시옵고,

당신 안에서 진실로 이 땅을 위해 순명할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옵소서. 주여!”

 

냉면 한 그릇에 깨우친 아버지는 그 길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삼베옷을 입을 처지지 않소?”

 

대동아와 농사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능내의 당시 집 뒤로는 예봉산이 솟아 있다.

3년의 무모한 방랑 끝에 아버님은 부모님 모시기에 전력했다.

동네 사람들은 예봉산 정기를 타고 나서 빼어난 효자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버님의 꿈은 단순한 에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때 우리나라 인구인 2천만, 2천만 분의 일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웃한 열 집의 사람들을 설득해서

울타리를 헐고 조그마한 집단촌을 만들었다.

 

광동전문학교를 나온 아버지는 농사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아버지 집은 닭을 기르고 벌을 모아 길렀다. 길도 넓히고,

가로수를 심고, 집과 집 사이에는 무궁화를 심었다.

 

마을이 윤택해지자 일본 사람들은 공출을 심하게 해갔다.

그래서 아버님은 공출을 막기 위해 논을 없애고 벼를 심었던 땅에 고구마를 심었다.

쌀만 공출해가고 고구마는 공출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마을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공출로 쌀을 빼앗겨 돈을 만들 수 없게 되자 아이들 공부를 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님 마을의 아이들은 고구마를 팔아 모두 서울로 유학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아버님께서 꿈꾸시던 이상촌은 어김없이 진행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일본인 순사들은 우리 촌사람들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않는다며 들볶았다.

한번은 경기도 경찰국의 고등계 주임인 다니치가 아버지를 불렀다.

 

그는 아버지를 취조실로 끌고 가서 마구 욕설을 퍼부었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 것은 천황 폐하에게 불경한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꾸했다.

 

사람들이 당신 아버지에게는 절을 하지만, 그 문패에 절을 하지는 않소.

나도 마찬가지요. 천왕 폐하가 내 앞에 있다면야 수십 번인들 절을 못하겠소?

그러나 그 문패에는 못하겠단 말이오.”

 

이 일이 있고 나서 우리 촌에는 묘한 손님이 찾아왔다.

조선총독부의 옌도 정무총감이었다.

그는 수행원 40명을 이끌고 우리집을 찾아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도 경찰국에서 총독부에 우리 이상촌의 현황을 알리고,

아버지를 이용하면 전시의 식량난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보고했다는 것이다.

 

그는 앞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 신사였다. 식민지주의자들의 능란한 앞잡이로서는

손색이 없어보였다. 막내 아들벌이나 되는 아버지에게 깍듯이

하이, 하이라고 했고 위협하는 말투는 조금도 쓰지 않았다.

 

당신이 하는 일은 정말로 훌륭하오. 다 같은 황국 신민으로서 당신을 치하하는 바이오.

이제 이 일은 이 마을의 일일 수만은 없소.

당신은 이 좁은 땅에서만 뜻을 펼 것이 아니라 총독부로 들어와

대동아를 만드는 데 동참하기 바라오.

내가 총독부 전시생활과에 당신 자리를 마련하겠소.”

 

그의 말 솜씨는 어디까지나 정중했고 품위가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저는 한낱 농사꾼에 지나지 않습니다.

농사꾼은 자유를 좋아하기 때문에 누구 밑에 들어가면 숨이 막혀 살지를 못합니다.

그리고 대동아는 저 같은 농사꾼이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저는 이 나라와 이 땅의 이름 없는 농사꾼인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옌도 정무총독은 별다른 까탈을 부리지 않고 돌아갔다.

40명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촌길을 걸어나가는 노회한 정객의 뒷모습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그가 다녀간 뒤로는

우리 촌에 주재소 순사들이 얼씬도 안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변함없이 농사꾼으로 일했으며, 고향이 어느 정도 살 만한 촌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그곳을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고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당시 경기도 고양군 구기리)으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경기도 용인군 원삼으로 옮겨 지금의 가나안 농장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광복도 맞았다. 6·25도 겪었다. 그러나 언제나 아버지는 땅을

버리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일했다. 땅이 아버지의 미쁜 반려였다고나 할까?

 

 

막사이사이상과 삼베옷

 

지난 19668,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 있는 가나안 농장으로

서울의 5대 일간지 지프차들이 들이닥쳤다.

막사이사이상이 아버지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한참이나 시달림을 당하고 나서야 정식으로 수상통보를 받았다.

막사이사이상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는데,

아버지가 탄 상은 사회공익상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농사만 짓는 늙은 사람에게도 상을 주는 세상을 보려고

내가 임금이나 평양 시장을 못했던가 싶어서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고 한다.

 

아버지는 60 평생에 넥타이나 구두를 몸에 대지 않고 살았다.

아무리 엄숙한 자리엔 가더라도 고무신에 코르덴 바지 차림이었다.

 

그런데 필리핀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아버지의 수수한 차림을 소문으로 들었는지

반드시 예복을 가져오라는 전갈을 보내왔다. 바침 예복이 있어서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그곳까지 입고 갈 옷이 마땅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큰 맘을 먹고 서울로 나들이 옷을 맞추러 갔다.

아버지는 필리핀이 더운 나라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대문시장을 찾아가 고운 삼베 두 필을 천이백원씩 주고 떴다.

그리고 이왕이면 크고 좋은 집을 찾아가서 옷을 짓겠다고 명동까지 나왔다.

 

상탄 김에 큰 맘을 먹고 근사한 자자라사라는 양복점에 들어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양복점 점원이 앞을 막아서면서 어디서 왔소?”라며

아버지의 아래 위를 불결한 물건 대하듯 훑어보았다.

 

집에서 오지 어디서 와. , 이걸로 옷 한 벌 지어주소.”

그는 아버지 손에 들린 삼베 두 필을 보더니 눈을 부라렸다.

아니, 이 영감님이. 여긴 한복집이 아니예요.

한 벌에 7만원짜리 옷을 짓는 데예요. 빨리 나가슈.”

 

그렇게 거지 동냥쟁이 내쫓기듯 세 군데의 양복점에서 쫓겨나온 후

우리는 천호동에 있는 노동복 짓는 곳을 찾아갔다. 그곳에선 대환영이었다.

우리는 한 벌에 오백원씩 주고 삼베옷을 맞췄다.

 

비행기를 타고 수상식에 참석하러 갈 때, 우리는 신던 고무신을 깨끗하게 닦아서 신고,

가방에다 속옷 몇 벌과 두루마기를 넣고는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돈은 필리핀에서 다 대기로 되어 있으니 한 푼도 필요없다고 해서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공항대합실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과 친지들이 모여 있었는데,

우리 부자가 삼베 양복을 집고 들어서자 저 양반이 왜 저러는 거야?

나라 망신을 시키고 싶다는 건가?”라는 소리와 고무신을 신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하는 비아냥거림이 들려왔다.

 

그 가운데에 양복을 쏙 뽑아입은 청년 하나가 나서더니,

선생님 고집이야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드님은 저게 뭡니까?”라며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는 얘야, 떳떳하게 고개를 들어라.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고개는 왜 숙여. 정신차려라하고는 그 사람 앞으로 갔다.

 

이보오 젊은 양반, 나도 값비싼 좋은 양복과 구두가 좋다는 건 알고 있는 사람이오.

그러나 나는 국민소득이 65달러밖에 안 되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고무신을 신고 삼베옷을 입을 처지밖에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 삼베옷이 어떻습니까? 내가 듣기로는 필리핀이란 나라는

몹시 더운 모양이던데, 이 옷이 얼마나 시원하고 위생적인지 아십니까?”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함으로써 우리 옷차림에 대한 공격을 잠재울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감사

 

당신들이 묵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비행기를 처음 타시는 것이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비상구가 나 있는 자리로 가서 무조건 앉았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에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아버지는 살아서 할 일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어떤 역경에 처하거나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것을 극복해 나가려는 마음을 지니고 살았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아버지의 길이 탄탄하게만 잘 되리라는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미리 준비를 한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일단 비행기에서 빠져나와 헤엄이라도 쳐야 하니까

제일 빠져나오기 쉬운 비상구 옆에 앉은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도 외국인들은 우리 부자를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도쿄의 하네다 공항에 내렸는데, 필리핀행 비행기는 다음날 아침에 있었으므로

시간은 아주 넉넉했다.

 

그래서 구경도 할겸 공항 청사 안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50여 명이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이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국제공항에 삼베옷을 입고 새까만 고무신을 신은 데다가

키도 작고, 얼굴도 시원찮게 생긴 사람이 다 낡아빠진 가방을 들고 어슬렁거리니까

심심하던 차에 구경거리로는 제격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그냥 있을 사람인가.

 

, 난 맘이 좋아서 돈은 안 받으니 구경이나 실컷 해라하고

그들 앞에 버티고 서셨다. 만약 마음을 찍는 엑스레이로 사람들의 마음을 찍어서

그곳에 진열한다면, 사람들은 거기서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보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조금도 부끄러울 게 없었기 때문에 태연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택시를 탄 우리는 마닐라에서 온 안내원이 예약해 놓았다는

긴자의 도쿄호텔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택시기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곳은 일류 호텔인데, 정말로 그곳에 가실 겁니까?”

우리의 허름한 행색으로 봐서는 그곳에 묵을 형편이 못된다 생각했기 때문인지 재차 물었다.

 

그곳에 가자고 하는데 왜 자꾸 묻는 거요?”

그제야 마지못한 듯 차를 몰았는데,

이번엔 호텔을 100m쯤 남겨두고는 다시 서는 것이었다.

 

저쪽인데.”

저쪽이라면서 어쩌란 말이요. 어서 그곳까지 갑시다.”

 

거의 우격다짐으로 호텔까지 왔는데, 그 다음이 또 문제였다.

호텔 문 앞에 서자 문이 저절로 스르륵 열렸다.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서자

호텔 종업원이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나는 내심 일류 호텔은 뭐가 달라도

역시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데 호텔 종업원의 말이 가관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는 당신들이 묵을 만한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백 미터만 내려가시면 깨끗한 하숙집이 있으니까 그리로 가시지요.”

 

호텔 종업원의 친절한 안내가 끝난 다음에야 나는 여권을 내보였다.

그러자 그 종업원은 사색이 되어서 우리 부자에게 수없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마닐라 공항에서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서자, 손에 태극기를 든 우리 교포들에게 둘러싸였고,

순식간에 꽃다발에 파묻혀 앞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우리들은 막사이사이상 수상위원회 영접원들의 안내로 세단차에 올라타고

그곳 경찰 사이드카의 경호 속에서 마닐라 호텔로 향했으며,

그곳에서 촌스러운여장을 풀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때, 공항에서부터 우리를 따라온 필리핀 주재 대사가

미심쩍은 듯한 얼굴로 우리 부자의 행색을 살피며 물었다.

 

선생님, 예복은 가져오셨겠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의 걱정을 불식시키기 위해 가방을 열고,

아버지가 스무살 장가갔을 때 할머니께서 해주신 모시 두루마기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 여기 예복을 가져왔습니다.”

대사는 가방에 넣어 구깃구깃해진 두루마기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이게 뭡니까? 예복을 가져 오셔야지. 두루마기를 가져 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아니, 국가를 대변하는 사람이 우리나라 예복도 모릅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조상님들의 제사를 지낼 때 두루마기를 입고 지내고,

정월 초하룻날 부모님께 세배를 드릴 때에도 두루마기를 입습니다.

 

그런데 대사님께서 지금 입고 있는 새까만 옷이 우리나라 예복입니까?

그 옷은 영국 사람들이 만든 자기나라 예복입니다. 그런데 그게 뭔지도 모르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걸 예복이라고 입고 다니니 참 큰일입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니까 그 대사도 어쩔 수 없다며 체념하는 표정을 지었다.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식장에는 3천여 명이 모여서

다섯 나라에서 온 다섯 사람의 수상식 장면을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두 번째로 상을 받았다. 그때 시상하던 마르코스 대통령은

아버지가 하얀 두루마기에 고무신을 신고 들어가자,

한국 예복은 제가 처음 본 것 같습니다하며 신기해했다.

 

당연한 것이, 우리나라 두루마기를 입고 외국에 가신 선배님들은 많았지만

그냥 윗옷 대신에 입은 것이지 국제적인 큰 예식에 두루마기를 예복으로 입은 것은

아버지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럴 만도 했다.

 

아버지는 막사이사이상의 수상이유서가 읽혀질 때

고마우신 우리 주께마음속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이 사람에게 제9회 막사이사이상의 사회공익상을 주는 이유는,

아시아 한반도의 출생으로서. 농촌 개발에 큰 뜻을 품고 농촌 생활의 차원을 높였다.

그리고 이 사람은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영원토록 살려는 데에 그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왼손에 성경과 바른손에는 삽을 단단히 쥐고 두 발로

굳세게 땅을 딛고 서서, 머리는 하늘에 두고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큰 나무와 같이 살았으므로.

아시아의 후진성을 탈피시킬 수 있는 생활인으로서 산 교재가 되었으므로

이에 사회공익상을 주노라.’

 

내가 너희를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으로 너희를 올라가게 하리라.”

 

아버지는 이 구약성경의 말씀을 좇아 가나안 농장을 만들고

그 안에 농군학교를 세웠다.

공평은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것이어서는 안 되므로,

가진 사람이 나누어 갖는 공평이어야 한다.

 

아버지는 그동안 삼천 차례가 넘는 대중 강연회를 가졌었고

지니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 어떤 힘이 있다면, 그것은 나누어 갖고 싶은 마음에서 생겼을 것이다.

아버지는 때때로 비 뿌리는 농장의 밭두둑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심은 대로 거두게해주는 하늘이 고맙고,

젊은 날의 방황을 빨리 끝내게 해 준 하늘이 고마워서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누가 행복한가?”라고 물으면

아닙니다. 다만 감사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하셨다.

 

 

효율적 경제 위해 의식주개선부터

 

우리 가정의 생활원칙

우리 가정의 생활원칙은 아버지가 처음 가정을 이루었던 때부터

계획을 세워 실천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가정의 생활원칙을 정한 것은

온 국민이 잘 사는 데 그 목표를 두고,

우리 가족이 계획적으로 생활함으로써 그 모범을 보이자는 생각에서였다.

 

우리 가족은 땅을 개간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땅이 기름지게 되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옮겨다녔으며,

또 어디에 가든 우리가 살 집보다 먼저 교회를 세웠다.

 

그래서 아침 기상과 동시에 그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그날의 일을 시작하며,

기도로써 그날의 일을 끝낸다.

이것은 우리 가족들이 잠시라도 신앙심을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이며,

일상생활을 기도와 감사의 마음으로 하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교육도 반드시 신앙교육을 시킨 뒤에 생업을 위한 기술교육을 가르친다.

또한 우리 아들들이 교육이나 농촌 시찰 등으로 외국에 나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배워 가지고 오는 것은 좋지만,

그 대신 네 것(신앙심)을 놓고 와서는 안 된다고 이른다.

 

우리 집은 아침 4(겨울에는 5)면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기상한다.

그 기상종은 아버지가 친다. 그 종을 치기 위해서는 가족들보다 10분쯤 먼저 일어나야 한다.

아버지가 먼저 일어나 종을 치는데 가족들이 안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상과 동시에 예배를 드리고 운동과 집안팎의 청소, 세면, 식사를 한다.

8시에 식사를 끝내면 30분 동안의 휴식을 취하고 각자의 분담된 일을 시작한다.

일거리는 우리 가족 모두가 미리 생각하여 함께 그 계획을 세우고, 각자가 분담한다.

 

12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점심, 1시부터 2시까지는 라디오를 듣거나 독서를 하고,

2시부터 다시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6시부터 7시까지 저녁식사,

7시에서 10시까지는 독서와 신문 읽기, 라디오 듣기 등 휴식을 취하고

10시에 일제히 취침한다.

 

식사기도 드리며 우는 사람은 첨 봤소

우리 집의 가계와 경제적인 책임은 모두 아버지가 맡았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단 한 푼도 아버지의 승인없이는 지출이 되지 않는다.

 

40세가 될 때까지 교통비를 아버지께 타가게 했다.

쓰고 남은 돈은 반드시 반환해야 하는데, 약간의 훈련으로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아버지부터 솔선하여 실천하니까 가족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두 형님이 일본에서 개최된 동남아시아 농촌지도자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의 일이다.

그때 아버지는 정부에서 책정한 최소한의 여비규정에 맞춰

그 액수만을 형님들에게 주어보냈다.

 

그런데 정부에서 책정한 여비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였기 때문에

그들은 비행기로는 일본에 가지 못하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게 되었다.

 

그 배 안에서 점심을 사 먹는데, 벌써 호주머니 속의 달러가 많이 줄어든 기분이라서

앞으로의 여행기간 동안 그 돈으로 살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더라는 것이다.

 

낯선 이국땅에서 돈이 떨어진다는 것을 상상하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식사기도를 드릴 때 지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 눈물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다분히 섞여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들이 울며 기도를 마치고 눈물을 닦고 있을 때

노신사 한 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기도를 드리는 거로 봐서는 크리스천인 것 같군요. 나도 크리스천인데,

지금까지 식사기도를 울면서 하는 사람들은 처음 봤습니다.”

 

그 노신사는 옆자리에 앉더니, 어디에 사느냐, 어디까지 무슨 용무로 가느냐를 낱낱이 물었다.

그래서 두 형님은 공손히 인사를 하고 자신들이 울게 된 연유를 솔직히 말했다.

 

그러자 그 노신사는 감탄한 어조로 훌륭하신 아버님이시고 훌륭한 아드님이시군요.

내 집이 시모노세키인데, 우리 집으로 갑시다하며 호의를 베풀었다.

 

그리고 두 형님은 노신사의 안내와 극진한 대접을 받았으며,

무사히 교육을 마치고 돌아왔다.

 

경제생활은 의식주, 이 세 가지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효율적인 경제생활을 하려면 무엇보다 이 의식주의 비경제적인 면을

근본적으로 시정해야 한다.

 

구들장 문화

이 지구상에서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6~8시간을 자기 위해 방안을 온돌로 만들어

3인치의 돌(구들장)을 달구는 나라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덕분에 산이 모두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그 폐해는 심각한다.

 

첫째, 몸이 허약해진다. 외국 사람들은 쉴 때 반드시 드러눕지는 않는다.

앉아서 쉴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방바닥이 따뜻하므로 누워서 쉰다.

편할지는 모르지만, 누워 있으면 기운이 탈진되어 또 다시 일어나기가 싫어지므로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또한 밥 먹은 즉시 누울 경우, 소화가 잘 안되고 척추의 발달에도 장애를 받는다.

라디오 소리도 누워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 가족들에게 라디오를 앉아서 듣게 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앉아서는 일을 할 수 있지만,

누워서는 일을 하기 어렵다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 사람들에 비해 비활동적인 것은 바로 이 온돌의 죄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의 폐해로는 구들을 달구기 위해서 시골에선 대부분 나무를 구해다 땐다는 점이다.

그래서 산의 나무들을 장작으로 베게 되었고, 목재가 부족하게 되자

그 방면의 산업이 모두 위축되어 버렸다.

건축, 조선, 제지 등 산림 자원이 고갈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집에서는 온돌방을 폐지한 지 오래다.

그 대신 벽을 한 자 이상이나 되는 두꺼운 흙벽돌로 하였고,

창을 이중유리창으로 만들어 방 안으로 들어온 태양열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정히 추운 날이면 연탄난로를 피우면 되니 절약도 되는 것이다.

 

 

영농의 다각화로 체질개선

 

식생활과 의복의 개선

우리나라 국민들은 13식을 하며, 쌀을 주식으로 한다.

그런데 그 쌀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기 위해선 매끼니 때마다 불을 지펴야 하며

음식을 끓이고 버무리는 등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의 경우는 1주일 분량의 빵을 한꺼번에 구워 놓고 먹는다.

그리고 반찬을 만드는 시간도 그리 소요되지 않는다.

빵에 버터나 기름을 바르거나 고기나 야채를 살짝 데치는 정도의

조리를 하므로 부엌에서 해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주부라는 사람은 하루 진종일 부엌에서 빠져나올 틈이 없다.

갖은 반찬을 양념으로 버무리고, 끓이고, 볶고, 찐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난 다음에는 산더미같이 쌓인 밥그릇이며 반찬그릇 등을 씻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또 다시 다음 끼니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여자들은 일평생 부엌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들이고 노력해서 만든 우리나라의 음식들은 보기 좋고

가짓수는 많지만,

 

영양적인 면은 그다지 고려하지 않은 원시적인 음식물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주식으로 먹고 있는 쌀밥과 보리밥의 경우,

겨우 껍질만 벗겨서 삶아 먹는 수준으로 이것은 아주 미개한 취식 방법이다.

 

왜냐하면 문화가 발달한 민족일수록 가공을 한 음식물들을 주로 섭취한다.

그들은 쌀, 보리, , 콩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일단 빻아서 가루로 만든다.

그리고 다시 여러 가지 영양이 담겨져 있는 원료를 섞어서 반죽하고 구워서 먹는데

이러한 가루 중에서도 굵은 가루보다는 고운 가루일수록 맛이 좋고, 값도 더 비싸다.

 

그래서 우리 집의 경우는 쌀이나 보리 등을 가루로 내어 빵을 해 먹는다.

여자들이 부엌에서 해방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이점도 있다.

우리 집처럼 손님이 많이 찾아오는 집도 드물 것이다.

 

하루에 20~30명의 손님을 맞이하는 건 흔한 일이며,

많을 때에는 1백 명이 넘게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 집은 손님 대접이라고 해서 특별나지 않는다.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구워놓은 빵을 대접하면 되니,

손님들이 몰려온다고 해서 어려울 것도, 크게 돈이 들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집은 그 많은 손님들이 와도 언제나 즐거우며 부담감이 없다.

손님들이 와 주어서 즐겁고, 함께 있어서 즐거우며,

편히들 있다가 고맙게 생각하고 가니, 모두가 즐거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먹는 것만큼이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있다.

우리의 웃옷이며 외출복인 두루마기는 세월이 흐르고 생활이 바뀌었지만,

소매가 약간 좁아졌을 뿐이다.

 

여자의 치마 저고리, 남자의 바지 저고리 등은

도무지 그것을 입고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옷들이 아니기 때문에 실용성이 없다.

특히 흰색으로 만들어진 옷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도시의 직장인들이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양장만 해도 그렇다.

빳빳하게 세운 바지의 줄이나 하얀 와이셔츠, 목을 꽉 옭아매는 넥타이,

자리에 앉으면 속옷이 보일 정도의 짧은 치마와 몸에 딱 달라붙는 옷 등

도무지 일하기 위해 입는 활동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실생활에 알맞은 복장으로 고쳤다.

국산 옷감으로 만들되, 간소하고 내구성이 강하며,

염색한 옷감에 활동이 편하고, 보기 좋은 것 등에 기준을 두어

남녀복, 외출복, 작업복 등을 직접 고안해 만들었다.

 

그래서 남자들의 외출복도 넥타이를 매지 않는 국산 양복으로 했고,

구두 대신 고무신을 신도록 통일했다.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

당장 먹기에는 곶감이 달다라는 말은

우리 민족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목전의 이익을 위해서는 장차 거둘 수 있는 커다란 이익을

예사로 버리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다. 시야가 좁고 계획성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자녀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심어주는 대신 좀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고, 책 대신에 과자를 사주는 것이 우리나라의 부모들이다.

 

농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논밭을 장만할 때에도 토질이 좋을 것을 찾지,

토질이 나쁜 것을 값싸게 사서 개량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다.

노력이 요구되는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이다.

 

그래서 기름진 논밭을 가지고도 우선 편한대로 금비(金肥)만으로 농사를 짓는다.

그러다 토지가 산성화되면 팔거나 개토를 한다. 집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에서 살다가 집이 낡으면 고쳐서 살기보다는 그 집을 팔고 다른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

 

그래서 나는 이와는 반대로 나쁜 토지만을 골라서 산다.

값이 싸기 때문에 많은 땅을 살 수 있고,

몇 년만 공을 들여 일을 하면 좋은 땅이 되니 그걸 사는 것이다.

 

집 또한 마찬가지이다. 낡은 집을 싼값에 사서 조금만 손을 보면 새집처럼 되니

그때 팔더라도 많은 이익을 얻게 된다.

 

농촌에 가보면 넓은 울타리 안에 과수 하나 없는 집들이 많다.

과수를 심어놓고 3년이나 4년만 기다리면 과일이 열릴 터이지만,

그걸 어떻게 기다리냐? 이 집에서 그때까지 살지 안 살지도 모르는데

구태여 그런 것들을 심을 필요가 있느냐?’하는 마음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들을 보면서, 사람의 수명이 얼마나 된다고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혀를 찬다. 어불성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사람의 생명이란 그렇게 짧은 것도 아니며,

내가 하는 고생은 결코 고생을 하기 위한 고생이 아니다.

 

장차 편히 살기 위한 고생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당장은 나보다 편안할지 모르지만,

앞으로의 영원한 고생이 그 사람의 대를 이어 따르게 될 것이다.

 

나는 다각 영농을 한다. 우리나라 농촌의 경우, 한 가지 농사만 짓는 게 고질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 봄에 못자리를 하면 모가 자랄 때까지는 한가하다.

그리고 모를 심고 결실할 때까지 또 한가해진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들이면 또 겨울에 할 일이 없어진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농사꾼들은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다.

이건 놀고 싶어서 노는 게 아니라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노는 것이다.

 

그것은 벼농사 한 가지만을 짓기 때문에 비롯된 일이다.

밭에다 여러 가지 농작물을 곁들여 지어보라.

절대로 놀래야 놀 시간이 없게 된다. 이놈을 거둬들일 때는 저놈이 싹이 트고,

저놈을 거둬들이면 이놈이 또 싹이 튼다.

그야말로 1년 내내 거두고, 가꾸어야 한다.

 

또한 축산을 같이 하기 때문에 잠시 동안도 한가한 시간이 없게 된다.

연중무휴로 일하는 사람과 절반쯤 손을 놓고 지내는 사람과의 수입은

굳이 비교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농사만 지을 때, 만약 그 농사가 흉년을 맞게 되면 굶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각농을 하면 한두 가지 농사가 흉년을 만나도 끄떡없다.

그런 잇속을 사람들은 왜 저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비단 1년 농사만을 그렇게 짓는 것이 아니다. 나는 처음 토지를 구입하게 되면

적어도 5년 내지 7년 동안의 계획을 세워 그렇게 밀고 나간다.

 

처음에는 몇 년 후의 수확을 계획하고 과수를 심는다.

그리고 고구마와 기타 작물을 간작한다.

 

간작물은 당년에 수확하지만 과수들은 2년 후, 혹은 3년이나 5년 후에나 수확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간작물이 실패할 경우 과수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완전한 실패가 아니며,

과수들이 실패를 해도 그 역시 완전한 실패는 아닌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야 한다

 

우리 민족의 의뢰심은 사대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반만년이라고들 하지만,

그 중에서 완전한 주권국가로 행세한 때는 상고시대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 밖의 세월은 강대국의 침략으로 그들의 지배를 받고 살거나 그 그늘 밑에서 살아왔었다.

 

그 족적을 살펴보자면, 삼국시대는 중국 당나라의 그늘 밑에 살았고,

고려 4백여 년은 원나라의 침략사이다.

그리고 조선 5백여 년은 명나라와 청나라를 상전국으로 섬겼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사이며,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미국의 원조를 받으면서 그 그늘 밑에 살고 있다.

 

이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큰 나라들이고 힘이 세며, 돈이 많고 문화가 발달된 나라들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그들의 지배를 받거나, 살아남기 위해선 그들을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온 글들도 그 의뢰심을 배양하기에 알맞은 글들이었다.

중국의 지배하에 있을 때에는 한문을 배웠고,

일본에게 병탄을 당했을 때에는 강제로 일본글을 배웠고,

그 일본글을 잘해야만 먹고 살기에 편하도록 교묘하게 조종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학생은 물론이고, 일반인들까지도 영어를 배워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시기가 되었다.

 

우리의 역사를 살펴보자.

신라의 삼국통일은 당나라의 힘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당나라를 숭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조는 혁명으로 건국되었지만, 우리 왕이 중국의 왕을 천자로 섬긴다는 조건하에

그들의 승인을 받았고, 비로소 나라 행세를 했다.

 

이조 말엽에는 정치인들이 세 파로 갈라져 러시아를 받는 측과 일본을 받드는 측,

그리고 중국을 받드는 측으로 나뉘어 서로 큰 나라들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 민족의 사대 사상은 하루 이틀에 젖어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에게서 이 사대 사상을 뿌리뽑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주체성과 진정한 독립성을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이 사대 사상,

즉 의뢰심을 없애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일을 한다.

 

의뢰심을 없애고 자립심을 키우기 위해선 어릴 때부터 자립심이 길러져야 하므로

어린 아이들에게도 각기 일감을 맡기고 제 할 일은 어른이 절대로 도와주지 않는다.

가령 어린아이가 넘어져도 절대로 일으켜 주지 않으며, 제 스스로 일어나게 만든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민족이 우리 민족이다.

이 병폐는 극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파싸움이나 감투싸움 등도

바로 단결력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이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백성들인데 협력하지 않고

협동하지 않으며 분열만 일삼고 있으니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가족들이 단합하지 않고, 부자간과 부부간 모두가 제각각으로 행동할 때

그 가정은 파괴된다. 그래서 우리집은 가족들이 사랑으로 단단히 뭉쳐지도록

모두가 노력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가장 첫 번째 사업이므로

나는 그 사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가족을 사랑하는 일보다 더한 급선무는 없다고 하셨다.

 

가정에 대한 의무를 등한시 하는 자들은

다른 영혼들을 위해 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기에 앞서 자기 가족에 대한 사랑을 먼저 분부하셨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에 대한 사랑을 우선한다.

 

우리 집은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기도로 일을 시작하고,

가정에 기쁜 일이 있으면 온 가족이 함께 모여 합창으로 즐긴다.

그리고 지금 집에서 운영하고 있는 농군학교도 온 가족이 단결하여 함께 해 나가고 있다.

 

남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는 자세 또한 우리 민족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이것도 단결력이 부족한 병폐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봉사 정신으로써 농군학교의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이 교육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가족들이 모두 도와주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를테면 전 가족 모두가 교직원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학생들을 가르치고, 며느리와 딸들은

그 학생들의 하루 세끼 식사를 제공해야 하며, 아내는 어린 손자들을 돌봐야 한다.

 

그리고 교육기간에는 아이들까지도 제 마음대로 놀지 못한다.

우리 가정의 생활 그 자체가 학생들이 보고 배우는 교재이기 때문에

세 살짜리 손자 놈의 행동도 교육적이어야 하므로

평시에도 철저히 훈련을 시킨다.

 

그래서 우리집 어린 손자와 손녀들은 절대로 일하는 어른들에게 매달려 칭얼대거나,

군것질을 하거나, 놀다가 넘어져도 누가 일으켜 세울 때까지 울고 있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힘으로 해나가도록 교육시킨다.

 

또한 학생 수가 많을 때에는 갓 시집온 며느리 방이 학생들의 침실로 제공되지만,

며느리는 절대로 불평하지 않는다.

그만큼 전 가족이 무언가 배우러 온 학생들에게 총력을 기울여 봉사한다.

이것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를 맞고 깨닫다

 

아버지가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의 학생총회 주최의 강연 요청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간에 맞춰 가니 2천여 명이 될 듯 싶은 대학생들이 강당을 가득 메운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의 연제(演題)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상대가 학생들이니만큼 아버지는 어려서 글 공부를 하던 얘기부터 시작했다.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집안이 가난하여

외지에 나가 학교에 다닐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그래서 13세가 될 때까지 짚신을 신고 마을의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훈장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문리(文理)가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는데,

그 말은 배운 것을 그대로 실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훈장 선생님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그 한학(漢學)은 내게 커다란 회의를 가져다 주었다.

 

어느 날 서당에 갈 때는 비가 내리지 않더니 집에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당에서 우리집까지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서 오자면 비를 별로 맞지 않고도 올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나는 뛰지 않고 천천히 평보(平步)로 걸어왔기 때문에 결국 옷을 모두 적시고 말았다.

 

왜 뛰지 않고 평보로 걸어서 왔는가 하면,

글에서 배운 대로 군자(君子)의 걸음걸이는 아무리 급한 때라도 마땅히

두용직(頭用直), 수용공(手用恭), 족용중(足用重)’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나는 젖은 옷을 갈아입을 만한 다른 옷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체온으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불편이 어떠한 것인지는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리고 내가 유학(儒學)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우중에도 비를 맞고 천천히 걸어야 하는 것이 군자의 도()일까?

그런 군자의 도를 무엇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다. 유학에서는 시서예악(詩書禮樂) 중에서도 예()를 가장 중히 여겼는데,

그 예에는 관(), (), (), ()례 등 그 예에 대한 서적만도

예기(禮記) 6권과 주례(周禮) 6권이 있으며,

 

어른에게 인사를 할 때도 조부모에게는 아침과 저녁 때에 어떻게 절을 하고,

부모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며, 이웃 어른들에게는 어떻게 절을 한다는 등

그 대상에 따라 허리를 굽히는 정도까지 모두 다르다.

 

예절은 인간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미풍(美風)을 가져다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예문일체(禮文一體)라고도 한다.

 

그러나 예절에 필요한 형식이 그처럼 번잡하여

인간생활의 가장 귀중한 자유를 속박한다면

이것은 예절의 본의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우리나라 민족의 원기가 쇠퇴한 원인이

그러한 예절로써 모든 생활을 속박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난 5백여 년 동안 소위 양반 자제의 행동이란 일거수일투족을

그 고정된 형식에 부합시켜야 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 학자들의 연구 논란의 초점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예문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산업이 쇠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어려서 깨닫고 그 한문을 집어치웠다는 얘기를 학생들에게 했다.

그리고 신학문을 조금 한 다음에 농사꾼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얘기를 했다.

 

 

농사꾼은 천하다?

 

아버지가 농사꾼이 된 직접적인 동기는 할아버지의 유언에 의해서였다.

할아버지께서 농사야말로 나라 산업의 대종(大宗)이다.

그래서 지식인 중에서도 지식인이 지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역대로 지식인들이 농사를 기피하고 무식한 촌맹(村氓)들만이 농사를 지었다.

 

그러니 산업이 부흥하지 못했고, 나라가 회복하려면 우선 경제자립을 해야 한다.

그러니 너는 꼭 농사를 지어서 모든 국민들에게 그 모범을 보이도록 해라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아도 옳은 선견을 지니신 말씀이다.

오늘날에는 조금만 글을 배웠다 하면,

의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사무실 의자에 앉으려 하고,

또 글을 배우러 학교에 다니는 목적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아예 땅일랑 파먹고 살 생각 말아라. 네 애비는 무식해서 땅 파먹고 산다만,

너만은 농사꾼을 만들 수가 없다.”

 

이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아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답을 서슴없이 팔곤 한다.

이렇게 공부를 한 아들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곧 취직이라도 되면 다행인데,

그나마도 취직을 못하고 노는 수가 많다.

 

그럴 때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서 고향에 내려와 농사라도 지어라하지는 않는다.

농사가 원수인데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하숙비를 계속해서 대줄 테니 놀아도 서울에서 놀아라.

아예 시골에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말아라. 이웃에 창피하다.”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하숙비를 계속 대주면서 동네 사람들에게는

우리 아들이 지금 판사될 공부를 하네라며 거짓으로 자랑을 한다.

 

이것은 어디에서 온 사상일까?

한마디로 말해서 조선(朝鮮) 5백 년의 악정이 빚어낸 결과이다.

태조 이성계는 무용(武勇)이 뛰어난 북쪽의 남아였다.

고려의 사직(社稷)을 빼앗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보니,

자손만대까지 그 자리를 영원히 물려주고 싶은 야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속담처럼 속환한 중이 동냥을 더 안 준다는 말과 같은 이치이다.

 

그는 임금의 자리를 영원히 지킬 수 있는 비결이란, 북쪽의 무용을 꺾어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무용을 억제하고 선비를 숭상하는

이른바 숭문억무(崇文抑武) 정책이었다.

 

문관(文官)이란 자리에 오르기가 실로 하늘의 별과 같이 따기 어렵게 만들었고,

귀하게 대접했던 것이다. 그러니 천하의 부모들은 저마다 아들로 하여금

그 별을 따는 선비, 즉 양반이 되기를 바랐으며,

무인이 되어 나라의 간성(干城)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 악폐는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용이 많은 북방인보다는

글 잘하는 남방인만을 주로 등용함으로써 조정은 거의 남방인 일색이 되었다.

 

그러니 결국 일국이 모두 문약(文弱)해져 버린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이 문약의 결과로 임진왜란을 비롯해서 여러 외적들을 불러들여

백성들로 하여금 갖은 질곡을 다 겪게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나라를 왜국(倭國)에 빼앗기는 결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폐해로 마침내 국민들은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사상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가 외적뿐만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일하기 싫어하는 기풍 때문이라도

못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수십만을 헤아리는 남아들이 과거(科擧)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과거의 문이란 좁기가 바늘귀 같은 것이라서 몇 사람만 등용되고는

모두가 실업자로 전락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실업자들은 글을 배웠다는 것을 구실로 일은 하지 않고

배가 고파도 찬물을 마시면서 시()나 읊조리며 지냈다.

이러한 사람들이 내가 늘 말하는 불한당들이다.

이마에 땀 한 방울 안 내고 좌식(坐食) 와식(臥食)하는 무리들이란 뜻이다.

 

 

나보다 이 댁이 혁명을 먼저 했습니다, 그려.”

 

나는 농사를 짓되 좋은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은 것이 아니다.

남들이 버리다시피 한 땅만을 골라 헐값으로 사서 개간한 후 농사를 지었다.

가족끼리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짓다가 땅이 비옥해지면 그걸 다시 팔고,

다른 곳의 못 쓰는 땅을 더 많이 사서 다시 개간했다. 이런 식으로 20대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거처를 다섯 군데나 옮겨 다니며 개간을 했다.

 

첫 번째 개간한 것은 고향인 봉안의 이상촌이다.

두 번째가 고양군에 있는 구기리의 농도원, 세 번째가 용인의 에덴농장,

네 번째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가나안 농장,

그리고 또 개간에 착수한 곳이 강원도 신림에 있는 15만평의 돌산이다.

 

그때마다의 고생은 이 자리에서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새로운 장소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천막을 트럭에 싣고 가서 천막생활부터 시작했다.

 

에덴 농장을 개간할 때에는 식량마저 모자라서 밥그릇을 1, 2, 3호 등급으로

그 크기를 달리 만들어, 가족들이 각기 일한 성적만큼 밥을 먹도록 했다.

 

하도 일이 고되고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아서

한번은 둘째 아들이 도망쳤기 때문에 그 아이를 찾느라고 혼이 난 적도 있다.

 

가나안 농장 초기에는 더욱 비참했다. 내 안사람이 광주리 장수를 5년이나 했다.

호박이며, 깻잎, 고구마 등을 광주리에 담아 이고, 20리 밖에 있는

천호동 시장에 내다 팔아서 쌀과 보리쌀로 바꿔 그것으로 먹고 살았다.

 

이렇게 해서 가나안 농장을 14년 걸려 완성해 놓으니, 처음에는 비웃던 이웃 사람들이

내게 찾아와 개간하는 방법과 사람이 사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가나안 농군학교이다.

 

지금은 상당한 발전을 해서 훌륭한 강의실과 침실도 마련했지만,

초기에는 우리 집이 모두 강의실이었고 배우러 온 사람들의 침실이었다.

그때는 자기 먹을 것만 마련해 오면(지금은 식대로 약간의 돈을 받지만,

초기에는 양식으로 받았다) 함께 밥을 해먹고 자면서 그들을 가르쳤다.

 

이렇게 시작한 일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44만여 명의 졸업생을 냈고,

우리 집을 견학한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백만여 명이 훨씬 넘는다.

 

박정희 대통령이 5·16혁명 후 처음으로 사가(私家)를 찾은 것이 우리 집이었다.

그때 나는 우리 집 식구들이 평소에 먹던 대로 고구마와 식빵을 점심으로 대접했다.

나는 20세 이후부터 지금까지 하루 두 끼 이상 밥을 먹어 본 일이 없으며,

그 중 한 끼는 반드시 고구마와 빵으로 대용했다.

 

그리고 반찬은 지금까지도 한 끼에 두세 가지 이상 상에 놓는 일이 없다.

먹는 것뿐만 아니라 입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온 식구가 외출복이건 평상복이건 언제나 코르덴 옷으로 통일했으며,

가족들 중에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본 이가 없으며 구두를 신은 적도 없다.

 

자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연탄이 흔한 편이므로 시류를 좇아 불을 때고 자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겨울에 마루방에서 그대로 잤다.

그 대신 창을 이중유리창으로 해서 낮 동안에 태양열을 받아

온기를 오랫동안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지금의 가나안 농군학교 사무실이 바로 우리 식구의 살림방이었기 때문에

직접 와서 본 사람은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나보다 이 댁이 혁명을 먼저 했습니다, 그려.”

박정희 대통령이 우리 집을 둘러보고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

나는 45년 전부터 집안에 혁명을 일으키며 살았고,

온 나라가 거국적으로 했던 새마을운동도 나는 45년 전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며 살아온 셈이다.

이렇게 열심히 살았더니 1966년도의 막사이사이상이 나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자랑하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아니다.)

농사꾼으로 이러한 상을 탄 것이 세계에서 내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나는 평생동안 예수를 믿으며 산 사람이다. 나에게 이 모든 용기와 신념을 준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그래서 막사이사이상을 탄 수상 소감도 그렇게 말했다.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길은 농사를 통한 식량의 증산밖에 없으며,

영혼의 타락은 신앙으로 길잡이를 하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괭이를 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차 이 지구의 표피가 아름다운 과일들이 영그는 에덴동산이 되고,

전 인류가 이 에덴동산에 복귀하여 행복하고도 자랑스러운 영원한 삶의 터전이

되게 하는 길은 오직 그 길밖에는 없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이 에덴동산에 그 새싹이 날 때까지, 그 길잡이로서 선두에 서서

깃발을 흔들고 종을 울려 내 뒤의 사람들을 따라오게 하려는 것이 나의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류에게 가르치신 교의는 근로, 봉사, 희생입니다.

그분 자신이 직접 노동을 하여 자주적으로 육신을 영유하였으며,

그의 아버지인 조물주께서도 엿세 동안의 노력으로 이 우주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에게도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전쟁이란 근로의 노력없이 약한 자의 것을 빼앗아 먹는 행위이며,

근로의 소산을 파괴하고 소멸시키는 행위이므로

이는 신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죄 중에서도 가장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벌이 내려집니다. 서로 죽이고 죽으며, 모든 것이 불바다가 되는 전쟁.

그 자체가 죄에 대한 형벌이며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근로를 통해서만이 평화와 행복은 있는 것입니다.

 

봉사 역시 예수께서 직접 모범을 보인 일입니다.

이웃을 돕고 도움을 받는 가운데 서로의 사랑이 움트고 복된 기쁨이 오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십자가의 정신입니다. 작은 것을 희생하여

보다 큰 것을 획득하는 정신입니다. 나를 희생하여 상대방을 구하는 정신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자기를 포기할 때, 최고의 사랑이 이루어지며,

서로가 살게 되고, 그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성취하게 되는 삶의 길입니다.

 

2천여 년 전,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하신 것이

그분에게는 큰 손해이며 패한 것이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그때의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천여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까지 눈물을 흘리며 그분을 구세주로 섬기고 따르니,

이보다 더 큰 승리가 어디에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성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몸소 제자의 발을 씻겨줌으로써 살아서의 사랑을 보이셨고,

스스로의 몸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여 멸망할 수밖에 없는 온 인류에게

회개와 구원을 얻도록 예수님이 희생의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러한 사랑이야말로 가정생활, 사회생활, 국제생활,

더 나아가서는 온 인류의 생활을 참사랑으로 만드는 지상의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근로, 봉사, 희생의 이념이 인류생활의 진리이며

인류 평화의 근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진리와 근본을 아직도 따르지 않고 있으며

인간이 꾸미고 조작한 지식에서 나온 수단과 술법으로 인생의 사는 길을

열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며, 헛된 짓이 될 수밖에 없고,

나아가서는 스스로 불속에 빠져드는 결과를 빚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과 고통과 죽음을 방비하기 위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사랑의 교의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는 끝으로 이 자리에서 빈궁을 몰아내자, 평화를 이룩하자, 영생을 얻자

라는 구호를 소리높이 외쳐 부릅니다.”

 

 

복 받기 좋아하는 사람들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치고 복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유난스럽게 복이란 글자만 보아도 좋아하고,

또한 그 복이 거저 굴러오기를 바라는 국민들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밥을 담아 먹는 주발이며 수저에도 이란 글자를 새겨 넣고,

입고 다니는 의복이나 잘 때 사용하는 베갯모에 이르기까지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집을 지을 때도 기왓장이나 대들보, 담벼락까지 으레 이 자가 새겨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 흔한 복이란 꼭 그렇게 해야만 들어오는 것일까?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복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하는 행동들을 보면

복이 오려다가도 절로 달아날 짓들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가령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생전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의미에서

좋은 묘자리를 찾아 장례를 지내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데 묘 자리를 찾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다. 명당자리에 부모의 묘를 씀으로써

자신의 부귀영화를 바라는 마음이 무엇보다도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청룡 우백호가 어떻고 무슨 혈과 맥이 어떻고 하며,

그 명당을 찾느라고 몇 달, 몇 년 아니 평생을 허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해서 묘를 써 놓고는 집 식구들 중에 누가 병이라도 걸리면

산소를 잘못 써서 일어난 일이라며 그걸 또 파서 옮긴다.

내 고향의 어떤 사람은 조상의 묘를 한밤중에 몰래 파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유골을 몇 개 잃어버린 사람까지 있었다.

 

이런 일이 어찌 그 사람뿐이며 어찌 묘 쓰는 일뿐이겠는가.

여기에다 집을 지으면 무슨 산이 뒷덜미를 둘러싸고 있고

무슨 맥이 어디로 이어가고 있어서 좋다는 등 하며 집터를 고르고 골라

집을 짓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렇게 정신없이 복을 찾아 세월을 보내온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이다.

사람들은 눈만 크게 뜨고 손발만 부지런히 놀리면 천지가 복인데도

그걸 모른다. 바다에는 물고기 천지이고 야산을 개간하여

과일나무를 심으면 거기도 주렁주렁 복이 열릴 터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모른다. 그래서 무조건 자리에 퍼질러 앉아서

복 주시오, 복 주시오하며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것이 우리나라 백성이다.

 

이야기는 좀 다르지만, 우리가 늘 부르는 애국가 하나만 제대로 불러도 복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

애국가의 구절들을 잘 새겨서 성의껏 부르고 그 내용 그대로 이행만 한다면

나라가 잘되기 이전에 자기부터 잘될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걸 부르기 싫어서 마지못해 부르거나, 또 부른다 해도 가사를 잘 몰라서

어물어물 옆 사람의 입에 맞춰 입만 뻥끗하니

나라가 잘되고 자기가 잘될 리 만무한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어떤 행사장에 가보면 바쁘다고 1절만 부르거나 때로는 그나마 생략해 버리곤 한다.

애국가를 그 따위로 부르고서 뭐가 잘되기를 바란단 말인가?

 

덴마크의 위대한 애국자 그룬트비히는 1807년 영국과의 해전에서 덴마크가 참패했을 때

용사 윗모스라는 노래를 지어 절망에 빠진 덴마크 국민들을 고무하여 사기를 진작시켰다.

 

그룬트비히는 패전사를 덴마크 청년들에게 강의하는 자리에서

포악한 영국 해군의 압도적인 위력에 대항하여 덴마크의 해군과 의용병들이

조국 덴마크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얼마나 용감하게 싸웠는가를 역설하였다.

그리고는 사관인 파티 윗모스가 용감하게 분전하는 모습을 노래로 만들어

덴마크 국민의 가슴속에 선명하게 부각시켰던 것이다.

 

이윽고 그 노래가 덴마크의 온 국민들에게서 널리 애창되었으며

그것을 계기로 덴마크 국민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연료가 된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덴마크의 패전은 덴마크의 참패가 아니라,

오히려 덴마크 국민의 애국심을 고양시켜 준 값진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덴마크 국민들은 번번이 진 전쟁에 있어서도

이긴 전쟁보다 더 값진 역사를 만들어 살 길을 찾았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천지에 굴러다니는 게 모두 복인데도 불구하고

손발을 움직여 잡으려 하지 않고, 주발이나 수저 등에 자만 써놓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복이 스스로 굴러들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다.

 

복 사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걸어갈 때나 만원버스를 탔을 때,

호주머니 속에 만 원이 있을 때와 10만원이 있을 때의 심리상태는 달라진다.

액수가 많을수록 불안해지고 주위 사람들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살인강도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돈을 빼앗으려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돈 때문에 사람을 덤으로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소유를 늘려 주지 말고 욕망을 줄여줘야 한다.”

 

복을 가장 적절하게 풀이한 말씀이 성경에 있다.

 

나를 가난하게 하지 마옵시고, 부하게도 만들지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만을 내게 먹이소서.

그것은 내가 배불러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렵기 때문이며,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을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과부족이 없는 상태가 가장 행복한 상태라는 의미인데,

우리 동양에서는 안빈낙도가 이와 비슷하고, 이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한 말이 공자의 중용론이다.

 

한 쪽으로 치우치면 금수가 되고, ()이면 삶이 된다.

()인즉 치우치지 않음이요, ()인즉 바뀌지 않음이다.

()만으로는 그 의미를 다하지 못하므로 중용(中庸)이라 했다.’

 

중용은 인간이 사는 가장 바른 길이고, 성경에서 말하는 나를 가난하게 하지 마옵시고,

부하게도 만들지 마옵시며의 말이 곧 그 내용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사는 가장 바른 길이므로, 이러한 바른 길을 걸을 때

행복이 수반됨은 두말 할 것도 없는 일이다. 앞에서 나는 참 복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참 복인(福人)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설명했다.

이처럼 참 복인들만이 모여서 된 백성을 복민(福民)이라고 하는데,

한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복민이 되는 길을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다.

 

나는 평생을 그 운동에 몸을 바쳐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평생을 해온 일이건만 아직도 이렇다 하고 내놓을 만한 성과를 거둔 것도 없다.

 

그래서 나는 그 길을 가나안으로 가는 길이라는 제명으로 책까지 쓴 적이 있었다.

가나안이란 구약시대의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땅에서 자손만대에까지 번성하도록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지금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 땅은 정치, 경제, 신앙의 세 가지 의미를 지고 있다.

 

첫째, 정치적으로는 신과 약속한 희망의 땅임을 의미하는 것이고,

둘째, 경제적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영원한 복지(福地)임을 의미하며,

셋째,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이 선택하여 감독하는 신성한 땅임을 의미한다.

 

이처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길이 내가 주장하는 복민운동의 길이며,

얼마나 멀고 험하며 외로운 길인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모세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지도자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이웃을 위해 살아가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하루라도 빨리 가나안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곧 내가 사는 길이기도 하다.

 

 

교통벌과금을 물은 대통령

 

내가 막사이사이상을 타기 위해 필리핀에 갔을 때 막사이사이라는

위대한 정치가에 대한 수많은 일화를 접할 수 있었다.

 

막사이사이퀴리노 정권의 국방상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는 공산당인 후크단의 준동이 심하여 국정은 지극히 어지러운 상태였다.

2천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 도처에서 후크단의 게릴라 공세가

연이어 벌어졌으므로 마치 미군정 하의 한반도처럼 정치정세가 극도로 불안하였다.

 

그러나 막사이사이가 국방상에 취임하면서 필리핀의 사정은 일변했다.

그가 국방상으로 취임한 지 2년 만에 후크단이 설 땅을 잃었던 것이다.

 

그는 필리핀이 공산당의 온상으로 변하게 된 것은

정부와 군에 만연된 부정부패에 의한 것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정부와 군부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부정부패의 제거야말로

후크단을 소탕하는 첩경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방상에 취임하자마자 군부 내의 부패 장교를 일소했으며,

군기를 바로잡고 대민 선무공작을 강화했다. 또한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자,

군의 전력을 투입하여 부정선거를 철저하게 방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필리핀에는 총투표자수가 유권자의 총수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이 남국의 선거는 산의 새와 들의 짐승, 그리고 죽은 망령들까지 나와서

투표한다며 세계적인 조롱을 받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국방상인 막사이사이의

철저한 감시하에 치러진 선거는 문자 그대로 공명선거가 되었다.

 

그 결과는 상당히 고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정과 부패가 점차 사라지며 선정(善政)이 실시되자,

필리핀 민중은 후크단을 차츰 외면하기 시작했고,

끈질기게 정부에 대항하던 후크단은 민중의 지지를 잃게 되자 속속 투항했던 것이다.

 

이러한 업적에 힘을 얻은 막사이사이는 국민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다.

1950년 대통령 선거에서 퀴리노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만약에 베트남에도 한 사람의 막사이사이가 있었다면 베트남 적화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공산화된 나라의 국민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방송매체를 통하여

여러분들도 상세히 접했을 것으로 안다.

 

망망대해를 표류했던 보트피플(선상 난민)의 참담함은

지도자의 부재로 인한 구김들의 분열과 대립, 무질서와 법의 존엄성 상실,

그리고 방종과 부패 등이 가져온 결과이며 베트남 국민들이 법과 질서,

의무와 책임을 외면한 당연한 대가(代價)인 것이다.

 

각설하고, 대통령이 된 막사이사이가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자신의 전 재산을 국민 앞에 공개한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직을 사임한 후에 자신의 재산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늘어난 것이 있다면

국민의 가차없는 심판을 받겠다고 선언했다.

 

공직자 재산등록 제도를 1950년에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직접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비행기 사고로 서거했을 때, 막사이사이의 미망인은

대통령 관저를 떠나 옮겨갈 집조차 없을 정도로 재정이 빈궁한 상태였다.

 

이러한 청빈함을 실제로 접한 필리핀 국민들은 막사이사이 대통령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했으며, 미망인의 딱한 사정이 전해지자,

필리핀 의회는 대통령 미망인에게 집을 사서 기증할 법적인 근거를 마련했다고 한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이 법을 지킨 일화 가운데에는 이런 것도 있다.

 

막사이사이 대통령을 태운 승용차가 속도위반으로 교통경찰에게 벌금을 문 일이 있었다고 한다.

교통 규칙을 위반한 대통령에게 벌금을 부과한 교통순경,

그리고 교통순경이 그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대통령,

그리고 흡족하게 그 벌금을 낸 대통령의 일화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한

내 자신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물론 대통령은 의전이나 보안상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막사이사이 대통령은 대통령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포기하고

순순히 벌금을 냈다. 이것은 법치주의가 아직 자리잡지 못한 나라에서

모범을 보이기 위한 배려였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처럼 법의 지배’, ‘법에 의한 통치가 살아 있는 예를 막사이사이 치하의

필리핀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점은 막사이사이의 사후 필리핀이

이러한 위대한 업적을 그대로 전승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자신있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 어느 나라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국민의 잘못이 아니라 통치자의 잘못이라고 굳게 믿는다.

 

필리핀의 국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나라의 정치는 막사이사이 시대와 지금,

그리고 그 이전이 너무도 판이하게 다르다.

그리고 현재 필리핀에 만연된 부정부패와 경제적 빈곤상을 보면서

지도자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 우리는 값비싼 교훈을 얻게 되었다.

 

모세의 율법과 준법정신

 

나는 여기에서 법과 계약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율법은 하나님과의 계약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많은 종족 중에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양자로 삼았음을 말한다.

그리고 양자로 삼은 이상,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여러 가지 계약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간의 이러한 계약 관계는 모세의 생애를 더듬어 보면 좀더 명료해진다.

모세의 일생은 양자 관계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히브리인 부모에 의해 갈대 바구니에 담겨 나일강으로 몰래 띄워 보내졌으며,

이집트의 파라오 딸에게 발견되어 그녀의 양자로 궁중에서 자랐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자각하였고, 자신의 민중들을 억압하는

잔인한 이집트의 근로감독관을 살해한 후 미디안(시내)으로 도망친다.

 

여기서 그는 미디안족의 사제인 이드로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파라오와의

끈질긴 투쟁 끝에 이집트에 있는 모든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나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받는다. 그것이 모세의 십계명이다.

 

이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신도 섬기지 말 것을 못 박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양자 결연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이것을 인간사에 적용하면 너는 오늘부터 나 이외의 그 어떤 사람도 아버지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계약과 같은 것이다.

만약 이 계약이 파기되면 모든 관계는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써,

그 순간 부친이 남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

하나님 이외의 잡신을 믿게 되면 하나님과의 모든 인연은 끊어지고 만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법률이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계약이다.

따라서 서구에서는 이 법률이 아주 엄격히 지켜진다.

또한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면서 감옥에서의 탈출을 거부하고

독배를 마신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파악하면 그의 심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라 사랑의 본보기

 

동방요배 거부와 신사참배 거부

 

내가 일제하에 겪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 신사참배 거부와 동방요배 거부, 그리고 창씨개명 반대 등에 얽힌

이야기들을 간추려볼까 한다. 이것은 민족의 긍지와 조국애를 되살리는 데

하나의 귀중한 경험담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제1의 개척지인 봉안 이상촌이 궤도에 오를 무렵, 나는 신사(神社)참배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신사란 일본인들의 민족적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신()을 떠받드는 곳으로,

그들의 국태민안을 빌고 호국영령의 영혼을 위로하는 장소였다.

그러니까 한국인이며 기독교도인 나로서는 처음부터 용납될 수 없는 존재였다.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가 공식적으로 표면에 나타난 것은 1935년 가을,

평남 도지사 야스다케가 도내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소집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도지사의 소집을 따라 회동했던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인 매큔(한국명 윤산온)

숭의여학교 교장인 스누크 여사는 야스다케의 위협과 감언이설에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완강히 거부했다.(한국기독교1백년 3)

 

야스다케는 격분했으나, 60일의 유예기간을 주겠다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60일 후에도 기독교 대표인들은 여전히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매큔은

마침내 학교에서 강제로 쫓겨나게 되었고, 평양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사참배 문제는 일본내의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하나의 고난이었다.

이시자카 요지로라는 일본의 인기작가가 쓴 젊은 사람이란 소설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미션 계통의 한 여학교에서 어떤 여학생이 젊은 국어 교사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천황 중에서 누가 더 높으냐?”는 질문을 한다.

교사들이 천황을 살아있는 신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순진한 여학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천황과 비교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천황이 더 높다면 그 교사의 신념과 신앙에 반하고 그리스도가 더 높다고 한다면

신변상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질문으로 젊은 교사는

애매한 답변을 하며 쩔쩔매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끝내 신자, 비신자 할 것 없이 모두 신사참배를 받아들였다.

군국주의의 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신앙과 체제에 대한 정면도전이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이 벌어진 뒤부터 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더욱 열기를 더해갔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 파고(波高)는 마침내 교회까지 파고 들었다.

 

1938910,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나라 교회사에 씻지 못할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그러니까 조선예수교 장로회 제27회 정기총회(총회장 홍택기 목사)

평양 서문교회에서 열렸는데, 그곳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여파는 우리 기독교계를 단숨에 휩쓸었고, 끝내는 봉안 이상촌에도 휘몰아쳐 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사참배를 둘러싼 소용돌이는 나의 장로 장립식 석상에서 벌어졌다.

따지고 보면 나의 장로 장립식은 신사참배 거부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우리 봉안교회는 교회 활동의 3대 목표를 신사참배 거부, 창씨개병 거부,

공출 거부로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양주경찰서의 미움과 주목을 받게 되어

봉안교회에는 목사가 올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장로라도 내세워 교회를 이끌어 가야 하는데,

장로회 법에는 30세 이상의 신자가 장로에 장립될 수 있다고 못 박아 두고 있었다.

당시 27세인 나는 당연히 이 규정에 저촉되지만, 목사가 올 수 없는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외가 인정되어 장로 장립을 받게 된 것이다.

 

나의 장로 장립식은 분위기부터 요란스러웠다. 조그마한 시골 교회에

3개 노회에서 목사님들이 40여명, 장로님들이 80여 명이나 왔고,

일반 신도들이 3백여 명이나 모여들었으니 요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과는 달라서 그때는 교회와 성직자 그리고 신도의 수가

극히 적었기 때문에 좀처럼 보기 힘든 큰 집회였다.

 

그러나 장립식은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다. 식순에 동방요배(東方遙拜)

황군장병무운(皇軍將兵武運)을 비는 1분간의 묵념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이것이 상식이며 당연한 순서였다.

 

그래서 일본 천황이 사는 동경쪽, 즉 동방을 향하여 절을 하는 동방요배는

모든 의식에 있어서 첫 번째로 해야 하는 필수적인 순서였으며,

중일전쟁이 본격화되어 가던 그 때인지라 일본 군인의 무운을 비는 묵념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식순이었으나 나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못합니다.”

 

3개 노회에서 온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을 비롯한 일반 신도들이

이 말을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나와 뜻을 같이 하는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이 말이 너무나도 놀라운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그들에게 내 소신을 분명하게 밝혔다.

 

제가 장로를 못하면 못했지, 계명을 범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27차 총회에서 총회장인 홍택기 목사와, 38차 총회에서 채 목사,

정 목사 등이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결의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신앙의 계율을 지키지 않는 자들의 야합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바쳐서라도 계율을 지켜야 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뜻을 저버린 행위입니다. 만약 동방요배를 꼭 해야 한다면,

차라리 장로 장립을 받지 않겠습니다.”

 

몇몇 목사님들이 꾸짖는 어조로 나를 설득하려 했다.

 

이미 노회에서 동방요배와 신사참배를 결의했는데, 웬 소란이오?

어서 식순대로 진행합시다.”

 

그러나 나는 끝내 반대했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파생되는 모든 문제를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간신히 장로 장립식을 마쳤다.

 

나는 예상했던 대로 양주경찰서에 끌려갔고 1주일간에 걸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그들의 고문 수법은 물 먹이기, 공중에 매달기, 손톱 밑 찌르기,

손가락 사이에 막대기 끼워 비틀기 등이었는데,

체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문을 나는 믿음과 오기로 견디어 냈다.

 

신사참배를 둘러싼 그들의 집요한 압력은 나의 장로 장립식 후에도 거듭 있었으나

이 또한 끝까지 물리쳤다.

그 때문에 여러 차례나 경찰서에 붙들려 갔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혹심한 고문을 받았으나,

나는 순교자가 될 각오로 끝까지 버텼다. 돌이켜 생각하면 기적처럼 느껴지는 일들이었다.

 

내가 이러한 일들과 연관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해방 후 많은 목사님들이

이른바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때문에 겪은 곤욕에 관해서이다.

일제하의 그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일제의 강요를 뿌리친다는 것은

일신의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방이 되고서 사람들이 동방요배를 이유로 그들에게 돌을 던졌으나,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굴종으로 너그럽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사참배 거부로 인하여 끝내 순교의 길을 택하신

우리 기독교계의 거목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에게 끝없는 추모를 보낸다.

 

 

농민은 나라의 주인이다

 

땀 흘리지 않았던 우리 조상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농업은 그 나라 경제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이 오늘날의 공업을 주도하는 국가이면서도 한편으로

농업을 매우 중요시하고 보호육성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의 태반이 농업이므로, 그 농업을 등한시하고서는

나라가 부유해지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를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학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예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그 학문 자체가 농업과는 거리가 먼 학문이었다.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하기는커녕 농사를 짓는 것은 천민이나 하는 짓거리이고,

똑똑한 사람은 놀고 먹어야 옳다는 것을 그 한문(漢文)이 가르쳤다.

 

그래서 농사는 바보들이나 짓는 것으로 알았고,

똑똑한 사람은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농촌으로 돌아가라

 

그렇기 때문에 소 팔고 논 팔아 공부한 학생이 자신의 공부를 마치면

그 훌륭한 지식과 기술로써 다시 소를 사고 논을 사서 농사를 더 잘 지어야 할 터인데,

그렇지가 못했다.

그들은 농촌을 버리고 도회지로 나가기 위해서 공부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농촌을 피폐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짓게 된 것에 대하여 늘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만일 농사 이외의 다른 직업을 가졌더라면 이처럼 행복감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취미를 중심으로 농사가 좋은 직업이라고 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라를 위해서 권하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에게라도 농사보다 더 좋은 직업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좋은 직업을 혼자만 누리지 않으셨다.

대학을 나온 자식들에게도 모두 농사를 짓게 하셨으며,

심지어는 법과를 나온 사위까지도 땀 흘려 농사를 짓게 했다.

 

농사는 정말 수지가 안 맞는가

 

흔히들 농사는 수지가 안 맞아 못 짓겠다고 한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부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을 한다.

농사는 정부가 짓는 것이 아니라 농민이 짓는 것이다.

수지가 안 맞을수록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 참 농민이다.

 

그래서 소출을 더 많이 내면 되지 않겠는가.

농민이 덕을 세울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보다는

우선 땀을 흘려 자기 일부터 똑똑히 하자.

 

그리고 생산하는 책임은 어디까지나 농민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정부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생산도 하지 않고 자기가 먹을 것도 제대로 짓지 못하면서

정부의 시책이 잘못되어 그렇다고 원망만 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일도 다하지 못하면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제 할 일은 자기가 하고,

제 집, 제 고장은 자기가 지켜야 할 것이 아닌가.

스스로 자기를 버리는 사람은 돌봐줄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농민을 위한 농민의 정부

 

정부는 누가 만드는가? 국민이 만든다. 우리나라의 경우,

농촌 인구가 특히 많으니 우리 정부는 우리 농민의 손으로 만든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을 뽑는 투표 때에는 엉뚱한 사람들에게만 표를 찍어 놓고는

그 사람들이 국회에 가서 하는 정치를 그르다고 탓하니,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겠는가. 죽은 나무에 비료를 주면 더 썩으며,

그 나무에 기생하는 버섯만 번창할 뿐이다. 산 나무에 비료를 줘야 잘 자라는 법이다.

 

우리집에도 선거 때가 되면, 입후보자들이 찾아오곤 한다.

그때 나는 그 입후보자들을 시험해 본다. 내가 경기도 광주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선 우리 광주군의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몇 호()나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런데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출신구의 기본적인 사항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출신구를 위할 것인가.

 

어떤 입후보자는 서울에서 커다란 방직공장을 한다는 사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네 회사의 종업원들에게 딸린 식구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며 모르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말한다.

 

자기가 월급을 줘서 먹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는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사람이 마음 놓고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월급이 적절한지를

검토해 봐야 할 게 아닌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월급만 주면서

일을 잘하느니 못하느니 한다면 나라의 큰일을 어떻게 하겠는가.

 

먼저 자기 할 일부터 똑똑히 해야 한다. 자신이 똑똑하면 자신의 손으로 뽑아서 된 선량들이니,

그 정치가 바로 설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정치를 잘못하거든 그땐 원망하라.

 

한 나라의 농사가 잘되어야 모든 것이 평화로운 법이다.

농사를 잘 지어서 백성들이 먹고 남은 것을 이웃의 부족한 나라들에게 나누어 준다면

어찌 나라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겠는가.

 

만약 위정자들끼리 전쟁을 하려 해도 곡식을 주고받는 사이라면 전쟁이 일어날 수가 없다.

아이들끼리 친한 집들이라면 어른들까지도 서로 싸울 수 없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이렇듯 개인의 행복이 농사에 있고, 국가의 번영 발전이 농사에 있으며,

인류 사회의 평화와 안녕이 농사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하루 빨리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우리가 잘 사는 길은 오직 농촌의 번영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크나큰 사명감을 가지고

누구를 원망하기에 앞서 자기 할 일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우리 농민의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가 부흥하고 쇠퇴하는 운명은

우리 농민들의 생각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싸움에 이기는 군인만이 진정한 군인이다

 

애국심을 배우는 승리대학

 

군인은 평화시의 의무기간 3년을 허송해서는 안 된다.

한 인간의 발전 단계로 보아도 20세에서 25세 무렵이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장래에 일할 수 있는 기반이 모두 그때에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군인들이 군대 생활 3년을 마치 3년 동안 대학을 다니는 것으로

생각하길 바라고 있으며, 그것을 권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 대학을 승리대학이라고 이름 붙였다.

 

일반사회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이 승리대학처럼 강한 훈련을 하는 학교는 없을 것이다.

또한 군대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특수한 정신교육을 배울 수가 있다.

이를테면 애국심, 전우애, 생명의 소중함, 죽음에 임하여 아낌없이 죽을 수 있는 정신,

상관에 대한 절대복종, 부하 사랑 등 이러한 체험 교육을 군대가 아니면

그 어디서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이처럼 좋은 대학에 들어가 허송세월을 보내며 3년 동안 밥그릇만 세다가

사회에 나와서야 되겠는가.

그것은 마치 나이를 세면서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짓이다.

 

군대가 하는 일은 싸움이다. 싸움은 이기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그 수가 많더라도 싸워 이겨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군인이다. 그래서 군대에서는 불가능이란 없다.

명령대로 움직여야 하므로 소총으로 원자폭탄을 가진 상대와 싸우라면 싸워야

하는 것이 군대이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도 역시 승리가 그 목표이다.

 

이러한 훈련을 3년이나 받고 사회에 나오면 무슨 일이든 못할 것이 없다.

가난을 몰아내고 한 가정을 세우는 일쯤은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보다도 목숨을 내놓고 싸워 승리를 거두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교와 지휘관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먼저 부대 내에서

사병들의 어버이가 되어, 그들을 가족으로 다스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는 지휘관은 사병들의 전투 지휘를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부하의 신임과 존경을 받지 못하는 지휘관의 작전 지휘는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패할 뿐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신임과 존경을 받을 수 있게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예비군의 적은 후방에 있다

 

현역 군인은 전방이 일선이고, 예비군은 후방이 일선이다.

그런데 후방에는 간첩보다도 몇 갑절 무서운 적들이 많다.

한재와 수재가 적이요, 도적도 적이고, 간음도 적이며, 불효도 적이다.

 

그러므로 예비군은 우선 후방의 적부터 무찔러야 하며,

이 싸움에서도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비군 자신이 부모에게 불효하면

그 자신이 적이므로, 자신부터 이겨야 한다.

 

집안에 도적을 두고 울 밖의 도적을 지켜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라 안에 적을 두고 변방에 나가 적을 지켜보았자 소용이 없다.

필시 나라 안의 적으로 인하여 나라가 무너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집안의 적, 마을 안의 적, 나라 안의 적과 맞서 사우는 것이

예비군의 임무이다. 그럼 여기서 옛날 신라의 화랑도 정신을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자신 안의 적을 물리치기 위해 화합과 충성의 덕을 존중하는

자세를 키웠다. 이것은 이웃과 화합하고 나라에 충성한다는 뜻이다.

 

둘째, 충효를 기초로 하는 사회 봉공의 정신을 길렀다.

 

셋째, 난시(亂時)에는 종군 출전하여 목숨을 티끌처럼 가벼이 여겼고,

평시에는 의를 태산같이 무겁게 하여 의가 아니면 천금을 줘도 굽히지 않는

고결한 기상을 길렀다.

 

그런데 오늘날의 예비군은 옛날의 화랑보다도 그 조직이 훨씬 더 크다.

그리고 연령으로 보더라도 나라의 중견들이며, 처자와 부모가 있고

이웃과 향리를 아는 사람들이므로 화랑보다도 더 강력한 조직을 구축할 수 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다. 아직 현역인 젊은 사람들이라면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명령만으로 기꺼이 싸울 수가 있으나 예비군은 그것만으로는 싸울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싸우는 목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따지게 되는 연령이며,

부모와 처자가 연관되지 않는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마을의 중심이고, 마을은 나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그 가정을 사랑하는 방법에서부터 예비군 훈련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비군의 교육을 간첩잡기와 전쟁 대비의 목적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라를 부강시키는 데

250만의 중견 젊은이들이 쓰일 수 있도록 실질적인 교육을 거듭 바라는 바이다.

 

군인을 사랑하는 국민이 되자

 

우리나라 사람들의 군인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좋지 않다.

사실 군인들 때문에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존재를 과히 중요시 여기지 않고 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역대 사회제도의 잘못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산업을 담당한 농민과 함께 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병졸을

천시하여 신분계급의 하위구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 제도는 이조시대까지 농민과 군인의 천시사상으로 이어졌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군의 상층 지휘관들은 상류계급이었지만,

그들은 출장입상(出將入相)으로 원래는 내직에 속한 사람이

전시에만 장교와 병졸을 지휘했던 것이다.

 

그 후에 문무(文武)가 갈라졌지만, 무관은 외직으로 문관 우월주의였다.

그래서 무인의 반란으로 세운 나라가 조선인데,

이 조선조 때에도 문관 우월주의는 여전하여

군인이 대우를 받지 못하는 기풍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일제 때의 징병제도 또한 우리들로 하여금

군인 기피 사상을 불러일으켜 군인의 존재가치를 그릇되게 만들었다.

 

그 다음은 애국심이 박약한 우리 민족성에서 군인 기피와

군인 천시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국민의 애국심이 박약한 원인으로는 지리적인 환경의 영향을

그 첫째로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는 대륙과 해양 사이의 교량과도 같은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남과 북의 영향을 크게 받아왔다. 또한 자체적인 방어력이 약했기 때문에

세력이 크고 강한 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 땅에는 국민 생활의 안정을 누릴 수 있도록 통치한 지도자가

역대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물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렇게 애국심이 없으니 나라를 지키는 군인을 존중할 리가 없다.

군을 존중치 않는 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외국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망하는 것은 대개가 그 나라 국민들의 착각에 의해서이다.

평화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면 사람들은 마치 그 상태가 영원히 지속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외적에 대한 걱정이나 전쟁에 대한 염려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

 

일선의 군인들이 일거에 손을 놓아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도 위정자들은 정권이 내 것이라고, 그 감투가 내 것이라고 다투겠는가.

 

좋은 집 따뜻한 방에서 단잠을 잘 때마다 대문이 잘 걸려 있는가만 생각지 말라.

영하 30도의 고지에서 보초를 서는 변방의 군인들을 생각하라.

진심으로 군인을 존중하라. 그들은 참으로 고생이 많다.

 

고생하며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다. 군인들이 부패했다고 탓하지 말라.

군인들을 부패시킨 것은 바로 국민들 자신임을 알라.

그리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군인은 싸움에 이기지만,

국민의 멸시를 받는 군인은 싸움에 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가난을 몰아내는 지도자 양성

 

가나안농군학교가 어떠한 학교이며 무엇을 가르치는 학교인지를

몇 마디로 설명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 3() 사관학교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4() 사관학교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공군이 3군이라면 농군(農軍)이 제4군이다.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에 있는 가나안 농군학교가

바로 4군인 농군의 사관학교라는 것을 이 기회에 밝혀 둔다.

 

그런데 농군학교라고 하니까 농사짓는 방법이나 기술 같은 것을 가르치는 학교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나안농군학교는 농군의 정신을 배우는

정신 교육의 학교라고 할 수 있다.

 

설립하기까지 나의 슬로건은 하라는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는 사람이 되자!’이다.

아버지는 황무지 개척과 인근 주민들에 대한 계몽 강습에서부터 이 일을 시작했는데,

그 정신은 어느 교리나 가르침에 의거한 것이 아니다.

 

오직 아버지의 인격과 독창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오랜 황무지 개척 생활을 통해 이룩된 아버지의 정신과 생활윤리는 청교도,

특히 미국개척사에 있어서의 청교도 정신과 생활윤리가 일치하는 점이 많다.

 

50명의 문제 사병

 

어느 날 6관구 군목인 안명세 중령이 찾아와 부대 내의 문제 사병들에게

집단교육을 시켜달라는 부탁을 했다.

나는 몹시 난처했으므로 무어라고 딱 잘라 확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헌병 대위의 인솔하에 GMC 두 대에 50명의 문제 사병을 태우고 왔다.

 

그리고 그들을 인솔했던 헌병들이 돌아가자, 그들의 반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50명 전원이 상습 전과자일 뿐만 아니라 성격이 난폭해서 가지고 있던 쇠갈고리로

이유없이 땅바닥을 찍어대는가 하면 자전거 체인을 휘두르며 은연중에 사람을 위협했다.

 

그러면서 어디 교육 한 번 잘 시켜 보시우하며 은근히 뻗대는 것이었다.

현역 군인이 민간인에게 훈련을 받게 된 것이 아니꼽다는 투였다.

그리고 우리가 쳐다볼라치면 뭘 봐?”하며 대들기까지 했다.

 

사태는 심각했다. 생각다 못한 아버지는, 50명을 이끌고 교회로 갔다.

그러자 50명의 군인들은 교회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티는 것이었다.

 

교회에 들어가서 단 5분만 내 말을 들어보시오.”

 

아버지는 그들을 설득했지만, 그들은 마음의 문을 꼭 닫은 채,

아버지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절대로 듣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간신히 그들을 설득하여 교회로 들어간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신성한 교회입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니 그대로 믿어주시오.”

 

이렇게 전제를 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첫째, 교육을 빙자하여 당신들에게 기합을 넣거든 농군학교에 불을 지르시오.

둘째, 우리가 실천하지 않는 교육을 여러분에게 시키거든

우리를 위선자로 생각하고 그 군화로 우리를 짓밟으시오.”

 

아버지가 이렇게 말하자, 그들은 눈을 번쩍이며 그게 정말이냐고 반문한 후

아버지 말을 기록했다.

 

그렇지만 나도 조건이 있소. 만약 우리가 거짓없이 실천하는 교육이라면

여러분들도 불평없이 교육을 받아 주시오.”

 

이렇게 50명과 약속이 성립되자 가장 먼저 구보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구보에 들어가기 전에 아버지는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농군학교에서는 교육생이라면 누구나 구보를 해야 하는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그들은 구보라면 얼마든지 좋다고 했다.

 

그래서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선두와 중간에 세우고,

아버지는 맨 뒤에서 감독을 하며 신장까지 5km를 왕복하기로 했다.

 

군화와 고무신, 군인 대 민간인, 게다가 농사일과 농군학교 교육으로 지칠대로 지친

우리 부자의 몰골들이 정말 볼품없으므로 군인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기고만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를 밟아라!”

 

누군가가 소리치자, 그들은 선두에 선 큰 아들을 따돌리며 기세좋게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2km, 3km,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에는 기세좋게 달리던 그들은

헐떡이기 시작했고 차츰 속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속도는 한결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봉안 이상촌에서부터 새벽마다 구보로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신장 반환점에 이르자, 헐떡이던 군인들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소리쳤다.

 

개척!”

아버지가 이렇게 소리를 치면 교육생은 정신!”하고 뒤따라 소리쳐야 했다. ‘개척정신’, 이것은 농군학교의 구호이다.

 

개척!”

이 구호를 내가 선창하자, 아무리 지쳤어도 따라 소리치지 않을 수 없다.

정신!”

 

아버지는 때때로 구호를 바꿔가며 소리쳤다.

이겨야!”

산다!”

 

이것도 농군학교에서 평소부터 사용한 구호다.

개척 정신!”

이겨야 산다!”

 

이러한 구호를 외치며 신장까지 왕복 10km를 구보하자, 50명의 문제 사병들 중에서

4명이 중도에 나가자빠져 설맞은 산돼지처럼 씨근거리며 소리쳤다.

 

아이고, 고무신이 워커를 잡네!”

아버지는 나가자빠진 4명에게 다가가서 달래기 시작했다.

 

저 들판을 보시오. 논밭에서 일하는 민간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소.

이래서는 군인 체면이 말이 아니니 일어나서 군인답게 뛰시오!”

 

내 설득에 4명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이날의 구보에서 반쯤 혼이 난 50명은 그때부터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밤이면 우리 가족은 초긴장 상태에서 야간 불침번을 더 한층 강화했다.

행여나 이들이 마을로 빠져나가 말썽이라도 부리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이들을 전담해서 맡았고 교대로 불침번을 섰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두 아들의 입은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서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웃는 낯으로 그들을 대했다.

 

새벽 4. 아버지가 두들기는 산소통 종소리에 기상할 그들이 아니었다.

그러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그들을 깨우기 위해 두 아들은 별짓을 다했다.

그럴 때마다 귀찮게 굴지 마라!”라고 소리를 지르며 돌아눕기 일쑤였다.

 

그러나 두 아들은 돌아눕는 그들의 등을 쳐주기도 하고, 다리를 주물러 주며,

교육을 받느라고 얼마나 피곤하십니까?”하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이쯤 되면 그들도 하는 수 없이 부스스 일어났다.

 

이렇게 10여 일이 지나가자 50명의 문제아들은 차츰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변화를 보이던 그들은, 교육 마지막 날인 15일 후 쇠갈고리와

자전거 체인을 농군학교에 반납하고 새사람이 되겠다는 혈서까지 쓰게 되었다.

 

 

산교육장, 가나안농군학교

 

바보가 된 노 하사와 한 상사

 

그뒤 부대로 돌아간 이들 중에 몇 명이 대대 강사가 되어 각 부대를 순회하며

정신교육을 강연하고 다녔기 때문에 술 병장 깡 병장이 강사가 되어 돌아왔다

우스갯소리가 영내에 돌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그 해에 문제 사병들을 1백명씩 15회나 정신교육을 시키게 되었다.

 

술 병장 깡 병장 말이 났으니 노 하사와 한 상사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노 상사와 한 상사는 육군 모 부대에 함께 복무하는 하사관으로

같은 마을의 아래윗집에 살았다.

이렇게 아래윗집에 나란히 사는 이들은 틈만 나면 서로를 찾았다.

 

노 상사, 한잔하자!”

한 상사, 한잔하자!”

 

이처럼 서로를 불러내서는 술타령으로 여가를 보냈으며,

노 상사는 술 때문에 실수를 하여 끝내는 노 하사2계급 강등되고 말았다.

 

이쯤되자, 부대에서는 농군학교에 이 두 사람에 대한 위탁교육을 의뢰해 왔다.

물론 이 두 사람만 별도로 온 것이 아니라, 1백명 중에 섞여 오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농군학교 교육의 특징은 정신교육에 있었는데,

이 정신교육을 15일간 받고 노 하사와 한 상사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들이 집에 돌아가자, 그들의 부인들은 이제 죽었구나!”하며 지레 겁을 먹고는

통닭찜에 술상을 차려놓았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들은 평소에 장기교육을 받고 오면 언제나 생트집을 잡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생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미리부터 술상을 잘 차려놓아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날도 닭을 잡아서 술상을 잘 차려놓았는데, 이 술상을 본 노 하사가

여보, 나 술 안 먹어. 그러니 닭은 아이들과 당신이 먹구려!” 하는 것이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부인은 무슨 소린가 하고 남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평소에 노 하사가 하루라도 술을 끊으면 팔자 핀다고 말할 정도였으므로

부인이 의아해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부인이 자기를 멍하니 바라보자, 노 하사는 씩 웃으며

이 술 외상으로 가져온 거지? 그러면 다시 돌려줘하고 말했다.

부인은 노 하사의 행동이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부인은 쿵쾅거리는 발소리와 물을 항아리에 붓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뜻밖에도 술 하사인 자신의 남편이

새벽부터 물을 길어 나르고 있었다.

 

이를 보고는 너무나도 감격한 부인이 우리 남편이 바보가 됐다!”라고 소리를 치자,

노 하사는 씩 웃으며 그 동안 당신을 고생시켜서 정말 미안해하며 위로를 했다.

 

그날 아침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노 하사 부인은 곧바로 한 상사 집으로 달려가

남편 자랑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늘어놓았다. 그러나 한 상사의 부인도

노 하사만 바보가 된 게 아니라 한 상사도 바보가 됐다!”라고 하며,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는 울었다고 한다.

 

두 부인은 남편을 정신차리게 만들어 준 농군학교로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오자며 집을 나섰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농군학교에 도착해서는 부끄러워 들어가지는 못하고

농군학교 담벼락 밖을 세 바퀴나 돌며 농군학교 감사합니다하며

인사만 하고는 돌아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그 뒤에 교육을 받으러 온 그들의 동료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이와 같이 수많은 문제 사병들이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가나안 농군학교는 한때 군대의 재교육장처럼 되다시피 하여

몇 년 사이에 15천여 명이 넘는 군 장병들이 거쳐 가게 되었다.

 

가축장 화재에서 산교육 체험

 

큰 형인 종일과 둘째 형 범일은 일본 유학을 가고, 필자는 입대한 뒤라서

농군학교 강사로는 아버지와 큰형수, 큰누나, 이렇게 세 사람뿐일 때였다.

전국 군수 출신과 실업인들 70여 명, 깡패 출신인 청년 몇 사람과

대학 재학중인 청년 몇 사람이 교육을 받겠노라고 우리 농군학교에 입교했다.

 

한창 추운 12월이었다. 겨울철이었지만, 일손 부족으로 아버지를 비롯한 큰형수와

큰누나는 밤과 낮이 없는 강의와 양계장, 양토장 일에 쫓기어

그야말로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양계장에 피워 둔 연탄 난로에서 불이 난 것이다.

삭풍이 불어닥치는 12월 한밤중이었다. 난데없는 불길에 눈을 뜨고 보니,

5백 마리와 앙고라 토끼 2백 마리가 불길 속에 휩싸인 뒤였다.

잠에 곯아떨어졌던 교육생들도 내의 바람으로 뛰어나와 불을 끄기 위해 야단법석이었다.

 

모피용인 앙고라 토끼의 털에 불이 붙자 시뻘건 불덩이가 되어 양토장 안을 누볐고,

불길에 놀란 5백여 마리의 닭들은 야단스레 소리를 쳤다. 그 분위기는

흡사 생지옥과 같았으며, 아무리 손을 쓴다 해도 그 동물들을 구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여러분! 조용히 자리에 앉아서 저 광경을 보며 살아있는 교육을 받읍시다.”

 

아버지는 교육생들에게 모두 앉으라고 권한 다음,

양계장과 양토장이 다 탈때까지 조용히 지켜보았다.

 

실로 그 광경은 끔찍했다. 타오르는 불 속에서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는 짐승들.

이미 때가 늦었는데도, 악머구리처럼 살기 위해 소리치는 닭떼.

그 짐승들과 비교해서 사람들은 어떤가? 또 무엇이 다른가?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육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에 직면하는 날, 그 영혼은 속절없이 유황불에 이글거리는

지옥으로 떨어져 저 불 속의 토끼와 닭처럼 구원받지 못하는

절망적이고도 처절한 상황에서 울부짖을 것이 아닌가?

 

마치 인행 사후의 지옥에서 일어나는 처참한 광경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리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불길이 다 사그라진 후, 나는 교육생들을 이끌고 교회로 갔다.

교회에 들어선 우리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고 부르짖었다.

 

이날 밤, 교육생들은 물론 나 자신도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이날 밤 대전에서 왔다는 깡패 두목은, 자기 손으로 깡패 1천여 명을 길러냈으며,

경찰관까지도 폭행할 정도로 포악했지만

이제부터는 새사람이 되겠노라고 눈물을 흘리며 모든 교육생들 앞에서 맹세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지금 목사가 되어 복음 일선에서 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날 밤, 깊은 감명을 받은 림영철 군은 그날 이후로

농군학교와 관계를 맺어 마침내 큰 매형이 되었다.

그 당시 림 군은 경희대 법대를 졸업하여 사법고시 1차시험에 합격한 전도가

유망한 법학도였다. 그런 림 군이 법관(法官)의 길을 스스로 내던지고

농군이 되고자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제1가나안 농군학교 교장으로서 뜻을 함께하여 일하고 있다.

 

 

가나안의 새마을운동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새마을운동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만큼 거국적인 운동으로 번져서 상당한 성과를 올린 것으로 알고 있다.

이미 40여 년 전부터 이 운동을 해온 아버지로서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무튼 거국적인 운동으로 새마을운동이 진행되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40여 년 전, 아궁이에 나무를 때지 않는 집을 고안하여

오늘날까지 그렇게 살아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 가족에게는 남녀를 막론하고 사치스러운 옷을 입지 못하도록 했으며,

관혼상제도 간소한 방법으로 고쳐 만들어 실행해 오고 있다.

또한 이를 이웃사람들에게도 전하고 우리 농군학교의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오고 있다.

 

그래서 아버지를 가리켜 흔히들 새마을운동의 선구자라고 부른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 운동을 전개하게 된 동기는, 우리 집이 가난했고

이웃과 온 나라의 백성들이 모두 가난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나도 잘 살고 이웃과 온 나라가 모두 잘 살 수 있게 될까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후진국 백성들이 그러하듯이 우리나라 백성들도

어지간히 착취를 당하며 살아온 백성들이다. 조선조 때에는 양반들로부터 착취를 당했고,

일제 때에는 일인들로부터 착취를 당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에도 백성들은 나라를 잃은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단지 그들의 상전(上典)인 양반이 일본인으로 바뀐 것쯤으로 알았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생업에 뜻을 잃고 나태하게 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고난이 닥쳐왔을 때 그 고난을 극복하여 일어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대로 좌절하고 주저앉는 사람도 있는데,

아마 우리나라 백성들은 후자의 경우에 속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는 일제 시대에 일본인들에게 받았던 고난이 하도 커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면 입을 열기조차 싫어하셨지만,

그들에게서 부러워하는 한 가지가 있으셨다.

 

그것은 일본인의 근검절약 정신이다.

그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인을

역사가들은 소위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성공 때문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말이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 명치유신을 성공리에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국민들의 근검절약 사상과 그 실천에 있다고 나는 본다.

 

새마을운동은 사랑의 운동이다. 새마을운동은 사랑의 운동이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란 어떤 것인가? 나는 언젠가 생인손이라는 손가락 끝에

나는 종기 때문에 고생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인체 중에서 별로 대수롭지 않은 곳에 난 작은 종기에 불과했지만,

대단히 통증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인손을 한 번 앓게 되자, 평소에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던 그 손가락 끝으로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치유될 수 있도록 힘을 기울였다.

잘 다스리자 며칠 후에는 깨끗이 딱지가 떨어져 흔적도 없이 낫게 되었다.

 

앞에서 말한 사랑이란, 바로 이와 같이 전체의 일부가 파괴되었을 때

전체가 총력을 기울여 그것을 원상태로 복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새마을운동은 먼저 우리가 사는 마을 전체를 하나의 신체와 같이 생각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집, 가장 고통을 받는 집, 가장 곤란을 당하는 집부터

어떻게 해서라도 그 가난과 고통과 곤란에서 구해야 한다는 그런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가난하게 사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진단하여 치료해야 한다.

각기 분산되어 있을 때는 약해 보이지만, 전체가 하나로 뭉쳤을 때의 힘이란

대단히 큰 것이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이 있듯이 열 사람이 밥 한 술씩을 모아서 한 사람

먹여 살리기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이렇게 했을 때

비로소 마을 전체가 하나로 될 수 있는 협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제아무리 우주를 건설한 정도로 문명을 이룩해 놓았다고는 하지만,

그 속에 도덕과 종교가 빠져 있다면 조만간 무너지고 만다.

그 도덕과 종교는 곧 사랑이다. 사랑으로 이웃을 돕고 함께 잘 살게 된다면,

그 모두의 힘으로 또 다른 이웃을 돕는 것이 참 새마을운동이 아니겠는가.

 

동족간에, 아니 한 마을 안에 굶주린 이웃을 돕기 위해

잘 살기 위한 운동이나 새마을운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마을운동은 잘 살기 운동과 참살기 운동이 되어야 한다.

 

어떤 미망인의 무덤

 

오랜 옛날 이집트의 왕들은 자신의 이름이 만세에 전해질 것을 간절히 염원하여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조하였다. 그러나 오늘 피라미드의 거대함에 힘입어

그 이름이 후세에 빛나는 왕은 그 누구도 없다.

다만 피라미드 속에 매장된 금은보화와 예술품들이 찬란한 이집트의 문화를

증언하는 문화유산으로 전해 내려올 뿐이다.

 

내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대부호의 미망인이 죽음에 임하여

자신의 이름을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시키고 싶은 나머지

거대한 묘를 건조하도록 유언을 하고 죽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학교나 병원에 재산을 기부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일이므로

나는 세계 최대의 묘를 건조하여 만세에 내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유언했다.

물론 그녀의 소원대로 건조된 거대한 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묘를 구경하는 극히 짧은 순간 동안에

그녀의 이름을 한번쯤은 읽거나 떠올려보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 대한 찬사나 선망이 아니라

그녀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조소와 연민에서 그럴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의 옛 속담에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라고 했다.

이처럼 자신의 업적과 사상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욕망의 하나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본질적인 욕망이 이집트의 왕이나 미국의 돈 많은 과부처럼

허망하고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면 정녕 인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참된 정신의 유산인가에 있다고 생각한다.

 

50년간 계속해 온 아버지의 농촌운동과 이를 바탕으로 한 복민운동(福民運動)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고희(古稀)의 나이에 접어든 나는 한편으로는

내 인생을 조금씩 정리해 보면서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한 마지막 봉사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흔히들 인간상실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회복의 길이 무엇인가를

지금까지의 경험과 믿음을 바탕으로 말해두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 아닌가 한다.

 

기독교적인 사상으로 현세를 해석하자면 오늘의 삶은 미래의 나라,

영원의 세계로 향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나는 이러한 불안과 초조에서 해방되어 복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물질과 문명 앞에 식상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이며,

인간 본연의 자세를 찾아 영생에 이르는 복된 생활을 누려가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이같은 인간 회복의 운동을 복민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가나안 가족의 터전인 가나안동산을 재단법인 가나안복민회

등록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유태인의 고난과 가나안의 개척사

 

우리 농군학교를 찾아오거나 그동안 발간된 아버지의 저서를 읽은 사람들은

흔히 농군학교 개척의 40여 년 역사가 이스라엘의 시련과 영광을 압축한 것 같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봉안 이상촌 개척에서 신림 동산의 제2농군학교를 세우기까지

아버지 스스로의 뜻과 신념에 따라 행동했을 뿐 어떤 철학서나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 실천해 온 것은 아니다.

 

아버지는 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알았지만,

시련 중첩인 나라와 민족에 대해서는

그 이상의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영광과 가나안 개척사를 비교하였기 때문에

최근 이 나라에 대한 저서를 구입하여 숙독할 기회를 가졌다.

 

아버지가 이스라엘의 인문과 지리를 살펴보면서 가장 놀란 점은

우리나라의 강원도만한 이 좁은 나라가

지구의 축소판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관광안내서를 보면 4계절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 것이, 이 작은 나라의 네게브 지방은 사막지대이며,

푸레 호수 근방은 습지대로써 지난 날에는 말라리아가 창궐한 질병의 발상지였다.

 

또한, 겨울철의 예루살렘은 우박이 쏟아지고 2,3년에 한 차례씩 눈까지 내리지만,

직선거리로 22km밖에 안 되는 예리코에 가면 냉방시설을 갖추어야만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무덥다.

 

그리고 레바논 근방의 해안지대는 대낮에도 햇빛이 비추지 않을 정도의

열대의 밀림이 우거져 있으나

메론산의 정산에는 사시사철 눈이 쌓여있다.

 

또한 세페라 지방은 전형적인 지중해 기후로 농사에 알맞은

옥토를 이루고 있지만,

동쪽으로 고지를 하나 넘으면 유명한 사해의 연안으로서

곤충 이외에는 생물이 살지않는 황량한 땅이다.

 

이처럼 강원도만한 땅덩어리에 열대, 한 대, 습지대, 사막, 평지, 구릉지, 바다, 호수, , 염호(鹽湖)

뒤섞여 있어서 마치 지구의 축소판같다.

그러므로 유태인이 나라를 잃고 2천여 년이나

 

전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그런대로 적응하여 견딜 수 있었던 저력의 하나가

이 같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내가 이 특수한 나라의 농사조건을 살펴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한 이 축복의 땅을 끊임없이 가꾸고 돌보면 풍요한 수확의 옥토가 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양()을 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정도록 황무지가 된다는 점이다.

 

그 땅은 가리 성분이 많아서 비옥하지만 수분이 적다. 그래서 이 비옥함을 살리기 위해서는

, 가을에만 내리는 비를 한 방울이라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라라는 말은

유태인에게는 불필요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환경의 변화에 민첩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게 풍토조건이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

 

가나안이라는 내용 속에는 첫째 약속과 희망의 땅, 둘째 잃은 것을 회복함,

 

셋째 하나님께서 감독하심, 넷째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福地)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축복의 땅은, 피와 땀을 아끼지 않는 알뜰하고도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이룩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이스라엘의 풍토조건에서 깨닫게 된다.

 

아버지가 제1농군학교를 세운 경기도 광주군 풍산리는 속칭 황산(荒山)으로 불리어진 곳이다.

거친 뫼로 풀이되는 이 황량하게 버려진 땅을 가나안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은,

이 거친 땅을 개척하여 가나안으로 만들고자 하는 아버지의 의지였다.

 

아버지의 땀과 믿음으로 이 거친 땅을 옥토로 만들어 사랑과 믿음을 심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4백여 년간이나 되는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갖은 고난 끝에 가나안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약속의 땅이 황량한 들판인 것을 알고는 대단히 실망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풍요와 축복이 약속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에겐 버림과 시련만이 있는 곳이 바로 가나안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삼천리 강산 전부를 가나안으로 만들기 위해 내 생애를 바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난이라는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농군(農群)이 아닌

진정한 농군(農軍)이 필요하다.

이 학교를 가나안 농군(農軍)학교로 이름지은 배경 또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신림 동산을 건립하기까지의 40년 역사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땅에 대한 도전이며 개척이었다.

봉안 이상촌을 세우기 위해 사들인 4천 평의 땅부터가 마을 앞에 버려진 볼모지였다.

 

그리고 제2의 개척지인 삼각산 농장 또한 10년이나 방치된 황무지였다.

과수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지만, 흉가라는 소문 때문에 그대로 방치된 집은

귀신이 나올 것처럼 거미줄과 먼지로 뒤덮여 있었으며,

6천여 주의 10년생 과일나무는 야생 잡목처럼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이 황폐한 곳에서 아버지는 4시에 일어나 밤 10시까지 쉬지 않고 일했다.

 

에덴동산황상 가나안 농장그리고 신림동산의 건설 또한 이와 비슷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이룬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땀을 아끼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드리워짐을

나는 체험을 통해 깨우침을 받은 것이다.

 

 

가나안의 복민 대강(大綱)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업을 이루기 위해 사람을 택하신다. 아브라함을 택하신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함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데에는 그 택하심을 받을 준비와 봉사의 책임감이 필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못들은 체할 수는 있으나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자기 자신이 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영광을 알며 화답하는 사람, 그 사람이 곧 복민이다.

 

그럼 여기서 가나안 복민의 생활 헌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우리 겨레는 이 때 이렇게 살자

 

음식 한 끼에 반드시 4시간씩 일하고 먹자.

 

버는 재주가 없거든 쓰는 재주도 없도록 하자.

 

억지로 못 살지 말고 억지로 잘 살도록 하자.

 

물질과 권력과 지식과 기술을 바르게 쓸 줄 아는 국민이 되자.

 

물질의 빚이나 마음의 빚을 지지 말자.

 

우리 국민의 뛰어남을 말과 마음과 일과 행동으로 드러내자.

 

외모만을 아름답게 단장하지 말고 마음을 더 아름답게 단장하다.

 

시대적인 외세의 유행을 따르지 말고 우리 국민의 시대적인 감각을 바로 살리자.

 

국토 통일보다 먼저 가정과 단체 통일을 빨리 하자.

 

반공, 승공의 길은 빈궁을 먼저 막는 것이다.

 

하라고 하는 국민이 되지 말고, 하는 국민이 되자.

 

육체의 잠이 깊이 들면 물질이 도적을 맞게 되고 민족 사상의 잠이 깊이 들면 영혼이 멸망하게 되니 늘 깨어 살자.

 

창조주 하나님을 외국사람에게 빼앗기지 말고 우리 온 국민의 아버지로 삼자.

 

      

온 인류가 요구하는 인물

 

한마디 말이 약속어음으로 대용되는 인물이 되자.

 

의지가 돌같이 굳고 무거워서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마음이 동요치 않는 인물이 되자.

 

무슨 일이든지 일정한 연구와 의견을 가지고 앞으로 발전하여 나아가는 인물이 되자.

 

작은 일에도 큰 일과 같이 충성스럽게 실행하는 인물이 되자.

 

자기 개인을 위한 야심이 아니고 인류와 사회와 남을 위하여 큰 포부로써 봉사하려는 마음이 불타오르는 인물이 되자.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기회를 민첩하게 붙들어 자기가 할 일을 유감없이 행하는 인물이 되자.

 

많은 사람 가운데 가서라도 자기가 지닌 의지와 자기의 올바른 특성을 잃지 않고 뚜렷하게 드러낼 수 있는 인물이 되자.

 

      

자존의 깨달음

 

참 배움이란 배워야 할 것을 배우며 알아야 할 것을 알아서 진정하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전세계와 온 국가를 알고 싶거든 먼저 가정을 알아야 한다.

 

온 국민, 나아가 전인류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원하거든 먼저 자기 자신이 잘될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인간됨이란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고 인간된 그 위치와 지위를 바로 지킬 줄 아는 그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불행과 고통을 싫어하지만 그 속에 빠진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참 크고 행복한 사람은 행복이 우주 안에 가득 차 있음을 깨닫고 그것을 찾아 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몫의 일을 완전히 실행하는 자는 인류의 민족, 부모와 자기를 사랑하는 자요,

나아가 조물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진 사람이다.

 

인생 최대의 지식과 학문은 인간이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게 되고

드디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구세주 그리스도를 바로 배우고 믿음으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이것은 준 자와 받은 자만이 아는 참 행복이다.

 

      

7대 강령

 

첫째, 우리는 역사의 동상이 되자.

 

둘째, 우리는 시대의 등불이 되자.

 

셋째, 우리는 판단의 저울이 되자.

 

넷째, 우리는 문화의 발판이 되자.

 

다섯째, 우리는 선악의 거울이 되자.

 

여섯째, 우리는 지식의 채찍을 가하자.

 

일곱째, 우리는 신앙의 불길을 일으키자.

 

    

우리의 생활신조

 

윤리를 되찾아 부모님께 효하며 살자.

 

씨족 관념을 버리고 다 하나가 되어 살자.

 

지방적인 파벌의식을 버리고 살자.

 

남을 멸시하는 계급의식을 버리고 살자.

 

빈부귀천의 거리를 없애고 살자.

 

빼앗지도 말고 빼앗기지도 말며 서로 먼저 주면서 살자.

 

사람은 누구나 다 연쇄적 책임을 가지고 살자.

 

목적은 하나가 되고 소질과 기능에 따라 힘써 일하며 살자.

 

만유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삼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