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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의 신앙적 의미

LNCK 2019. 8. 13. 21:51

◈방언의 신앙적 의미                   행2:5~13                    15.02.08.스크랩, 녹취

출처 : 방언과 예언 (1) 4:10~23:23

  

오늘 이 시간에는 방언에 대해서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방언은 영적인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나오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천상의 말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가장 손쉽게

확인하는 길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혀가 꼬부라지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경험은 확실히 성령님의 임재를

가장 용이하게 확인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방언을 이처럼

신비로운 외적 현상으로만 이해하기에

이미 2천 년 전부터

방언과 관련된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방언을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서로 유무를 따지며

방언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것과 같은 부작용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써 보낸 편지인 고린도전서에서 14

한 장을 온통 방언에 할애했습니다

고린도의 교인들 간에 서로 자신을 과시하려는 방언으로

인한 부작용이 그만큼 컸기 때문 입니다

 

그 고린도교인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418절에서 19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의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 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울은 그 당시 누구보다도

방언을 더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공개 장소에서 사람들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으로

1만 마디를 말하는 것보다

자신이 먼저 분명히 깨닫고

상대도 깨달을 수 있는 말 다섯 마디 하는 것이 더 낫다고 권면했습니다

 

공개 장소에서 까지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말하려는 것은 자기과시를 위한 자기 교만일뿐

성령님께서 주시는 참된 의미의

방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오래전부터

방언과 관련된 부작용이 있어 왔습니다

 

방언을 신비로운 외적 현상으로만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만약 본문의 어떤 제자들이 행한 방언이

그런 외적 현상으로만 그쳤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도리어 그들의 믿음생활에도

방언으로 인한 부작용이 수반 되었을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신 것과

동시에 그들의 입에서 터진 방언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면

그 방언이 참된 의미의 방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방언의 본래 의미,

방언의 참된 의미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성령님의 은사,

즉 성령님의 선물인 방언이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주어졌던 역사적 사실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순절에 제자들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제자들이 갑자기 방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로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은사였습니다

 

오순절의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졌던 방언을

외적 현상으로만 잘못 이해한 결과입니다

 

2000년 전 성령님의 강림과 동시에 제자들이 처음으로 말한 방언은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도 알아들을 수 없는 천상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25절에서 13절이

당시의 정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6.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9.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11.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13.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본문에 거명된 최소한 16개의 지역은

당시 유대인들이 알고 있던 거의 전 세계 였습니다

 

제자들이 방언을 하던 현장에는 마침 오순절을 맞이해서

전 세계로부터 예루살렘을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수세기 전부터 이국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그들은

각각 다른 현지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방언을 할 때

희한하게도 큰 모든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방언을

각각 자신이 사용하는 모국어로 알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학교 문턱도 넘어서 본 적이 없는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정규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기에

제자들이 한 말이었는데도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모국어로

제자들의 말을 알아 들었던 것입니다

 

언어가 다르면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표현 방식 뿐만 아니라

사고 방식과 이해 방식도 같지 않음을 뜻합니다

 

갈릴리 출신의 무식한 제자들은

전혀 외국어를 구사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는 대화나

소통이 아예 단절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다른 언어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임하시자 제자들은

평소에 전혀 말이 통하지 않던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과도 말이 통했습니다

소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최초로 제자들에게 주어졌던 방언의 참된 의미는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간의 소통 이었습니다 *주제

 

그래서 우리가 방언이라고 말하는 헬라어가 혀와

언어를 동시에 뜻하는 '그로싸' 입니다 혀를 뜻하는 영어

tongue이 언어를 의미하기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외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무식한 제자들의 말을 각각

자신들의 모국으로 알아듣게 되는 것에 대해 깜짝 놀랐습니다

 

개중에는 새 술에 취했다고

제자들을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방언이 그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 개인의 삶이 새로워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 결과로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가 구축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와의 소통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소통이 불가능하던

사람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언의 은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랑도 평화도 공생도 전도도

오직 소통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은사를 통해

모든 외적 은사는

내적 은사로 승화되어야 함을 (다른 시간에) 배웠습니다

 

신비로운 천상의 말을 하는 것이 방언의 외적 은사라면

평소 대화가 통하지 않던 사람간에

말이 통하기 시작하는 것은

방언의 내적은사 입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드러나 보이는 방언의 외적 은사는 자칫

자기과시를 위한 자기 교만에 빠지기 쉽지만

사람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언의

내적 은사는 받으면 받을수록

사람관계의 폭과 깊이가 더 넓고 깊어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증언하는

어떤 제자들의 방언이 절대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그 방언이 겉으로 드러난 일시적인 외적 은사로 그치지 않고

오순절에 주님의 제자들이 행하였던 방언처럼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내적 은사로

이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적용 / 우리는 거의 대부분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간의 소통이 되는 경우보다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한 지붕 아래서 한국어를 주고받으면서도 소통이 되지 않는 부부,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소통이 불가능한 동료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소통이 막힌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형식적으로는 동일한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실제로는 한국어를 빌어서 각각 다른 언어를 말하는 탓입니다

 

서로 상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으면

한국어로 아무리 많은 말을 주고받아도

실은 각자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어의 발성은 입과 목에서 이루어지지만

언어의 근본적인 출발점은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다 함께

주님 앞에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신앙생활 하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언어를 고집하느라

막상 대화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과연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참된 믿음의 부모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인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서로 다른 언어에 집착하느라

소통은 아예 불가능하다면

대체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를 아우르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들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보수주의자 나 진보주의자

어느 한 진영 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당신의 오른 팔로는 보수주의자를 감싸시고

당신의 왼 팔로는 진보주의자를 동시에 감싸 주시기 위해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남편과 아내 어느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를 동시에 품어 주시기 위해

주님께서 당신의 두 손을 내어놓으셨습니다

 

나 뿐만이 아니라 나와 소통이 되지 않는

그 사람도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주님의 두 손이 십자가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주님께서 특정인이나 특정 지역 혹은 특정 그룹만의

주님이 아니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만인을 위한 구주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주님을 모신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방언의 사람,

소통의 실천자로 살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대립과 분열과 단절이 판을 치고 있는

이 암울한 조국의 현실 속에서,

악과 불의는 단호하게 물리치면서도

사람간의 소통은 확대시켜 나가는

진정한 방언의 실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 홀로는 불가능하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재물 되어 주신

주님의 도우심 속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게끔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이미 우리 속에 임해 계시고

우리로 하여금 벌써부터 당신 Jesus 속에 있게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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