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과 바울서신 번역 L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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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다음 몇번은 우리가 바울의 서신 몇 권을 논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그의 서신을 논하기 전에 먼저 바울이라는 사람을 보겠습니다. 그가 왜서 이 서신을 기록했는지를 보고, 우리는 이 서신을 응당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우리는 그에 대한 이해가 다른 사도들보다 훨씬 많습니다. 사실 신약성경 절반이 바울이 기록하지 않았으면 바로 바울과 연관이 있습니다. 만약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을 합치면 신약성경 삼분의 일 이상이 바울을 위주로 한 것입니다. 바울이 지난 2000년 교회 역사에서의 영향이 예수님 다음입니다. 심지어 그가 유럽 역사의 영향에 대해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먼저 바울의 생애를 보고, 그리고 그의 서신을 다시 보겠습니다. 제가 바울이 주를 믿기 전, 주를 믿는 경과 그리고 주를 믿은 후를 논하겠는데, 이것은 바울 인생에서의 세 단계입니다.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는데, 그 중에서 세번째 단계가 가장 길고 또한 가장 멋지십니다.
바울은 다소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거기는 현재 터키의 동남쪽이며, 지중해의 동북쪽이고, 거기는 대학 도시이며, 당시 세번째로 가는 대학이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대학은 아덴 대학이었는데, 오늘날의 케임브리지 대학과 같은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강의하는 것은 제가 케임브리지대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학이 두번째인데, 거기는 오늘날의 옥스퍼드 대학 같은 것입니다. 다소 대학은 오늘날의 더한 대학 같은데, 세번째입니다. 제가 듣기에 이렇게 순위를 매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소 대학은 지중해 연안에서 세번째로 가는 대학입니다.
바울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주요로 세가지 큰 영향을 받았는데, 첫번째는 그의 부모가 유대인이었고, 그는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신분으로 영광스러워 했고,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 신분으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가 후에는 이 신분을 포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야웨’ 이스라엘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이 그의 삶에서 계속하여 머리가 되셨는데, 그러나 그는 크리스찬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오해했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고, ‘사사기’에서 이 지파가 하마터면 멸종될번하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살아남은 후 인원이 격감되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이라는 단어가 원어로 발음하면 ‘사우’ 같습니다. 그래서 이 남자아이의 이름을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에서 취했고, 모두 동일한 지파에 속해서 이름을 사울이라고 지었습니다. 후에 그가 스스로 라틴 이름을 지었는데, PAULUS였고, ‘작다’라는 뜻입니다. 모든 자료에 그는 키가 작은 사람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성장 배경에서의 일부분이고, 그는 아마 어렸을 때 갈릴리로 이사를 간 것 같아요. 우리는 그의 집 전체가 갈릴리로 이사간 것을 알고 있는데, 후에 바울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하였고, 가말리엘이라는 이름의 유명한 자유파 교수에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가말리엘을 한번만 언급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묻기를 ‘크리스찬을 응당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는 두고 봐야 하느니라 만일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라면 계속해서 할 것이고, 만일 아니라면 수포로 돌아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매우 전형적인 기수파이며, 성경에서 후에 다시는 가말리엘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유파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각종 생각을 포용하였습니다. 그가 두고 봐야 한다고 했고, 무엇을 대하는가를 급해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학생인 사울의 생각은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사울이 크리스찬은 위험 분자라고 했으며, 우리 유대교에 전례 없는 위협을 가져오니 내가 전력으로 저지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이 적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무심한 사람보다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한 청년 클럽에 가서 설교를 했는데, 거기에 30명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집에 가니 와이프가 평소와 같이 모임의 상황을 물어서 그 중의 두 명은 주를 믿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두 명은 저의 설교를 듣고 나서 너무 화가 나서 울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명은 주를 믿을 것 같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앉아만 있으면서 서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결국은 6개월 내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적의 있는 사람이 무심한 사람보다 소망이 있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학생이 그의 교수 가말리엘보다 더 소망이 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살펴보기만 하고, 사람들더러 기다려 보라고 하지만 사울은 전력으로 반격하고, 이로써 행동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첫번째로 순교하는 것은 크리스찬이라고 투표로 표결하였고, 사람들이 스데반을 죽일까 말까 표결할 때 사울이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그는 심지어 돌을 던지는 사람을 대신하여 겉옷까지 챙겨주었고, 그는 예수님을 위해 순교한 사람을 죽인자입니다.
그때부터 그이 마음은 고통하기 시작했고, 양심에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얼굴에 광채가 충만한 것을 친히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말하기를 ‘나는 예수님이 하늘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주 예수여 나의 영혼을 받으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모습이 사울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못했고, 그더러 계속해서 양심의 불안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로써 크리스찬을 반대하는 행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는 크리스찬을 반대하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고, 자기 고향을 떠나 각 곳에 가서 크리스찬을 핍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를 믿기 전에 이미 선교사였는데, 하지만 목적은 크리스찬을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향과 가족을 떠나 각 곳에 가서 크리스찬들을 죽이기를 원했는데, 이것은 그 중의 배경입니다.
또 두개의 영향력이 있는데, 유대 배경의 영향 외에 헬라어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가 다소에 거주하면서 헬라어로 말했는데, 그것은 옛날에 통용했던 언어였습니다. 스와히리어처럼인데, 그것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의 통용 언어이며, 곳곳에서 통했습니다. 그 때는 모든 사람이 헬라어를 알았고, 그러므로 바울이 어떤 곳을 가든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영향력은 로마 율법이었습니다. 바울의 아버지가 로마 제국에 대해 공헌이 있었고, 이로써 로마 시민의 신분을 얻었습니다. 아마도 그가 로마 병사를 위해 많은 텐트를 만들었던 것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텐트업은 그의 가족 사업이었고, 사울은 12살 때 이 업에 들어갔으며, 후에 이 업을 하며 오랜 세월동안 생계를 도모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로마 시민이기 때문에 어린 사울도 로마 시민의 신분을 계승 받았으며, 이 신분이 그에게 특권을 부여했고, 그는 이를 이용했습니다. 사울이 말년에 이 특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에게 상소를 제출했고, 그가 처형을 당할 때 베드로나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는 머리 베임을 당했는데, 그것은 로마 시민의 특권이며, 속전속결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야말로 기나긴 죽음의 과정이며,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당한 로마 시민을 없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대해 극한 모욕이었으며,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머리 베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로마 시민 신분이 유용하게 쓰였고, 그는 상의원에 상고를 제출할 권리가 있었고, 직접 가이사에게 상고할 수 있었는데, 그가 후에 이렇게 했습니다.
이 세가지 영향을 합치면 매우 특별한데, 유대인, 헬라어와 로마 율법이 그가 예수를 위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특별하게 합당하였으며, 이런 성장 배경은 더 이상적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를 믿기 전 일찍이 당신의 다음 인생의 사명을 예비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신이 아직 모르기 전에 당신을 예비했습니다. 사울이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에 대해 계획이 있었고, 그를 끊임없이 예비했습니다. 후에 사울이 크리스찬을 반대해서부터 크리스찬 선교사로 변하기까지입니다. 유대인들을 크리스찬으로 변하게 하려면 한가지 일만 하면 되었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필경 ‘크리스찬’이라는 단어는 이방인의 명사이며, 이방의 안디옥 교회에서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완전하게 변한다든지 혹은 진정한 유대인 등으로 응당 말해야 하고, 유대인들을 크리스찬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으려면 한가지 일만 하면 되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만 알기만 하면 됩니다. 한번은 제가 케임브리지에서 설교했는데, 후에 25살 되는 유대 여자가 저에게 왔어요. 그가 저에게 묻기를 ‘나사렛 예수가 지금도 살아 계십니까?’라고 하여 제가 ‘그렇습니다. 그가 살아 계십니다’라고 했더니 ‘예수가 만약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의 메시야겠네요?’라고 해서 제가 ‘그렇습니다’라고 하니 그가 또 묻기를 ‘제가 어떻게 하면 그가 아직 살아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라고 해서 제가 ‘당신이 직접 예수님에게 물어보시면 됩니다’라고 했더니 그가 그대로 했고, 그리고 알게 되었습니다. 10분 후에 그가 저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것이 그의 배경에 있고, 그의 혈관에 있으며, 그는 모든 일이 다 준비되어 있었고, 동풍만 부족했고, 나사렛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아는 것만이었습니다. 그가 관건을 붙잡으니 ‘성경’ 전체를 이해했고, 주를 믿은지 10분만에 저에게 ‘성경’을 가르쳤는데, 장래에 이스라엘 전체가 주를 믿으면 바로 이렇게 됩니다. 사울이 당시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어떻게 주를 믿었으면 장래 이스라엘 전체도 이렇게 주를 믿을 것입니다.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면 자신들의 잘못이 얼마나 터무니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시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이 바로 이러했습니다. 첫번째 장면은 골란 고지에서 일어났는데, 쿠네트라라는 작은 읍에 가까웠고, 이 유대인이고 바리새인인 사울, 이 유대인 중의 유대인, 히브리 중의 히브리인인 그의 발이 이방 땅에 들어서자 나사렛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이방인에게 보내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의 경내에서 주를 믿었는데, 이 점의 의미가 매우 큽니다. 그래서 사울이 골란 고지에 올라갔는데 거기가 다메섹까지 몇 시간이 떨어졌고, 예수님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당시 예수님이 바로 이 산에서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앞에서 변화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번 나타났을 때는 더욱 큰 영광으로 나타났는데, 왜냐하면 사울이 이번에 만난 예수님은 일찍이 승천했기 때문이며, 그가 원래 있던 영광을 되찾은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그의 영광을 포기하고 세상에 오셨는데, 하지만 그가 승천 후에는 원래 있던 영광을 되찾았으며, 사람이 그 영광을 보면 분명히 눈이 멀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예수의 영광을 본다면 반드시 눈일 멀게 될 것입니다. 망막이 반드시 다칠 것입니다. 이 녹음하는 등도 이미 눈이 매우 부신데, 하지만 예수님의 영광은 더욱 큽니다.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이 목격한 것은 여전히 육신으로의 예수님 영광이었고, 승천 후의 예수님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승천 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되찾았고, 그 영광은 점심의 태양보다 더욱 뜨거울 것이며, 사울의 눈이 멀었습니다. 그는 바로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의 중생 전체 과정은 삼일이었고, 아나니야가 와서 그를 위해 기도함으로 사울이 철저히 중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나니야더러 가서 사울이라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분부했습니다. ‘사울? 그는 우리를 죽이려 온 사람이 아닙니까?’. 아나니야는 자존심을 삼키며 가야했고, 그가 사울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를 치료하러 왔느니라 네가 볼 수 있게 하고, 물에서 세례를 받고, 그리고 성령충만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야 중생의 과정이 완성됩니다. 저에게 ‘정상적인 중생’이라는 책 한권이 있는데, 이를 논했습니다. 사울은 회개하고 믿음에서부터 세례까지, 그리고 성령충만까지 사흘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이 후부터 바울의 전체 과정은 중생을 위했고, 그가 매번 사람들을 주를 믿게 이끄는데 반드시 모든 절차를 완성했습니다. 이는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되는데,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정성적인 중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젠 그가 사역할 준비가 되었는데, 하지만 그가 뜻밖에도 바로 선교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말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적의를 불러왔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든지 적의를 불러왔는데, 그는 주요로 유대인의 반대가 있었고, 로마인들은 절대로 그를 적대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그가 광주리에 담겨 성벽을 타고 내려서 도망을 했습니다.
바울이 예비한 사역 과정이 매우 재미있는데, 그는 바로 봉사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바로 사역을 시작하고 싶어하고, 부름심을 받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로 사역 시작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적어도 3년을 기다렸고, 그때에야 하나님의 부르심대로 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가끔은 너무 급해하고, 우리는 오히려 급해하지 않거나 혹은 우리가 가끔은 너무 급한데 하나님은 오히려 급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확실하게 해야 하는데, 이것은 미국의 전도인 브룩스가 한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삼년을 머물면서 잘 생각해 보고 그가 하나님에 대한 인지를 다시 사고해 보았습니다. 그는 성경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지 않았고, 그는 성경 지식을 연수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침도 받지 않았고, 오직 주님과 홀로 지냈습니다. 그는 매우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수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었고, 그는 마지막 사도라고 자칭했으며, 아주 특별한 사도였고, 열세번째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는 열두번째라고 하며, 가룟 유다를 대신했다고 하는데, 이는 틀렸습니다. 바울은 12사도의 신분을 항상 인정했고, 그는 자신을 12사도 중의 한명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열세번째입니다. 그는 항상 특별한 사도의 신분으로 자처하기를 ‘내가 그 분을 보지 못했느냐? 그가 나를 부르지 않았느냐?’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필로 기록할 수 있는 사도였는데, 이는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아라비아에서 삼년을 사고했고, 그는 속으로 반드시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바울과 만났고, 그에게 묻기를 ‘네가 왜서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하니 바울이 내가 당신을 핍박한 적이 없고, 나는 크리스찬을 핍박하느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대답하지 않고, 그가 갑자기 깨우치기를 네가 어떻게 크리스찬에게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고, 이 깨우침이 그더러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점점 깨닫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됩니까? 바울은 알았어요. 가장 작은 형제에게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한 것이고, 크리스찬은 확실히 그리스도 세상의 몸입니다. 당신이 어떻게 크리스찬에게 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울의 인식은 그가 다메섹 길에서 부활하여 승찬 이후의 예수님과 만난 것에서 온 것이고, 또한 그가 아라비아 광야에서 홀로 있으면서 삼년동안 사고해서 얻은 것입니다. 후에 그가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그 곳에서 사방으로 난관에 부딛혔습니다. 크리스찬들은 그가 진짜로 주를 믿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꾸어 당신이라면 당신은 믿겠습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의 가족을 붙잡아 옥에 가두었고, 다음 주일에 교회에 와서 그는 이미 주를 믿었다고 하면, 제가 보기엔 당신도 의심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위로자라고 부르는 바나바, 그는 진짜로 좋은 사람이고, 그가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소개합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매우 불쾌해 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이 배신자라 생각했습니다. 그는 본래 랍비의 훈련을 받은 우수한 제자였는데, 그들이 미워하는 크리스찬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소로 보내어져 거기서 10년을 지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이 사건을 항상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주를 믿고 난 후 바로 나와서 선교했고, 사방으로 가서 전도한 줄로 알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가 먼저는 아라비아에 삼년을 사고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10년을 지냈는데, 그는 그 곳에서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인치심을 기다렸습니다.
10년 후 바나바가 또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 길은 다메섹으로 통하는 길이고, 이 길은 다메섹의 ‘직거리’인데, 바울이 바로 거기서 물 세례를 받고 성령충만했습니다. 이 길은 현재도 아직 있는데, 다메섹을 통과하는 직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알게 될 것인데, 이 사진은 잘 찍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곳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곳을 모르실 것인데, 평시에 이 곳의 사진을 많이 보지 못해서입니다. 이것은 현재 시리아의 대도시였고, 안디옥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는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바울의 일생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우선 탕자의 비유에서의 탕자인데, 바로 여기에서 돈을 다 써버렸습니다. 복음서 시대에 ‘먼 나라’ 하나만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안디옥이고, 사람들이 말하는 고대 파리이고, 또한 고대의 암스테르담이나 혹은 방콕 같기도 한데, 여러분은 한번 들으면 아실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돈이 있으면 다 써버릴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이 이스라엘에 거주하면 바로 많은 돈을 가지고 안디옥으로 갈 것입니다. 안디옥에 향락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바로 그 곳에서 돼지와 먹을 것을 다투게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향락지를 찾는다면 여기를 가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 곳은 등불이 번쩍이고 술이 충만한 곳이고, 죄악이 충만한 곳입니다. 하지만 첫번째 이반인 교회가 바로 안디옥에 세워졌고, 바나바도 그 중의 한 사람이며, 예수님의 제자도 이 곳에서 처음으로 ‘크리스찬’이라고 불리웠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바나바가 사울을 안디옥이라는 이 이방 교회에 데려왔습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인 사울이 이젠 반드시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했고, 몇 년 후 그가 말하기를 ‘내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으로,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으로, 나는 이렇게 하기를 원하는데, 이로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탄력성이 없는데, 우리는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어쨌든 바울이 이 이방인 교회에 왔습니다. 한번은 다섯명이 기도하고 있는데, 그 중 두 명은 교사였고, 다른 두 세 명은 선지자였는데, 그들이 주 안에서 섬길 때 예언이 그들에 대해 말하기를 ‘때가 되었느니라 너희들은 나를 위해 바나바와 사울을 나누어 보내서 내가 그들을 부른 일을 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두가지 방식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먼저는 주를 믿을 때 예수님이 그를 불러 주셨는데, 하지만 후에 교회에서 예언을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인치심을 얻었습니다.
저는 특별히 이를 논하고 싶습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기만 하면 되었다고 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교회가 이 부르심을 인치심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러면 우리는 머리와 몸으로의 이중 부르심이 있게 됩니다. 장래에 난제에 부딛혔을 때 이 이중 부르심이 우리를 도와 견디어 내게 합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사울은 곧 처음으로 동역하게 될 것인데, 사실 이것은 그들의 첫번째 동역입니다. 그들 두 사람 모두는 먼저 집사가 되었고, 돈 관리를 책임졌으며, 두 사람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동역했는데, 바로 예루살렘 기근의 구호기금을 보관했습니다. 예루살렘 남방에 기근에 발생했고, 안디옥 교회가 모금을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와 바울이 돈 관리하는 이 일을 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사울이 부르심을 받아 이방인에게 갔는데, 하지만 교회에서 돈 관리를 했고, 그러나 그들은 그대로 했으며, 이것이 그들 두 사람의 첫번째 동역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급하게 큰 일을 하고 싶어 하는데, 하지만 사울과 바나바는 먼저 돈 관리하는 일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젠 그들이 파견되어 나가게 되었는데, 안디옥 교회가 돈에 있어서 그들을 지지하지 않았고, 단지 그들을 파송했을 뿐이었습니다. 뒤에서 그들은 스스로 돈을 벌어 생계를 도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출발했습니다.
삭생 시절의 제가 반드시 사울의 선교 여행 그림을 막힘이 없이 외워야 했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성적이 가장 나쁜 과목이 바로 성경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는 매우 소망이 있습니다. 하지만 쇼브나와 같이 학교를 떠난 후에야 무엇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전에는 항상 이 그림을 그려야 했고, 교수님이 가르친 것에서 이것만 기억이 납니다. 네가 꿈에서까지 이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사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여기는 예루살렘이고, 잔잔한 물결이 예루살렘에서부터 안디옥가지 퍼졌습니다. 이젠 안디옥이 중심지로 바뀌었고, 잔잔한 물결이 여기서(안디옥에서)부터 로마까지 퍼졌습니다. 바울의 첫번째 목표는 바로 복음을 지중해 동북 해안, 로마 제국의 수도까지 전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그와 바나바가 가서 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구브로에 도착했고, 그리고 대륙으로 돌아갔습니다. 안디옥, 루스드라와 더베 이런 곳에서 교회당을 세웠는데, 이것은 다른 하나의 안디옥 성입니다. 그리고 모교인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서 경과를 보고했고, 그리고 그들은 다시 나가서 선교했습니다.
바울의 서신 대다수는 에게 해 해안의 교회에 보내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조금 후에 다른 한장의 그림을 보겠습니다. 이어서 세번째, 네번째 선교 여행이고, 후에 크레타를 떠났고, 몰타에서 배 파선이 발생했고,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달했습니다.
바울의 전략은 주요 도시마다에 교회당을 세우는 것이었고, 그리고 다시 재빨리 떠나고, 다시 계속하여 교회당을 세우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3주만 머물었는데, 그가 고린도에서 18개월을 머물었습니다. 어떤 때는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고, 어떤 때는 자신이 떠나고 싶어서 떠났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회 하나를 남기고 떠났고, 그들더러 복음을 현지에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각 도시와 읍에 교회를 건립하지 않았고, 그는 그 도의 주요 도시를 찾아서 그 곳에 교회를 건립했고, 그리고 그들더러 인수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 전략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그는 먼저 생명력이 있는 교회를 건립하고, 그들더러 복음을 도 전체에 전하게 했고, 그리고 그는 떠나서 계속하여 교회당을 세웠습니다. 그는 진정한 사도였고, 끊임없이 움직였고,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곳을 탐색했고, 복음을 받지 못한 곳에 전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의 기초위에 건축하지 않고, 복음을 받지 못한 곳을 찾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갔고, 저 해양을 넘을 때까지입니다. 복음이 처음으로 유럽에 전해졌고, 유럽 사람들은 이로부터 달라졌습니다.
바울은 아주 큰 위험을 경험했고, 그는 배 위험을 세번이나 만났는데, 하지만 ‘성경’에는 그 중의 한번만 묘사했습니다. 그는 홍수를 여러 번 만났고, 하마트면 익사할뻔했습니다. 사람들의 돌에 맞아서 땅에 누워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 외에 그는 모든 교회를 위해 걱정해야 했는데, 이는 아마 그의 가장 큰 짐이었을 것입니다. 배 위험, 채찍에 맞는 것 모두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하지만 많은 교회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오, 그것은 정말로 낙타의 마지막 볏짚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많은 교회를 돌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아시면 그의 뜻을 아실 수 있습니다. 가끔은 사자굴에 들어갔는데, 집사들과 회의하는 것보다 많이 쉬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건립되어서 당연히 다시 따라가야 했습니다. 나는 모든 교회의 상황에 매우 관심이 있는데, 어떤 부흥사처럼 대형 부흥회에 한번 와서 끝나면 바로 가서 다시는 묻지를 않는 것처럼 아니니라. 바울은 이렇지 않습니다. 그는 교회를 건립한 후 교회가 품질과 수량의 성장에 지속족으로 관심을 했습니다.
그는 두가지 방식으로 따라야 했습니다. 한가지는 돌아가서 탐방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자주 사용했던 방법입니다. 교회 건립한 일년 후면 그가 일반적으로 돌아가서 탐방을 하고, 그리고 각 교회에 장로를 세웁니다. 사도가 일단 현지의 장로를 세우면 사역이 완성된 것입니다. 바울이 전에 디도에게 편지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를 크레타에 남게한 것은 각 성에 장로를 세우는 사역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일단 현지의 장로가 있게 되면 사도의 임무는 완성한 것이며 이로써 떠납니다. 하지만 교회가 이 단계로 건립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가끔은 돌아가서 그들을 탐방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만약 계속해서 가서 탐방하면 계속해서 교회당을 세우는 것을 하지 못합니다. 그의 목표는 복음을 스바냐까지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지중해의 북해안까지 전하는 것인데, 바울의 ‘야심’은 아주 컸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약 계속하여 가서 교회를 탐방하면 스바냐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교회를 따라야 하는 두번째 방법은 바로 편지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에 바울의 서신이 있게 되었고, 그는 이 방식으로 복음의 사역을 따라갔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 먼저 그가 마지막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달해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나누겠습니다. 그의 친구 누가 의사 선생님이 그를 위해 항변서를 써서 법관에게 올렸는데, 즉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이고, 바울이 그때는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후에 그가 멀리 스바냐로 갔는데, 전통적인 믿음은 바울이 스바냐를 갔고, 그리고 다시 몇 곳을 탐방했는데, 크레타, 니코폴리 같은 곳이고, 그리고 가보지 않았던 몇 곳이었습니다. 후에 그는 예수님처럼 팔렸는데, 알렉산더의 구리장이라는 사람이 그를 팔았고, 결국에는 두번째로 잡혔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습니다. 그는 급하게 끌려가서 심지어 그의 노트와 겉옷을 챙기지 못하였는데,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에서 우리가 다시 논하겠습니다. 그가 편지에서 말하기를 ‘나의 겉옷을 보내 달라 여기가 너무 춥구나 그리고 나의 노트, 일기를 가져다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은 바로 바울 생애의 간략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가요? 먼저 그의 외모를 말하자면, 그는 외모가 돌출하지 못했고, 키가 작았고, paulus라는 이름은 ‘작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O형 다리였고, 매 부리 코였고, 대머리였고, 눈썹은 두 눈썹 사이에 있고, 눈은 매우 이상하게 생겼고, 두 손은 거칠고, 외모가 정말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느 한 교회가 바울을 전도인으로 고용하냐 안 하냐를 고민한다고 한번 상상해보세요. 듣기에 이 사람의 외모가 이상하다고 합니다. 그는 한 곳에서 오랫동안 머물지를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자주 무례했으며, 전에 경찰에게 잡혀서 옥에도 갇혔습니다. 설교할 때 매우 집착하고, 또 미혼이며, 텐트업으로 생계를 도모했고, 회중들은 그 때문에 분열되고,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방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만약 교회가 이런 이력서를 받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이는 바로 그들이 고용하고 싶어하는 목회자이겠습니까? 이로 보아서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의 선택과 아주 다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시 교훈을 배웠는데, 그들은 외모로 키가 크고 잘 생긴 사울을 선택했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택했습니다. 이젠 하나님이 키가 작고 외모도 별로 볼 것 없는 사람을 택하여 역사 이래로 가장 위대한 선교사를 만들었으며, 다음 2000년의 역사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사람과 다릅니다. 바울이라는 이 사람은 신앙에서 비할 바 없는 열성이 있었으며, 성경은 이를 ‘뜨겁다’라고 불렀으며, 완전히 뜨거운 열성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는 전심전력했고, 온 정신을 집중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한가지 일만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가족이 없으며,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사람들더러 결혼을 하지말라고 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그를 부른 것에 전력을 쏟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비 할 수 없는 용기가 있어서 자신의 분노를 절제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서신을 읽고 연구할 때 바울이 편지에서의 어휘가 매우 강렬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정말로 방화 편지지에 써야 했습니다. 그의 뜻을 아는 사람은 진짜로 불이 붙은 줄로 생각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제가 매번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 구절을 읽는 것을 들으면 매우 화가 납니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읽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서신에서의 어휘가 강렬했고, 감정이 충만했으며, 심지어 노기가 충전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저의 ‘갈라디아서 뜻 역본’을 읽으면 바울의 말투가 얼마나 직접적이고 얼마나 겸손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도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고, 관심과 긍휼이 충만했으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를 이해하려면 인성의 특질로 보면 안되고, 그의 서신에서 그가 살아가는 목적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세가지 사건을 기록할텐데 이로써 바울의 진정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어제 다 썼는데, 방금 발행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세가지가 바울 일생의 원동력이 되는데, 바울의 일생에 있어서 이 세가지는 바로 그리스도, 복음과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바울은 완전히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고, 그가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서부터 생각이 완전히 그리스도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말하기를 ‘내가 만일 죽으면 나의 이익에서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세상울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좋기로 비할바가 없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태도는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 떠나기를 갈망하고, 죽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때문이고, 그가 만일 죽으면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칭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그가 나를 속량했고, 나는 그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서신서의 서두에서 항상 자칭하기를 ‘사도된 바울, 예수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대의 종은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았고, 완전히 주인께 속했으며, 자신의 시간, 돈이 없고, 완전히 남에게 속했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자신을 예수의 종이라고 자칭했고,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자, 그리스도의 사자라고 자칭했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또한 낮은 위치에 있었는데, 이것은 매우 특별한 구조입니다. 종이면서 도한 사자입니다. 그는 사자의 신분으로 영광스러워 했고, 또한 종의 신분으로 인해 영광스러워 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한가지를 언급하겠는데, 여러분도 사실 매우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거의 논하지 않았는데, 그의 서신에서 대개 한 두 번 ‘그리스도가 내 안에’라고 언급했고,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수십번 언급했는데, 이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항상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고 말하면 예수님이 작아서 내 이 작은 마음에 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응당 작은 것은 큰 것 안에 넣어야 하지요. 이해가 됩니까? 바울이 매번 성령을 논하면 거의 말하기를 ‘성령님이 내 안에’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를 논할 때면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몇 년 전에 제가 독일의 한 목사님하고 대화를 했는데, 그가 1903년 경에 히틀러의 청년단체에 참가했다고 하였습니다. 가입할 때 그가 독일의 한 장관 앞에 서 있으니 장관이 그에게 묻기를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여 그가 이름을 말하니 장관이 또 그에게 묻기를 ‘당신 어디 사람입니까?’라고 물어 그가 햄버거시에 산다고 하니 장관이 ‘틀렸습니다. 당신 어디에서 삽니까?’라고 물어서 ‘그가 ‘저는 독일에서 삽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장관이 ‘틀렸습니다. 당신 어디에서 삽니까?’라고 하여 그가 ‘제가 제3제국에서 삽니다’라고 하니 장관이 ‘틀렸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삽니까?’라고 하니 그가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대답하면 됩니까?’라고 하니 장관이 ‘나는 히틀러 안에서 삽니다라고 대답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독일 목사님이 저에게 말하기를 ‘후에 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그런 절대적인 마음을 바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단지 이 점을 언급하고 싶을 뿐입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잇고, 그리스도가 나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는 말을 듣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그리스도가 비교적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의 안에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있어야만 모든 복을 받을 수 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모든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냥 이 점을 언급하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고, 바울은 마음으로 그가 로마 제국의 어느 곳에 있든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울 삶에서 두번째로 큰 원동력은 바로 복음인데, 복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는 무엇이든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옥에 갇히는 것도 매우 기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갇혀있지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내가 로마 병사와 함께 묶여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여덟시간마다 교대했는데, 매일 세 사람이 나의 옆에 함께 묶여서 나의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기회라고 생각하여 그의 강대상을 빼앗았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울과 경쟁하기 위해서이고, 그래서 바울이 옥에 갇히니 그들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r의 강대상을 빼앗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질투와 분쟁으로 전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주님을 찬양했는데, 이는 복음이 전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만 전해진다면 나는 그들의 동기를 아랑곳 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사는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복음에 빚진 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책임으로 보지 않고, 빚으로 보았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암을 치료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면 당신이 모든 암병 환자와 무슨 관계가 되겠습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빚질 것이고, 당신이 그들에게 알려 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당신이 그들에게 알려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빚진 자이고,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빚진 자이고, 나는 그들에게 빚진 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연고를 위해 무엇이든 모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자가 되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역할을 곳곳에 전했습니다.
제가 두개의 단어로 바울의 복음을 묘사하겠습니다. 그가 전한 것은 ‘말세’의 복음이었고, ‘말세론’이라는 이 단어는 발음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Eschatology 이 단어는 헬라어의 eschaton에서 온 것인데, ‘미래’라는 뜻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제가 바울이 전한 것은 말세의 복음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미래의 복음에 관한 것이며, 미래가 현재를 침입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복음의 미래 측면을 소홀히 하면 복음 자체를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인생의 좋은 조식을 말하는 것이고, 또한 미래 세계의 좋은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장래 우리는 새로운 몸이 있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좋은 소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번 달에 조금만 있으면 한차례 회의가 진행되는데, 60개 나라에서 오신 전도인들이 참석하고, 이 전도인들 모두는 복음의 미래 측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영국 교회는 이 방면을 계속해서 소홀히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을 기쁘게 기대하고 있지 않았고, 천국도 기쁘게 기다하지 않았고, 우리의 생각은 온통 금생의 문제에 점령되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미래와 연관이 있고, 곧 한 나라고 임하게 될 것이며, 곧 한 왕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복음을 현재 누릴수 있는 미래로 보았고, 우리는 내일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의 묘사는 바울의 복음은 도덕적인 복음이며, 그는 영혼만 구원하고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없는 복음에는 흥취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미래에 관한 복음이었고, 또한 일상 생활에서 살아내는 복음이었는데, 이는 제가 후에 다시 논하겠습니다.
바울의 세번째 원동력은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뜻밖에도 그가 크리스찬들을 핍밥하러 가는 길에서 그를 구원했다는 것을 바울은 영원히 잊지를 못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그는 근본적으로 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가 한대로 그에게 대한다면, 그는 일찍이 지옥에 떨어졌을 것인데, 그는 이 은혜를 영원히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데,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은혜를 우리에게 그냥 준 것입니다. ‘로마서’에서의 한 마디가 이 뜻을 가장 맞게 전달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을 이렇게 표현하면 더없이 적당하였습니다. 그가 전에는 적이었고, 온 힘을 다해 크리스찬들을 상대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히려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사용하리라 너는 나의 사도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은혜는 감사의 태도를 가져왔습니다. 바울의 모든 노력은 감사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응당 징벌을 받아야 했는데, 하지만 오히려 은혜로 대했습니다. 주 예수님의 은혜가 바울 일생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세개의 원동력 외에 아직도 많은 것들을 들 수 있는데, 하지만 저는 이것이 바울 삶에서의 세가지 큰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그리스도는 가장 큰 원동력이고,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복음은 그가 가장 갈망하고,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가 오히려 그를 격려하는 힘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의 서신을 보겠는데, 바울은 역사이래로 가장 유명한 서신서 저자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서신서 읽기를 좋아하신다면, 반드시 신약성경을 좋아하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많은 서신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실 유대인들은 편지 쓰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편지를 많이 쓰지 않았는데, 원인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들 땅은 작아서 편지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쓰고난 후 부치는 비용이 매우 많습니다. 로마 제국 때 황실 우편 배달 서비스가 있었는데, 하지만 로마 관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일반인들, 일반적인 백성들은 이 서비스를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편지는 쓸 수 있지만 쓰고난 후 반드시 보내는 사람을 찾아서 그더러 먼 곳에 편지를 가져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편지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만약 친척이 부근에 거주하고 있으면 직접 그를 찾아가면 되었고, 혹은 그의 집을 지나가는 친구에게 구두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편지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 제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썼는데, 하지만 일반적으로 관원이거나 혹은 편지 전달하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 돈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우편 배달 서비스가 없었고, 그래서 반드시 중요한 일이어야만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 보고 싶다는 말만 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엽서를 쓴 것이 아니고, 중요하거나 혹은 심각한 일들이 있기에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바울의 모든 편지에는 까다로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대 서신은 일반적으로 매우 짧은데, 한장의 사초지뿐이며, 그리고 많아야 20글자 뿐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한 장을 더 붙히기도 했으며, 그리고 그를 말았는데, 이렇게 써야 조금 길게 쓸 수 있었습니다. 바울 서신은 고대로 말하자면 가장 긴 서신이고, 그의 서신이 평균 1300글자인데, 이것은 매우 긴 편지였습니다. 한번 상상해보세요. 긴 종이 한 장에 편지를 쓰고 말면 매우 볼 만했을 것입니다. 그의 ‘로마서’는 무려 7114글자였는데, 이는 고대에서 가장 긴 서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열심히 편지를 썼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의 서신은 이미 정한 양식이었습니다. 한장의 종이를 이렇게 말았다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당연하게 여깁니다. 우선 보내는 자의 이름을 응당 써야 하는 것이 비교적 도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왜서 보내는 자의 이름을 마지막에 놓지요? 제가 가끔은 길게 20페이지 되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들은 제가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 하는 줄로 알고 있는 것 같아요. 보내는 사람이 이름을 마지막에 썼고, 그래서 편지를 읽기 전에 먼저 뒤로 넘겨 누구 보냈는지를 보아야 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먼저 보내는 자의 이름을 썼는데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도리가 있습니다. ‘사도된 바울, 예수의 종’일고 했고, 다음 주소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배달원은 책을 조금만 열면 되는데, 만약 그가 읽고 싶으면 물론 읽어도 되었습니다. 어차피 먼저는 이름과 주소입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 다음은 문안을 썼는데, 일반 서신 모두는 문안이 있습니다. 다시 이어서는 축복의 말인데, 하지만 바울은 항상 상대방을 위해 기도했고, 축복의 말 같은 것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너희를 위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울이 수신자인 대상을 칭찬했으며, 그들의 장점을 칭찬했으며, 그들더러 즐겁게 편지를 읽도록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항상 가능한 한 상대방을 먼저 칭친하고, 그리고 그가 논하고 싶은 문제를 논했는데, 이것은 괜찮는 양식이었고, 우리가 배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비평하고 싶으면 먼저 그 사람을 칭찬하십시오. ‘계시록’에서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는 예수님이 친히 쓰신 것이고, 같은 양식을 채용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칭찬하고 다시 비평하는데, 이것은 크리스찬에게 응당 있어야 할 방법입니다. 상대방을 칭찬한 후 믿음의 주제로 들어가기 시작해야 하며, 말씀드리고 난 후 다시 총결을 지으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문안 말씀을 하고, 마지막 자신의 이름을 싸인하면 됩니다.
당시 사람들 대다수는 친히 편지 쓸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이 그림에서 인도 사람들이 편지를 쓰는 모습을 보았을텐데 모두 사람을 불러서 대신 쓰게 하였습니다. 헬라 문화에서 모두 서기가 대신 기록했고, 바울은 친히 집필하지 않았고, 구술로 하고 서기더러 기록하게 하였습니다. 이 서기는 어떤 때는 실라이고, 어떤 때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편지는 구술이고 문자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신약성경 대부분은 먼저 구술하고 다시 쓴다는 것인데, 바울이 왔다 갔다하는 것을 상상해보세요. 서기에게 분부하여 상대방은 이것, 저것하며 알려주는데 마치 상대방 앞에서 그와 말하는 것 처럼입니다. 내용은 확실히 매우 구어화이고, 문구를 씹지 않았고, 확실히 매우 구어화였습니다.
저의 장모님이 98세 고령인데, 올해 돌아가셨으며, 이번에는 그가 버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에 많은 메시지를 얘기했는데, 그는 모든 사람을 손금 보듯 환했고, 기억력이 아주 좋고, 우리 두 사람보다도 좋았습니다. 그가 그 편지에 쓴 어투가 마치 앞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처럼이었습니다. 그의 증손자 손녀 어떻게 어떻고, 그에게는 많은 증손자 손녀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로 이렇게 편지를 썼고, 그는 상대방과 말을 했으며, 문장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것은 친히 방문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지만 이것 또한 앞에서 말하는 효과와 똑같았는데, 그는 구술로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왔다 갔다하면서 마치 회중들과 얘기를 나누는 것 같았는데, 차별은 단지 서신을 썼을 뿐이었습니다. 서신으로 기록했고, 문자로 변했을 뿐이며, 그는 매번 거의 마지막에서야 싸인을 했습니다.
바울은 눈 병 환자였는데, 우리는 실제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쓴 글자가 매우 컸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마지막에서 말하기를 ‘너희들은 내가 친히 쓴 글씨가 얼마나 큰지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나눌 때 바울이 싸인하기 시작한 것은 다른 사람이 그의 편지를 모방하기 때문에 싸인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많은 상처를 만들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가 바로 모방한 편지 한 통을 받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주 조심스럽게 너희들이 내가 친히 싸인한 것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편지에 나의 싸인이 없으면 내가 썼다고 절대로 믿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마귀가 사람을 속이는 방법이 정말로 많습니다.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세가지 편지를 썼는데, 첫번째는 개인에게 쓴 편지이며, ‘빌레몬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입니다. 두번째는 전문적으로 논한 서신인데,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제가 말하는 전문적이라는 것은 교회에 대한 어떤 특별한 상황을 겨냥한 것입니다. 교회에 어떤 상황은 그가 편지를 써서 해결해야 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소히 말하는 전문적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세번째는 일반 서신인데, 마치 성탄절에 받은 그런 편지입니다. 일반 서신은 어떤 편지일까요? 일반적으로 인쇄한 것인데, 가족의 상황, 어떻게 명절을 보낼지 등을 상세히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편지는 모두에게 전해서 읽게하는 것이고, 독자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독자의 상황을 겨냥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내용은 일반적인 메시지이고, 어디로 보내든지 모두 적용되었습니다. 교황이 가끔 이런 편지를 쓰는 것처럼인데, 우리는 이런 편지를 전하여 읽는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성탄 서신을 친한 친구에게 보내 보셨습니까? 내용은 모두 가족의 상황을 보고 하는데, 복사본을 여러 부 만들어서 모두에게 보냅니다. 선교사님들도 이렇게 하는데, 이것이 일반적인 서신입니다. 사실 바울이 이런 편지는 단지 한 통만 썼는데 어느 책일까요? 맞아요. ‘에베소서’이고, ‘로마서’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로마 교회의 어떤 상황을 겨냥하여 쓴 것인데,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만 특정한 문제를 논하지 않았고, 크리스찬들이 응당 있어야 할 믿음과 행위를 논하였습니다. 이것은 읽고 연구할 가치가 아주 있는 한권의 서신서이고, 모든 크리스찬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문적인 서신은 해석하기가 비교적 어렵고, 또한 인용하기가 비교적 어려운데, 이런 서신은 일방적인 소통만 보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전에 이 문제를 논했는데,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전화 얘기를 하시는 것을 들어보셨습니까? 당신은 영원히 그 중의 일방적 말만 들을 수 있고, 그들 쌍방이 무엇을 논하고 있는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이 사람이 전화를 말할 때 ‘바꾸어 나라면 변호사를 찾아가서 해결 할 것이라’고 하였으면, 당신이 전화하는 저쪽이 전화에 무엇을 말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습니까? 무슨 상황일까요? 부도일까요? 경찰이 잘못 알고 잡힌거 아닐까요? 아니면 이웃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까요? 알 길이 없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전화에 ‘당신이 완전히 좋아져서 나는 매우 기쁩니다’라는 것을 들었으면, 당신은 ‘무엇이 좋다는 것일까? 놀랐을까요? 아픈 것일가요? 가족을 잃어서 아픈 것인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진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문적인 서신이 바로 이렇게 어떤 상황을 겨냥하여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식은 그 편지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 교회에 반드시 무슨 일이 발생했고, 왜서 이 편지를 읽어야 하는지를 추측합니다. 이해가 됩니까?
만약 당신이 다른 사람이 전화할 때 그들이 무엇을 논하고 있는지를 추측해 보세요. 안녕하세요 오셨습니까? 축하합니다. 오, 중하십니까? 무슨 색입니까? 당신 아내더러 만지지 못하게 하세요. 기름이 많이 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무한궤도 기계 중에서 이건 빠른 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진흙 위에서 달리려는 것입니까? 나도 한대 응당 한대 사야 하는데. 안녕히 계십시오. ㅎㅎ. 견인기입니다. 몇 명이 맞추었습니까? 좋아요. 제가 처음부터 아기에 대해 말했다는 것을 몇 명이나 생각했을까요? 여러분 제 뜻을 이해했습니까?
서신서를 읽을 때 바로 이렇게 수시로 상대방의 상황을 추측하게 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갈라디아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여러분은 한폭의 그림을 맞출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정탐꾼처럼 글자의 뜻을 읽어야 합니다. 사실은 매우 재미있습니다. 이로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두 권의 서신을 기록하였는데, 그 중 한권의 말투에는 열정이 있고, 다른 한권의 말투에서 냉담하였습니다. 한권은 왜서 그렇게도 열정이었을까요? 다른 한권은 왜서 그렇게도 냉담했을까요? 말투 변화가 왜서 이렇게도 큽니까? 이것 모두는 실마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책 전체를 완정하게 읽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뛰어서 읽을 수도 있는데, 하지만 반드시 전체를 읽어야 뜻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문화 차이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책의 배경과 2000마일과 2000년 거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신경을 조금 써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고린도서’를 논할 때 여자가 모자를 쓰는 문제를 논하게 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데는 무슨 뜻이 있을까요? 오늘의 삶에 어떻게 인용해야 합니까? 여기에 앉아 계시는 분들은 모자를 쓴 사람이 없네요. 남자가 써야 했나요 아니면 여자가 써야 했나요? 응당 어떻게 써야 한다고 말했나요? 우리는 그 중의 원칙을 반드시 삶에 인용해야 합니다.
바울과 그의 서신에 관하여 제가 마지막에 다시 두가지를 언급하겠는데, 첫째는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가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는데,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의 격려 뿐만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생각해 보셨는지요. 만약 그들 모두가 문제가 없다면 오늘날 바울 서신이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은사가 충만했고, 또한 혈기가 충만했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 같은 사랑의 시가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주 방언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진리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편지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리고 신약성경 삼분의 일의 편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게 감사하고, 신약 시대의 교회는 그다지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나누려는 마지막 이 점은 바로 세상에서 어떤 종교도 서신을 하나님의 게시에 넣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상상해보세요. 하나님이 왜서 서신을 그가 게시하는 성경으로 했을까요? 이것은 전례가 없었던 방법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람에게 쓴 서신이 뜻밖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서신을 당연하다는 것에 습관되었는데, 하지만 사실 이것은 전례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서 서신으로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전달하려고 했을까요? 바울이 당시 이 편지를 기록할 때 이를 성경에 개입한다는 것을 근본상 생각도 못했습니다. 신약성경 뒤에 있는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가 바울 서신을 성경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신약 시대에 바울 서신을 성경으로 보았는데, 하지만 바울은 이렇게 될 줄을 근본상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서 서신으로 그의 말씀을 전했을까요? 저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첫번째는 이것이 하나님 말씀더러 친근감이 있게 하였습니다. 서신은 사람에게 친근감을 주고, 사람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향해 하신 것이고, 서신으로 사람에게 친근한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서신은 친근감이 있고, 동시에 감정이 충만하며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있게 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서신으로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전했는데, 이는 친근감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약 바울 서신을 가까이 하면 신앙에서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두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실제적입니다. 서신은 모두 실제적인 일을 말합니다. 일상 생활, 필요, 혼인, 노예, 그리고 자녀, 직업 등과 모두 관계가 있으며, 이 모든 것들은 서신에서 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제적이고 친밀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전달했는데, 좋은 것은 우리로 하여금 철학과 신학에 있어서 고집스럽게 매달리지 못하게 합니다.
너무나 많은 성경 학자들이 신학을 학문으로 연구하는데, 그들은 대학 교실의 상아탑에 갇혀서 무엇이 크리스찬인지를 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딜런 주교가 그 이상하고 신기한 생각들을 제출했는데, 이 모든 것들은 교실에서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수업 방식으로 하지 않고, 서신으로 그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매우 멋지시지요? 혹시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지를 않았을 것인데, 저도 어제서야 생각했는데, 제가 느끼기에 너무 멋지십니다.
‘성경’을 읽으면 가장 묘한 것은 바로 새로운 체험이 끊임없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이 들어서 한 체험이 바윽ㅁ 주를 믿었을 때의 체험과 똑같게 새롭고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참지 못하여 말하기를 ‘주여 감사합니다. 당신이 서신으로 우리에게 진리를 전달했고, 서신서의 진리는 친절하고도 실제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당신은 친절하고도 실제적인 신앙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우리에게 교재를 주지 않았지만 많은 바울 서신들이 있습니다’. 다음에 우리가 ‘데살로니가전후서’를 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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